215. 챕터32. 서쪽으로 (6)
“이게 마제은이란 말이지.”
“예. 나리.”
중국까지 왔는데 조정관복을 입을 필요도 없거니와, 자신의 신분 또한 숨겨야 하지 않나.
조선관리들은 조선인부들이 입는 흔한 반팔티셔츠를 입고서, 말발굽을 닮은 뭉툭한 은덩어리를 들고 요리조리 살폈다.
“어떤가?”
“음...”
“무게도 다르고...”
“엇비슷하지만 크기도 제각각이군.”
“예. 맞습니다. 나리들. 그래서 교환소가 필수지요.”
상인파벌이 붙여준 상인의 설명을 역관이 통역했고, 조선관리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것도 어찌 보면 귀찮은 일이군.”
“하지만 현물로 교환하는 것보다는 편하지 않습니까. 특히나 거금을 융통하는 상인들 입장에선 마제은이 없으면 거래를 하기도 힘들지요.”
“그야 그렇겠지...”
“크흠.”
“당연한 소리를 왜 하고 있냐?”라고 말하는 중국상인을 보며, 조선관리들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너희는 화폐도 없어서 현물교환만 하잖아.”라고 비꼬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그런데 저렇게 하나하나 다 살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군.”
“그야 그렇지만, 허투루 할 수도 없지 않을까? 저거 하나가 얼만데...”
한 청년관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은 함유량이 떨어져도, 마제은은 은 덩어리다.
저거 하나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 하나는 뚝딱하고 살 수 있을 거다.
“하긴...”
“그리고 저런 거금이 관짝으로 돌아다니는 걸 보면, 확실히 거래량이 많긴 많은 모양이야.”
“만약 저걸 전부 현물로 교환했다면, 그만큼 고생했을 거고.”
“그렇겠지...”
이들은 전부 의주에서 무역을 감사했던 관리들 아닌가.
자신들이 해온 일이 있었기에, 현물교환이 아닌 현금교환이 얼마나 간편하고 간명한지 곧장 알아차렸다.
“이래서 대감께서 교환소를 살펴보라고 하신 건가?”
“그럴 걸세.”
모두는 눈빛을 반짝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조선의 목줄을 잡고 끌고 가는 사람이 바로 연오랑이다.
의주에서 돈을 만지며 재정학을 익힌 호조관리들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연오랑이 자본유학을 퍼트린 장본인인 걸 떠나서.
그가 호주를 만들고 여진 및 요동과 무역을 하면서 건들기 시작한 규칙과 조례 등은, 의주에서 시행되고 있던 관세 및 무역법에 깊은 영향을 줬다.
작금에 이르러선 의주의 무역법을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
보다 포괄적인 조선상법으로 제정하고 있으니, 그 뿌리를 찾아가면 연오랑이 만든 규칙과 규범이 닿아 있었지.
“어쩌면 아국에서도 마제은과 유사한 화폐를 만들려는 걸지도 모르겠군.”
“흐음...”
“그게 쉽게 되겠나?”
누군가의 말에 모두는 반신반의하며 부정적인 의견을 토해냈다.
이들은 호조관리인 만큼, 나름 조선화폐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
고려 때에 은병銀甁을 만들었다가, 가치가 너무 커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해서 보조화폐로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만들었었다.
다만 은병은 후에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해서 소은병으로 대체되었고, 보조화폐 또한 해동중보海東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등을 만들었었지.
허나 원말명초, 여말선초 시절을 겪으면서 다 날아갔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고, 태종대에 이르러 다시금 화폐 발행을 시도.
지폐인 저화를 발행했지만 실패했고, 저화를 보조하기 위해 만든 동전 또한 실패하고 말았다.
원래 역사에선 세종 대에 이르러 저화의 통용이 사실상 중단되자, 새로운 동전인 조선통보를 주조해 사용하려 했다.
다만 이런저런 노력을 다 했음에도 결국은 또 실패했지.
지금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저화는 이미 물 건너갔고 동전 또한 물 건너갔다.
조선통보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세종은 저화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화폐문제는 잠시 뒤로 미뤄뒀다.
지금은 화폐보다 더 시급한 일이 산적해 있으니까.
헌데 연오랑이 이걸 건드리려는 모양새를 보이니, 호조관리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상왕전하 대에 실패했던 화폐를 다시 하려면, 적잖게 연구를 해야 할 텐데 말이야.”
“그래서 우리에게 알아보라고 한 것 아니겠나.”
“그렇겠지?”
“그럴 걸세.”
모두는 눈빛을 반짝였고, 중국상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조선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그머니 역관의 옆구리를 찔러보지만, 역관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역관조차도 사실은 의주에서 활동해온 호조관리였으니까.
“이보게. 조제소가 이렇게 많으면 귀찮지 않나? 하나로 통일해 볼 생각은 안 해봤나?”
“안 해봐겠습니까...만, 실패했습니다.”
중국상인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말하다가.
‘칼잡이도 아니고, 뭔 놈의 눈빛이...’
역관의 눈빛이 찌를 듯이 매서워지자, 그는 자라목이 되어 냉큼 설명을 덧붙였다.
중국상인이 상상이나 했을까.
역관은 착호군 임시관리가 되어 집체훈련을 받아왔고, 착호군에서 전역하여 정식관리로 임용됐다.
중국으로 파견된 청년관리들 대부분이 이 과정을 거쳤으니, 따지고 보면 중국상인의 의심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닌 셈이다. 이들이 아무리 먹물을 먹었어도, 어지간한 이들보다 칼질을 더 잘할테니까.
“그게 말입니다...”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해보지만, 관리들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중앙조정이 없는데, 대체 무슨 힘과 명분으로 마제은의 규격과 품위를 통일할 수 있을까.
명나라가 있을 때도 안 됐다.
애초에 마제은은 나라에서 공인한 법정화폐도 아니고.
명나라 말기에 장거정이 등장해서 일조편법을 시행하면서부터 공인된 법정화폐가 만들어졌고, 이게 그 유명한 은원보, 금원보다.
그 이전에도 은전이 통용된 건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민간화폐였던 거지.
어쨌든 화폐라는 게 묘해서. 은의 양과 가치가 10이라면, 화폐는 8,9에 해당하는 은의 양으로 10의 가치를 만들 수 있다.
화폐를 만드는 주체가 1,2만큼의 은을 남겨 먹을 수 있는 거지.
이 시대부터 현대에까지 두고두고 써먹는 방법이다.
이 꿀을 놓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각 조제소는 어떻게든 은 함유량은 낮추면서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마제은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반대로 교환소에선 어떻게든 마제은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어찌 보면 의도치 않게 합금기술이 발달하는 걸지도 모르고.
게다가 예나지금이나 조제소는 상인세력, 관리세력등의 권력자들과 결탁되어 있고, 이들은 지금도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다.
남의 화폐를 사용하는 건 경쟁자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니, 갈기갈기 찢어진 중국에 오만가지의 마제은이 굴러다니는 건 당연한 현상이지.
더불어 남의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고, 자신들보다 남의 화폐가 더 신용 있고 잘 만들어졌다는 걸 의미했다.
결국 죽었다가 깨나도, 중국의 마제은이 통일될 수 없는 거다.
“하긴... 조금만 생각해도 당연한 말이겠군.”
“게다가 교환소도 껴 있지 않나? 보게. 저치들은 마제은을 감정하면서 적잖게 떼어먹지 않나.”
“맞지.”
관리는 교환소에서 거의 주먹다짐을 하듯 목청을 높이는 중국상인들을 가리켰다.
마제은을 가져온 상인과 마제은을 받는 상인, 중간에 껴서 감정하는 상인끼리 목청을 높여가며 타협점을 찾아가고 있었다.
“환전을 통해서 얻는 수익이 나름 쏠쏠할 테니, 저치들은 마제은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좋아할 걸세.”
“음... 아국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겠군.”
조선은 왕실과 조정이 꽉 잡고 있으니, 저런 꼴을 볼일이 없을 거다.
“당연한 말일세. 대감께선 환전과 함께 마제은이 어떤 방식으로 유통되고 활용되는지를 연구해 보라고 했으니...”
“대감께서 굴리는 기업이 한두개가 아니니, 이미 알고 계셨겠지.”
“그렇겠지.”
관리들은 자기들끼리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누더니, 품에 끼고 있던 종이철을 꺼내 연필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
종이철은 얇게 다듬은 나무판이 겹쳐져 있었고, 가장자리에 구멍이 뚫려 묶여 있었다.
아무데나 서서 글을 쓸 수 있게, 종이를 받치는 용도로 만든 물건. 그 위로 사각사각 소리 내며 연필이 선을 그렸다.
훈민정음은 만들어진지 몇 해 되지도 않았는데, 중국인들이 이걸 본다고 알아볼 수나 있겠나.
눈치 보지 않고 열심히 손을 놀리며, 입도 함께 놀렸다.
“마제은을 민간에서도 쓰나?”
“예. 가치가 커서 잘 쓰이진 않지만, 필요할 땐 조금씩 잘라서 씁니다.”
중국상인은 생경한 연필을 유심히 살피면서, 웬 집게와 저울. 은 쪼가리를 보여줬다.
마제은은 가치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이렇게 은을 잘라내서 저울에 재서 써먹는다고 했다.
“이걸 은자銀子나 은정銀錠이라 부릅니다.”
“공식적인 건 당연히 아니겠군.”
“이거 모양을 보게. 누가 이런 식으로 만들겠나.”
청년관리들은 난잡한 은 쪼가리를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것은 손톱만하고, 어느 것은 손가락만하다.
둥근모양, 네모모양, 세모모양, 심지어 그냥 우격다짐으로 뜯어낸 것 같은 모양도 있다.
크기도 모양도 중구난방이니, 말 그대로 무게를 재서 써먹는 모양인데...
“마제은마다 또 품위가 다르니, 보통 일이 아니겠군.”
“그렇겠지.”
다들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은자로 가게에서 물건을 사려면, 가게 주인은 환전 전문가가 되어야 할 거다.
“게다가 아무리 잘라서 쓴다고 한들, 가치가 너무 크군.”
“그렇지 않겠나.”
손톱만한 은자라고 해도... 평범한 객주의 한달 숙박비, 혹은 100인분의 식사비를 댈 수 있을 테니, 민간에서 흔히 쓰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럼 민간에선 역시 동전을 쓰겠군.”
“예.”
마제은 쪼가리를 내려놓기 무섭게, 중국상인은 두께와 무게가 다른 동전을 들이밀었다.
태종 대 만들었던 동전과 비슷했는데, 당연하지만 태종이 홍무제가 만든 홍무통보洪武通宝를 보고 따라 만들었기 때문.
홍무제는 초기에 대중통보를 후에는 홍무통보를 만들어, 화폐를 발행했다.
지폐인 대명보초大明宝钞를 보조하기 위해서 만든 물건으로, 무게 별로 1문, 2문, 3문, 5문, 10문 가치를 가지는 동전을 만들었지.
명이 망하고 대명보초는 휴지조각이 됐지만, 구리 그 자체인 홍무통보는 여전히 유통되어 민간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허나 이것도 결국 문제가 될 텐데... 홍무통보를 발행하는 이들이 있나?”
“그게... 아무래도 쉽게 건드리긴 힘든 문제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있는 동전을 쓰고 있습니다.”
상인은 조선관리의 말에 조심스럽게 답을 이어갔다.
명은 각 성에 보천국宝泉局이라는 동전조제소를 만들어 홍무통보를 만들었다.
통일적인 규격을 통해, 제대로 된 구리로 만들어서 품질이 나름 뛰어났지.
허나 명이 망했으니 보천국 또한 휴업상태에 들어갔고, 이걸 차지하기 위해 각 성마다 세력다툼이 벌어졌다.
마제은을 만들 때 남겨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동전 또한 구리를 남겨 먹을 수 있을뿐더러, 화폐제조라는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으니까.
허나 이 시도는 천만다행으로 실패했다.
“각 세력끼리 협의해서 보천국을 관리한다고? 그게 되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되고 있습니다. 홍무통보의 품위를 건드리는 건 너무 큰일이니까요.”
모두가 믿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자, 상인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초창기에는 보천국을 집어삼킨 이가 동전을 마구 발행해 돈을 쓸어 모으려 했었다.
하지만 이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먼 옛날. 삼국지 시절에 동탁이 오수전을 잡철로 만들어 마구 발행하여 망해버린 것처럼, 그 후에도 중국역사에서 불량화폐를 발행했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게 한두번이 아니다.
당장 원나라조차 말년에 교초를 마구 발행했다가 망하지 않았나.
각 성의 권력자들이 단순히 유학을 공부한 관리출신이거나, 싸움질만 잘하는 군벌이라면 눈앞의 이득만 보고 달렸겠지만...
지금 역사의 중국은 상인이 실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 상당히 많다.
돈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상인들은, 이거 잘못 건드렸다가 화폐가치가 폭락하여 또 다시 초특급인플레이션이 도래. 경제가 폭삭 망할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거지.
특히나 땅이 아닌 무역과 돈에 생존이 걸린 상인들 입장에선,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원수와 손잡고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사안이었다.
그 원수조차도 같은 상인 출신이니까.
“아...”
“하긴. 우리 또한 전조 때 난리를 겪었으니, 원말명초를 직접 겪은 옛 명나라 상인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겠지.”
“예. 그래서 보천국에서 동전을 발행하는 일에 대해서는, 너나 할 거 없이 뭉칩니다. 저희도 마찬가지로, 공청 파벌과 칼부림을 부리는 일이 있더라도 동전을 쉽게 발행하는 일을 막았지요.”
“음... 그래도 망실되는 홍무통보가 있을 테니 문제가 생길 텐데?”
“맞네. 아까 있는 동전을 쓴다고 했지? 그럼 줄어드는 건 어찌 충당하나?”
“예? 그건. 뭐...”
중국상인은 말을 대충 흐리면서도, 속으로 찔끔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조선관리와는 조금 다르군. 확실히 가려 보낸 이들인가?’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 이 생각이 번뜩 떠올랐기 때문.
조선관리가 산동의 사정을 낱낱이 훑어보는 것처럼, 상인세력 또한 조선의 사정을 살피고 있었다.
굳이 말은 안 해도 서로 정보전을 하고 있는 셈이랄까?
다만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조선이 시장경제가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건 산동상인이 더 잘 알고 있고, 의주상인이나 의주관리가 아니고서야 돈놀이를 제대로 하는 곳이 없는 걸로 알고 있었다.
헌데 중국으로 파견 나온 이들이 날카로운 식견을 보여주니 놀랄 수밖에.
‘과거에 합격한 이들이라서 그런가? 금방 배운 걸까? 나이를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조선관리들은 누가 봐도 청년티가 풀풀 나는 이들.
하지만 조선이나 중국이나 과거시험이 더럽게 어려운 건 마찬가지 아닌가.
사람이 많은 중국은 과거시험을 합격하는 게 더 어려웠으니, 과거에 합격한 이들은 아무리 못해도 수재는 된다.
옛 명나라 과거시험을 떠올린 상인은 혼자서 지레짐작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