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16화 (216/538)

216. 챕터32. 서쪽으로 (7)

“...”

“...?”

“뭐하시나?”

그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옆에 있던 역관이 콕콕 옆구리를 찌르며 빨리 대답하라고 무언의 시위를 보냈다.

“아... 딱히 정해진 건 없지만, 시장의 동향을 파악해서 협의를 통해 홍무통보의 가치를 맞추는 편입니다.”

“흐음... 애매하군?”

“약간 억지 같기도 하고...”

청년관리들이 “그거 구라 아니냐?”라는 눈빛을 뿌리자, 상인은 손사래를 치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어떠한 이유든 간에, 동전은 조금씩 줄어들 수밖에 없다.

부서질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럼 자연스럽게 화폐의 가치가 올라가기 마련이고, 본래 액면가치가 1문짜리의 동전이 실제로는 2문, 3문으로 통용될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중국이 보통 넓은 게 아니고, 또 유사 자유시장경제와 흡사하게 돌아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상품의 시세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때그때 상황을 봐서, 각 성별로 동전을 더 찍어내거나 회수한다고 했다.

“음...”

“잠깐...”

청년관리들은 설명을 듣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서로 눈을 맞췄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

중앙조정이 없는데, 화폐가치가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걸 어떻게 다 확인하고 조정할 수 있을까.

어느 성에선 오르고 있고 어느 성에선 떨어지고 있는데, 이걸 하나로 뭉쳐서 조정할 수 있다고?

‘이거 중국이 분열된 거 맞나?’

‘홍무통보의 가치를 안정화시키려면 하나의 성만 주도해선 될 리가 없지 않나?’

‘만약 누군가 정신줄을 놓고 동전을 마구 발행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대충 관리해?’

이런 생각이 절로 떠올랐고, 가자미눈을 하고서 상인을 슬그머니 흘겨봤다.

모두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혀서 일까.

상인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왜...?”

“공식적일 수도 있고 비공식적일 수도 있는데, 각 성의 수뇌부들끼리 통교를 많이 하나보군? 이곳의 산동상인회와 저 밑의 남직례상인회 혹은 하남상인회와 말이야.”

“굳이 상인회가 아닐 수도 있겠지. 모든 성에선 대부분 관리,상인,군인이 서로 섞여서 권력을 나눠 갖지 않았나? 뭐가 됐든 서로 연결점이 되어 있나 보군?”

“알려지지 않은 협의체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

조선관리의 물음에 상인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고,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은 윗사람에게 떠넘기는 게, 아랫사람의 생존비법이자 권리 아니겠나.

상인은 오래된 격언을 충실히 따랐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 수 있는 게 아니라서...”

“...”

조선관리들은 하나같이 호랑이 같은 안광을 뿜어내며 압박해왔고, 상인은 더더욱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모르는 건 모르는 건데, 뭐 어쩌란 말인가.

“알았네.”

“일어나지.”

“그럽세.”

이내 어색한 침묵을 깨고, 조선관리들이 먼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옆 건물로 안내하게.”

“옙! 나리.”

대충 넘어간다는 걸 직감한 상인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냉큼 발을 놀려 밖으로 나갔다.

옆 건물은 밖은 조선군이 지키고 있었고, 안은 박도를 찬 사병이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생각보다 한산했는데 앞쪽에 위치한 접수대에는 쇠창살이 박혀서 흡사 감옥처럼 보였고, 접수원 앞에만 창살이 끊어져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호오...”

“오...”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모습에 조선관리들은 감탄을 흘렸고, 이내 대기실 한쪽에 위치한 탁자와 의자를 찾아 엉덩이를 붙였다.

여긴 또 무슨 특이한 곳인지 절로 궁금해진 모양이다.

“여긴 전장錢莊입니다.”

“전장이라.”

“돈을 빌리거나 맡기거나 필요할 때 뺄 수 있는 곳이죠.”

“고리대금업과 비슷하군.”

“이걸 이렇게 대놓고 한단 말인가?”

조선관리들은 간단한 설명을 듣기 무섭게 혀를 내둘렀다.

조선에도 고리대금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주집안에서 알게 모르게 하는 식이지, 이런 식으로 대놓고 상가를 세워 장사를 하진 않는다.

더욱이 지금은 고리대금법이 실시되면서, 암암리에 실시되던 민간사채조차 다 없어지고 나라가 대신하고 있지 않나.

“마냥 고리대금이라고만 보시면 곤란합니다. 사실 그렇게 고리도 아니고 말입니다.”

조선관리들이 왠지 모를 불쾌함을 표시하자, 상인은 자기도 모르게 얼른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 역사에서 전장은 명나라 말기에 본격적으로 출현한다.

물론 조선조차도 고리대금이 있는데, 상업자본이 발달한 중국에 없었겠는가.

송나라, 원나라 시절부터 꾸준히 있어왔고, 명나라로 넘어와서도 존재했다. 다만 보다 실체적이고 규정과 체계를 갖춘 조직인 전장이 본격적으로 생겨난 게 명나라 말기인 거지.

헌데 지금 역사에선 상인세력이 대두되면서, 원래 역사보다 훨씬 빠르게 체계를 갖춘 전장이 등장했다.

“흐음... 현금화폐를 쓰지 않는 이상, 전장은 존재할 수도 없겠군?”

“상업자본이 돌지 않으면, 애초에 전장이 필요가 없겠지.”

“그럴 걸세.”

“... 예. 그렇지요.”

‘이놈들 보게?’

조선관리들이 날카로운 식견을 보여주자, 중국상인은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며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전장에 대해 얼마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곧장 핵심을 파고드는 모습이 꽤 인상적인 모양이다.

조선의 고리대금법은 따지고 보면, 환곡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춘궁기나 보리고개에 식량이 떨어진 백성들이, 그 시기를 넘기기 위해서 높은 이자를 감수하고 곡물을 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을 빌려서 뭔가를 하려는 게 아니라, 굶어 죽지 않으려고 곡식을 빌리는 거지.

이러니 상업자본이라고 말할 수가 있나.

뭔가 사업을 하려는 이라면 그냥 아는 사람의 소개를 통해 부잣집에 가서 돈을 융통하는 거지, 전장처럼 불특정다수를 상대하는 조직에게서 돈을 빌리는 식이 아니었지.

이런 측면에서보면, 현금화폐를 예치하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전장이 마제은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조선처럼 쌀이나 면포를 쌓아두고 빌려주거나 받는다는 건데... 이래서 전장이 운용이나 될까.

곡물과 면포는 무조건 썩거나 삭기마련이니, 보관하는 것 자체가 손해를 보겠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젠 아국도 상업자본이 일어서지 않았나.”

“일어선 게 뭔가.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무섭도록 성장하고 있지.”

조선관리들은 열심히 손을 놀려 뭔가를 적으면서, 서로 눈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갔다.

기업의 공인으로 인해 조선도 상업자본이 생겨났으나, 미흡한 도로사정과 부족한 유통망으로 인해 잉여분이 넘쳐흘렀었다.

기업은 사원으로 쓸 수 있는 노동력과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자가 많은 곳, 즉. 사람이 나름 많이 사는 큰 도시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사람을 끌어 모은 기업은 무섭게 커지면서 온갖 물산을 생산.

초창기에는 조정의 공물로 넘기는 물량이 전부였지만, 한두해가 지나기 무섭게 공물량을 가뿐히 추월해 잉여분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남긴 잉여분은 터 잡은 도시로 흘러들어가 팔렸고, 그러고도 남은 잉여분이 도시 인근의 작은 소도시나 마을로 흘러 들어갔지.

낙수효과 아닌 낙수효과로 인해 작은 소도시에서도 하나둘씩 기업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내 같은 작업이 반복됐다.

더 작은 소도시나 산골 마을에까지 잉여분이 흘러들어가면서,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현, 하나의 도가 동반성장을 이뤄갔다.

이 와중에도 행상은 꾸준히 활동하면서 다른 지방의 물산을 열심히 옮겨댔는데, 그럼에도 전체 물동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각 지방마다 특별한 물산은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조정이 상인기업을 인정하게 무섭게 유통, 물류, 운송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던 거지.

그리고 이로 인해 드디어 조선의 상업자본이 완전히 안착됨과 동시에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채비마저 끝마쳤다.

“상인기업, 정확히 말하면 통상기업이 등장하면서 돈을 빌리고 받는 경우가 많이 늘어났다고 하지 않았나.”

“맞네. 그 때문에 곡물과 면포 가격이 요동치기도 했고.”

“흐음... 전장이라.”

조선관리들이 계속 말을 이어가자, 조선말을 못 알아듣는 중국상인은 그저 그들을 유심히 살필 따름이었다.

“처음부터 말해보게. 어쩌다가 전장을 만들게 됐나?”

“그게...”

중국 상업자본의 역사를 그대로 따라가려는 걸까?

조선관리들은 연필을 쥐고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적겠다!"는 열의에 찬 눈빛을 뿌렸고, 중국상인은 그 열기에 흠칫 놀라서 얼른 입을 놀렸다.

명나라가 망하고, 상인세력이 권력자로 대두되고, 해금령이 자연스레 해체되자 무제한적인 해상무역이 시작됐다.

문제 아닌 문제는 해상무역은 하나부터 열까지 막대한 자금이 출렁이는 사업이고, 거래를 할 때마다 은 궤짝, 금 궤짝을 들고 다녀야 했으니 온갖 도적들이 달라붙었지.

중국이 쪼개지면서 가병과 사병이 불어났다고는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약해진 공권력과 치안력에 비례해 메뚜기처럼 날뛰는 비적과 마적, 산적들도 늘어났으니까.

그나마 가까운 도시를 오가는 경우에는 상관이 없는데, 중국 내지로 들어갈 때는 문제가 됐다.

나아가 이런 도둑 걱정은 둘째 치고, 무거운 짐을 바라바리 싸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이었던 것.

해서 상인들은 옛 송나라 시절의 국영은행이라 할 수 있는 저당소抵當所와 송,원시절에 어설프게 존재했던 전장을 본격적으로 제도화 시켰다.

전장에 돈을 맡기고 간단하게 물표와 전표만 가지고 다니면, 굳이 현금이나 현물상품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됐으니까.

“물표物票와 전표錢票라?”

“잠시만...”

조선관리들이 궁금증을 토해내자, 중국상인은 재깍 몸을 날려 접수원에게 달려가 뭔가를 받아왔다.

물표는 쪼개진 나무 조각처럼 생겼는데, 그 쪼개진 모양새가 죄다 제각각이라서 거래인을 특정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 쪼개진 반쪽을 전장에서 보관하고, 나머지 반쪽을 거래인이 가지는 겁니다.”

“이걸 맞춰서 맞으면 본인인 걸 인정해 주는 거군?”

“예.”

간단한 이치인 터라, 조선관리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물표를 붙였다 때였다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놀리지 않고 연필을 놀렸고, 물표의 재질과 크기, 두께, 촉감 등을 빠짐없이 기술했다.

다음으로 시선을 돌린 건 전표.

전표는 특수한 종이와 특수한 먹물로 작성했는데, 거래인이 얼마를 예금 혹은 인출했고, 얼마가 남았는지 적어둔 물건이었다.

조선관리들은 전표를 양손으로 잡고 조심스럽게 당겨보고,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긁어보고, 누군가는 연필로 써보고, 또 누군가는 칼로 쓱쓱 잘라봤다.

“그냥 종이가 아니군.”

“이거 종이보단 오히려 면포에 더 가깝지 않나?”

“아닐세. 이 찢어진 날실을 보면 면포가 아니라 비단에 더 가깝지 않나?”

조선관리들은 해부학자라도 되는 것 마냥, 전표의 재질을 놓고 토의에 들어갔다.

“뭐로 만들었는지 아나?”

“그건 전장마다 비밀이라서 저도 잘...”

“음...”

조선관리들은 아쉽다는 표정과 함께, ‘역시 안 넘어오는 군?’이라는 속내를 숨기며 전표를 뜯고 맛보고 즐겼다.

“꼭 저화처럼 생겼군.”

“따지고 보면 이것도 종이돈 아닌가. 대명보초나 저화나 전표나 거기서 거기겠지.”

“그러게 말일세. 여기 번호와 인장도 박혀 있군.”

전표 양 끝단에는 일련번호와 도장으로 찍은 전장인장이 찍혀 있었고, 그 중앙에는 예치액수가 적혀 있었다.

“이 두 개를 가지고 가면 돈을 빌리거나 뺄 수 있는 거군?”

“그렇습니다.”

“본인을 특정하지 않아도 되고?”

“보통은 상단주나 행수가 오는 편이지만, 상관없습니다. 한명에게만 특정할 순 없지 않습니까.”

거래를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매번 같은 사람에게만 허용하면 효율이 너무 떨어지는 게 당연한 법이다.

“허면 누가 이걸 훔쳐서 사용하면 어찌되나?”

“보통은 보던 사람들과 거래하는 편이긴 하지만, 전장에선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건 보관을 잘못한 사람이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음...”

조선관리들은 눈빛으로 ‘하여간 사기꾼 중국놈들. 쯧쯧.’이라고 혀를 차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중국인들은 “사기를 친 놈보다 사기를 당한 놈이 바보.”라는 요상한 개념이 박혀 있는 탓에, 이러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모양이다.

허나 이해는 됐다. 그래야 전장이 돌아갈 테니까.

“이 먹물 말일세. 뭐로 만들었는지 아나?”

조선관리 중 한명이 창틀 너머로 흘러들어오는 햇볕에, 전표를 이리저리 비춰서 살피며 묻자.

“그것도 전장마다 비밀이라서 저도 잘...”

중국상인은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게 바로 전표의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장치인데, 자신이 어떻게 알겠는가.

“하긴 자네가 알면 위조해서 마구 써먹었겠지.”

“...”

또 다시 약 올리는 말에 중국상인은 잠깐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얼른 표정을 풀고 실없는 미소를 흘렸다.

“이렇게 돈을 쉽게 뺐다 넣었다 하면 확실히 편하긴 편하겠군.”

“그럴 걸세.”

“그리고 이렇게 돈을 한곳에 모아두면, 더 큰 사업을 할 수도 있겠지.”

“예를 들면 해상무역이라든가... 맞나?”

자기들 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묻자, 중국상인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칼에 찔린 듯, 놀란 표정을 애써 숨기면서 입을 놀렸다.

“맞습니다. 옛 송나라시절 전장을 부활시켜 활성화한 건, 집적된 자본을 활용하기 위해서지요.”

조선관리들은 자신들의 추측이 맞는 걸 확인하려는 생각인지, 중국상인의 두툼한 입술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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