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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218화 (218/538)

218. 챕터32. 서쪽으로 (9)

“생각해보면... 의창을 비롯한 모든 창을 통합해서 관리하는 조세처를 만든 것도 다른 뜻이 있는 것 같군.”

“하긴 용연군 대감이라면...”

“음.”

누군가의 말에, 모두는 머리에 김이 나도록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양전사업이 시작되면서 의창, 군자창 등의 공창公倉은 전부 통합되었고, 각 부서별로 따로 소유하던 공전公田과 따로 거두던 세금도 통합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조직은 호조산하에 있긴 했는데, 다 집어삼킨 탓에 덩치가 너무 커져서 반독립적인 부서로 떨어져 나왔고.

그 부서를 조세처라 불렀다.

이들은 옛 곡창을 허물고 신 건축기술을 활용해 신형 곡물창고를 건설하는 건 물론이고, 호조의 판적사版籍司, 회계사會計司의 업무 일부를 이관 받아 담당하고 있었지.

조정신료들은 “어차피 잠시 보관하는 곡물창고인데 굳이 저렇게 많이, 크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지곤 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해답은 다른 곳에 있었다.

“곡물창고 옆에 사무실만 붙여 놓으면, 그게 곧 전장의 지점이 되지 않겠나?”

“그렇지 않을까?”

“다른 점은 마제은 대신 곡물과 면포를 이용하는 거겠지.”

“흐음...”

모두는 이제야 뭔가 그림이 그려진다는 듯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의주에 전장이 만들어질 게 분명, 그렇다면 조선내지에 전장을 못 만들 이유가 없다.

그런 전장이 만들어질 곳은 당연히 돈이 모여 있는 곳이고, 조선의 돈은 곧 곡물과 면포이니... 조세처의 공창이 전장의 지점으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일 거다.

“그게 맞을 걸세. 아국의 고리대금은 악독하긴 하나 세련되지 못하고, 이젠 고리대금법으로 인해 지주들이 사채를 하는 것도 힘들어지지 않았나.”

“맞네. 허나 조정이 아무리 노력을 해본들, 백성들이 사채를 필요로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환곡을 빌려주던 의창을 정리하고 조세처에서 그 일을 담당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겠지.”

“옳은 말일세. 다만 조세처에선 세수를 실질적으로 거두고, 곡물을 보관하는 역할을 해왔으니... 전장과 유사한 업무를 하려면 다른 조직이 또 필요해 지겠지.”

“흐음...”

모두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안 그래도 조선조정의 육조체제는 찢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예조에선 예조보다 더 큰 교육부가, 공조에선 도로건설처가, 호조에서 조세처와 함께 사수감이 떨어져 나와 선박과 선소를 관리하는 전함처가.

병조에선 승여사乘輿司의 일부와 공조, 호조의 업무가 합쳐져 역참과 수참을 관리하는 물류교통처가, 예조와 병조는 더 크게 떨어져 나와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위부서인 율법부가 만들어졌다.

이러니 전장의 역할을 할 새로운 부서가 생기는 건, 그리 특별한 게 아니지.

고래로부터 이어 내려온 육조체제가 찢어지는 데도 조정관리들이 큰 반대를 하지 않는 건, 시대의 흐름이 바뀌는 걸 모두가 느끼고 있기 때문.

굳이 자주화를 말하지 않아도, 기존의 육조체제로는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조정을 감당할 수가 없다.

나아가 여러 부서의 업무가 겹치는 온갖 사건들이 튀어나올 정도로 조선은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으니, 살아남기 위해서든 통제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든 변화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

잠깐의 고민이라면 “과연 그 새로운 부서에 가는 게 출세에 도움이 될까?”라는 거였다.

“흐음. 전장이야 그렇다 쳐도, 마제은과 홍무통보의 유통에 관한 걸 연구하라고 하신 걸 보면... 분명 화폐에도 관심이 있는 거겠지?”

“그럴 걸세.”

모두는 연오랑에 내렸던 명령을 떠올리며, 다시금 머리를 굴려봤다.

“허나 분명 뭐가 됐든 바뀌긴 해야할 걸세. 아무래도 지금의 현물거래를 유지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일세.”

“그건 맞긴 한데...”

누군가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확답을 내놓지 못했다.

조선이 과거에 어째서 화폐유통에 실패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지지 않았나? 면포의 가격이 너무 요동치는 건 물론이고, 그걸 떠나서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어.”

“그건 의심할 것 없이 확실하네.”

면포의 수입 및 수출을 담당한 적이 있는지, 한 청년관리가 단호한 목소리로 확신을 내뱉었다.

착호군 활동 이래로 미개척지는 꾸준히 개척되어, 돌산이 아니고서야 뭐라도 뽑아낼 수 있는 땅으로 바뀌었다.

그중 조정과 두 왕이 중점을 두고 진행했던 산업은 양잠, 면직, 모직을 비롯한 직물산업이었고, 조정의 지원을 받는 직물산업은 날개가 달린 듯 성장했다.

매 해마다 신기록을 갈아치울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사실 조선의 직물산업은 바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빈약했고, 죄다 가내수공업 수준도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목화솜을 쉽게 빼낼 수 있는 신형 조면기, 한 번에 두,세개의 실을 뽑아낼 수 있는 신형 방적기, 기존보다 크고 일정한 크기의 천을 짤 수 있는 신형 직조기. 천을 옷감으로 쉽게 바느질 할 수 있게 도와주는 패달식 재봉틀까지.

이 모든 걸 동원해서 공장을 만든 직물기업이 등장했으니, 가내수공업에서 단번에 껑충 뛰어서 공장제 수공업의 끝판왕 수준까지 치고 올라간 거지.

이게 끝이 아니다.

이젠 기업을 세워 뭐라도 하면 돈을 벌리는 걸 백성들은 알아차렸고, 산과 들을 들쑤시며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자발적으로 찾아다녔다.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대마로 만든 삼베는 물론이고, 제한적으로 키우던 저마마저도 대량으로 생산해 모시로 만드는 기업이 튀어나왔다.

산간지역에선 뽕나무를 대량으로 키워 비단을 뽑아내는 양잠기업이, 양목장에서 키운 양털을 이용한 모직기업이, 북방에선 끝도 없이 잡고 있는 산짐승을 이용한 피혁기업이 등장.

한반도 역사상 지금 시대보다 옷감이 다양하고 풍족한 적이 없었으니, 면포에 대한 의존도가 떨어지는 건 당연.

이 와중에 면포의 생산량마저 급등했으니. 면포의 가격이 널뛰는 건 물론이고, 현물화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가격이 하락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인 거지.

“그렇군.”

“괜히 제주의 왜관이 미친 듯이 커지는 게 아닐세. 일본은 아직도 제대로 된 면포를 못 만들고 있네. 중국에서 생사生絲를 수입해봐야 여전히 수요를 못 맞추고 있으니, 아국의 면포가 불티나게 팔리는 중이지.”

“그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네.”

“오히려 일본에 잉여물량을 팔아서,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도 들리더군.”

“흐음...”

결론은 조선도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로 흘러갔는데... 이 와중에 잠자코 있던 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폐는 둘째 치고 말이야. 아까 전장의 돈싸움을 생각해 봤는데 말일세.”

“...?”

“만약 아국이 전장을 만들어서 중국에 진출하면 어떻게 되겠나?”

“...”

“...!”

잠시간 침묵이 감돌다가, 문뜩 뭔가 실마리를 잡았는지 누군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쩍 벌렸다.

“지금 아국이 중국전장과 돈싸움을 벌여서, 중국전장을 망하게 만들겠다는 건가?”

“가능하지 않겠나? 개판이 된 지금의 중국이라면 말일세.”

“흐음...”

“마냥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군.”

통역도 해주지 않아 눈만 멀뚱멀뚱 굴리고 있는 중국상인을 뒤로하고, 역관마저도 귀를 기울이며 동료의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

중국은 거대하다.

조선이 아무리 여진을 흡수하고 북방을 먹어치웠어도, 무섭도록 크고 있는 조선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앞세워도, 중국의 3개 성 이상은 감당할 수 없다.

인구로나 땅 크기나 경제력으로 보나 말이다.

하지만 지금 중국은 하나의 성을 통합한 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 역사라면 혹은 옛 중국의 역사에서, 중국 전역을 앞마당처럼 누비고 다녔던 전국구 거상은 존재하지 않는 거지.

이런 거상은 애초에 권력에 빌붙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건데, 통합된 권력이라는 게 없는 시대니까.

홍무제가 한 번 때려잡고, 명이 망할 때에 눈먼 돈을 차지하기 위해 칼부림을 부리던 시절을 거치면서.

유사 전국구 거상의 몸뚱이는 들개무리에게 물려 갈기갈기 찢어져, 지금의 난잡한 수십개의 상회로 재탄생했다.

“그러니 만약 왕실이 주도해서, 아국의 자본을 집약한 전장을 만들면 어떻게 되겠나. 아무리 풍족한 강남의 성이라고 해도, 그 하나만으로는 아국에 대적할 수 없네.”

“흠... 가능한 말이야.”

이들은 중국의 호구수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어떤 성이든 하나정도는 조선이 체급빨로 눌러버릴 수 있다는 걸 안다.

“게다가 신뢰의 문제를 보게. 이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경쟁하느라 상회의 전장이 자기 구역에 파고들지 못하게 칼부림을 하면서라도 막고 있지 않나.”

“그렇지.”

“하지만 절대 무너지지 않고, 압도적인 자금력을 갖춘 전장이 등장한다면 어떻겠나.”

“조선왕실전장이란 말이지.”

“...”

그 무거운 말에, 모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잠깐의 감격을 느꼈다.

“뭐... 명칭이야 나중에 정하면 될 거고, 본질은 그게 맞네.”

“문제라면 중국상인이 조선왕실전장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돈을 집어넣느냐 인데...”

‘될까?’

‘될 거다. 돈에는 나라가 없고, 중국상인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안 그래도 서로 목줄을 잡고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어차피 목줄이 묶일 바에는 뒤통수를 안 맞는 방법을 찾아야겠지.’

‘명나라도 없어졌는데... 아국에 돈을 맡기는 걸, 눈치 볼 사람도 없지 않나.’

‘우리가 저들의 땅과 이권을 보장만 해준다면, 전부 우리에게 붙을 거다. 오히려 우리가 던져주는 이권을 노리고 서로 경쟁하게 되겠지.’

모두는 눈빛으로 대화를 나눴다.

“... 가능하겠나?”

“불가능할 건 뭔가. 거부하는 도시와 상회가 있다면 의주의 거래를 금지해버리면 되는 것 아니겠나? 북방무역을 독점한 이상, 중국이 하나로 뭉쳐서 움직이지 않는 이상, 언제나 주도권은 아국이 쥐고 있네.”

“맞는 말이지. 만약 의주에 조선왕실전장이 생긴다면, 그들은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라도 해안도시에 조선왕실전장의 지점이 생기는 걸 반길 걸세.”

“그렇겠지.”

중국전장과 똑같은 상황 아닌가.

무겁게 짐을 싣고 다닐 필요 없이, 전표와 물표만 왔다갔다 거리는 걸 상인들은 누구보다도 반길 거다.

특히나 의주에서 중국 상인들끼리, 서로 거래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럴 거고.

지금은 힘들고 번거롭게도, 배에서 배로 현물을 옮기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번에 산동에서의 일이 끝나면, 더욱 겁을 먹지 않겠나?”

“쉿. 그 이야기는 하지 말게.”

누군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가, 정색하는 동료들을 보며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입을 다물었다.

모두는 침묵하며 슬그머니 중국상인의 눈치를 살폈으나... 중국상인은 역관의 옆구리만 조심스럽게 찌르며 끼어들 차례만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야 이해가 되는 군.”

“뭔가?”

또 뭔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보이자, 모두의 눈동자는 청년관리의 입에 달라붙었다.

“광산법을 제정해서 광산기업을 허가한 것 말일세. 금,은광을 허가했음에도 민간에 풀지 않고 조정에서 다 사들이고 있는데, 그게 이것과 연관된 일이 아닐까 싶어서 말일세.”

“금,은광이라...”

“흐음.”

모두는 다시금 톡톡 연필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명이 없어진 후에도 조선은 금,은광을 개발하지 않았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필요가 없고, 다른 일도 바빴으니까.

기껏해야 귀금속을 만들 정도인데, 그건 굳이 광산을 파내지 않아도 사금을 채취하는 걸로 충당할 수 있었지.

허나 광산법이 제정되고 광산이 민간에 풀리면서, 온갖 광산업자들은 착호군이 밀어버린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면서 광맥을 찾았다.

대다수는 이미 사업가능성이 열린 철광,주석광,납광,석탄광,석회광,유황광산을 찾아다녔지만, 일확천금을 노리고 금,은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지.

다른 광맥을 찾으러 갔다가, 우연치 않게 금,은광을 발견한 사람도 있었고.

그렇게 찾아낸 광맥은 조정의 감시와 허가 하에 채굴을 시작했고, 은,금광석은 민간에 풀리지 않고 조정으로 빨려 들어갔다.

조정이 광석을 사는 방식이 아니라, 하도급을 줘서 채굴량만큼의 대가를 광산기업에게 주는 방식을 취했던 것.

염전기업만큼이나 세금이 추가로 더 붙긴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남는 장사라서 거부하는 집안은 없었다.

“안 그래도 광산 업무를 담당하던 동료들이 의아해 하긴 하더군. 광석에서 뽑아낸 금,은은 극소수를 제외하곤 민간에 풀지도 않는데, 뭐 하러 고생하면서 쌓아 놓느냐고 말이야.”

“...”

“나도 그 말을 듣고서 같은 생각을 했었네. 한편으론 ‘밀채를 방지하려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고...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그 말은...?”

“내 생각에는 이미 전장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자본금을 모으는 게 아닐까 싶네. 자신들이 전장을 운영하고 있으니, 중국상인들도 전장의 보유자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겠지.”

“...”

“그러니 아국의 광산에서 뽑아낸 산더미 같은 은,금을 보고서 안심하지 않겠나? 아마도 절대 망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테니, 불안정한 중국 정세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왕실전장에 자금을 맡기지 않겠나?”

“...!”

“훗날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말일세. 뭐... 권력투쟁에 패배한다고 한들, 죽기 싫으면 조선으로 귀화해서 조선인으로 살면 되는 거 아니겠나? 자금을 맡겨두면 그게 더 수월해지겠지.”

“오...!”

“충분히 가능한 말일세!”

“그리고... 잘 모르는 우리조차 이런 생각할 수 있다면, 대감과 전하께선 당연히 생각하고 움직였을 걸세.”

모두는 이제야 두 왕과 연오랑이 그린 큰 그림을 엿본 탓일까?

대체 언제부터 이 일을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거미줄처럼 넓게 뻗어나간 대계를 보며 감탄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상인세력이 아국과 돈으로 엮여 긴밀하게 연관되면...!?”

“자기들이 손해를 보기 싫어서라도 아국에 적대할 수 없을 걸세. 그게 설령 한 성을 통일한 권력자가 등장한다고 해도 말이야. 지금 중국이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아무리 칼을 앞세운 권력자라고 해도 상인회를 다 죽여 버리고 혼자 독차지할 순 없어 보이니까.”

“과연. 과연!”

“그럴 걸세!”

“정말 놀랍군...”

모두는 다시금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단순히 전장을 만들어 조선의 화폐 및 시장경제를 바꾸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중국을 옭아맬 그물까지 함께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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