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챕터33. 급습하다 (1)
조선관리들이 원시적인 은행과 증권의 개념,조직체계를 쌓아가고, 화폐 유통에 대한 밑그림을 산동상인에게 배워가는 동안.
산동상인 또한 청도포구를 건설하는 걸 보며, 조선의 신제도 및 풍습에 대해 배워갔다.
물론 연오랑은 조선에 퍼지고 있는 신문물을 보여주지 않았다.
기술력이 아닌 아이디어의 차이로 만든 물건은, 산동상인이 얼마든지 따라만들 수 있기 때문.
하다못해 신형 대패조차도 보여주지 않았기에, 특이하게 생긴 짐마차는 주요부품이 없어서 걸핏하면 부서지기 일 수였지.
이렇듯.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순식간에 진행된 대규모 공사지만, 그래도 좌충우돌하면서 어떻게든 굴러갔다.
기술과 기물이 없으면 인력으로 대체하면 그만이고, 중국이야 원래 그렇게 머릿수로 뭐든 해결해 왔으니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조선인 인부는 계속 들어오고, 새롭게 건조한 신형전함이 달에 한 척씩 추가되면서 공사는 가속화됐다.
근 5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 어느덧 산동에도 가을이 찾아왔고, 뜨겁게 달구던 여름바람은 금세 선선한 가을바람으로 변해 포구를 간지럼 피웠다.
이 오랜 시간동안 조선인 인부와 조선군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산동상인들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조선인 인부들은 포구에 만든 관아와 숙소, 상관에 거주하는 게 아니라, 너나할 것 없이 조선군 진지에 만들어놓은 게르에서 숙박을 해결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산동상인들은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감에 잠을 지새웠다.
밀약을 맺었다 한들 산동상인은 조선군 진지에 들어올 수 없었고, 그 속에 뭘 숨겨놨는지 알아낼 수 없었으니까.
그저 계획대로 잘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었지.
그들이 어떤 마음을 품든, 어찌됐건 청도포구는 드디어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청도는 꽤 거대했다.
미래를 앞당겨 가져온 보람이 있는 게, 여긴 단순한 항구를 넘어서 수만명이 살 수 있는 대도시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처음부터 설계를 하고 만든 신도시답게, 도로와 거주지역이 바둑판처럼 구분되어 있었고,
상수도를 끌어오진 못했지만, 미래에 맥주로 유명했던 질 좋은 지하수를 뽑아낸 우물과 분수를 여럿 만들어 놨다.
시대에 걸맞지 않게, 중국에는 없던 광장 유사한 걸 조성해 놨지.
대신 하수도는 제대로 만들어놨는데, 토벽과 토관으로 만든 하수도를 도로 옆에 깔아서 바다로 빠져나가게 만들어 놨다.
중심부에는 3층 전각을 비롯한 고층 전각이 자리해 포구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중심부 외곽에는 성형요새를 쌓을 넓은 공간을 맨땅으로 덩그러니 남겨두고,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대로를 따라서 옹기종기 기와집이 자리 잡았다.
중국식 사합원을 만들 법도 하지만 이곳 건물은 대부분 신한옥의 형태를 닮아 있었고, 대신 사합원의 벽면만큼이나 높은 담장을 둘러놔서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건물이 수백,수천을 넘어가니, 포구에 인부로 일을 하러온 이들이 죄다 이곳에 눌러 앉게 된 모양새였지.
뭐... 전부 부두노동자로 일을 할 수 없을 테니, 도시 밖으로 나가 일거리를 구해야 했고, 이 부분은 산동상인들이 알아서 정리해줬다.
그들은 조선이 차지한 중심부로 들어가진 못해도, 중국인 인부가 사는 외곽지역에 상가와 점포를 만들어 투자한 자금을 야금야금 회수하면서 여러 일거리를 제공했다.
청도 인근 황무지의 주인이었던 주가, 평가, 호가.
이들이야 말로 봉 잡은 심정이었는데, 답이 없어서 내버려뒀던 습지와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었기 때문.
그들도 바보가 아니니. 이 땅을 어떻게든 경작할 수만 있으면, 도시에 식량을 팔아먹을 수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이제 일거리가 슬슬 떨어져가는 인부들을 대규모로 동원해서, 쉽지 않은 관계 사업을 하는 건 퍽 좋은 기회를 잡은 셈이었지.
청도를 감싸고 터 잡은 이 셋 호족집안은 인부들을 소작농으로 받아들였고 “제발 이대로만 계속 성장하게 해주세요!”라고 하늘에 빌며, 적극적인 친조선파 가문으로 변모했다.
그렇게 포구 주변이 전답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포구와 이어진 공터 옆에 위치한 조선군 진지와 목마장은 변한 게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역으로 계속 영역을 넓혀갔다고 해야 맞을 거다.
조선에서 넘어온 말은 이만필 가까이 됐는데, 이 많은 말은 산동으로 퍼지지 않고 아직도 조선이 쥐고 놔주지 않았으니까.
“오래도 걸렸네. 그치?”
“예. 대감.”
“그렇습니다.”
청도포구가 건설되기 무섭게 산동으로 넘어온 사단장 최윤덕과 김효성
둘은 포구 한쪽에 언덕배기에 새로 만든 정자에 앉아, 바닷바람을 맞아 옷자락을 휘날리는 연오랑을 바라봤다.
탁 트인 전경과 함께 포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니, 앞으로도 꽤나 명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닌데 말이야. 산동에서 배운 것도 많고, 얻은 것도 많아. 안 그래?”
“예.”
“뭐...”
싱긋 웃는 연오랑을 보며, 둘은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어 멋쩍은 미소만 흘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두 맞는 말이니까.
조선관리들이 청도포구에만 눌러 앉아서 상인들과 꼼지락거렸겠는가.
산동상인이 붙여준 길잡이와 상인을 따라서, 조선관리와 연대병들은 중국옷으로 갈아입어 위장하고서 산동 전체를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 북과 징에 나무토막을 달아서, 딱딱거리는 작은 소리만 내는 기리고차마저 끌고 다녔지.
길잡이들은 지리감 소속 관리가 몰래 산동지도를 만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안내를 해줬을 거다.
그렇게 사방으로 퍼져나간 이들은 산동의 모든 걸 긁어모았다.
이젠 굳이 쓸모도 없는 유학서적은 배제하고, 그 외의 모든 방면에 걸쳐 있는 서적과 고서들을 매입하고, 매입이 불가하면 필사라도 해서 넘겨받았다.
산동의 특산물은 물론이고, 흔히 키우는 밀과 보리 등의 볏과식물, 산동의 약재, 청경채나 중국땅콩 같은 야채와 상품작물.
심지어 길가에 널려 있어서, 산동인들도 잘 모르는 잡풀마저도 전부 뿌리채 뽑고 종자씨를 긁어모았다.
이미 중국원정을 떠났던 수년전부터 해왔던 작업이잖나.
산동인들이 “저걸 뭐 하러 챙기는 거지?”라는 의아한 눈빛을 뿌릴 때.
“멍청한 놈들. 이게 다 돈이 될 수도 있어.”라는 속마음을 숨긴 채, 조선관리들은 열심히 손을 놀렸다.
식물류만 이렇게 챙겼을까.
산동의 가축은 물론이고 소문을 듣고 은근슬쩍 끼어들어온 하남과 남직례의 상인을 통해서도 가축을 긁어모았다.
‘이러려고 내가 직접 온 거지만, 생각보다 성과가 크단 말이지.’
연오랑은 지난날 먹물 냄새가 물씬 나는 기억을 휙휙 지워내며, 속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냥 평범하게 청도포구만 건설할 거였으면, 엉덩이 무거운 연오랑이 뭐 하러 왔겠나.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살피고, 산동의 모든 것을 뜯어가서 조선에 이식하려고 온 거지.
문제라면... 조선이 이러는 동안, 공청 파벌은 “말은 대체 언제 줄 거야? 이미 약조했던 오천필이 한참 넘었잖아!?”라고 계속 외쳐댔었다.
연오랑은 “너희가 사용할 목마장을 아직 못 만들었잖아.” “너희는 말을 관리할 기술부터 먼저 배워야 하지 않냐.” “바다를 건너와서 군마의 상태가 아직 안 좋다. 무리해선 안 된다.” “군마가 이곳 풍토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등등. 온갖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뤄왔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부족했고, 연오랑은 대신 기병훈련을 직접 도와준다는 혹할 제안을 던져서 군마를 이곳에 묶어 놨다.
이건 공청 파벌로서도 결코 허투루 흘려버릴 수 없었으니까.
명나라 시절부터 조선은 정주국가 치고는 기병의 비율이 기이할 정도로 높은 정신 나간 나라였고, 지금은 더 심했다.
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지난 여진정벌 때.
조선이 동원한 기병만 4만을 넘었으니, 기병이 잔뜩 쪼그라든 지금의 중국이 보기엔... 조선이 정주국가인지 유목국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지.
그러니 조선이 모든 기병기술과 전술을 알려주지 않더라도, 함께 붙어서 배울 수 있는 것 자체가 다시 못 올 기회였던 것.
조선군은 대단한 건 아니지만 기본에 충실하게 산동기병을 나름 잘 가르쳐줬고, 이에 만족한 공청 파벌은 더 이상 떼를 쓰지 않고 청도포구가 완성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청도포구가 완성되고, 조선청도령이라는 시건방진 현판이 달리는 걸 보게 됐지.
이젠 미뤄뒀던 거래를 끝낼 시간이 된 거다.
“연대병들과 군마의 상태는?”
“군마는 물론이고, 11연대 모두 푹 쉬어서 완벽합니다.”
“와서 훈련은 못하고, 건물만 지어댔는데도 괜찮은 건가?”
“예. 뭐... 밤에 각자 개별훈련을 했으니, 감을 잃진 않았을 겁니다.”
“큭. 그래.”
연오랑은 피식 웃으며 우려를 던져치웠다.
북방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창칼을 휘두르며 활을 쏘던 녀석들이니, 이곳에 와서 몇 달 쉬었다고 해서 몸이 녹슬진 않았을 거다.
오히려 얌전히 인부로 지내면서 풍토에 적응했을 테니, 차라리 더 잘된 걸지도 모르지.
과연 산동상인이나 공청 파벌이나 짐작이나 했을까.
조선인부로 위장한 이들 대다수는 연대병이었고, 그 수가 만 명을 훌쩍 넘어갔다.
웃기게도 중국인부와 함께 손을 놀렸던 이들이 연대병이니, 조선군이 몇 명이나 왔는지 궁금해 했던 건 쓸데없는 짓이었지.
이마에 “나 군병이오.”라고 적어놓은 것도 아니고, 옆에 지나가고 있어도 감쪽같이 속았을 거다.
더불어 잔뜩 끌고 온 군마들도 전부 연대기병이 타고 다닐 말인데, 이걸 산동에게 왜 팔겠나.
연오랑이 질질 시간을 끈 건, 11연대가 모두 적응을 끝마치고 움직일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공청을 비롯해서 산동의 난다긴다하는 집안의 사람들이 다 찾아올 거다. 알고 있지?”
“예.”
둘은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숙였다.
조선이 청도를 조차한 건, 중국을 한 대 후려칠 정도로 거대한 사건이었고,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의 시선에 이쪽에 쏠려 있었다.
다만 공사만 하면서 잠잠히 지내는 터라 다른 성의 관심은 쭉 사그라들었지만, 당사자인 산동 입장에선 이제 시작인 법.
당연히 청도포구의 상관 개관식에 맞춰서, 산동의 유력 인사들이 다 찾아올 예정이다.
“접객은 산동상인들이 알아서 해줄 테니 신경 쓸 필요 없고, 애들만 잘 관리하고 있어라.”
“예.”
“그리고... 하남 상구현의 홍형청은 뭐하고 있지?”
“공청이 저흴 압박할 때 잠깐 산동경내로 들어왔다가, 지금은 되돌아 간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기는 풀지 않고, 진에 머물고 있습니다.”
“좋아. 일이 시작되면 벼락처럼 움직일 터, 준비를 해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옙!”
둘은 목청 높여 답을 했고, 연오랑은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그리며 물끄러미 청도포구의 상관을 내려다 봤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그러면서도 잔잔하게 흘러갔다.
산동상인이 알아서 다 준비를 해준 탓에, 중심부 상관거리는 어느덧 사람으로 가득 찼다.
유랑민이자 빈민에서 어느덧 청도포구 거주민으로 변신한 이들은 중심부로 들어오지 못했지만, 산동 전역에서 온 이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상인들, 관리, 하급무관들, 지주출신의 호족 등등. 이들이 사용인과 호위를 이끌고 찾아왔으니, 그 수가 몇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
조선이 허가해준 상가와 점포에는 해안가 출신뿐만 아니라, 관리파벌이 득세한 서북부의 상인들도 자리를 차지했다.
온갖 곳에서 불을 피우며 먹거리를 만들었고, 공청 파벌마저도 인파에 휩쓸려 조선관리의 설명을 들으며 상관을 돌아다녔지.
그리고 이 모든 난장판의 중심부에 위치한 청도관청에서, 연오랑은 왕처럼 앉아 예물과 인사를 받고 있었다.
연무장도 아니고, 대청도 아닌, 판석으로 깔아놓은 관청 앞 공터는 어느덧 잔칫상이 펼쳐진 듯 사람으로 가득 찼다.
‘아오. 이 짓도 못할 짓이네.’
그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자신에게 꾸벅 인사하는 인물에게 메마른 미소를 던져줬다.
자기를 어디 가문의 누구라고 소개를 하는데, 저런 자들이 한둘이 아닌 터라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오히려 옆에 서 있던 황보인만이 미친 듯이 세필을 놀리며, 예물과 이름을 적고 있었지.
“네가 장군인 걸 아무도 모르나 보다.”
“변장이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변장은 무슨...”
인부들이 입는 옷만 입고, 고급 갓 대신 초롱이만 쓰고 있는데... 변장은 무슨 변장인가.
연오랑은 허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평범한 긴팔티셔츠를 입은 황보인을 보며 피식 웃었으나, 황보인은 기분이 상하지도 않는지 오히려 그 또한 히죽히죽 웃어댔다.
그도 그럴 것이. 산동에 온지 벌써 3달이 지났음에도, 그 누구도 그가 조정대신이자 장군이라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저 연오랑의 수발을 드는 하급관리 중 한명이라고 생각했으니, 지금 옆에서 입을 놀리는 걸 보면서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하긴 생각해보면, 알아보면 그게 더 문제인가?’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몰라 고개를 내저었다.
연오랑 자신이야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 중국도 소문이 퍼졌지만, 황보인을 비롯한 다른 연대장들, 장군들 외모와 인적사항을 산동인들이 어떻게 알겠나.
옛날이라면 관리들끼리 왔다갔다 거리면서 안면도 익히고 그랬을 테지만, 지금은 중국상인이 아는 얼굴이라고는 의주에서 일하는 관리들 밖에 없다.
조선조정의 고위 관리들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는 절대 모르지.
“그나저나 공청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안 와? 이제 슬슬 해가 저무는데.”
“상관의 창고를 구경하고 있다고 합니다. 꽤 잘 만들었다고 칭찬을 했다고 하더군요.”
“건방지게, 지가 뭔데 칭찬을 하나 마나야?”
연오랑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빈정거렸고, 황보인 또한 마찬가지로 피식 비웃음을 함께 했다.
“그런데... 그 자식은 왜 목마장을 먼저 안보고, 상관 창고를 보고 있어?”
“속셈이야 뻔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역시 건방져.”
연오랑은 태사의의 손잡이를 두들기며, 다시금 피식 비웃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