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 챕터33. 급습하다 (2)
군마는 이미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하고,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뭐 뜯어먹을 게 없을까?” 하고 어슬렁거리는 모양이다.
“대인.”
둘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연오랑과도 몇 번 안면을 튼 연태공가의 공표가 웬 노인 둘을 데려왔다.
“...?”
그가 ‘얘들은 뭔데, 무게를 잡고 있냐.’라는 매서운 눈빛을 뿌리자, 공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장민 대인과 영기옥 대인입니다.”
“오...”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감탄했고, 슬쩍 황보인을 곁눈질 하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동상인회의 회주이자 상인 파벌의 수장인 장민.
관리 파벌의 수장이자 제남의 대호족인 영기옥.
혹시나 싶어서 그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이들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찾아왔다.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
그는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켜서, 훌쩍 단상을 내려와 둘 앞에 섰다.
둘 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샜고, 얼굴엔 검버섯이 조금씩 피어나고, 며칠 굶은 사람처럼 빼빼 말라 있었다.
지팡이를 쥔 거친 손은 주름으로 가득했고, 낯빛 또한 뭘 잘못 먹은 사람마냥 살짝 시커멨다.
눈에 띄는 건, 나이에 맞지 않게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 뿐.
‘그래도 나잇값을 하겠다는 건가?’
“...”
“...”
‘쓸데없는 기 싸움은 무슨.’
연오랑은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으로 둘을 노려봤고, 결국 연오랑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노인네들의 허리가 유연해졌다.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딱딱한 허리는 땅에 닿을 정도로 깊게 굽혀졌다.
“장민이라 하옵니다. 대인.”
“영기옥이라 하옵니다. 대인.”
연오랑이 만족스럽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때, 오히려 잔칫상 아닌 잔칫상에 앉아 있던 이들이 웅성거렸다.
나름 산동의 최고 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인데, 허리를 굽히는 경우가 흔했겠는가.
다들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연오랑은 둘에게 일어서라 말하고선, 잠깐 생각에 잠겼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인네들이군. 하긴 그래서 일을 이렇게 진행한 건가?’
말 그대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데, 그럼 뭔가를 이룩하기보다는 자리보전에 힘쓸 나이가 되지 않았나.
그래서 자신들이 죽기 전에, 대업을 끝마치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
어쩌면 자식과 가문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거고.
“오느라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왜 왔는지는 알겠으나 걱정할 건 없다. 준비는 다 끝났으니까. 오히려 너희가 와서 더 잘됐군.”
“...!”
시원시원하게. 하지만 둘만 들을 수 있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하자, 둘의 쳐진 눈꺼풀이 번쩍 올라오면서 안구가 칼날처럼 빛을 뿜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거래는 거래니까. 그리고 난 거래를 잘 지키지.”
“...”
뜻 모를 말을 하면서 연오랑이 빙긋 웃자, 둘은 다시금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우린 우리 역할을 잘 할 테니까, 너희도 너희 역할을 잘해라.’라는 협박 아닌 협박임을 알아차렸기 때문.
“...”
“...”
잠깐의 침묵이 맴돌다가, 공표는 얼른 뒤쪽에 손짓하여 누군가를 불러왔다.
황보인 또래의 중년인 두 사람.
둘은 가주이자 아버지인 두 노인에게 인사하기 무섭게, 얼른 연오랑에게도 깊게 허리를 굽혔다.
“장혁진이라 하옵니다. 대인.”
“영승보라 하옵니다. 대인.”
둘 모두 산동의 고위관리인 동시에 아버지를 대신해 가문을 이끄는 이들이지만, 그래봐야 연오랑의 신분에 비교할 수 있나.
둘의 속내를 알 순 없지만, 겉으로는 극공의 예를 갖췄다.
“고개 들어라.”
“이 아이들이 저희를 대신할 겁니다. 대인.”
“좋아. 알아서 준비하고, 우리 보조만 맞추면 된다.”
연오랑은 히죽 웃었고, 멀리서 봤으면 그저 덕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예.”
“알겠습니다.”
허나 둘은 누가 들을세라,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게 답을 하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이름값 높은 장민과 영기옥이 고개를 숙이고 간 탓일까?
왠지 모르게 산동호족들의 허리는 더욱 부드러워졌고, 다들 예물 겸 뇌물을 던져놓고 눈도장을 찍고 사라졌다.
그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해도, 이곳에 머문 지 벌써 반년이 다 돼간다.
뇌물 같은 거 싫어하는 성격을 다들 들었기에, 그저 냉큼 던져주고서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것 마냥 눈을 맞추고 군말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선물공세를 받고 있자, 드디어 주인공이 등장.
호위들과 함께 나타난 배불뚝이 장년인 공청. 아니다. 장년인보다 노인에 더 가까운 이가 장내에 있는 모두를 쓱 훑어보며 걸음을 옮겼다.
시기와 질시, 분노와 억울함이 모두 섞인 눈동자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서 뿜어 나왔다.
허나 그 악한 감정을 집어먹기라도 한 듯, 노인은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며 “건방진 눈빛을 한 놈들을 기억하겠다.”라고 말하듯 사방을 둘러봤다.
바로 그때.
‘진짜 건방지네. 저놈.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정말 막가자는 건가?’
딱딱! 연오랑이 태사의의 손잡이를 가볍게 내리치자, 공청마저도 호위를 뒤로하고 조심스럽게 연오랑 앞으로 다가왔다.
공청은 비록 배불뚝이가 되었지만, 옛 명나라 장군이었던 가락이 있는지 덩치는 은근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연오랑에게 비할쏘냐.
머리 반쯤은 더 큰 연오랑은 공청을 무섭게 내려 봤고, 그의 이글이글 타오르던 눈빛은 어느덧 잠잠해지더니 결국 연오랑의 눈빛을 피하고 말았다.
이 자가 산동에서 얼마나 잘나가는지 모르겠다만... 그래봐야 지금껏 산동일통도 못했는데, 여진을 정벌한 조선의 부마에 비할 수 있나.
명나라 시절에야 자기네 한족이 잘났다고 으스대면서 조선을 깔봤겠지만, 그런 우월감이 박살나고 중화인과 오랑캐의 사정이 역전된 게 20년을 훌쩍 넘겼다.
이젠 한족임을 부끄러워하며 자정하자는 정신 나간 이들도 뜨문뜨문 나왔고, 조선은 물론이고 가깝게는 몽골 심지어 동남아 일부에서도 한족을 무시하려는 분위기가 퍼진지 오래.
그는 자존심을 세우려는 모습이 오히려 더 안쓰러워 보일 거라 생각했는지, 거꾸로 애써 호방한척 티를 내며 머리를 깊게 숙였다.
어색하면서도 요상한 분위기를 느낀 걸까?
군마를 점검하러, 또 기병 훈련을 확인하기 위해 연오랑과 몇 번 안면을 튼 인물. 공청의 아들 공윤발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도... 아니. 제 아버님입니다 대인.”
명나라가 망한지가 언젠데, 최고위직인 도지휘사니 뭐니 하는 직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딱히 대체할 만한 게 없어서, 옛 명나라 관직을 그냥 사용한다지만... 조선이 그걸 인정해 줄 리가 없는 터라 공윤발은 얼른 말을 고쳤다.
“공청이라 하옵니다. 대인.”
“그래. 들었다. 내가 기병들을 훈련시켜줬는데 어떤가. 마음에 드나?”
“물론입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오냐. 마음에 들었다면 다행이군. 우리 사정을 이해해줘서 또 고맙고.”
“...!”
그는 연오랑이 기싸움을 하지 않고, 오히려 호의적인 대답을 해서 놀란 걸까? 자기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더니, 다시금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마 예상했던 반응과 다른 반응을 보여서일 테다.
‘우리가 산동상인과 함께 했다고 해서 자신들을 견제할 거라 생각 했나 본데...?’
연오랑은 속으로 생각하며, 피식 웃고 말았다.
사실 얄팍한 수작이지만 이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고, 조선부마라면 충분히 강짜를 놓을만하지 않나. 옛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와서, 호가호위하며 건방을 떨었던 것처럼 말이다.
허나 예상외로 연오랑이 부드럽게 다가가자, 그도 표정이 풀리고 한숨 놓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군마는...?”
“아아. 자세한 이야기는 연회를 끝마치고 하지. 어차피 시간은 많지 않나.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마땅치 않군.”
연오랑은 쓱쓱 손을 내저으며, 힐끔 턱짓으로 공청 뒤편을 가리켰다.
저 뒤엔 연오랑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온 이들이 바글바글한데, 여기서 긴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되겠나.
“아... 알겠습니다. 대인.”
“시원시원하군. 다음에 봅세.”
“예.”
연오랑은 다시금 가볍게 손을 내저었고, 공청 부자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선 예물을 넘기고 공터 한편을 차지했다.
둘이 물러나자 연오랑은 조용히 물었다.
“공청이 올해 몇 살이지?”
“환갑이 된 걸로 압니다.”
“흐음...”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죽기 직전에 마무리를 하고 싶은 모양이군.’
거의 한세대 동안 대립해 왔던 사이 아닌가.
이제 정말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공청은 끝장을 보려는 거고, 장민과 영기옥 또한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윽고 인사치례도 끝나가자, 공터에 머물던 이들은 각자의 자리로 옮겨갔다.
이제부터 허리띠를 풀고 본격적으로 마셔야 하니, 알아서 끼리끼리 자리를 찾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
산동의 고위관리 및 대호족 가주들 또한 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가장 상급자인 연오랑은 느긋하게 연회장으로 향했다.
관청 뒤편에는 새로 조성한 탓에 빈틈이 많아 보이는 정원이 있었고, 꽃은 이미 져서 앙상한 가지만 나무만 남은 꽃나무들이 연회장 근처를 감싸고 있었다.
완전무장한 조선군과 공청이 데려온 가병인지 무관인지 모를 이들이 연회장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연오랑은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중국식 연회를 한 터라 디귿자 모양으로 탁자가 배치되어 있었고, 가장 고위직들만 모여 있어서 그런지... 다 합쳐도 서른이 못 되는 인원만 모여 있었다.
‘흐음... 연회자리에서조차 사이가 안 좋단 말이지.’
그나저나 서로 웃고 지낼 사이가 확실히 아닌 모양이다.
공청 파벌과 다른 파벌은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옆 사람과 가벼운 이야기만 나누고 있을 뿐... 흥겨운 분위기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어차피 오늘이면 끝인데, 신경 쓸 필요 있나. 뒤처리는 저들이 알아서 하겠지.’
“...”
연오랑이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자 모두가 일어서서 그를 맞이했고, 그는 곧장 상석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과연 상석은 상석인지... 오른쪽부터 공윤발, 공청, 장민, 영기옥만 자리하고 있었고, 뒤늦게 온 연오랑이 중앙에 앉자 다들 눈치를 보며 조용히 엉덩이를 붙였다.
“나가봐.”
“예.”
모두가 앉은 후에 황보인에게 눈치를 주자, 그는 곧장 발을 놀려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연오랑은 황보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가 확실히 밖으로 나간 후에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칙칙하군.”
“...”
“자. 한잔씩 들지.”
자리가 자리인터라, 흥을 돋궈줄 예기藝妓도 술을 따라줄 시비도 없지만... 연오랑이 먼저 콸콸 잔에 술을 따르자, 모두가 알아서 술잔을 채웠다.
“다들 채웠나?”
“예.”
조선의 주도酒道나 중국의 주도나 그리 다를 게 없는지, 호탕한 연오랑의 모습에 모두가 목청을 높였고.
“그럼...”
연오랑은 잔을 내려놓고 흡사 춤을 추듯 몸을 빙글 돌리며,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뒤이은 변고에 모두는 시간이 느려지는 기분과 함께, 연오랑의 모습이 족자에 그린 그림처럼 번져가는 걸 느꼈다.
자기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꿈결처럼 느껴진다.
쓰윽. 가볍게 몸을 비틀며 일어선 연오랑.
그의 손은 어느새 탁자 밑에 들어갔다가 부드럽게 빠져나왔고, 연회장 사방을 비추는 등잔을 따라 서늘한 빛줄기가 그의 손에 이끌려 딸려 나왔다.
“커...”
빛줄기는 물끄러미 연오랑을 올려보던 공청의 두툼한 뱃살을 스치고 지나갔고, 쩍 갈라진 옆구리와 아랫배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아나 비단옷을 붉게 물들였다.
모두가 느려진 시간 속에 파묻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지하기도 전에.
쉐엑! 공청을 스치고 간 칼날이, 화들짝 놀라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공윤발을 짓이겼다.
“컥...”
유려하게 사선을 그리며 날아간 칼날은 공윤발의 가슴마저 반대편에서 쓸고 지나갔고, 그 또한 아버지를 따라 그 자리에서 꼬꾸라져 탁자에 머리를 박으며 무너져 내렸다.
“이...!”
“무슨!”
바로 옆 맞은편에 앉아 있던 천호장들.
공청의 부하이자, 한때는 공가의 가병 지휘관이었던 이가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던 찰나.
순식간에 공청과 공윤발 부자를 무너뜨린 연오랑. 그는 어느새 탁자를 돌아 장군들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쉐엑! 아까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파공음이 날아들자, 천호장은 황급히 손을 휘둘렀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뜬금없고, 너무나 당황해서 일까.
그의 몸짓은 방어가 아니라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에 더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푸헉! 연오랑의 손에 들린 장도는 천호장의 팔뚝을 반으로 쪼개며 떨어졌고, “끄아악!” 천호장은 비명을 내지르며 팔뚝을 붙잡고 바닥을 굴렀다.
“이게... 무..!”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세 명을 빈사상태로 만들었는데, 아무리 천호장이라고 해도 대응할 수 있을까.
옆에 있던 천호장은 그저 놀라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사기접시를 자기도 모르게 집어 들었고.
콰작! 흡사 도끼질을 하듯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떨어진 장도는 사기그릇을 박살내며 장군의 어깻죽지를 파고들었다.
“헙...! 끄아...”
어찌나 강맹한 일격인지, 장도는 장군의 쇄골을 부수고도 힘이 남아서 한 치가량 살을 파고들었다.
푸헉! 연오랑이 칼을 뽑아내기 무섭게, 어깨가 잘려 한쪽 팔을 덜렁거리던 장군은 탁자를 우르르 밀어내며 그 자리에서 그대로 허물어졌다.
그 때.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걸까? 마지막 남은 장군은 황급히 앉아 있던 의자를 집어 들고 연오랑을 후려치려 했지만.
연오랑은 내려친 손을 가볍게 머리위로 올려, 칼끝이 아래를 향하게 쥐고 등을 보호했다.
캉! 퍼벅! 칼날과 의자가 부딪치며 사방으로 나뭇조각이 퍼져나갔고, 휙. 연오랑은 성큼 진각을 밟아 한칼거리로 달려들어 다시금 장도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