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22화 (222/538)

222. 챕터33. 급습하다 (4)

“...”

장민을 끝으로 모두가 손에 피를 묻히고, 자기자리로 돌아가 힘없이 앉자.

물끄러미 지켜보던 연오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은 다 끝났고... 그럼 너희만 남았군. 뭐.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흰 공청 파벌이긴 한데, 또 알게 모르게 애매했다면서? 그래서 안 죽은 거다. 무슨 말인지 알지?”

“...”

“흐헙.”

연오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지만, 그게 어째 또 무섭게 보였던 걸까? 공청 파벌 가주들은 기겁한 모습을 숨기지 못하고, 마른기침만 뱉어냈다.

“살려준다니까 그러네. 하지만 너희도 확신을 보여줘야겠지? 와라. 너희의 각오를 보여라.”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걸까?

자기가 살 길이 이것뿐이라는 걸 직감한 듯. 그들은 황급히 달려와 연오랑에게 절을 했고, 은근슬쩍 장민과 영기옥에게 감사의 눈빛을 뿌렸다.

“흐... 에잇!”

연오랑이 살길을 열어준다는 말에 너무 심취한 모양인지... 이윽고 칼부림이 다시 시작됐다.

다들 두 눈을 질끈 감고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지만, 누군가는 어색하게 기합까지 넣어가며 두 부자의 시체를 난도질하고 말았다.

공청 부자를 인주로 삼은 피의 맹약이 끝나자, 다들 파묻히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너무나도 큰일을 갑작스럽게 겪어서인지,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이 아려오는 모양이다.

짝짝! 그 모습을 보며 연오랑은 가볍게 박수를 쳐, 시선을 집중시켰다.

“밖은 정리가 됐을 거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하고, 죽을 사람은 죽어야 하겠지. 하지만 그걸 내가 정해줄 순 없는 법. 산동의 일은 산동 사람이 마무리 지어야 되겠지?”

“...”

연오랑의 말에 모두는 풀린 눈을 하고서도,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너희가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할 거고, 그럼 우리에게 넘길 대가가 더욱 커질 거다.”라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조선이 늑대를 잡아먹고 호랑이로 변할지도 모르는데, 꼬투리가 잡힐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지.

장민과 영기옥은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번쩍! 불꽃이 피어오르면서, 허물어지는 육체를 애써 일으켰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냐? 너희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라. 거래만 잘 지키면 문제는 없을 테니까. 아국은 굳이 산동을 취할 생각도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

연오랑은 이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 마냥 말을 했고, 모두는 괜히 표정이 굳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조선이 산동을 병합해서 직접 경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호족가문을 무너뜨리고 괴롭히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말을 안 들으면 괴롭히겠다는 협박이 담겨 있으니, 이들의 머릿속이 점점 실타래처럼 엉켜들어갈 수밖에.

‘이미 각오하지 않았나.’

허나 장민은 연오랑의 말에 오히려 안도했다.

계획을 짤 때부터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시원하게 말해주는 게 차라리 낫다.

‘더욱이 나라가 하는 일치고는 지저분하게 진행했는데, 조선이 이를 주도하면 명분도, 위엄도, 위신도 모두 잃게 될 게 분명. 우리가 앞장서야 문제가 없겠지.’

장민은 그런 생각을 하며 영기옥을 바라봤고, 그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중국이 쪼개지고 중화사상이 무너졌어도, 아직도 한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남아 있다.

산동이 주도해서 공청 파벌과 세력다툼을 하는 건 그러려니 하겠지만, 조선이 직접 주도하고 산동을 집어삼키려는 모습을 보이면 다른 성에서 가만히 있겠는가.

조선에 대한 경계심이 최고조로 치솟아서, 앞으로의 무역과 조선과의 선린관계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조선이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까닭이 없을 터, 지금처럼만 유지 되도 충분히 만족할 거다. 그러니 우릴 앞장세워서 실리만 챙기려는 것일 테고.’

장민과 영기옥은 눈빛으로 대화를 마쳤고, 이내 연오랑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동의를 표했다.

시간을 잠시 되돌려 보자.

연오랑이 칼춤을 추기 전에 밖으로 나갔던 황보인.

턱. 그는 연회장의 문을 닫기 무섭게 주위를 둘러봤다.

한쪽에는 공청이 데려온 호위들이 반대쪽에는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조선군이 눈에 들어왔다.

‘연회를 즐기지 못해서 불만인가 보군.’

그의 눈에 티가 날 정도로, 공청의 호위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게 보였다.

“...”

황보인이 가볍게 손짓하자 조선군들이 천천히 다가왔고, 그들 손엔 작은 술병이 들려 있었다.

“...?”

호위들은 말도 안 통하는 조선군이 다가오자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황보인은 그들을 보며 히죽 웃으며 역관에게 말했다.

“취하진 못하겠지만, 가볍게 목을 축일 정도는 될 걸세.”

“아...”

“음.”

역관이 통역하기 무섭게 호위들의 표정은 풀어졌다가, 이내 곧 어색해졌다.

이걸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헷갈렸기 때문.

“잠시만... 여쭤보고 오겠습니다.”

호위 중 한명이 그리 말하자 황보인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누가 봐도 “그럴 필요 없다.”라고 말하는 듯 했지만, 아쉽게도 전혀 아니었다.

쓱. 황보인의 손이 올라가기 무섭게 조선군은 허리춤에 끼고 있던 손도끼. 토마호크를 개량한 전투도끼를 손에 쥐었고.

신호에 맞춰 다짜고짜 호위들을 향해 휘둘렀다.

“끄억!” “컥.” “헙...!”

뜬금없는 기습에 어찌 대응할 수 있을까.

호위들은 하나같이 목이 찢어져 쓰러지거나, 머리에 구멍이 뚫려 붉은 피와 함께 허연 뇌수가 터져 나왔다.

퍼퍼퍽. 술을 주는 척 하면서 은근히 포위한 형상인 터라, 호위들은 박도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남김없이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대기해라.”

“옛!”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고 가볍게 얼굴을 찡그린 황보인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르는 훈련대원과 함께 도착한 곳은 관청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노대露臺.

밖을 볼 수 있게 확 트이고, 처마 밖으로 살짝 삐져나온 곳이 있었는데. 그곳엔 이미 완전무장한 조선군이 대기하고 있었다.

“신호를 보내라.”

“옛!”

대답과 동시에, 화포병들은 가볍게 손을 놀려 화약에 불을 붙였다.

이윽고 “파파박!” 요란한 굉음과 함께 불꽃이 밤하늘을 뚫고 피어올랐다.

이 시대 중국인들도 폭죽을 엄청 좋아했고, 또 애용하지 않았나. 이는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화약이 아까워서 폭죽놀이를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뿐, 폭죽을 다루는 것엔 일가견이 있었지.

이런 거창한 행사에 폭죽놀이가 빠지면 오히려 심심했을 터, 밤하늘을 붉고 노랗게 물들이는 불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와아!”

“저기 봐!”

아니나 다를까. 상가와 객점의 노대에서 술을 마시던 이들은 뜬금없이 터진 불꽃놀이에 환호를 내질렀다.

“잘 되려나 모르겠군.”

“대감 실력을 모르나?”

완전무장을 갖추고 말 위에 올라 타 있던 김효성. 그는 실없는 소리를 하는 최윤덕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조선에서 연오랑보다 실력이 좋은 이를 찾을 수 없는데, 그를 걱정하는 게 말이 되나.

허나 최윤덕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대감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 말일세.”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은 건가?”

“뭐... 그런 고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흐응.”

김효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최윤덕의 의견에 동의하진 않았다.

이번 작전은 청도포구를 탐낼 때부터 계획된 일이고, 더 깊게는 조선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닦는. 첫 번째 토대를 쌓는 일이니까.

다만 조선이 지금 기세로 계속 뻗어나가길 바라는 이들과 일단은 조선 내지와 북방에 더 집중하자는 이들이 대립했는데... 김효성은 전자에, 최윤덕은 후자에 위치해 있었다.

“상왕전하와 전하께서 승인하셨지 않나.”

“아네. 그냥 그렇다는 거지.”

김효성은 전가의 보도를 꺼내들었고, 최윤덕은 멋쩍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신료들이 의견 통일을 못할 때는, 언제나 태종과 세종의 의중에 따라 결정되지 않았나.

두 왕조차 조선의 위신을 떨어뜨릴 위험마저 감수했으니, 더 이상 왈가불가할 필요가 없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하나?”

“별 거 아닐세.”

“흐음...”

뒤에서 지켜보던 이순몽과 유은지가 슬그머니 눈을 흘기며,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꼭 “니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라고 눈으로 말하는 듯 했다.

“수상한데...”

“그냥 작전이 잘 먹힐까. 그걸 말하고 있었네.”

“흐음. 아닌 거 같은데?”

이순몽은 옆에 있던 다른 이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날렸고, 한자리에 모여 있던 연대장들은 피식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순몽과 유은지도 나이를 먹으면서, 또 빡빡한 신군율을 따르는 연대장으로 오래 활동하면서 성깔이 많이 죽었지만... 철부지 같은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으니까.

“걱정할 게 있겠나.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도 오랜만인데 말일세.”

“맞습니다.”

“예. 그러합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가장 연장자인 전흥의 말에 모두는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착호군은 조선육군으로 체질전환을 하며 덩치를 불렸고, 중국원정을 떠났던 착호군 1기의 연대장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가, 여진정벌 때 합류. 그 후 다시 또 흩어졌다.

이들의 전투 및 실전지휘경험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고, 이걸 널리 퍼트려 신입 착호군 및 기존 무관들을 새로이 교육시켜야 했으니까.

하지만 연오랑은 착호군 1기의 연대장들을 전부 데려왔다.

이들이야 말로 태종과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신료인 동시에, 앞으로 조선육군의 최고위 지휘관이 될 이들이니까.

다양한 전투경험치를 계속 먹여줘야, 보다 효율적이고 유연한 조직과 체계를 만들 수 있을 거다.

긴장을 풀듯. 시시덕거리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

드디어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사단장님. 신호입니다.”

“계획대로 움직인다.”

“옙!”

최윤덕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대장은 물론이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들 모두가 빠르게 발을 놀렸다.

피휘윙! 날카로운 효시가 울려 퍼지자, 어둠에 잠겨 있던 조선군 진지가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5개 연대는 어느새 말을 타고서 천천히 나아갔고, 나머지 반은 도보로 이동해 청도 중심부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청도의 성벽을 짓기 위해 비워둔 공터에는 화롯불이 빼곡하게 박혀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는데, 연대기병은 검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청도포구를 포위했다.

두두두. 뜬금없이 들려오는 말발굽소리에 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대로를 따라 중대별로 쪼개진 조선군은 밀물처럼 쏟아져 청도 중심부를 집어삼켰다.

“...!?”

“무슨...?”

2,3층 객잔의 노대에 앉아 술을 마시던 이들은 어둠처럼 밀려오는 검은 갑옷무리를 보며 웅성거렸지만, 조선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로의 교차로를 점거하고 소대별로 찢어져 객잔과 창고의 입구를 하나둘씩 막기 시작했다.

사이가 안 좋은 이들을 한자리에 붙여 놓으면 문제가 터지기 십상이고, 안 그래도 사고 칠 가능성이 농후한 칼잡이들이 술까지 마시면 오죽하겠나.

해서 각 파벌별로 쪼개서, 비어 있는 창고를 개방해 연회장처럼 사용 중이었는데... 이제 보니 단순히 그런 이유만 있던 게 아니었다.

조선군이 그렇게 그물처럼 촘촘한 포위망을 완성하는 동안.

“헉헉...”

산동인들이 처음 보는 생경한 모양의 조선군기. 그것도 가장 크고 시커먼 연대기 앞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이번 작전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장민의 아들 장혁진, 영기옥의 아들 영승보. 공표의 아들 공형. 연태 이가의 후계자. 이보를 비롯해서, 상인회에 속한 후계자들이 우르르 몰려온 것.

“흐흡...!?”

“으...”

다만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빠르게 시작될 걸 몰랐는지, 다들 허둥지둥하며 미욱한 모습을 보였다.

돈놀이에는 자신이 있어도, 달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창칼로 무장한 연대병들의 눈빛은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잔뜩 겁을 집어 먹은 모습이 역력했다.

그나마 최윤덕은 산동기병을 훈련시키면서 안면을 튼 터라, 후계자들은 얼른 최윤덕에게 고개를 숙이며 달라붙었다.

“장... 장군.”

“연회장에 있을 가주들에게 들었을 터, 명단은 다 추렸나?”

“그렇습니다.”

“그럼 바로 움직이지. 각자 흩어져서 따라가게.”

“예!” “예. 나리.” “예. 장군.”

후계자들은 대답조차 중구난방으로 날렸고, 최윤덕 뒤에 있던 대대장들이 연대장들에게 경례하고선 후계자들을 앞세워 대로로 나아갔다.

“흐힉!”

“뭐... 뭔데!?”

“왜 창고 문을 막고 있는 거냐!?”

오밤중에 시퍼런 예기가 살아 있는 창칼을 앞세워 조선군이 등장했는데, 겁을 집어먹지 않은 이가 있을까.

사방에서 겁먹은 목소리, 술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고함소리, 뭔가 사단이 난 걸 직감하고 발악하듯 외치는 비명소리가 밤하늘로 채우며 떠올랐다.

“여기부터 청주부에 속한 가문이 머무는 곳이오.”

“...”

역관이 대대장의 말을 바꿔주자, 공형은 침을 꿀꺽 삼키며 친우들과 눈을 맞췄다.

이제 자신의 말 한마디로 수십, 수백명의 목숨이 사라질 터,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이미 열려 있는 문으로 공형이 빼꼼 고개를 내밀자, 박도를 움켜쥐고 대치하고 있는 칼잡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거하기 술을 마신 탓인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자기 손으로 뺨을 때려가며 정신을 깨우려는 이도, 일진이 안 좋다는 걸 직감한 듯 관자노리를 따라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공형을 알아본 걸까? 가병에 둘러싸여 있던 누군가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네놈들 짓이구나! 더러운 수작을 부렸어! 감히 조선을 끌어들이다니!”

“...”

굳이 통역을 하지 않아도 뭐라고 하는 지 알아볼 수 있는 바, 대대장은 무심한 눈으로 공형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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