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챕터33. 급습하다 (5)
“누군지 알겠나?”
“일조 장가. 일조 허가의 식솔이... 맞습니다.”
공형은 떠듬거리며 말을 했고,
“그럼 죽여도 되겠군?”
“...”
곧 이어진 대대장의 물음에 차마 답은 못하고, 그저 고개만 푹 숙이고 말았다.
장가와 허가의 식솔은 연회장에서 연오랑에게 죽은 천호장의 가문인 바. 절대 회유가 안 될 가문으로 이미 찍혀 있었다.
“네... 네놈!”
“우... 우릴 어. 어찌할 거냐!”
장가와 허가의 후계자가 그리 목청을 높이자, 공형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조선의 부마가 있는 자리에서, 너희 가문이 우릴 해하려 했다! 그 대가를 치르는 거다!”
“뭔...!?”
공형의 대꾸에 가병들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조선의 부마가 있는 자리에서 칼부림을 왜 부려? 말이 되나?” “그게 아니고서야 조선군이 갑자기 왜 이러겠나?” “속지 마라. 거짓말이다.”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려봐야, 날파리 날개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적이 감돌고 있는 상황.
몇몇이 떠드는 소리는 모든 이의 귀를 파고들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허가의 후계자가 얼른 목청을 높였다.
“개소리 집어치워라! 우릴 죽이려고 수작을 부린 걸 모를 줄 아느냐!”
그는 그렇게 소리치며 빠져나갈 곳이 없는지 두리번거렸고, 공형을 비롯한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얼굴이 시뻘게졌다. 얄팍한 수작이지만, 참으로 무서운 수작이었으니까.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대놓고 하는 거짓말이라도 모두가 입을 맞추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진실로 믿게 되는 법.
이번 사건은 공청 파벌이 먼저 칼을 꺼내들었고, 그걸 조선이 징치하기 위해 반격한 것으로 소문이 퍼져나갈 거다.
이젠 장가와 허가의 식솔들뿐만 아니라, 호위들마저도 쌍욕을 내뱉으며 시끄럽게 굴기 시작하자.
“죽여도 되는지 물었소.”
대대장은 다시금 무심한 말투로 결단을 촉구했다.
“예... 가병은... 처리해도 좋습니다.”
“좋군. 발사!”
공형이 힘겹게 답한 게 무색할 정도로, 대대장은 시큰둥하게 답을 하고선 목청을 높였다.
장도와 쌍검, 전투도끼를 든 연대병 뒤에서, 화살비가 쏟아져 나왔다.
박도를 든 가병들은 여차하면 칼부림을 부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화살이 날아올 줄 짐작이나 했을까.
문밖 어둠에 파묻혀 있던 곳에서 화살이 쏟아져 들어오자, “흐억!” “끄억.” “컥...” 하나같이 고슴도치로 변해 우수수 쓰러졌다.
맨몸으로 보호를 해도 한계가 있던 탓인지, 다섯 차례에 걸친 일제사격을 얻어맞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장가의 후계자조차 어느새 피웅덩이에 쓰러져 있었다.
“확인해라.”
“옙!”
조선군은 성큼성큼 다가가 쓰러진 시체에 친절하게 칼을 박아 확인사살을 했고, 이윽고 이미 죽은 허가와 반쯤 죽은 장가의 후계자들을 끌고 왔다.
“맞나?”
“예...”
“그럼 데려가지.”
대대장이 가볍게 손짓하자 몇몇이 후계자를 챙겼고, 나머지 연대병들은 창고에 남은 가병들을 확인사살하고 화살을 회수해 창고를 나섰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작업이 청도의 모든 창고와 객잔에서 벌어졌다.
유장은 지금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힘겨운 훈련을 끝마치고 드디어 몸 편히 쉬면서, 다른 이들처럼 오랜만에 술을 마시며 흥겹게 놀았다.
비록 흥을 돋궈줄 예기도 시중을 들어줄 시비도 없지만, 자신들이 언제 그렇게 고급지게 놀아본 적이 있던가.
그저 한상 가득 차려진 음식과 끝없는 술독이면, 평생 동안 해 본적 없는 사치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헌데 그렇게 잘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조선군이 몰려와 그들을 끌어내고 분리 격리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근 반년동안 그들을 지도해줬던 교관들이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당황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
죽고 사는 순간이 찾아왔는데 술기운이 남아날 리가 있나. 몸을 달구던 취기는 어느새 사라져, 오히려 오한이 찾아왔다.
“...”
“...”
하급무관 중 최선임자인 유장은 앞에 앉아 있는 진강을 놓고, 머리를 감싸고 생각에 잠겼다.
‘음...’
손을 묶어 두지도 않고 풀어준 걸 보면, 딴생각도 해볼 법 하지만... 이내 탈출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정확히 알지 못해도 분명 조선군이 떼거리로 포위하고 있을 테니까.
‘못 보던 사람이 잔뜩 이다. 눈으로만 본 것도 삼백명을 넘어가지 않나.’
기병지휘관이 되기 위해서 파견된 백여명의 하급지휘관을 정리하기 위해 조선군이 나섰다면, 청도에는 더 많은 조선군이 튀어나왔을 거다.
“조선이... 산동을 노리는 것이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유장은 끝내 그렇게 묻고 말았다.
진강은 대답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고, 유장은 왠지 모를 배신감에 이를 갈았다.
“우릴 이렇게 붙잡은 걸 보면, 분명 연회에서도 사단이 났을 터... 유학을 따르는 조선이 이런 치졸한 짓을 벌일 줄은 몰랐소.”
“그러는 명은 유학을 잘 따라서 운석을 맞고 망했나?”
“...”
쏘아붙이듯 말하는 진강을 보며, 유장은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이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진강은 그런 유장을 보며 피식 웃고선 말을 덧붙였다.
“아국이 산동을 노려서 뭐하나.”
“...?”
“그냥 지저분한 일에 끼어든 거지. 저들이 왜 죽었겠나.”
“...!”
분산 격리를 했다지만 딱히 감옥도 없는 터라, 이들은 그저 조선군에게 포위되어 드문드문 뭉쳐 있는 상태였다.
그런 터라, 환하게 피워둔 화롯불 저편에서 이런저런 말도 없이 다짜고짜 참수 당한 지휘관들을 볼 수 있었지.
그리고 이내 곧 알아차렸다.
죽은 이들은 하나같이 공청 파벌의 핵심 인물이자, 가문의 혈족이라는 걸.
“청도에 온 저들 가문은 다 정리 됐다. 죽을 자리를 제 발로 찾아온 꼴이 됐지.”
“...”
“이제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알겠나?”
“...”
유장은 딱히 답하지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자네를 비롯해서 다른 지휘관들이, 공청에게 딱히 충성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경험담이오?”
아직도 분을 풀지 못한 유장이 으르렁거리자, 진강은 씁쓸한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오래전 일이지만. 북평부의 기병장군 진강은 산동에 매우 위협적인 인물이었고, 한때는 제남을 위협한 적도 있었다.
근 십년이 지난 지금은 “아! 그때 그 장군!”하면서 이야깃거리로만 회자될 뿐이지만, 산동군병들 중에선 아직도 진강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기병장군을 꿈꾸는 유장도 그들 중 하나였지.
“뭐... 경험담이라면 경험담이 맞지.”
“...”
“나는 돈도 없고, 가문도 없는 한미한 출신이었고, 출세를 위해선 줄을 잘 타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를 장기 말로 써먹다가 팽해버렸지만... 어찌됐건 이렇게 살아남았지.”
“...”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속을 꿰뚫어 보는 눈빛에, 유장은 왠지 모를 울화가 피어올랐다.
마치 자신의 인생선배마냥 똑같은 길을 걸었던 진강이 몰락했다가 다시 일어선 걸 보고서, 뭔가 가슴속이 간질간질했기 때문.
“나보고 조선에 귀화라도 하라는 거요?”
“뭐? 하하.”
진강은 유장을 보며 피식 웃고선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했잖나. 아국은 산동 내부의 지저분한 싸움에 끼어든 게 전부라고, 그대가 갈아타야할 줄은 공청이 아니라 장민이나 영기옥이 되겠지.”
“...!”
“뭐 어쩌겠나. 자네를 비롯해서 저치들 모두 같은 처지 아닌가?”
“...”
“가진 것도 없고, 가문도 없고, 있는 거라고는 몸뚱이 하나. 그거 하나 믿고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군문에 들어온 것 아닌가? 그럼 공청의 부하든, 장민이나 영기옥 부하든, 어차피 산동군 인건 마찬가지 아닌가?”
“...”
번민하는 가슴에 못을 때려 박는 말에, 유장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넘어오겠군.’
반대로 진강은 유장의 반응을 보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명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룩하려 했지만, 중국은 커도 너무 크고, 사람도 너무 많았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앙에서 관리를 내려 보내도, 지방의 하급관직은 지방호족들이 꽉 잡고 있던 형태.
다만 중앙의 힘이 워낙 막강해서, 지방관리들이 대놓고 딴 짓하지 못하고 묶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중앙의 시선이 지방의 모든 곳에 닿는 건 아니었지.
이런 상황에서 명이 망하고 중앙이 없어졌다.
지방호족가문 출신들이 지방관직을 하나둘씩 직접 차지했고, 이게 한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천호장, 백호장들 또한 어지간하면 전부 호족가문 출신인터라 하나의 지휘체계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았다.
외부의 공격에는 뭉쳐서 대응할 순 있어도, 만약 내부로 무력을 행사하려하면 난장판이 나기 일 수였던 것.
이걸 깨부수려면 외부에서 강력한 무력을 가진 이가 비집고 들어와야 했고, 공청이 바로 이런 케이스였다.
시간이 흐르자 또 문제가 터졌다.
명도 조선처럼 모병과 징병이 혼합된 형태였고 군역이 존재했다.
헌데 나라가 없는데. 대체 왜, 무슨 의무로 군역을 해야 할까. 이걸 쉽게 받아들일 백성이 누가 있을까.
호족의 가병이나 소작인이 되면 군역을 면피할 수 있고, 하다못해 돈이라도 조금 찔러주면 얼마든지 군역에서 빠질 수 있었다.
공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병사들에게 직접 땅을 나눠주는 방식을 취했지만... 그 세월이 벌써 이십년이 넘지 않았나.
애초에 공청에게 딱히 충성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쩌다보니 산동에 남게 된 병사들 입장에선 운 좋게 땅만 얻으면 그만이지, 굳이 군병으로 계속 남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그 결과. 정예병은 거의 공청 휘하 가문의 사병과 흡사했고, 나머지 징집병은 정말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서 군문에 들어온 경우가 대다수였지.
한미한 이들 중에서, 출세를 바라는 이들 또한 사정이 막막했다.
애초에 공부는 돈과 시간이 없으면, 일반 백성들은 할 수가 없는 거다.
여기에 이젠 과거조차 치르지 않으니 문관직에 오르는 건, 호족가문의 연줄이 없는 이상 불가능에 가까웠지.
그나마 트여 있는 길은 군병을 거쳐 무관이 되는 건데...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결국 또 연줄을 타야했다.
이러니 지금 중국의 군대는 이게 사병조직 연합체인지, 아니면 각 성을 중심으로 뭉쳐 있으나 지휘권이 난잡한 지방군인지... 정체성을 찾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너희가 필요한 거고.’
진강은 아직도 침묵에 잠겨 있는 유장을 보며, 다시금 쓴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공청은 산동기병을 자신의 친위병이자 사병으로 만들기 위해서, 각 천호소, 백호소에서 능력 있는 이들을 뽑아 조선에 맡겼다.
하지만 유장을 비롯한 하급 지휘관들이 공청에게 목숨을 걸만큼 충성했을까? 그럴 리가 있나.
애초에 위로 올라가려고 줄을 선택한 것뿐이니, 줄이 끊어졌으면 다른 줄을 잡아야지.
“이야기는 다 된 거요?”
“물론.”
드디어 넘어왔는지, 유장은 더 이상 과거를 묻지 않고 미래를 물었다.
“다만 너희가 그만큼 충성을 보여야겠지.”
“...?”
“새벽 동이 트면, 조선군 일만기병이 움직여 산동을 쓸어낼 거다.”
“허헙!”
유장은 조선군이 일만명이나 된다는 말에 기겁했고, 그게 전부다 기병이라는 말에 한번 더 기겁했다.
“아...”
동시에 왜 이렇게 군마를 많이 끌고 왔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이 전력이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지도 모를 산동의 천호소와 백호소를 깨부수는 건 일도 아니고, 공청 파벌의 가문을 무너뜨리는 것도 일도 아니겠지.”
“그게 쉽게 되겠소?”
“이미 머리는 다 떨어졌고, 파발이 각 도시로 출발했다. 장민과 영기옥 파벌은 가병을 미리 준비해 놨으니, 제남이든 어디든. 오늘 밤은 산동 전체가 피냄새에 절여지겠지.”
“끄응...”
지금껏 파벌끼리 생사결단을 내지 않은 건, 양패구상을 우려한 건데... 지금은 조선군이 있다.
이젠 칼을 빼들어도 후환을 감당할 수 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천호소와 백호소를 회유하는 거군.”
“그렇지. 회유가 되지 않을 이들은 쓸어버릴 거지만, 모든 군병이 공청에게 충성을 바치는 건 아니지 않나. 어차피 군문에 들어온 이들은 다 같은 산동인인데, 파벌이 다른 게 중요하겠나?”
“...”
유장은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의 고민이 바로 이거였다.
군권을 가진 공청을 날려버리면서, 동시에 산동의 군력은 상하지 않아야 했던 것.
그래야 지금의 분열된 상황이 유지될 테니까.
위험천만한 치졸한 수를 쓰고, 하급지휘관을 회유해 전력을 보존하려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조선이 다른 성에서 산동을 넘보지 못하게 잠시동안 방패가 된다... 이 말이군.”
“방패가 될지 창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
“...?”
진강의 의미심장한 말에 유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묻고 말았다.
“헌데 이상한 게 있소.”
“뭔가?”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할 거였다면, 굳이 조선군을 이렇게나 많이 데려올 이유가 있소?”
아무리 공청의 눈을 피하려고 했다지만, 굳이 일만이 넘는 기병을 데려올 필요가 있었을까?
어차피 머리만 쳐내고 몸통을 흡수하려 했다면, 더 적은 수로도 얼마든지 가능 했을 텐데... 굳이 위험을 자처할 필요가 있었을까.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 않겠나?”
“...!”
또 뭔가 있다 싶어서, 유장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
산동에서 피의 연회가 펼쳐지고, 그 결과가 나올 무렵.
쏴아아. 철퍽. 시원한 파도가 밀려와 때릴 때마다, 위풍당당하게 파도의 목을 자르며 나아가는 함선이 승리의 고함을 내질렀다.
“이제 곧 발해만에 진입합니다.”
“신호를 보내게.”
“옙!”
함장의 말에, 항해사는 얼른 선미로 달려갔다.
이미 활활 타고 있던 작은 화로에 달라붙어, 뒤가 트여 있는 뚜껑을 연신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