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챕터33. 급습하다 (6)
다만 묘하게 박자감이 있는 터라, 망망대해 어스름한 새벽하늘에 올라 홀로 연주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내 곧 가락을 맞추려는 듯. 제일 선두에 선 함선에서 불빛신호가 터지기 무섭게, 어둠을 깨부수며 점점이 불빛이 피어나 선을 그렸다.
함선의 꼬리에 피어난 불꽃은 총 13개.
조선해군 신형전함 13척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바다로 몸을 밀어 넣고 있었다.
점등조차 하지 않아 함선은 흡사 관처럼 고요했고, 타륜 근처에서 어둠 저편을 바라보던 몇몇만 잠에서 깨어 있었다.
“고요하군.”
“예. 확실히 동해보다 조용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겠지.”
2함대 사령관 박홍신은 함장 이사검의 말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해와 동해의 풍랑과 파도가 차원이 다른 건, 물질을 하는 해군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택에 위치한 2함대로 오긴 했지만, 선원 대다수는 원산에서 머물며 동해에서 훈련받던 이들.
이 잔잔한 바다는 뭍에 있는 거랑 큰 차이도 없을 거다.
“병사들은 어떤가? 문제 있나?”
혹시나 싶어서 박홍신이 되묻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파도가 잔잔해서, 다들 요람에 든 것 마냥 잘 자고 있습니다. 흐흐. 생각해보니 그물침대는 요람하고 비슷하군요.”
“큭.”
피식 웃으며 답하는 이사검을 보며, 박홍신 또한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요람도 그렇고 그물침대도 그렇고... 하여간 대감은 별걸 다 만드는 군.’
불연 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
이 시기 조선에는 신생아를 위한 요람이 딱히 정해진 게 없었는데, 연오랑은 요상하게 생긴 신생아 전용 침대와 흔들의자를 만들어 팔았다.
만드는 게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서, 금세 돈 냄새를 맡은 공작기업이 달라붙어 조선 전역에서 생산했지.
미래엔 해먹이라 불릴 그물침대 또한 마찬가지.
지금껏 조선은 배를 오래 타는 경우가 조운을 옮기는 것 외에는 없었으니, 선원들의 함선생활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대충 곡물더미에 파묻혀서 자면 그만이고, 식사나 식수 등은 포구에 정박할 때마다 구하면 그만이었다.
허나 신형전함의 등장은 지금껏 없었던 장기간의 함선생활이 필수였기에, 그물침대를 비롯한 온갖 신문물이 잔뜩 적용되어 있었지.
‘불편하긴 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면 나름 편한 편이니까.’
박홍신은 그물침대를 처음 접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가볍게 옛 추억을 더듬었다.
이렇게 덜렁거리는 천조가리 위에서 어떻게 잠을 자나 싶었는데... 파도에 출렁거리는 배 위에선, 오히려 그물침대가 더 편할 줄 상상이나 했을까.
“바다에서 생활하는 건 둘째 치고... 처음 겪는 실전인데, 어떨 것 같나?”
“글쎄요. 뭐. 실패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만, 얼마나 제대로 힘을 쓸지는... 확신을 못하겠습니다.”
“흐음.”
이미 출정할 때부터 왈가불가 말이 많았던 사안인 터라, 박홍신 또한 동의하며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범선과 노선은 운용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기존의 맹선은 솔직히 구조가 단순하고 크기가 작아서, 대충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여 붙이면 그만이었다.
허나 신형전함은 중앙 돛대만 3개에, 선수에 사선으로 달린 돛대 하나. 돛대에 달린 돛만 해도 10개를 넘어가니...
이걸 한마음 한뜻이 되어 움직이려면 수십개의 밧줄과 도르래를 동시에 움직여야 했다.
선원들에게 지급된 가죽장갑이 다 헤질 정도로 밧줄을 당기고 풀기를 반복해야 했으니, 그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지.
예전 기선군을 생각하고 해군갑사로 지원한 이들은, 다시 물리지도 못하고 자신의 선택을 매일 같이 후회해야 했을 거다.
이게 끝일 리가 있나.
범선을 움직이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고, 전투도끼와 장창, 활을 다루는 무기술도 익혀야 했고, 추가로 화포병과 같은 특기가 있는 이들은 특기교육을 받아야 했다.
지휘관급에 해당하는 항해사, 화포장등은 해군훈련원에서 추가로 지휘관 교육을 또 받아야 했으니...
원래 수군에 잔뼈가 굵었던 박홍신이나 이사검마저도, 코피를 흘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확신을 못하겠단 말이지.’
이런 개고생을 했음에도, 그 세월이 2년 밖에 되지 않은 터라... 솔직히 신형전함의 성능을 완벽하게 뽑아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솔직히 함포사격이 얼마나 통할지는 정말 모르겠더군요.”
“음.”
이사검 또한 같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살짝 기가 질린 표정을 하고선 우려를 표했다.
지금의 조선이 아무리 화약 생산량과 보존기간이 늘어났어도, 실탄사격훈련을 마구 할 정도로 남아나는 건 아니었다.
특히나 신형전함에는 공성포보단 작지만 야전화포보다 큰 함포가 실려 있었고, 양 측면에 10문씩. 무려 20문이나 장착되어 있다.
함선 하나가 일제사격을 할 때마다, 기병연대에 배속된 1개 포대가 동시에 쏴대는 것보다 더 많은 화약을 소모했으니... 실탄사격훈련은 한 달에 한 번하면 많이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대감과 전하께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고, 이번 기회를 통해서 허실을 알아보라 하지 않았나. 이번 작전은 실전인 동시에 훈련인 거지.”
“말이야 그렇다지만... 너무 허탈한 결과가 나오면, 그것도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이사검의 우려가 뭔지 아는 터라, 박홍신은 그저 주먹을 꽉 쥐고 기합을 넣고 말았다.
지금의 조선이 성세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해군이 필요한 건 모든 신료들이 동의하고 있다.
허나 그렇다 쳐도 해군이 소모하는 군비는 많아도 너무 많다.
기존의 대맹선보다 두,세배는 더 큰 신형전함을, 그것도 함포를 잔뜩 싣고 다니는 화력전함을 운용하자, 군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기 때문.
개혁이 진행되면서 온갖 사건을 다 겪은 호조마저도 기겁할 정도였으니... 만약 들어가는 비용만큼 효과가 없다면, 해군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이 쏟아질 게 분명한 일.
이들은 어떻게든 눈부신 성과를 도출해야만 했다.
“뭐... 함포가 없어도 승리할 테니,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북평부의 함선이라 봐야 무역선과 크게 다를 것도 없으니, 달라붙으면 상대나 되겠습니까.”
“...”
이사검은 자신만만한 의견을 숨기지 않았고, 박홍신 또한 이미 경험했던 터라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함대장님.”
“뭔가.”
“정작 일은 산동에서 벌어지는데, 굳이 저희가 북평부를 공략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명분이 필요한 일은 아니지 않나.”
“그야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이사검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말을 흐리고 말았다.
요동 및 산동의 지원을 받아 시작한 일이라지만, 어찌됐건 조선이 먼저 다짜고짜 북평부를 두들겨 팼다.
그것도 거용관이라는 중화문명의 방패를 박살내서, 북평부는 아직도 그 충격과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고 있지.
이러니 사이가 좋을 리가 없고, 이번에 한 대 더 후려친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
“힘이 줄었다곤 하나, 여전히 북평부는 위협적인 상대 아닌가.”
“예.”
“요동, 산동, 북원잔당, 올량합 3위까지. 조선과 붙어 있는 모든 세력은 우리가 북평부를 치는 걸 좋아하면 좋아했지, 싫어하진 않을 걸세.”
“음...”
그나마 악감정을 가질 곳이라면 북평부와 사이가 좋은 산서뿐인데... 산서는 북원잔당에게 서쪽과 북쪽에서 두들겨 맞고 있는 상황.
나머지 중국내지나 강남지방에선, 조선이 북평부를 건들든 말든 자신에게 피해만 안 오면 신경 쓰지 않을 거다.
“그거야 뭐...”
허나 이사검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다 아는 사실 말고, 더 있지 않습니까.”라고 은근한 눈빛을 뿌려댔다.
무려 함장인데, 이번 작전의 개요를 모를 리가 있나.
평택과 청도를 오가며, 전함을 한 척씩 추가하면서 대규모 수송 및 서해에서의 항해를 경험했다.
이제 남은 건 실전인데, 정작 실전을 치를 상대가 없다.
찾아보면 기껏해야 해적선이나 무역선을 터는 건데, 함대 전체를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한 척만 돌아다녀도 어지간한 해적선 여러척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거다.
그나마 함대 다운 함대를 찾으면 요동과 북평부만 존재했고, 요동을 공격할 순 없으니 남는 건 북평부 밖에 없지.
“그럼에도 굳이 우리가 북평부를 쳐야할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군?”
“예...”
“자네 말고 다른 함장들도 마찬가지일거고... 자네들끼리 머리를 굴려봤을 테니 말해보게. 뭔 것 같은가?”
“...”
‘확실히... 예전의 나를 비롯해서 다른 이들보다, 요새 치고 올라오는 녀석들이 시야가 넓단 말이지.’
박홍신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 이사검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옛 기억을 더듬었다.
착호군이 만들어질 때부터 조선군의 개혁은 시작됐고, 조선군 지휘관들은 야전지휘관으로 변모해야하는 압박을 받았다.
이 일을 진두지휘한 건 태종이지만, 태종의 뒤에는 대마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미친놈 연오랑이 있었으니까.
오래전에 대마도 정벌을 지휘했던 이종무, 유습, 박실, 박초 등과 같은 인물들이 다 어디로 갔겠는가.
자기보신에 능한 대신들답게 무관과 문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찾아오자. 연오랑이 바꿔나갈 조선군이 심상치 않을 걸 직감하고서, 죄다 문관직으로 옮겨갔다.
달리 말하면 지금 조선군 지휘관들은 어지러운 정치싸움보다는 단순명쾌한 장군을 희망했던 이들만 남았다는 뜻이고, 더불어 연령대조차 엄청나게 내려왔다.
부하들과 같이 말을 달리고 야지에서 생활하는 건, 나이 먹은 노장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연오랑이 내세운 생경하고 복잡한 방식의 연대병 운용법은, 기존의 방식에 익숙한 머리 굳은 이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
최윤덕, 이순몽, 김효성과 같은 인물들이, 원래 역사보다 십여년 빠르게 군의 중추에 자리 잡은 건.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고위직조차 물갈이가 됐는데, 하위직은 어떻겠는가.
착호군이 출범한지 벌써 7년차.
기존 무관들은 좋든 싫든 연오랑의 방식을 따라야 했고, 어느덧 몸에 익숙해지면서 버티지 못한 이들은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훈련원이 창설된 후에는 더욱 심해졌지.
전례 없던 지휘관 교육과정이 생겨났고, 여기에 군부가 분리되면서 정치나 연줄이 끼어들지 못하는 실력위주의 진급심사가 더해졌다.
조선의 강역이 너무 넓어지자, 단순히 전술,전략,지휘를 넘어서 국제관계를 어느 정도 읽을 줄 알아야 했고.
이는 조선 자주화와 맞물려, 무관들의 세계관과 인식의 한계가 넓어지게 된 것.
본래 수군 지휘관으로서 잔뼈가 굵었던 이사검조차도, 그 전에는 도적떼와 다름없는 자잘한 왜구의 침입을 어떻게 막을까 고민한 게 전부였는데...
지금은 조선을 넘어서 중국의 미묘한 정세를 읽어내고,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준까지 성장하지 않았나.
자신의 후임이 무럭무럭 성장한 걸 보자, 박홍신 입장에선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질 수밖에.
“아무래도 산동이 약해지면 북평부가 수작을 부릴까봐 그런 것이겠지요? 북평부-요동-산동은 한 덩어리나 다름없으니, 북평부를 약화시키면 둘 모두가 편안해지지 않겠습니까.”
“맞네.”
“...”
헌데 대답이 시원치 않자 이사검은 더 말해달라는 듯 조르는 눈빛을 뿌렸으나, 박홍신은 그저 히죽 웃고 말았다.
“고민해보게. 내가 알려주면 재미가 없지 않나. 답을 알아내야 자네들도 머리가 트이겠지.”
“...”
대답을 해주기 싫은지 실없는 소리만 하고 있자, 이사검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느새 동이 트기 시작했다.
어둠에 감춰졌던 민낯이 서서히 드러나고, 불그스름한 서광과 함께 저 멀리 지평선이 아른 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다 왔군?”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용케 요동수군에게 들키지 않은 모양입니다.”
“밤이니까.”
박홍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요동반도 끝과 산동반도 끝은 고작해야 100키로미터 밖에 안 되지만, 반대로 말하면 무려 100키로미터다.
이 사이를 지나가면 눈으로 보기도 쉽지 않은데, 아무리 달빛이 밝아도 밤에는 절대 못 알아챈다.
“그래도 요동수군이 순찰을 돌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천진 근처까지 올까. 설령 온다고 한들 상관있겠나. 우리를 본다면 오히려 좋아 하겠지.”
“예.”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자, 이리저리 함을 살피고 있던 당직사관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병사들을 깨울까요?”
“그러게.”
“옛!”
당직사관은 재깍 경례를 하고선, 작은 종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땡땡땡. 날카로우면서 신경질적인 쇳소리가 들려오자, 잠들어 있던 함선전체가 몸을 비틀며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저 앞에서 앞서 나가던 함선부터, 지휘함 너머 저 뒤에 있던 함선까지.
모든 함선에서 종이 울리자 메아리처럼 종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선창에서 취침을 하고 있던 선원들이 하나둘씩 갑판으로 올라오고, 잠을 깨우려는 듯 선미루 아래에 위치한 조리실에서 맛있는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
선원들은 하품을 하며 갑판을 빼곡하게 채웠고, 어지럽게 널려 있는 갑판 구조물을 피해 오와열을 얼추 맞춰 줄을 섰다.
특별한 일이 있을 리가 없으니 점호는 문제없이 끝났고, 선원들은 곧장 가볍게 도수체조를 하며 몸을 풀었다.
“충성. 총원 252명. 이상 무.”
“바로 취식을 하도록.”
“옙!”
이사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원들은 하나둘씩 선실로 내려가 각자 야전식기를 들고 나왔다.
나름 계급별로 순번이 있는지 혼잡스러우면서도 질서 있게 조리실을 들락거렸고, 그들 손에 들린 야전식기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충성.”
“든든히 넣었겠지?”
“예. 오늘만 지나면 청도로 갈 거라서, 조리장이 아낌없이 넣었습니다.”
부관병은 박홍신과 이사검의 야전식기를 건네주며 히죽 웃었다.
이사검은 확인을 하려는 듯, 포크숟가락을 닮은 야전숟가락으로 식기를 뒤적거려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