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챕터33. 급습하다 (8)
불화살만 쏴댄다고 해서, 배가 불 탈거라고 생각하면 천만의 말씀.
말 그대로 미리미리 기름칠을 잔뜩 해둬야 불에 타기 마련이고, 조선해군은 대형쇠뇌를 통해 기름항아리를 날려 보내는 전법을 연구했다.
유효사거리가 고작해야 50보정도 밖에 안 되지만, 어차피 해전에선 그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화살비를 날려대지 않나.
이 정도면 충분히 제값을 하고도 남았다.
적함에 완전히 불이 붙자, 검은 연기가 미친 듯이 피어오르기 시작.
이 정도면 천진에서 충분히 보이지 않을까? 기함에서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곧장 명령이 날아왔다.
“속도를 줄이고 변침하라는 명령입니다. 기함이 선두에 섭니다.”
“알았다!”
“3,4,5번 돛을 내리고 속도를 줄여라!”
견시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항해사가 목청을 높였고, 윤세진의 전함은 옆으로 삐져나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최학!최학! 파도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중앙에 있던 기함이 윤세진의 전함을 스치고 지나갔다.
속도를 맞추기 위해서, 돛줄과 활차 도르래를 미친 듯이 돌리고 있는 선원들은 죽을상을 하고 있었지만.
“오!” “와!”
활시위를 점검하며, 혹여나 불이 옮겨 붙지 않게 불씨를 정리하고 있던 선원들은 감탄을 내뱉었다.
흡사 마술처럼 함대의 진영이 허물어졌다가 이어 붙고 있었으니까.
하늘 위에 떠서 보이지 않는 조율사의 줄에 이끌리듯. 뱀처럼 길게 늘어져서 오던 함대진영은 갑자기 확 부풀어 퍼졌고, 그 속에서 기함이 불쑥 튀어나와 앞장선 것.
그리곤 다시 하나로 합쳐지자 어미를 따르는 오리새끼마냥, 기함의 뒤로 전함들이 줄줄이 이어 붙었다.
윤세진의 전함은 꽁무니를 차지해 꼬리처럼 흔들리며, 다시금 돛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한편의 멋들어진 경극처럼 절묘한 운용술이지만, 항해사는 심드렁한 발언을 내뱉었다.
“이럴 거면 그냥. 기함이 처음부터 앞장서면 되는 건데 말입니다.”
“실전훈련 아니냐. 실전훈련!”
‘이건 정기훈련 때마다 하던 건데, 실전훈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항해사는 그리 생각했으나, 어린아이처럼 신나서 주먹을 쥐고 흔들고 있는 윤세진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뭐...’
둘이 만담을 하거나 말거나, 함대는 천진을 향해 힘껏 나아갔다.
천진을 향해 세로진을 이루고 곧장 달려오다가, 기함이 앞으로 나가면서 서북쪽으로 변침한 후에 천진을 사선에 두고 나아가는 형세.
고개를 돌린 선원들 모두의 눈에, 부산스럽게 몸을 일으키는 천진항구가 어스름하게 보였다.
다만 그들이 보기에도 어설프고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저놈들은 천진이 공격받을 거라고 상상도 못해봤나 보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항해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이 분열된 이후, 북평부 수군은 항상 요동과 산동의 전력을 압도했다.
언제나 먼저 치거나 약탈만 했고, 두 세력은 방어에만 급급했으니... 천진의 방어시설이나 방어계획을 제대로 꾸려놨겠는가. 설령 계획은 세워놨어도 안이해졌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시간이 너무 이르잖아?”
“예.”
윤세진은 반대편 수평선을 가리켰고, 항해사는 어스름한 푸른빛을 뿌리는 하늘과 수평선을 뚫고 머리카락이 보일까 말까 하는 아침 해를 바라봤다.
이 시대의 밤은 침묵과 고요의 세계고, 대부분의 일상 활동이 해가 지면 멈추는 시대다.
배를 띄우는 것도 마찬가지.
밤에 말을 타고 달리는 것만큼이나. 보이지도 않는 암초가 즐비한 해안가 근처에서, 밤에 배를 모는 건 위험한 일.
무역선이야 일단 출발하면 끝이니, 낮이든 밤이든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거지만... 발해만 안에서만 활동하는 천진수군이 밤에 배를 몰고 다니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나.
야간순시라고 해봐야 어두운 밤바다에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조선해군은 어설픈 감시망을 뚫고 천진 코앞까지 들키지 않고 올 수 있었던 거지.
윤세진이 불태운 순시함은 그냥 재수 없게 걸린 셈이다.
“저기 보시죠. 이제야 저흴 발견한 모양입니다.”
“음.”
그의 예측이 맞은 모양이다.
항해사는 반대편인 동북쪽을 가리켰고, 윤세진의 망원경 너머로 몇 척의 함선이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야간순시를 나왔던 순시함이, 검은 연기를 보고 황급히 돌아오는 게 아닐까 싶다.
“이대로 계속 전진. 포격 준비를 하라는 명령입니다.”
“드디어!”
견시병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윤세진은 주먹을 불끈 쥐며 목청을 높였다.
촤악촤악. 신형전함은 계속해서 천진을 향해 나아가면서, 점점 가까워질수록 오히려 방향을 틀어 뱃머리를 북쪽으로 향했다.
“거리는?”
“이제 곧 사거리 안에 들어옵니다.”
“좋아.”
점점 가까워질수록 천진항구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자, 선원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이미 항구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고, 거리는 대략 오백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상황.
저들의 혼란스러움이 몸으로 느껴졌다.
천진은 북평부 최대 항구인 만큼, 수백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길게 뻗어 나온 여러 개의 부두에 묶여 겹겹이 겹쳐 있었다.
소맹선만한 작은 어선이 마구잡이로 모여 있는 곳도 있고, 대맹선보다도 큰 군선으로 보이는 배가 줄줄이 묶여 있는 곳도 있었지.
부두 저편으론 큼지막한 관아와 올망졸망하게 모여 있는 시가지가 눈에 들어오고, 해가 뜨기 무섭게 조업에 나가기 위해 부두가로 향하고 있던 어부무리가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땡땡땡! 둥둥둥!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모를 종소리와 북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수면 위를 흐르고 있었는데, 조선해군을 발견하고 경고의 목소리를 토해내는 게 분명했다.
선원들의 맨눈에도 혼비백산한 천진항구가 보일 정도인데, 망원경을 끼고 있던 윤세진과 항해사는 어떻겠는가.
말을 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부두를 질주하는 무관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고.
슬쩍 망원경을 틀자, 마구잡이로 무기를 챙겨든 수군들이 시가지 사방에서 부두를 향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포대는 찾았나?”
“아직...”
항해사가 대답하기 무섭게, 쾅! 천진항구 저편에서 검은 연기와 굉음이 확 피어오르더니, 퍼펑!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이 물보라를 일으켰다.
“저기군! 저게 끝이 아닐 텐데?”
“그럴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펑펑펑! 천진항구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 양측에서, 굉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다만 포탄은 신형전함까지 날아오지도 못하고, 죄다 물보라만 일으키며 애꿎은 파도만 계속 두들겼다.
제대로 된 포가가 없는 화포에서 쏘는 포탄이, 정확도가 높을 리가 있나.
어떤 건 함대 앞에 떨어지고, 어떤 건 아예 함대 저편으로 날아가고, 심한 건 화약을 왕창 넣었는지 함대를 훌쩍 넘겨 뒤에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놀라서 일단 쏴재끼고 보는 것 같은데... 맞을 리가 있나.’
윤세진은 천진수군의 행태를 속으로 비웃어줬다.
동아시아 최고의 화포를 가진 조선조차도 오백보가 넘는 거리에서 화포를 쏴대는 것에 회의적인데, 그보다 못한 북평부의 화포는 오죽할까.
저게 다 쓸데없는 화약낭비다.
‘오히려 포대의 위치만 확인해준 꼴이군.’
박도를 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무관. 어설픈 나무통에 담겨 있는 화포. 그 화포에 달라붙어 끙끙거리는 화포병.
깃발을 들고 성벽을 따라 질주하고 있는 연락병. 지게 비슷한 걸 지고서 화약더미를 옮기려는 병사들.
‘북평부가 중국 제일의 화포와 화포병을 가지고 있다고들 하던데, 정말로 다 옛말이 됐군. 우리보다 한참 밑이야.’
그는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모습을 보며, 절로 입꼬리가 들렸다.
조선은 북방에 성형요새를 만들면서, 그 성벽 꼭짓점에 흡사 무덤처럼 생긴 방어포대를 만들었다.
화포병들은 벽돌과 석재로 뼈대를 쌓고 흙을 단단히 뒤덮은 포대 안에 숨어서, 정면에 입처럼 길게 뚫려 있는 포구멍 사이로 신나게 쏴대는 거지.
허나 이 시기의 중국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포대라곤 하나, 그저 성벽을 보다 넓혀서 어설픈 포가를 갖춘 화포를 덩그러니 놓아둔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성벽 위에 듬성듬성 화포를 올려둔 게 전부다.
저긴 운 좋게 한방만 맞아도, 근처의 화포까지 다 날아갈 거다.
“방향은?”
그는 선미루의 난간을 꽉 쥐어틀면서, 타륜을 쥔 조타병에게 목청을 높였고.
“제대로 가고 있습니다! 이제 곧 포격진영이 완성될 겁니다.”
“좋아.”
‘저들은 우리가 뭐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군.’
탕탕! 흥이 난 윤세진은 난간을 손바닥으로 때리며 머리를 굴렸다.
계획대로 척척 흘러가니, 흥을 감출 수가 없다.
이 시대엔 함대전이든 상륙작전이든, 해전에서 쓰이는 일자진이든 정자진이든 장사진든, 진영의 형태와 상관없이 일단 머리를 내밀고 돌진해서 싸우는 게 기본이다.
서로 가까이 붙으면서 투사병기를 쏴대다가, 함선이 딱 붙으면 선상백병전이 벌어지는 거지.
고려와 조선이 아무리 원거리 공격을 선호했어도. 뒤로 슬슬 빠지면서 최대한 타격을 주다가 백병전에 돌입하는 거였지, 진영 자체는 서로 머리를 마주보고 싸우는 게 기본이었다.
그러니 천진수군 입장에선, 조선해군이 맹렬하게 다가오다가 갑자기 옆구리를 보이고 방향을 틀어버리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움직임이다.
이러면 천진을 두고, 조선해군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꼴이 될 거니까.
하지만 수백년 후의 미래를 현재로 당겨와 화력전함을 만든 조선해군 입장에선, 이 생경한 진영이 오히려 최고의 진영이다.
이렇게 옆구리에 적을 평행하게 놓고 있어야, 최대의 화력을 토해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 기다리던 명령이 떨어졌다.
“포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입니다.”
“돛을 접어라!”
“포격 실시!”
견시병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항해사와 윤세진이 동시에 명을 내렸다.
두루륵. 위로 들려서 돌돌 말리는 돛을 따라 전함의 속도는 살짝 줄어들었고, 갑판 위에 올라와 망원경으로 천진포대와 항구를 살피고 있던 화포장은 굴러 떨어지듯 포갑판으로 내려갔다.
“좌측 포대 위치는 기억했나?”
“옙!”
포대장 강 중위의 말에 선임 화포병들이 답을 했고, 냉큼 화포에 달라붙어 포각을 맞추곤 장전을 끝마쳤다.
“발포!”
“발포!”
복명복창과 함께 쾅쾅쾅! 5문의 화포가 일제히 포구멍으로 목을 집어넣고 철환을 토해냈다.
명을 내렸던 화포장 강 중위와 화포부장 전 소위는 어느새 갑판으로 올라와 천진항구를 살피고 있었는데... 어째 제대로 맞은 게 몇발 없어 보였다.
올 때부터 미리 작전을 정해 놓은 바. 앞선 함선은 북쪽에 위치한 우측포대를, 후위의 함선은 남쪽 좌측포대를 타격하기로 정해놨었다.
정확한 위치는 몰라도, 천진수군이 바보가 아닌 이상 방어포대는 만들어 놨을 테니까.
그렇게 6척의 함선이 거의 일제히 화포를 발사했음에도, 삼십문의 화포 중에서 포대를 적중시킨 건 고작 한발에 불과했다.
“우리가 맞춘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끄응...”
화포장은 앓는 소리를 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다른 함선의 화포장들도 다 같은 마음일거라고 위안 삼았다. 이 거리에서 한발이라도 맞춘 게 그나마 다행이니까.
하지만 포대를 못 맞췄다고 해서 마냥 손해를 본 건 아니었다.
천진항구는 그 자체가 포격목표 아닌가.
빗나간 철환은 성벽을 때렸고, 성벽을 넘어가 시가지의 사합원 저택을 박살냈고, 성벽에 못 미쳐 부두가 근처에 떨어져 천진수군을 쓸어버렸고, 몇몇은 부두에 정박해 있던 함선에 박힌 경우도 있었다.
조선해군 입장에선 뭐에 맞든지, 일단 맞으면 이득인 셈이다.
“준비 끝!”
화포장과 화포부장이 궁시렁 거리는 동안에도, 작은 포구멍으로 사이로 천진항구를 살피던 화포병들이 목청을 높였고.
“발포!”
“발포!”
초탄을 발사한 후에 포각을 재조정해서, 장전을 끝마친 화포가 다시금 불을 뿜었다.
콰콰쾅! 이번에도 철환은 천진포대를 향해 날아갔고... 초탄을 통해 나름 포각을 계산한 탓인지, 이번엔 3발의 포탄이 포대에 적중했다.
그 후로도 연거푸 포격을 날려댔으나... 계속해서 2,3발 정도만 포대를 허물고, 나머지는 그 주변만 망가뜨렸다.
“스벌... 맞아도 우리가 맞춘 건지 알아야 말이지.”
“...”
다만 화포장 강 중위 입장에선, 아쉬운 소리가 또 나왔다.
해군 화포병들은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이 구른 탓에, 엄청나게 특출하지 않고서야 실력이 엇비슷했다.
그 말은 재장전을 하는 시간이나 포각을 조정하는 실력이나 엇비슷하다는 뜻. 6척의 함선이 거의 동시에 발사한 꼴이라서, 누가 맞췄는지 영... 알 수가 없다.
이건 공명심을 떠나서, 자신들이 포각을 제대로 설정했는지 확인을 못한다는 뜻이니까.
“어차피 포각은 계속 바꿔야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지금처럼 고각으로 쏠 때 맞추는 건, 솔직히 운으로 봐야죠. 그래도 탄착점이 몰려 있으니, 이 정도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흐음.”
화포부장 전 소위가 다독이듯 말을 하자, 강 중위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포구멍으로 머리를 밀어 넣고 쏘는 함포는 고각으로 쏠 일도 없고, 쏘기도 힘들다. 그러니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정확도는 뚝뚝 떨어지기 마련.
더불어 파도에 출렁이는 배 위에선, 위아래로 출렁이는 움직임에 따라 포각이 계속 변한다.
정확한 타격을 못해도, 함대 전체가 비슷하게 탄착점을 모은 것 자체가 대단한 실력이지.
“계속 포대를 노릴까요?”
“...”
화포부장이 화제를 돌리자, 화포장은 말없이 망원경으로 천진포대를 살폈다.
조선해군이 자신들에게 화포를 쏠 거라고 예상을 못한 걸까? 성벽 일부와 함께 포대가 무너져, 난장판이 된 모습이 망원경 시야로 들어왔다.
적중한 화포 주변에 있던 화포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고, 파편을 맞아 부상당한 이들도 있는지 마구잡이로 쓰러져 있었다.
심지어 지휘하던 무관마저도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살아남은 화포병들이 비틀거리며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