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챕터34. 제거하다 (5)
“그렇게 북평부 내부의 파벌싸움이 더욱 심해지면, 아직도 재건하지 못한 거용관과 그 거용관을 두드리는 북원잔당을 막는 게 힘들어질 테고.”
“그 또한 북평부의 군력이 줄어드는 거니, 요동도 영향을 미치겠군요.”
“맞네.”
“그럼...”
원창명은 성억의 눈치를 보며, 먼 미래에 펼쳐질 일을 입 밖으로 꺼내봤다.
주변에 아무도 없건만,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줄여본다.
“결국 최종목적은 아국이 요동을 도모하는 겁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한 다리, 두 다리 건너서 간접적으로 요동의 군력을 줄이려는 암계를 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성억은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국이 요동과 싸워서 질 리가 있겠나? 북평부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는 요동이 북평부의 두 배가 넘는 덩치를 가진 아국에 상대가 될 리가 없지.”
“...”
“허나 요동은 여진과 다르지. 여진처럼 쉽게 통합되고 지배되지 않을 거네. 그치들은 어찌됐건 명의 영향력 하에 있었으니까.”
“예...”
“단순한 정복이나 지배와 완전한 통합과 흡수는 아예 다른 일이네.”
“...”
조선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원창명은, 성억이 무얼 말하는지 곧장 알아차렸다.
지금 조선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유례없는, 아주 강력하고 통일적인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하고 있다.
조선이 처음 건국됐을 때와 비교하면, 아예 다른 나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지.
원래 역사의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은 지워진지 오래고, 지금 역사의 조선은 성리학과 잡학, 자본, 기술이 전부 뒤섞인 새로운 기조를 만들어 나아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여진인, 고려인, 기타 외국인등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그들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조선인으로 개조 중이지.
그런 면에서 보면... 나름 요동인, 혹은 한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요동인을 단기간에 조선인으로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작전은 대계의 일환일 뿐이고, 요동을 흡수하는 작전은 이미 여러 방면으로 진행 중에 있네. 당장 될 일이 절대 아니니, 입 밖으로 쉽게 꺼내지 말게.”
“명심 하겠습니다.”
원창명은 성억의 무섭고 무거운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조아리고 말았다.
요동. 언제나 조선이 차지하고 싶어 했던 땅.
북방을 집어삼킨 지금의 조선에겐 그 열망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옛 시절만 해도 요동은 조선이 가지고 싶어 하던 최우선 목표였다.
그런 요동을 집어삼키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말에, 원창명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떨려왔다.
성억 일행은 밤을 꼬박 새며 말을 달려, 드디어 주둔지에 다다랐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과 전답들 사이에 박혀 있는 큼지막한 장원. 그리고 그 장원을 둘러싸고 있는 수백개의 게르를 보자 반가움이 밀려왔다.
조선에선 눈길이 안 갈 정도로 지겹게 봤던 게르건만, 이곳 산동에서 게르 주둔지를 보게 되니... 뭔가 가슴이 뭉클해진다.
“다 왔군.”
“숙영진지를 제대로 만들진 않은 모양입니다.”
“조현의 양가를 쓸어내고 장원에 자리 잡은 모양인데, 굳이 주둔지를 건설할 필요가 있겠나. 게다가 산동인들에게 괜히 군주둔지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 필요도 없지.”
“본다고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요?”
원창명은 히죽 웃는 성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둔지가 뭐 얼마나 대단하겠냐?”싶겠냐만, 연대병이 만든 주둔지는 잘 설계된 마을이자 목책요새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목책만 걷어내면, 그 속에는 조선의 신도시설계도면이 땅에 그대로 남는 수준이지.
도시개발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하수도 및 변소, 기타 게르와 간이건물의 위치를 보고서 설계도를 유추할 수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냥 “줄 맞춰서 참 잘도 지어놨구나.”라고 밖에 안 보인다.
“그래도 혹시 아나?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 괜히 산동인들에게 우리 기술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
“예...”
청도를 건설할 때부터 유지해 왔던 기조긴 허나,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주의해서 나쁠 건 없다 싶었다.
‘신기하군. 쉽게 받아들이는 건가? 어차피 주인만 바뀐 거니까?’
잠시 침묵에 잠긴 원창명은 조선군을 보고도 겁먹지 않고, 열심히 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들을 굽어봤다.
한쪽에선 기병이 돌아다니고, 다른 한쪽에선 김매기에 한창이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공존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구경하며 나아가자, 일행을 마중하는 이들이 달려왔다.
“자네가 직접 왔나? 이거 영광이군.”
“영광은 무슨.”
성억을 반갑게 맞이한 건, 다름 아닌 김종서.
원창명을 비롯한 호위기병들은 냉큼 경례했고, 김종서는 히죽 웃으며 받아주곤 성억에게 달라붙었다.
“오느라 고생했네.”
“고생이야 자네들이 했겠지. 어땠나?”
“어려울 게 있겠나. 심심할 정도였네. 관료,상인 파벌이 확실히 비수를 숨기고 있더군.”
“음. 현의 자잘한 위소나 장원은 그렇다 쳐도, 제남 같이 큰 도시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오히려 반대일세. 그쪽은 창 한번 휘두를 일 없이 바로 성문을 열더군.”
예상했던 대답이 들려오자, 성억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서로를 노리고 비수를 갈고 있었을 테니, 청도에서 일이 벌어지기 무섭게 큰 도시에서 함께 머물던 가문끼리도 내전이 벌어졌을 거다.
엄밀히 말하면 내전이라기 보단, 관료,상인 파벌의 일방적인 기습에 더 가까웠겠지.
그리고 칼부림이 고착되고 확장되기 전에 조선군이 들이닥쳤을 터, 귀찮은 공성전 없이 안에서 내응했을 거다.
‘그렇게 성문이 열린 이상, 손쉽게 결말이 났을 테지.’
성억은 제남을 비롯한 여러 대도시에서 벌어졌을 일을 머릿속에 그려보고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곳 연주부는 공청 파벌의 근거지 아닌가.”
“말이야 거창하게 근거지지, 연주부 호족의 절반 이상은 어쩔 수 없이 공청을 따르고 있더군. 다른 살길이 열리기 무섭게 호응하던데? 위소를 제외하곤 장원을 끼고 저항하는 이들이 얼마 있지도 않았네.”
“호오...”
“짐 챙기고 도망갈 시간도 주지 않고, 우리가 빨리 온 것도 있고. 흐흐. 덕분에 수지타산은 얼추 맞출 수 있을 것 같네.”
김종서는 히죽 웃으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패물을 비롯한 이삿짐을 쌓아놓고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조선군이 너무 빨리 들이닥쳐서 빼앗은 게 분명.
친절하게 짐 정리를 대신 해둔 꼴이 된 모양이다.
“자네도 많이 변했군. 군무의 일에 이젠 수지타산도 따지나?”
“자네가 한번 사단장을 해보게. 돈귀신이 되지 않고서야 굴러가지도 않아. 차라리 지금처럼 연대장을 하는 게 오히려 속 편하다니까?”
“끄응.”
성억은 치를 떠는 김종서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사단장은 예전 도절제사와 비슷한 위치로, 한 도의 병력을 총괄하여 완편 된 상비군 오천기병을 직접 거느렸다.
예전처럼 중앙군 일부, 각 현에서 알아서 굴리는 영진군을 통솔하고 소집해서 훈련만 시키는 게 끝이 아니지.
이들의 작전 및 훈련뿐만 아니라, 먹을 거, 입을 거, 잠잘 거까지 전부 군부에서 책임져야 했다.
더욱이 예전이라면 군병들이 알아서 식량과 무기를 챙겨오고, 기타 잡일은 백성들에게 넘겨 노역을 시키면 그만인데... 상비군이자 모병제 비슷하게 변한 지금은 그게 불가능해지지 않았나.
예전의 도절제사가 반쯤 정치군인이었다면, 지금의 사단장은 반쯤 행정군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까 호조에게 예산을 더 달라고 말 좀 해주게. 군행정과 보급을 사단과 연대 안에서 해결해야 하니, 내가 무관인지 문관인지도 모르겠다니까. 손에서 먹물이 지워질 날이 없어.”
“알았네. 알았어.”
성억은 휘휘 손을 내저으며, 김종서의 푸념을 날려 보냈다.
사실 아무리 성억이라고 한들, 호조에 말한다고 해서 들어주기나 하겠나. 김종서도 솔직히 기대도 안했고, 그냥 넋두리를 하고 싶은 거다.
“그나저나 대감께선 어디 계시나?”
“안에 계시네. 바로 찾아뵐 텐가?”
“그래야지.”
성억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일행은 곧장 장원으로 향했다.
중국과 조선의 땅 크기를 비교할 수 없는 만큼, 호족가문이 머무는 장원 역시 조선과 비교할 수 없는 덩치를 자랑했다.
예전 양가의 장원에 머무는 식솔만 이천명이 넘어갔으니,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성억은 군데군데 부서진 장원의 담벼락과 정문을 힐끔 살폈고, 안으로 들어가서도 눈을 사방으로 굴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직 수거하지 못한 화살대가 여기저기 박혀 있고, 지우지 못한 핏자국이 널려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기병으로 시원하게 휩쓸어 버린 모양이다.
“크군.”
“이보다 더 큰 장원이 수두룩하다고 하더군. 양가 정도면 중간쯤 되려나?”
“아무리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도 그렇지...”
“뭐. 난장판이 된 후로 더 커지지 않았겠나.”
성억은 조선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태종이 사병을 혁파하고 지방세력을 억누를 시절에도, 조선의 지방호족들은 이만한 성세를 누리지 못했다.
‘이건 꼭 전조의 귀족과도 같은 모습 아닌가. 중국이 통일되는 게 생각만큼 쉽진 않겠어.’
이런 꼴을 보면, 대체 옛 명나라는 무슨 수로 지방세력을 통제했는지 모를 노릇이다.
‘어쩌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들을 그냥 놔둬도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안도감이 밀려왔다.
지방세력이 크면 클수록 통합이 어려워지지 않나. 이들 호족이 옛 명나라 시절보다 성세를 누리면 누릴수록, 자신들의 이권과 권세를 빼앗기는 걸 더욱더 싫어하게 될 테니까.
성억 일행은 말발굽에 짓밟힌 장원의 정원을 지나, 흡사 미로처럼 지어졌으나 지금은 담벼락이 무너져 사방으로 길이 뚫린 장원 중앙전각으로 나아갔다.
연대병 일부가 장원에 머무는 터라, 온 사방에 검은 갑옷이 넘쳐 흐르는데... 저쪽 전각에는 묘하게 다른 옷차림을 한 이들이 잔뜩 긴장해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족장원에는 조선의 사랑채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접객당이 존재했고, 그 접객당에 머무는 이들이 따로 있나 보다.
“저들은?”
성억은 갑옷도 입지 않고, 박도만 차고 서 있는 낯선 옷차림의 칼잡이들을 가리켰다.
“연태 공가와 제남 사가의 사람들이 손님을 데려왔네.”
“손님?”
의아한 눈빛을 뿌리자, 김종서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귓속말을 흘렸다.
“하남의 개봉, 정주, 허창에서 사람이 왔네.”
“역시 그렇게 되는군?”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닌가.”
둘은 남몰래 미소를 감췄고, 성억은 뜻 모를 질문을 던졌다.
“또 다른 손님은?”
“아직 안 왔네. 아마 간을 보고 있겠지. 이번 작전이 끝나면 찾아오지 않겠나? 어쩌면 이미 도착해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나쁘지 않군.”
“흐흐. 물론이지.”
둘은 계속해서 귓속말을 이어갔고, 이내 곧 연오랑이 머무는 중앙전각에 도착했다.
조선이나 중국이나 장원은 보통 왕궁이나 궁궐을 빗대어 만드는 바, 똑같이 만들면 큰일 나니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만드는 게 보통이었다.
양가장원 또한 마찬가지인 터라, 김종서와 성억은 익숙하게 걸음을 옮겨 중앙전각을 헤집었다.
집무실인지 접객실인지 모를 큼지막한 방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
방 안에는 조각을 이어붙인 큼지막한 지도가 탁자 위에 위치했고, 여기저기에 나무인형이 서 있는 걸로 보아... 군대를 표시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옆에는 연필로 휘갈겨 놓은 누런 혼합지와, 반대로 나쁘지 않은 서체로 정갈하게 써 놓은 화선지가 대비되어 눈에 들어왔다.
‘거 보게. 위로 올라갈수록 행정일이 더 많아진다니까?’
“...”
성억은 히죽 웃는 김종서의 눈빛에서 생각을 읽어내고선, 질렸다는 듯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왔나?”
“예. 대감.”
“오느라 고생했다. 앉아.”
“예.”
연오랑은 성억에게 가볍게 시선을 주고선, 옆에 앉으라고 눈짓을 보냈다.
예전이야 뭐 이러쿵저러쿵 예법을 갖춰 인사를 나눴겠지만, 연오랑이 착호군을 이끌면서 잡다한 예식을 다 날려버리지 않았나.
그 착호군이 조선군으로 변모하고, 전역한 착호군병이 조정에 들어오면서, 간소화와 효율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조정을 휘감고 있었다.
몇몇은 이 또한 자주화라고 외쳐대며 명분을 내세우긴 했는데... 솔직히 모두의 속내는 하나였다. 이게 덜 귀찮고 편해서였지.
예법과 예식은 아랫사람과 윗사람, 남과 자신을 구별해 자신을 높이는 목적이 있는데... 지금 조선에선 굳이 이런 거 없어도, 다들 왕실과 윗사람에게 충성하고 우러러보지 않나.
중요한 제사나 대례, 큰 행사가 아니고서야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특히나 윗사람이 그걸 바랄 경우에는 더욱 그랬지.
“비답은?”
“여기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파격의 화신답게 연오랑은 다 뛰어넘고 곧장 본론으로 나아갔고, 성억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냉큼 두툼한 서신을 내밀었다.
장계로 보내기엔 할 말이 너무 많은지라, 이건 서신이 아니라 얇은 서책처럼 보일 정도다.
연오랑은 서신을 읽으면서, 쓱. 받은 만큼 돌려주려는 듯 서책을 내밀었는데... 이 또한 조정과 세종, 태종에게 보내는 장계이자 보고서였다.
‘고생 좀 했겠어.’
저렇게 두툼한 걸로 보아, 연대장을 비롯해 모든 관리들이 날밤을 지새웠을 게 분명하다.
연오랑은 조정의 비답을 쓱쓱 읽으면서, 성억을 보지도 않고 질문을 던졌다.
“오면서 초석광산을 봤겠지? 어땠나?”
“위소병들에게 땅을 돌려주는 일은 바로 끝났고, 영가의 장원을 누구에게 넘길 지에 대해선 논의하고 있습니다.”
“거긴 초석 말고 특별히 돈이 될 만한 이권도 없는데, 오래 걸릴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다 같이 관리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초석을 한 가문이 독점하는 건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음.”
“다만 군호를 해체해 민호로 돌리는 것엔 모두가 동의했고, 청도의 빈민을 데려와 정착시켜 초석채굴량을 늘리고 있습니다. 화약장인으로 키울지는 그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초석채굴을 하는 건 막지 않았습니다.”
“그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