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챕터34. 제거하다 (6)
김효성을 보낸 보람이 있는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교통정리를 끝내고 초석을 생산하는 모양이다. 그것도 전보다 몇 배나 많은 양을.
“언제쯤 결론이 날 것 같나?”
“김 장군이 워낙 일을 잘하지 않습니까. 정착하려는 사람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굳이 초석이 아니더라도 이권이 많아질 테니...”
인부가 늘어나 마을이 새로 만들어지면, 거기서 뽑아낼 수 있는 세수도 늘어난다.
그 뿐일까. 주점, 다점, 음식점등이 생겨날 테니 거기에 따른 이권도 있고, 단적으로 식자재를 공급하는 것조차 이권이다.
자신들 돈으로 마을을 건설하고 있는 만큼, 그 보상을 뽑아내려 할 테니... 의견합치가 쉽진 않겠지.
“못해도 한두달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공청 파벌을 흡수하는 것도 바쁠 테니, 저희에게 맡기고 나중에 다 커지면 돌려받으려 하겠지요.”
“아니꼽긴 하지만... 오히려 잘 됐다. 그들이 손 놓고 있는 사이에 초석을 더 많이 캐면 되니까. 대략적인 산출량은?”
“여기...”
성억은 비답이 아닌 다른 서류를 내밀었는데, 최해산을 비롯해 화약제조청 관리들이 예상하는 초석 생산량이 적혀 있었다.
“허. 일주일 만에 아국의 세달, 아니 네달치를 뽑아낼 수 있다고?”
“예. 인부를 늘리면 늘릴수록 생산량을 곱절로 뽑아낼 수 있다고 하더군요.”
“씁...”
연오랑이 아쉬운 티를 숨기지 못하자, 성억은 물론이고 모두가 마찬가지의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역시 초석광산은 탐나는 물건이다.
“산동화약장인에게서 새로운 화약제조기술을 배우고 있고, 만약 저희가 주도적으로 정제기술을 연구하면 효율을 더 높일 수 있을 거라고 하는데...”
“그치들 좋은 일을 해줄 순 없지. 청도로 가져와 연구하는 건 괜찮지만 기술을 알려주는 건 불가다. 초석광산은 우리 것이 아니니까.”
“예.”
“어차피 우리야 약조한 양만큼 꼬박꼬박 받으면 그만 아니냐. 그치들이 알아서 지지고 볶든 그건 알바 아니지.”
“알겠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성억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술 유출에 대해서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게 하루이틀이 아니니까.
연오랑은 비답을 계속 읽어나갔고, 어느 부분에 가서는 히죽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대로 됐군? 연판장을 만든 게, 확실히 효과가 좋았나봐?”
“예.”
성억은 자랑하듯 말하는 연오랑을 보며, 그 또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나름 기발한 생각이었으니까.
이번 작전을 진행함에 있어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건 운석핵꿀밤 이후로 조선이 중국에게 정식 조서를 보내고, 나라의 이름을 걸고 교류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요동과 거래하긴 했지만 두고두고 지켜야할 약조나 계약을 맺지 않았고, 우량카이 3위 또한 마찬가지.
그래도 이쪽은 그나마 나았다.
거래의 당사자가 요양파, 심양파, 혹은 복여위 등으로 명확히 지정할 수 있었으니까.
일본이 그나마 정상적인 경우로, 개별 영주는 무시하고 무로마치 막부와만 교류하면 됐었지.
허나 산동의 경우에는 조서와 약조를 맺을 당사자가 없었다.
일개 가문과 조선조정 혹은 조선왕실이 조약을 맺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무리 중국호족가문이 덩치가 크더라도 격이 안 맞는다.
또 만약 장민, 영기옥 가문과 조약을 맺었는데, 둘 중 하나가 권력다툼으로 쓰러진다면? 둘 모두 쓰러지고 다른 가문이 득세하면 그땐 청도조차와 초석판매조약은 어찌될까.
조선의 군력이 두려워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잡다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지.
연오랑은 전례 없는 방법으로 이걸 해결했으니, 바로 산동 가문 전체를 당사자로 지정해 흡사 연판장을 만들었다.
“조정에서 이 연판장 조약이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예측했나 보군?”
“예. 아국에게 유리한 건 분명하지만, 반대로 산동호족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방편이었으니까요.”
“흐흐.”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모든 가문을 거래 당사자로 지정하면, 산동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발생해 다른 가문이 득세하더라도 조약을 이어나갈 수 있다.
여기에 속을 파헤쳐 보면 더욱 강력한 효과가 숨어 있었는데...
‘지금 기득권을 잡고 있는 산동 호족은 다른 호족이 치고 올라오는 거나, 다른 성의 세력이 산동으로 밀고 들어오는 걸 방지할 수 있지.’
연오랑은 산동인들이 부릴 꼼수를 속으로 떠올렸다.
다른 세력이 산동으로 들어와 조선과의 조약을 이행하겠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이 “니들이 뭔데 조약 당사자를 치워버리려고 하는 거냐? 우린 원래 조약을 이행하겠다.”라고 주장하면, 산동의 권력 투쟁에 끼어들 명분이 생긴다.
반대로 산동호족은 이걸 이용해서 “우리 건들면 조선이 가만있지 않을 걸? 그런데도 여길 노리고 싶냐?”라고 위협수단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거지.
‘이게 앞으로의 중국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정말 모르겠군.’
연오랑은 이번 조약으로 인해 변해버릴, 더 먼 미래를 그려봤다.
분구필합分久必合 합구필분合久必分. 나눠진지 오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지 오래면 또 반드시 나눠지는 법.
중국역사를 관통하는 유명한 말 아닌가.
평범하게 누군가 왕이 되어 산동을 통일할 수도 있지만, 이번 연판장을 시작으로 흡사 연합왕국. 혹은 자주성을 지닌 연맹체 국가로 발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쳐지긴 합쳐지는 건데, 다른 방식으로 합쳐지는 거지.
‘마냥 허황된 말은 아니지.’
운석핵꿀밤 이후로 중국은 분열됐음에도 묘하게 통합된 형태로 돌아가고 있고, 각 성 내부에서는 서로 으르렁거려도 다른 성의 공격에 대해서는 단결해서 막아내는 상황 아닌가.
이번 연판장 조약은 물밑에서 벌어지던 호족가문의 연계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서, 옛 명나라 정치체제에서 벗어난 호족연맹체를 공식적으로 공인한 꼴이 됐다.
동아시아의 큰형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의 인정을 받아서 말이다.
이 상황과 체제가 고착화되고 견고해지면, 정말로 어떤 정치체제가 튀어나올지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
“오면서 하남호족들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리신 겁니까?”
“아니. 잘 됐고, 비답이 오길 기다리던 중이었다. 연판장 형식은 처음 맺어보는 조약 아니냐. 그들 입장에서도 이걸 쉬이 믿을 수가 없어서, 조정과 왕실의 인장을 보고 싶은 거지.”
“아...”
성억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동은 조선과 요상한 조약을 맺었고, 이게 진짜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으니... 눈으로 직접 조서를 보고 확인하겠다는 뜻이리라.
“그럼 이제 정리가 됐으니, 참수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는 거군요.”
“그래.”
‘참수작전이라... 그냥 칭왕자稱王者 제거작전이 더 어울리지 않나?’
연오랑은 그 재밌는 말을 혀로 굴리며,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내정을 돌리기도 바쁜 조선이, 어째서 중국의 권력투쟁에 끼어들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통일을 막고, 막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였다.
공청세력과 손을 잡으면 일이 더 쉬워졌을 것임에도 반대세력과 손을 잡은 건, 조선이 보기에 공청이야 말로 위험천만한 인물.
산동을 일통해 왕을 참칭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의 행보는 오래전부터 눈에 거슬렸고, 조선은 여진이라는 후방정리를 끝내고, 또 좋은 기회가 찾아오자 주저 없이 칼을 뽑아든 거지.
‘뭐... 그거 말고 다른 이유도 있지만 말이야.’
관료,상인 파벌은 청도포구를 얻기 위해 자신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 조선은 어차피 공청을 제거할 생각이었고 겸사겸사 명분이 필요했던 거다.
‘그러면서도 절대 손해를 봐선 안 됐고, 그놈들이 우리 꿍꿍이를 알아서도 안됐지.’
연오랑은 그간 해왔던 작업, 그리고 앞으로 해나갈 작업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조선이 처음부터 “왕이 될 가능성이 높은 공청을 제거하겠다.”라고 달려들면, 산동은 물론 다른 성에서 어떤 반응을 보였겠는가.
“니들이 뭔데 우리 중국 내부사정에 끼어들어?”라며 좋든 싫든, 어떤 형태로든 발작을 일으켰을 거다.
그러니 속내를 숨기고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산동의 간곡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응하는 척 진행해야 했고, 오히려 상인마냥 거래하며 실리를 챙겨나갔다.
그 와중에 청도포구와 초석광산을 챙긴 거지.
하지만 문제는 산동에서 끝나지 않는다.
칭왕자가 과연 공청만 있었을까? 산동에 공청이 있었다면, 다른 성에도 칭왕자가 있지 않을까.
당연한 말로 하남에도 칭왕자가 존재했고, 그 자가 바로 상구현에 눌러 앉은 홍형청이란 작자다.
운석핵꿀밤으로 명이 망한 후. 중국은 난장판이 됐고, 지난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교통정리가 됐다.
호족가문과 상인세력은 드높이 득세하여 정치권력으로 자리 잡았고, 자신의 땅과 사람, 이권을 노리는 자들을 힘을 합세해 제거해 나갔다.
그 세월이 벌써 이십년을 넘었고, 이젠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안정되는 중이었지.
헌데 모두가 “자. 다들 배를 불릴 만큼 불렸으니, 힘을 합쳐서 우리끼리 다 해쳐먹읍시다!”라고 외치는데, “닥쳐. 우리끼리 해 먹기는 뭘 해먹어? 니들 다 때려눕히고 내가 다 가질 거다!”라고 외치는 돌연변이 야심가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문제라면 꽉 물린 톱니바퀴처럼 힘의 백중세가 이뤄지자, 칭왕자가 꿈틀거린다고 한들. 그 자를 제거하는 게 어려워졌다.
모두가 힘을 합쳐 야심만만한 칭왕자를 때려눕히면 좋겠지만, 그 어떤 호족과 상인가문이 자신의 피를 보는 일을 감내할까.
그런 쟁투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그 결과가 지금의 고착상태 아닌가.
자신이 손해를 보는 건 곧 남에게 이득이 되는 거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꼴이 되어버린 거지.
그런데 산동이 묘한 해결책을 보여줬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역할을,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조선에게 맡긴 것.
그리고 조선은 방울을 다는 게 아니라, 아예 고양이의 목을 꺾어 비틀어서 후환을 지워버렸다.
“우리가 넌지시 일러주긴 했지만, 하남호족들은 산동호족이 부르기 무섭게 부리나케 달려오더군.”
“들어보니 개봉, 정주, 허창에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전부다 상구현과 맞닿아 있는 지역이지.”
“예.”
개봉, 정주, 허창.
죄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들 아닌가.
달리 말하면 그만큼 호족도 많다는 뜻이고, 거미줄처럼 혼맥과 인맥으로 엮인 이 호족집단은 군벌인 홍형청과 대립하는 걸 꽤나 부담스러워 했다.
어디 써먹기도 힘든 군병을 늘리는 건 돈이 많이 드는 걸 떠나서, 그 군력을 쥐어튼 또 다른 실력자를 잉태할 수 있으니까.
그게 설령 호족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쉽게 마음이 놓이지 않고, 그렇다고 각 가문출신을 지휘관으로 쑤셔 넣으면 그게 군대 겠나. 콩가루를 모아놓은 꼴이지.
“그러니 산동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서, 우리의 힘을 빌리려 한 거지.”
“실상은 저희가 그걸 노리고 의도한 걸 모르고서 말입니다.”
“그렇지.”
둘 뿐만 아니라 김종서마저도, 히죽 미소를 머금었다.
조선은 땅과 사람을 욕심내지 않는 걸, 산동을 통해 보여줬다.
조선본토와 멀리 떨어진 이 중국땅을 대체 무슨 수로 경영하겠나. 청도는 빼앗은 게 아니라, 없던 걸 새로 만들어 빌린 거다.
뭔가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낯선 조선이야 말로 호족세력이 가장 믿을 만한 우군이 된 거지.
재물이나 대가를 얼마든지 뜯어가더라도. 땅과 사람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으면, 궁극적으로는 손해 볼 게 없다고 판단하는 거다.
“그런데 달리 보면, 공청이나 홍형청을 제거하고 나서, 또 다른 칭왕자가 나올 위험이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다.”
연오랑은 성억의 우려에,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간 칭왕자가 공청이나 홍형청만 있었겠는가.
명이 망한 후에 별의 별 놈들이 다 튀어나왔고, 지난 세월동안 정리되고 또 정리되어 덩치를 불린 하나둘씩만 남게 된 거다.
“세상에는 위험천만한 1인자가 되는 것보다, 누릴 거 다 누릴 수 있는 속편한 2인자가 되는 걸 바라는 사람이 더 많지. 그것도 1인자가 없는 다수의 2인자라? 그보다 더 편한 게 어디 있겠나.”
“음...”
“흠.”
잠자코 듣고만 있던 김종서마저도, 연오랑의 묘한 말에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1인자가 되는 길은 인내와 고통, 고난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수많은 경쟁자를 죄다 꺾고 올라서야 하고, 그 후에도 밑에서 치고 올라오려는 이들, 혹은 눈에 거슬리는 이들을 꾸준히 정리해야 한다.
황제나 왕이 된다는 건, 말 그대로 고난과 역경의 길을 걸어간다는 건데... 배가 부른 호족가문에서 그런 야심찬 인물이 과연 몇이나 등장할까?
게다가 지금 중국이 먹고 살기 힘들어서 죄다 들고 일어나는 난세던가? 분열된 건 분명하지만, 난세는 결단코 아니다.
도적떼가 횡횡하는 시대도 아니고, 호족가문이 덩치를 불렸다곤 허나, 그 밑에 속하는 소작인, 사용인들의 처지가 노예나 노비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아니다.
어떤 면에선 자영농보다 더 살기 편한 점도 있지.
관의 통제가 없어지고 호족과 호족이 직접 맞부딪치자, 옛 명나라 시절처럼 뇌물 밀어주고 얼렁뚱땅 해결할 수 있는 시절도 아니다.
수틀리면 호족끼리 서로 뜯어먹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는 시절이 됐으니...
피냄새 잔뜩 풍기는 시간을 지나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하는 과정을 거쳤고, 이내 살아남은 이들끼리 기득권을 더욱 견고히 다지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는 곧 1인자가 없는 다수의 2인자.
그것도 1인자만큼의 무한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2인자가 된 꼴인데... 대체 여기서 뭐 얼마나 더 얻겠다고, 다른 이들을 모조리 때려눕힐 야심을 품겠는가.
“산동과 마찬가지로 하남 또한 연판장 조약을 맺게 된다면, 그들의 기득권은 더욱 공고해진다. 이 안락한 평화와 가만히 있어도 떨어지는 달콤한 과실을 걷어 차버릴 인물이 몇이나 될까. 배가 부르면 부를수록 굼뜬 돼지가 되기 마련이니, 야심찬 인물이라도 심지가 꺾일 수밖에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