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챕터34. 제거하다 (7)
“음... 여차하면 저희가 개입할 수도 있고요.”
“그래. 조약을 맺는 순간 명분이 생기니, 연판장에 이름이 올린 이들 중에선 다른 마음을 먹는 이가 나오기 힘들 거다. 그런데 연판장에 이름을 올릴 정도면, 이미 하남을 쥐락펴락하는 대호족들 아니냐.”
“예.”
“겉절이 같은 잡스런 호족이나 군벌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쳐도, 그들 선에서 정리될 거다. 연판장 조약은 앞으로 산동, 하남호족의 기득권을 보장할 상호보장조약이나 마찬가지니까.”
“...”
“그들은 자기들끼리 티격태격할지언정, 연판장에 오른 가문이 연판장에 오르지 않은 세력에게 무너지는 걸 가만두고 보진 않을 거다.”
연오랑의 무시무시한 말에, 둘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조선인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기묘한 계책이자 분열책이었으니, 둘은 속으로 ‘과연 생각하는 게 다르구나.’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그가 요샌 미친놈이라는 말을 안 듣는 편이지만, 그래도 머릿속엔 여전히 상식을 벗어나는 비범함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
‘통일왕조가 아닌 연합왕조라... 전례 없는 이 방식이 과연 통할까? 어쩌면 잡을 수도 없는 머나먼 옛적 주나라 시절로 회귀하는 것 아닌가. 아니군. 주나라가 아니라 아국의 전조와 더 흡사하겠구나.’
“...”
성억은 눈을 감고 먼 과거와 먼 미래를 동시에 떠올렸다.
‘하지만... 천명이 무너지면서, 중화와 황제도 깨지지 않았나. 이걸 아국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느낀 게 한족이니... 그에 대한 반발로 전혀 새로운 체계가 만들어질지도...’
‘이미 아국 또한 건국 당시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나라로 나아가고 있지 않나. 중국 역시 다른 미래로 향할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모르겠어.’
상억은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이 빙빙 도는 걸 느꼈다.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휙휙 바뀌고, 앞으로도 사정이 달라지진 않을 것 같다.
‘후...’
그저 더욱 심지를 굳게 다져야겠다는 각오를 세울 따름이었다.
“산동과 하남이 연판장 조약을 맺게 되면, 다른 지역도 유사한 방식으로 나아갈까요?”
“그건 모를 일이지. 적어도 남직례와 절강은 그렇게 만들 생각이지만, 다른 지방이 어떻게 될지는 짐작을 못하겠어.”
“음...”
“하긴 중국내지는 북원잔당과 붙어 있으니까요.”
“훗. 그래. 지긋지긋한 북원잔당이지.”
연오랑은 섬서에 웅크리고 앉은 몽골세력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북원이 망한 게 언제고, 북원잔당이 설치고 다닌 게 언제고, 또 지금은 섬서를 집어삼킨 게 언젠데... 아직도 잔당 딱지를 달고 있다.
‘이 지긋지긋한 놈들은 죽었다가 깨나도 하나로 합쳐지긴 힘든 모양이야.’
실제로 반쯤 죽었다가 되살아난 놈들인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았다.
‘아니지. 서로 죽고 죽이지 않고 내정에 열중하는 걸 봐선, 그래도 정신을 차린 걸지도.’
연오랑은 그리 생각하며,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봤다.
원래 역사에선, 오이라트와 북원잔당이 명의 지원을 받으면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엔 오이라트가 북원잔당을 흡수한다.
지금으로부터 수십년 후. 그렇게 힘을 키운 오이라트가 명의 뒤통수를 갈겨서, 그 유명한 토목의 변이 벌어지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몽골일파가 중국 서북부를 점령하자, 둘이 싸울 필요성이 줄어든 것. 이런저런 이유가 붙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서 오이라트와 북원잔당이 죽도록 싸운 것 아닌가.
허나 이젠 먹고 살만 해졌고, 오히려 풍족한 땅을 지키기는 일이 더 급해졌으니, 둘이 대립하는 일도 줄어든 거지.
그렇다고 해서 몽골일파가 힘을 모아 중국을 치기에는 속사정이 안 좋았다.
몽골초원 동쪽에선 우랑카이 3위가 밀고 들어와 대치하고 있고, 초원 남쪽에선 북직례와 산서를 뜯어먹으며 자라난 항명출신 북원잔당이 독자세력화 되고 있었다.
여기에 섬서를 점령한 일파와 몽골초원에 남은 일파도 연결고리가 튼튼하지 않고, 원래 역사에서 순차적으로 칸이 되었어야 할 본아실리(부냐시리), 아로태(아룩타이), 아다이(아자이)등이 죄다 살아남아서 형세가 고착화 되는 상황.
‘오이라트도 마찬가지.’
본래 오이라트가 흡수했어야할 몽골고원 서쪽일파들.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등의 부족은, 북원이 부활한 관계로 잘게 찢어져 북원과 오이라트에 각각 속하게 됐다.
이 결과 본래 역사보다 힘이 줄어든 오이라트는 한중을 점거했으나 사천공략은 실패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하서회랑을 통해 오히려 서쪽으로 슬금슬금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티무르가 죽고 난 후. 난장판이 된 티무르제국 서쪽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부터 쓸어 담으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북원잔당도 마찬가지로 서쪽을 보고 있을 테니, 마냥 쉽게 되진 않을 거야. 그렇다고 북원잔당이 그들을 흡수하는 것도 쉽진 않겠지. 종교부터 다를 테니까.’
몽골제국이야 종교에 포용적이었다지만, 지금은 제국도 아닌 북원잔당 아닌가.
북원잔당은 불교가 강세인 반면에, 티무르제국에 속했던 이들은 이슬람교가 강세다.
앞으로 백여년쯤 후에나 오이라트가 티베트불교를 받아들이는 관계로, 지금 오이라트는 이슬람교가 대세에 잡다한 토착신앙, 샤머니즘이 난립하고 있지 않나.
종교적으로 보면, 티무르제국 잔당들은 오히려 오이라트와 더 가깝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뭐... 결론적으론 앞으로 어떻게 될 진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조선이 몽골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지.’
연오랑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깨어나자, 성억은 연오랑이 보고 있던 비답 뒤쪽을 미리 펼치곤 입을 열었다.
지금 상황과 관계된 놀라운 소식이 하나 있기 때문.
“...?”
연오랑이 성억의 손길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성억은 그저 “여기부터 먼저 보시죠.”라는 눈빛을 뿌렸다.
뭔가 하고 봤더니... 지금 중국 정세에 태풍을 일으킨 또 다른 사건이 적혀 있었다.
“대리국...?”
“...”
“언제 적 대리국인데... 정말로 부활했다고?”
“예. 대월상인과 함께 제주를 통해서 친서와 사신을 보냈습니다.”
“허...”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대리라... 하긴 이제 슬슬 기어 나올 때가 됐긴 됐지.’
한편으론 “올게 왔구나.”라는 생각이 뒤통수를 스멀스멀 잠식했다. 중국이 잘게 쪼개졌으니, 응당 옛 망령들이 몸을 일으킬 법도 하니까.
대리국.
대리에서 나는 하얀 돌이라는 대리석으로 더 유명해진 나라.
이 대리국은 운남성에서 시작된 나름 유서 깊은 나라다. 당나라가 있던 시절에 전신인 남조南朝에서 시작됐으니, 지금을 기준으로 치면 4백년전 이전부터 있던 나라지.
송나라 시절에도 있었는데, 그 당시 송은 요,금,원에게 순차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던 상황. 옆구리에 위치한 대리마저 적대하면 피곤해지니, 송은 데면데면하게 대리를 대했다.
다만 몽골제국에게는 답이 없었고, 대리 또한 몽골제국에게 멸망해버리고 만다.
허나 몽골제국은 봉건제식의 위임통치를 애용한 관계로, 대리의 왕족 단씨는 그대로 운남의 우두머리. 대리총독으로 남아 명맥을 이어가게 됐지.
그 후 명이 등장.
명은 요동까지 치고 올라간 후에 사천과 운남으로 밀고 내려왔고, 단씨는 운남을 지배하고 있던 원의 잔당인 양왕梁王정권의 뒤통수를 쳐버리고 독립을 꿈꾸며 명에게 붙었다.
그러나 명은 독립을 허락해주지 않았고, 몽골이나 여진과 같은 변방의 통치방식. 단씨 왕족을 도독, 제독 등으로 임명해 현지총독으로 삼아 지배했었지.
그랬던 명나라가 고작 이십여년 만에 망해버렸으니... 운남이 어떻게 됐겠는가.
당연히 독립운동 및 내부투쟁에 들어갔고, 결국 그 승자는 단씨가 되어 대리국이 다시금 튀어나오게 된 거지.
다만...
“영양가 있는 내용은 없네?”
“예... 아무래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지들 딴에는 나름 허세를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만... 대월, 유구와 같이 “조선을 큰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내용은 없었고, 그냥 “앞으로 잘해봅시다.”정도의 친선서신과 사신을 보내왔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잘 된 거잖아?’
조선이 공식적인 조공관계를 거부하고 민간거래 및 교류만 허용하는 지금상황에선, 오히려 이런 게 더 속편하다.
“나쁠 건 없군?”
“예. 저희만큼이나 중국이 통일되는 걸 우려하는 게 대리국 아니겠습니까.”
“당연하겠지.”
통일왕조가 들어서면 명나라 시즌2를 찍는 건데, 이걸 반길 운남인이 있을 리가 있나.
대리에도 한족이 많이 산다고는 하지만, 단씨 왕가는 엄연히 백족白族이다.
대리가 망할 시절에 많은 백족이 동남아시아로 퍼지긴 했지만, 그래도 꽤 많은 수가 남아 있었지.
미래에는 이들을 소수민족으로 분류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딱히 소수민족이니 뭐니 하는 것도 없지 않나.
오히려 명이 세워진 후. 머릿수로 밀고 들어와 토지를 가져간 한족에게 적대적인 이들이 더 많을 터, 백족을 비롯해 운남에 원래 살던 묘족, 이족 등은 대리가 다시 세워지는 걸 반겼을 게 분명하다.
원래 대리는 이들이 죄다 섞여 살던 곳이었으니까.
거기에 민족은 다르지만 나름 한족화, 문명화가 충실히 된 곳이라서, 나라를 부활시키는 일에도 거부감이 없었을 거고.
“우린 여기서 칭왕자를 제거하려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칭왕자가 나와 버렸군.”
연오랑이 살짝 허탈한 기운을 흘리자, 성억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칭왕자라 하지만 대리는 사정이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그들은 엄연히 백족이고, 저희가 상대하는 한족과 다르지 않습니까. 백족이 주축이 된 대리가 통일전쟁을 하는 건, 한족 칭왕자가 일어서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겁니다.”
“음...”
‘하긴, 대리는 역사적으로 중국내지로 힘을 투사한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그땐 당, 남송이 있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도 그렇게 될까?’
“안 그런가?”
연오랑이 우려를 표하자, 이 부분에 대해선 조정에서도 논의가 있었는지 성억은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異족이 득세하는 건 한족이 더 부담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대리가 있는 운남과 맞닿아 있는 곳은 사천성, 귀주성, 광서성인데... 그들 내부 사정도 복잡하나, 대리가 힘을 투사하는 걸 두고 보진 않을 겁니다. 특히나 귀주성에는 묘족과 포의족 대다수가 살고 있으니...”
“거긴 대리에 영향을 받아 묘족이나 포의족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겠군. 당연히 백족의 지배를 싫어할 테고.”
“예...”
‘쓰벌... 운석핵꿀밤의 스노우볼이 어디까지 굴러가는지 모르겠네.’
연오랑은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다시금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 말았다.
운남과 맞닿아 있는 귀주성은 오랜 세월동안, 물밀 듯이 밀려들어온 한족들과 뒹굴면서 이족들도 충분히 문명화됐다.
여기에 원나라가 지방 토착세력에 관직을 주는 토사土司제도가 실시됐고, 묘족과 포의족은 중국식 체제를 받아들여 지방호족으로 변모한 이들이 대다수다.
이건 명이 등장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다만 국시로 삼은 유학을 장려해, 이족 호족들이 유학을 익혀야만 토사로 임명해줬다.
명이 망하긴 했으나, 그래도 한세대는 실시된 정책이니 작게나마 효과를 발휘한 상태.
달리 말하면, 한족호족이나 이족호족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는 거지.
헌데 백족 정권인 대리가 등장했으니... 이족들이 자극을 받아 폭탄이 터질 가능성이 커지지 않을까?
광서, 광동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긴 한족에게 밀려 내려온 온갖 이족들과, 원래 이 지역에 살던 이족들, 객가인이라 불리는 이주한 한족들이 섞여 있다.
정치적으론 한족화, 문명화가 되었다곤 하나. 중원과 워낙 멀리 떨어진 관계로, 중앙조정과 관계없이 자기들끼리 놀던 세월이 너무 길고.
동남아시아를 통해 인도 및 서역과도 무역을 오래해온 터라, 중국내지와는 사상적으로도 조금 다르고 자유분방한 기질이 농후했지.
당연하게도 자유분방할수록 난장판이 크게 벌어지기 마련이니... 명이 망하자 그 어떤 곳보다도 빠르게 호족중심으로 재편된 곳이 광서성, 광동성이다.
그런데 백족정권인 대리가 부활했네? 여기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 될지는 짐작조차 못하겠다.
“뭐... 중요한 건, 적어도 귀주, 광서, 광동에서 칭왕자가 튀어나올 일은 없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들끼리 아귀다툼을 하다가는 대리국에게 뒤통수를 맞을 가능성이 높아졌으니까요.”
“음. 그건 우리에게 잘된 일이고...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는 일이니 지켜만 봐야겠군.”
“예.”
“그럼 대리와는 어찌하기로 했나? 직접적으로 교류를 하는 건 힘들 텐데?”
“워낙 내륙에 위치한 곳이니 바다를 통해서만 저희와 이어질 터, 대월과 광서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직접 닿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그저 친선만 하면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흐음...”
연오랑은 다시금 남중국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운남이 조선과 이어질 수 있는 길은 대월과 광서를 통해 남중국해로 빠져나오는 길 밖에 없는데, 광서는 제외해야할 거다. 여긴 난장판이니까.
‘그럼 대월인데... 여기도 사정이 안 좋긴 하지만, 친해질 가능성이 높군.’
대월은 쿠데타로 집권한 호 왕조가 열심히 중앙집권을 향해 나아가는 중.
당연히 내부에서 이런저런 싸움이 끊이질 않고 있다.
다만 옛 대리 출신의 백족이 동남아시아로 많이 이주하면서, 대월에도 백족출신의 호족들이 존재할 터. 그들을 발판삼아 대리와 대월은 사이가 좋아질지도 모른다.
‘특히나 대월은 조선에게 납작 엎드려 무역을 청하며, 우릴 큰형님으로 모신답시고 뜯어먹으려고 하고 있단 말이지. 호 왕조의 집권 명분을 세우면서 말이야.’
이건 연오랑이 조선에 있을 때도 논의가 됐던 일이고, 조정에선 언제나처럼 “그래. 친하게 지내자. 조공은 필요 없으니 무역이나 하자고.”라는 의도를 명명백백하게 공표했다.
이러니 호 왕조는 부활한 대리국과 친하게 지내면서 집권 명분을 세우려 할 거다. 조공까지 바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