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챕터34. 제거하다 (8)
“뭐... 이러나저러나 우리에겐 나쁠 게 없는 일이니, 이번 참수작전에 뒤통수가 가렵거나 변수가 생길 일은 적겠군.”
“예. 다들 자기 집 단속하기 바쁠 테니까요.”
“좋아. 자네가 선물을 들고 왔으니, 하남호족들을 하나로 묶어보자고.”
“예.”
연오랑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둘 모두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하남호족들을 연판장 조약으로 끌어들이는 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곧장 진행됐다.
기득권을 차지한 이들이 바라는 건 안정인데, 그 안정을 이룩하게 해줄 명분이 떡하니 등장했다.
이들도 바보가 아닌 바. 이미 산동호족과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득실을 점쳐보지 않았나. 간은 충분히 봤으니 남은 건 확신뿐이었는데, 서해를 건너온 성억이 그 확신을 가져온 거지.
특히나 하남호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조선이 딱히 윗사람으로서 자리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실질적으로 대등한 관계는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옛 명나라나 옛 황제국 마냥 압제하지 않았던 것.
“앞으로 우리 연호를 써라.” “우리가 시키는 제도를 따라라.” “가문의 후계자를 세울 때 우리 허락을 받아라.” “우리가 정한 사람이 연맹주가 되라.” 등등.
황제국으로서 제후국을 압박할 때 쓰는 통제논리는 전혀 적용하지 않았고, 조선이 바라는 건 오로지 “돈”이었다.
오천을 넘는 기병군단을 움직였으니, 그에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라는 거였지.
게다가 그 돈조차도 은으로 지불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남의 모든 종자씨, 특산물, 약재, 서적, 기술을 가진 장인, 끝으로 하남에 넘쳐나는 곡물로 지불하라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너무 싸게 주는 것 같아서, 하남호족들이 조금 더 얹혀줄 정도였다.
그렇게 조약의 청사진을 완성하고, 수결한 연판장을 챙긴 성억이 한성으로 향하기 무섭게 조선군은 움직였다.
산동과 하남은 행정적 편의를 위해 구분된 거지, 딱히 지형적 장애물과 경계가 있어서 분리된 게 아니다.
일반 백성들 입장에선 산동이나 하남이니 하는 구분보다는 저쪽은 “누구 집안의 땅.” 이쪽은 “누구 집안의 땅.” 이렇게 부르는 게 일상적이었지.
물론 경계의 역사를 따져보면 춘추전국시대로 올라가고, 그 시절에 잘게 나눠졌던 지방이 그대로 내려오면서 흡수되고 분리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접한 성이 정치,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건 절대 아니라는 거지.
중국내지의 성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구분됐고, 성으로 구분하긴 허나 원, 명 시절에는 하나의 나라에 속해 있던 곳 아닌가.
역사적으로 엄청난 요충지가 아니고서야, 중국본토의 성 경계마다 국경선을 긋고, 요새나 성을 지어놓은 것도 아니니... 산동과 하남의 경계에는 그럴듯한 요새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말인 즉. 조현에서 엎어지면 코 닿은 곳에 상구현이 위치했는데, 조선군의 앞길을 막을 그 어떤 장애물도 없다는 뜻이었다.
조선군은 산보라도 나온 듯 느긋하게 행군했지만, 그 수가 무려 오천.
가만히 있어도 땅이 울리고 먼지구름이 작게 피어올랐다.
연대별로 뭉쳐 있다지만 수가 워낙 많다보니 행군대열은 뱀처럼 길어졌고, 최대한 농지를 밟지 않고 움직이려 해도 그게 잘 될 리가 있나.
풀숲처럼 평야를 푸른빛으로 물들이던 콩밭과 수수밭, 땅콩밭을 가로지르자, 흡사 땅괴물이 지나간 것 마냥 푸른색 머리칼이 밀려 땅거죽이 드러났다.
“여기가 본래 옛 황하가 지나갔던 곳이란 말이지.”
“예.”
연오랑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야를 보며, 다시금 중국 스케일에 감탄했다.
수천년에 걸쳐 황하는 그 물줄기가 여러번 바뀌었고, 그 거친 황하가 꿈틀거리면 토사가 밀려들어 새로운 물줄기가 생기고 물줄기가 땅에 잠기기를 여러번.
그 역사의 현장을 이렇게 직접 밟고 있으니, 기분이 새삼 묘했다.
“이렇게 완전히 경작지로 변한 걸 보면, 물길이 끊어진지 오래인가 보군?”
“그렇다고 하더군요. 저 평야 양쪽으론 옛 물길이 아직도 남아서 운하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음...”
연오랑은 미리 지형조사를 해온 최윤덕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토사가 밀려와 퇴적층을 형성한 곳답게, 비옥한 토지로 변해서 일까? 그냥 척하면 척. 대충 봐도 기름진 땅인 게 티가 났다.
황무지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온통 푸른빛으로 점칠 되어 있으니까.
“홍형청은 어디에 집결했지?”
“양원구에 모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저흴 마중 나온 모양입니다.”
“건방지군.”
양원구는 조현과 상구현 사이에 위치해서, 산동과 하남이 딱 맞붙는 경계선이라 할 수 있는 곳.
마중 나왔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거기에 아직 추수도 하지 못한 평원에서 기병대와 맞부딪치겠다니, 그 용기 하나만큼은 가상하다.
“뭐 믿을만한 구석이라도 있나? 병력이 얼마나 되는데? 기병은?”
“기병은 대략 오백정도, 총 병력은 보병 일만이 조금 넘는 걸로 파악됐습니다.”
“거참...”
연오랑이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자, 최윤덕은 멋쩍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자신이 기병을 이끌고 중국내지까지 들어와서 싸울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고, 그런 조선군이 중국군을 압도하는 상황이 나올 줄도 상상 못했으니까.
어릴 적 명나라를 기억하는 최윤덕에게는, 직접 몸으로 겪고 있음에도 뭔가 믿기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쟤들은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르지?”
“예.”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무려 3개 연대로 불어난 특전대 중에서, 1개 연대를 통째로 데려왔다.
기병천명은 중국에 던져 놓으면 한줌도 되지 않을 양이지만, 산동과 하남 경계를 단속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
정찰, 수색, 추적의 달인이 된 특전대는 홍형청이 뿌리는 정찰병과 세작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그뿐일까. 산동호족들 또한 공청 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켜고 가병을 흩뿌려 산동을 뒤지고 있는 상황. 자연스럽게 홍형청의 정찰병을 잡아들였지.
아마 홍형청은 눈 뜬 장님이 되었을 거다.
“병력이 많은 게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맞부딪치는 건 무리 아니냐? 뭔가 꿍꿍이가 있을까?”
“제가 보기엔... 어쩔 수 없는 선택 같습니다. 정면 돌파 말고는 딱히 답도 없지 않습니까.”
“흐음.”
연오랑은 최윤덕뿐만 아니라 다른 대대장마저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우려를 날려 보냈다.
상구현은 편의상 현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개봉부와 귀덕부 사이에 존재했던 곳이었다.
허나 홍형청이 자리 잡고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가더니, 하남과 남직례 경계에 있던 서주까지 압박할 정도로 거대한 현으로 탈바꿈했다.
과거의 행정조직으로 보면 최소한 4,5개의 현이 상구현 하나로 통합된 것. 조선의 현과 중국의 현은 땅 크기가 3,4배 이상 나니, 그 크기는 어마어마할 거다.
그렇게 현을 흡수한 홍형청은 그 넓은 땅을 전부 군호로 바꿔버렸다.
말 그대로 진짜 군벌이라 부를 만한 존재로 재탄생.
그래서 일개 현 주제에, 무려 만명이 넘는 병력을 뽑아낼 수 있었던 거지.
지난날 대마도 정벌 때 조선이 대략 이만병력을 동원했는데, 상구현 하나에서 만명의 병력을 뽑아낸 걸 보면... 홍형청이 얼마나 쥐어짜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음. 만약 공청이 홍형청처럼 굴었다면, 병력을 얼마나 뽑아낼 수 있는지 가늠도 안 되는군.”
최윤덕의 설명을 들은 연오랑이 중얼거리자, 그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공청이 군벌이 되었다면 자기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졌을 겁니다. 처음에 군벌로 시작한 공청이 어째서 호족으로 탈바꿈했겠습니까. 그거 말고는 자신의 세를 유지하기 힘들어서겠지요.”
“하긴 그건 그렇겠네.”
연오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최윤덕은 자신의 생각을 마저 풀었다.
그렇게 군벌로 재탄생한 홍형청인데, 뜬금없이 조선군이 쳐들어왔다. 그것도 기병오천으로.
만약 맞서 싸우지 않고 농성을 하거나, 수성을 하거나, 전투를 회피한다면?
상구현 전체가 말발굽에 짓밟히는 건 자명한 일이지.
“듣기론 공청의 요청에 병력을 소집하는 바람에, 올해 밀 수확도 제대로 못한 걸로 들었습니다. 그러니 현 전체를 둔전으로 굴리는 이상 지금 농사를 망치면 힘들어질 겁니다.”
“...”
“더욱이 산동과 하남호족의 지원을 받는 저희가 상구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면, 홍형청 휘하의 병사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죄다 떠나버리겠지.”
연오랑은 홍형청의 미래가 눈에 훤히 그려졌다.
“이래서 군역은 문제가 있다니까. 쟤들이 어딜 봐서 농사짓는 병사야. 창칼을 든 농부에 더 가깝지. 그것도 억지로 민호를 군호로 바꿨는데, 사기가 얼마나 높겠어. 지금껏 제대로 된 싸움을 해보지도 않았을 거고.”
“예. 개중에서 걸러져 나온 이들도 분명 있겠지만, 한 푼도 안 되겠지요.”
무려 만 명이다. 일개 현 따위는 그냥 우르르 몰려가기만 해도 머릿수로 밟아버릴 수 있는데, 제대로 된 싸움을 해봤겠는가.
호족가문이 유격전 비슷하게 반항을 했어도, 이렇게 전 병력을 소집해 싸우는 건 몇번 없었을 거다.
“거기에 이렇게 군병을 소집시키는 것 자체가 이미 손해 아니겠습니까.”
농사를 짓고, 기타 생산 활동을 해야 할 장정들이 죄다 군병으로 소집됐으니, 상구현 전체가 그대로 멈춰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이 싸움을 길게 끌면 알아서 자멸할 수밖에 없으니, 홍형청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끝낼 수밖에.
“우리도 빨리 끝내는 게 좋고, 호족들도 마찬가지겠군.”
“예. 어쩌다보니 모두 같은 마음을 품은 모양입니다.”
“흐응.”
조선 입장에선 중국호족들이 까불지 못하게, 조선의 군력을 제대로 뽐낼 계기가 필요했다.
산동호족 입장에선 빨리 끝내야 보급 및 군수물자 지원이 줄어들 테고, 하남호족 입장에선 자신이 가져야할 땅이 최대한 덜 망가지길 바랄 것 아닌가.
말 그대로 모두의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한바탕 회전이 펼쳐질 상황이 됐다.
“그렇다고 홍형청이 막무가내로 병력만 모아놓고 있진 않을 텐데...”
연오랑이 그리 중얼거리기 무섭게, 정찰을 나갔던 특전대원이 나는 듯 달려와 소리쳤다.
“적이 운하를 따라 북상하고 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움직이네?”
“예.”
이 또한 예상해 두고 있던 상황.
농성도 못하고, 머뭇거릴 수도 없으면 답은 하나 밖에 없다. 전 병력을 끌고 아예 산동으로 쳐들어가, 조선군이 하남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
그나마 머리를 썼다면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운하를 끼고 진군하는 모양인데...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군.”
“흐흐.”
“옙!”
연오랑이 중얼거리기 무섭게, 모두가 실실 웃어댔다. 장기판 위에 올라있는 꼴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운하를 직접 도하하긴 힘들겠지?”
“예.”
운하가 아무리 폭이 좁아도, 수심이 깊은 이상 기병으로 도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배다리를 만들 순 있어도, 굳이 그럴 여유도 없고 이유도 없지 않나.
반대로 적군 또한 만명이 넘는 보병이 일시에 도하하는 건 불가능한 일.
‘알아서 함정에 빠졌으니, 그걸 이용해 줘야겠지.’
연오랑은 그리 생각하며 재깍 명을 내렸다.
“화기대를 운하 반대편으로 돌려라, 최대한 들키지 않게 우회해서. 어차피 우린 망원경이 있으니, 적보다 빨리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옙!”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대장이 흩어졌고, 이윽고 행군대열 전체가 흔들거리더니 화기대장이 이끄는 화기대가 분리되어 반대편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본대는 남쪽으로 계속 나아가 양원구로 향하고, 화기대는 동남쪽 서주 방향으로 나아가 운하를 마주보려는 것.
아마 홍형청은 화기대의 존재를 알아차려도, 그게 도하를 막으려는 기병으로 생각하지 야전화포를 끌고 다니는 기병이라고는 생각 못할 거다.
이제 전운이 하늘을 가릴 것 마냥 밀려오자, 어슬렁거리던 조선기병들도 날선 칼날처럼 군기를 세웠다.
행군하면서 야금야금 콩 줄기를 훔쳐 먹던 군마들도 힘찬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고, 군마에 올라탄 기병들도 활시위와 기창을 다시금 정비하며 충돌에 대비했다.
이윽고 채 한시진도 되지 않아, 저 멀리 피어오른 진한 먼지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연대별로 정렬! 전열을 갖춰라!”
“옙!”
“충성!”
한두번 해온 훈련도 아니고, 실전도 여러번 겪어보지 않았나.
연대기병의 선임들은 착호군 시절을 거쳐 군부에 남은 이들답게, 능숙하게 자리를 잡고 후임들을 이끌었다.
뱀이 날개를 피듯, 연대기병은 우악스럽게 콩밭을 밟으며 퍼져나갔다. 종대진영에서 순식간에 횡대진영으로 변신.
구릉이라고 보기도 힘들 정도로 평평하게 이어지는 낮은 언덕배기를 따라서, 연대기병은 거대한 쟁기가 되어 콩밭을 휩쓸었다.
두두두. 픽픽 목이 부러진 콩줄기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고, 기병들은 울퉁불퉁 솟아오른 이랑과 고랑에 아랑곳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쭉 밀고 나갔다.
연대장들은 각자의 연대를 지휘했고, 연오랑과 최윤덕, 특전대장만 함께 자리해 선두에 서서 적진을 살펴봤다.
저들도 먼지구름을 보고 조선군의 움직임을 알아차렸을 터, 자세히는 몰라도 적이 온 걸 알고 부산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평야에 난 종기처럼 살짝 솟아 있는 구릉에 올라,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펴보자...
“큭.”
“흐음.”
다들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과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만 명이나 끌어 모았다더니, 역시나 상태가 엉망이네?”
“그래도 저 정도 무장을 갖춘 게 어딥니까.”
최윤덕은 망원경 너머로 어스름하게 보이는 홍형청의 군대를 보며 비웃음을 흘려댔다.
지금 시대는 고대처럼 무작정 창하나 쥐어주고 전장으로 내보낼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전략과 전술은 끊임없이 발전했고, 기술의 발전으로 갑옷과 무기 또한 발전했다. 거기에 전략무기라 할 수 있는 화약무기마저 등장했지.
달리 말하면 제대로 된 군대를 꾸리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다는 뜻이고, 홍형청의 군대와 조선기병을 비교하면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