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36화 (236/538)

236. 챕터35. 남하하다 (1)

‘그나마 제대를 꾸리는 진법 훈련을 해온 것 같은데, 무장은 역시나 중구난방이군.’

연오랑은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병사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통일된 구색이 하나도 없다.

지휘관쯤으로 보이는 이들은 명광개를 입고 있고, 나머지 병사들은 쇄자갑, 찰갑, 면갑, 몽골식 가죽갑옷을 두서없이 입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갑옷조차 없어서 다 헤진 옷을 왕창 껴입은 이들이 보일 정도.

그나마 특이하다면 역시나 팔 보호대인 비갑을 꽤나 껴입고 있다는 점? 저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저것만큼은 용케도 껴입고 있다.

“무구 상태가 엉망이군.”

“예. 그래 보입니다.”

전면에 보이는 이들은 창을 들고 있는데, 안쪽을 살펴보니 농기구나 마찬가지인 쇄스랑, 쟁기 비슷한 걸 들고 있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고, 부무장으로 칼이나 도끼를 든 이들이 오히려 적어보였다.

그런 이들조차 흔하디흔한 박도로 무장했고, 그것도 없는 이들은 몽둥이나 식칼처럼 보이는 짧은 칼을 차고 있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궁병은...’

궁병도 숨겨 놓은 것 같긴 한데... 제대로 보이진 않았고, 있어봐야 몇이나 있겠나. 많아봐야 천명쯤 되면 많은 거다.

활을 쏘는 건 몇 년동안 꾸준히 훈련을 해야 하는 건데, 둔전을 일구는 둔병이 활을 쏠 일이 얼마나 있겠어. 그것도 이곳처럼 산은커녕 평야만 있는 지역에선 더욱 그렇지.

거기에 따지고보면 활과 화살도 은근히 비싼 물건이다.

“화포는 찾았나?”

“아무래도 안 보이는 군요. 제대 안에 숨겨둔 모양입니다.”

“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진군을 멈추지 않으면 방열조차 못할 테니...”

“그건 그럴 테지.”

화포에 가장 정통하다는 북평부조차 제대로 된 포가가 없는 판국에, 고작 군벌에 불과한 홍형청이 화포를 뭐 얼마나 잘 쓰겠나.

옛 명나라 시절 화포가 있긴 있겠다만, 화약장인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테니 화약도 얼마 없을 거고, 화포병을 키우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다.

호족의 가병이 득세하면서 소수정예는 발전했어도 통일된 대병이 옛 기억으로 파묻힌 지금.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이 모습이 어쩌면 지금 중국군대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어떤 면에선 오히려 놀랍다.

“아무리 저들이 옛 황제군 잔당이라고 해도 말이지. 이십년이 넘었는데 저 정도로 무장할 수 있나? 병력이야 군호를 쥐어짜냈다고 해도, 무장을 갖추는 건 한계가 있을 텐데?”

지금 시대의 전쟁은 돈싸움이나 마찬가지라 했으니, 둔전에서 나오는 소출만으로는 저 허술한 무장조차 지탱하는 게 불가능하다.

다른 재원이 있는 게 분명했고, 그 해답은 간단했다.

“운하에서 통행세를 걷지 않습니까. 그게 생각보다 돈이 많이 되는 모양입니다.”

“허... 그 정도 많단 말이지?”

‘하남호족들이 우리에게 붙으려고 기를 쓰는 이유가 있었고만.’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나 될 줄은 몰랐기에,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운하라... 다 망가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사용하는 모양이야.’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적군을 앞에 두고도, 태평하게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수,당시절에 만들어진 중국의 대운하는 유명하지 않나. 대운하 파다가 수나라가 망해버리기도 했으니까.

그 시절에 만든 운하는 항주에서 시작해 낙양과 장안으로 비스듬하게 이어졌고, 다시 낙양,장안에서 북평으로 이어지는 형태였다.

물론 땅을 죄다 파서 이어붙이는 건 불가능했고, 장강, 해하, 황하, 회하 등의 강과 강을 이어서 물길을 연결하는 식이었지.

이후 경항대운하로 유명한 운하가 새롭게 준설되는데, 이는 항주에서 일직선으로 곧장 북평으로 이어지는 운하였다.

원이 대도, 북평을 수도로 삼자, 강남의 물산을 북방으로 끌어올려야 했기 때문.

이 또한 옛 운하처럼 강과 강 사이를 이어서 연결했는데, 모든 곳이 전부 이어진 건 아니었다. 운하에서 육지로 다시 운하나 강으로 옮겨 북으로 올려 보낸 거지.

원나라 시절에 만들어진 운하를, 영락제가 북평을 북경으로 바꾸고 천도하면서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시작.

그 후 명나라 시절 내내 꾸준히 준설보수하면서 경항대운하가 완성되게 된 거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영락제가 없으니 원나라 시절의 미완성된 운하만 남아 있었고, 그 운하조차도 정난의 변 때 망가진 곳이 부지기수.

매몰되거나 터져서 곳곳이 허리가 끊긴 이 운하를, 잘게 쪼개진 지금 중국이 재건할 수나 있었겠는가.

그냥 있는 거 그대로 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럼에도 효용이 넘쳐나는 모양이다.

“그 정도란 말이지...”

“군데군데 끊어지긴 했지만, 서주에서부터 개봉, 정주로 이어지는 운하를 홍형청이 중간에서 막고 있지 않습니까. 이자 때문에 단순히 상구현 인근 호족들뿐만 아니라, 하남과 산동 전체가 손해를 보고 있었죠.”

“그렇군.”

딴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서로는 점점 가까워졌고, 이제 먼지구름을 넘어 어렴풋이 덩어리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출진해라. 특전대는 적 기병을 붙들고, 틈이 보이면 머뭇거리지 않고 밟아라.”

“옛!”

바로 옆에 있던 이인화 특전대장은 대답하기 무섭게 말을 몰고 튀어나갔다.

‘음...’

연오랑은 멀어지는 이인화를 묘한 눈으로 보다가 냉큼 시선을 돌렸다.

이인화는 나름 길주의 역사 깊은 호족으로, 원래 역사에서 세조 때에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의 아버지다.

이 사건으로 함길도의 길주가 강등되고, 함경도로 명칭이 바뀌지 않았나.

그 정도로 큰 내란이었는데, 지금 역사에선 함길도가 차별 받은 일도 없고, 이시애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아마도 원래 역사에서의 이시애의 난은 터지지도 않을 거다.

‘그러고 보니, 이징옥은 잘 있나 모르겠네.’

연오랑은 문뜩 떠오른 생각을 얼른 지워냈다. 함길도의 반란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이징옥도 함께 떠올랐던 것.

허나 우려와 달리, 이징옥 형제는 착호군에 들어온 후로 착실하게 커왔다.

당장 이징석은 특전대 대대장으로 진급했고, 이징옥은 여전히 기사대에 머물고 있는 상황.

둘 모두 딱히 불만 같은 건 없을 테니, 원래 역사에서 벌어졌을 이징옥의 난 또한 없던 일이 되겠지.

‘뭐... 문제는 다 세조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문종이 튼튼하게 크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겠지.’

연오랑은 왠지 모를 따가운 시선에, 얼른 상념을 지워냈다.

쓱. 고개를 돌려보니, “왜 우리에겐 명령을 안 내려 주냐?”라는 눈빛으로 최윤덕을 비롯한 이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큼...’

괜히 머쓱해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금 입을 놀렸다.

“계획은 오기 전에 다 짜놨잖아? 기사대는 적 예비대를 찾으면서 대기.”

“나머지 전군은 출진해라. 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쑤셔서, 적을 웅크리게 만들어라.”

“옛!”

“충성!”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시로 사단장 역할을 하고 있는 최윤덕과 몇몇 호위만 남겨두고 모든 기병이 질서정연하게 튀어나갔다.

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가 더욱더 커지기 시작했고, 횡진으로 길게 늘어져 있던 진형은 연대별로 잘게 쪼개져 묘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각 연대는 그 안에서 대대와 중대별로 거리를 뒀고, 그 연대가 총 4개나 되니... 운하를 따라 올라오는 홍형청의 군대를 얼기설기 포위한 형태가 완성됐다.

그리곤 곧장 1연대부터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허리춤도 오지 않는 콩밭, 땅콩밭인데 기마의 돌격을 막을 만한 장애물이 있을 리가 있나.

중국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운하주변은 밭이 아닌 맨땅으로 남아 있었고, 기병에 그 근처로 다가가자 지금까지와 다른 거친 먼지구름이 용오름 치듯 피어올랐다.

“온다!”

“막아라!”

“방패!”

조선기병의 등장은 이미 예고되었지만, 그걸 실제로 목도하는 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기병이 줄고 또 줄은 중국에서, 이렇게 많은 기병대가 움직이는 걸 본적이나 있을까.

멀리 떨어진 연오랑의 눈에도, 홍형청의 군대가 어수선한 모습을 보이는 게 훤히 들어왔다.

많이 쳐줘봐야 시속 10km를 조금 넘는 수준의 속도로 달려드는 기병이지만, 길게 늘어져 전면을 모두 가리며 등장한 기병은 너무나 무섭다.

쿵쿵쿵. 한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땅이 신음을 흘리며 진동했고, 그 진동은 창과 방패를 든 홍형청의 병사들의 손까지 떨리게 만들 정도.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두려움은 확산되고, 모두는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사방으로 내저었다.

동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모습이기도 했고, 함께 두려움을 나눠 덜어내려는 몸부림이기도 했고, 어떻게든 지휘관의 명령을 귀에 새기려는 안달이기도 했다.

홍형청의 군대는 최대한 밀집해서 옆에 운하를 끼고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걸 보다 촘촘히 잡아당겼다.

아무리 기병이 무섭다고는 하나, 정면에 세운 창진을 뚫고 들어오는 건 쉽지 않다. 그렇기에 운하를 등 뒤에 놓고 전선을 형성.

행군대열의 선두와 후미를 오히려 좁은 측면으로 만들어서, 기병대가 옆구리를 치지 못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지.

뭐... 결과적으론 홍형청의 의도대로 진영을 만들어졌으나, 병사들이 발을 멈추고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게 되자... 강제로 진군이 멈추게 된 상황이 펼쳐졌다.

그렇게 멈춘 이들을 향해 포위하면서 다가온 연대기병들은, 홍형청의 병사들의 생각과 달리 돌격 대신 화살비를 날려줬다.

결집된 장창방진은 아니지만, 겁먹고 자기도 모르게 밀집되어 버린 보병방진이 되지 않았나.

괜히 저기에 파묻혔다가는 속도를 잃고 돈좌될지도 모르는 일.

조선군은 몽골과 여진을 상대했던 경력을 흠뻑 살려서, 마구잡이로 화살을 날리며 가까이 다가가더니 고작 30보 정도의 거리만 두고 휙 말머리를 돌려 옆으로 비껴나갔다.

“쏴라!”

“막아라!”

홍형청 군대의 지휘관들은 상반된 명령을 목이 찢어져라 내질렀다.

연오랑의 예상대로 전열 중간에 숨겨뒀던 궁병들이 화살을 쏴보지만, 곡사로 날아간 탓에 제대로 날아가는 게 드물었다.

본래라면 궁병이 진영 겉에 위치했다가 화살을 쏘고 안으로 쏙 들어가야 하겠지만, 그 정도까지의 훈련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애초에 궁병의 수가 적은 걸지도.’

연오랑은 저 멀리 보이는 전장을 망원경으로 살피며, 먼지구름을 뚫고 쏟아지는 강철촉의 소나기를 바라봤다.

조선기병은 우르르 몰려와 화살비만 날리곤 약 올리듯 휙! 튀었고, 잔뜩 겁먹고 웅크렸던 홍형청의 군대는 속절없이 얻어맞으며 틈을 엿봤다.

이 스웜전술은 몽골이 애용하던 전술이니, 당연히 옛 명나라 장군들도 대처법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저 우직하게 화살비를 버텨내며 꿋꿋이 나아가 고지를 점거하고, 말이 지키기를 기다려 역공하는 수밖에 없다.

뒤를 돌아보고 후퇴하는 기병을 잡겠다고 쫓아갔다가는, 사방에서 몰려온 늑대 떼에게 뜯어 먹혀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게다가 보병이 기병을 뭔 수로 쫒아가겠나.

홍형청은 자의반 타의반 우직하게 얻어맞으며 버티더니, 기어코 거북이처럼 전진을 시작했다.

“오... 그래도 움직이네? 훈련을 하긴 한 모양이군.”

“예. 사실 저거 말곤 딱히 방법도 없으니까요. 저희가 너무 빨리 왔습니다.”

“그렇겠지.”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전장을 살폈다.

홍형청의 눈을 가리고서, 너무 빨리 왔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저들의 목적은 산동 경내. 바로 옆 조현으로 쳐들어가는 건데, 조선군이 너무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화살비를 맞으며 진군하게 됐으니까.

전장은 차륜전 아닌 차륜전으로 변해, 조선군은 일진이 와서 화살비를 쏘고 가고, 뒤이어 이진이 와서 화살비를 쏘는 형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런 산발적인 공격을 막아야할 적 기병은 1천의 특전대와 눈싸움만 하는 중.

특전대는 인사하듯 슬금슬금 다가와선, 와르르 화살비를 쏟아내고 냉큼 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중국에선 예로부터 기병은 고급병이자 정예병이니, 이들은 조선군이 뭘 노리고 이러는 건지 곧장 알아차렸다.

추격을 시작하면 매복은 아니지만 매복하듯,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포위하고 뜯어먹을 게 분명한 일.

홍형청의 기병은 오백정도로 머릿수만 두 배나 차이나고, 가까이에서 보니 무장부터 대놓고 차이나고, 나아가 기사를 할 줄 아는 기병과 숨바꼭질을 하라고?

이건 죽으라는 것 밖에 안 되니, 홍형청의 기병대는 애써 명령을 흘리며 보병대 옆에 바짝 붙어 측면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줬다.

연오랑의 눈엔 저 먼 후미에서 벌어지는 일이 보이진 않지만, 연락기병이 검은깃발을 휘날리며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지 않나.

그는 후미의 사정을 알려왔고, 연오랑은 곧장 입을 열었다.

“적 기병은 나올 생각이 없나보군.”

“저 화살비 지옥에서 빠져나오려면 아예 전장을 넓게 활용해 빠져나와야 할 텐데...”

“그러면 특전대에게 꼬리를 잡히겠지. 그럼 정작 필요할 때에 도착도 못할 거야.”

“예. 도착이 문제가 아니라, 특전대를 상대로 살아남을 걱정을 해야 할 겁니다.”

“결국엔 안으로 집어넣는 수를 택하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최윤덕은 연오랑과 같은 의견을 내놨고, 연오랑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음 작전으로 넘어갔다.

“연대 하나는 후미로, 하나는 선두에 집중해라. 체력 안배를 하면서 꾸준히 몰아붙인다.”

“옙!” “알겠습니다!” “충성!”

연락기병은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려 나갔고, 이내 곧 전장의 움직임이 슬그머니 변해갔다.

조선군은 길게 늘어진 홍형청의 군대를 온 사방에서 두들기고 있었는데, 이제 긴 전면전열의 공세가 잦아들고 측면이라 할 수 있는 선두와 후미에 공격이 집중된 것.

공격 방향이 바뀌자 종심이 깊어진 모양새가 됐고, 달리 말하면 선두와 후미의 전열은 미친 듯이 쏟아지는 화살비의 양이 곱절이 되었다는 뜻.

방패인지 아니면 그냥 집의 문짝을 떼어온 건지 모를 나무판자를 가지고 화살비를 막던 선두는,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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