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챕터35. 남하하다 (2)
후미라고 사정은 다를까.
2천에 가까운 기병이 홍형청의 기병을 향해 화살비를 쏟아내니... 이걸 참지 못하고 튀어나간 몇몇이 난도질을 당해 허물어지는 걸 보자, 그들 또한 동요하기 시작했다.
조선군의 공격이 달라진 걸 알아차린 걸까?
장기판 위에 올라선 홍형청은 예상대로 움직였다.
어떻게든 보병 전열을 열어서 기병을 오히려 보병진 안으로 끌어들인 것.
보병을 희생양으로 내세워서라도 기병을 보호하려는 모양새였다.
“예상대로군.”
“예. 적은 우리가 지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흐응...”
연오랑은 최윤덕의 덧붙임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살을 쏘는 건 생각보다 체력소모가 심하고, 말 위에서 쏘는 건 더욱더 심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오십발정도를 연이어 쏘면, 팔을 들어올지도 못할 거다. 몽골, 여진, 조선할 것 없이, 활에 익숙한 이들이 괜히 20발정도 들어가는 화살집을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지.
말은 또 어떤가.
말이 속도는 빠르지만 사람보다 지구력이 떨어지니,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건 보병이 아니라 기병이다.
그러니 이러한 공격이 끝없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고, 꾸준히 버티기만 하면 조선군이 알아서 물러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지친 틈에, 푹 쉰 기병대를 투입하면 조선군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일이 글러먹었다는 걸, 슬슬 느끼고 있을 걸?’
연오랑은 우거지상을 하고 있을 홍형청을 떠올리며, 피식 비웃어줬다.
그가 놓친 건, 조선기병이 전원 궁기병인 동시에 창기병이라는 것.
지금의 조선군은 몽골군보다 더 정예화 됐다.
멀리서는 화살을 쏘고, 가까이에선 여차하면 투창을 날리고, 근접해선 기창, 월도, 편곤, 장도 등의 개인무기를 쥐고 피를 부른다.
이렇게 순식간에 자유자재로 무기를 갈아 끼는 건, 엄청난 훈련양이 동반되어야 가능한 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 않나.
특전대와 눈싸움을 한 적기병대는 싸우기도 전부터 잔뜩 위축됐을 거다. 자신들은 못하는 짓을 특전대는 능수능란하게 하고 있었으니까.
반대로 홍형청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화살비가 쏟아지고 있으니, 버티는 건 좋은데 과연 군기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거다.
누구하나라도 겁먹고 전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면, 그땐 말 그대로 그물에 낚인 물고기가 될 테니까.
‘누가 더 오래 버티는지 겨루는 싸움이 된 거지.’
“음... 몇 번째 돌격이지?”
“일곱번입니다.”
횟수로는 얼마 되지 않지만, 시간은 어느새 훌쩍 흘러 태양이 중천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체력 안배를 위해서 대대별로 쪼개져 하나의 전열을 만들었고, 한번 화살비를 쏟아낸 이들이 다시 화살비를 쏘기 전까진 4,5번의 대대공격이 진행됐다.
홍형청 군대의 입장에선 쉴 틈도 없이 화살비가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조선군 입장에선 나름 여유로웠던 것.
그럼에도 결국 올게 오고 있다.
“기병들보다 전마가 더 빨리 지치겠네.”
“예비마를 가져오긴 했지만...”
“턱도 없이 부족하지.”
연오랑은 아쉬움에 중얼거리는 최윤덕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내저어줬다.
그를 탓하는 게 아니니까.
지금도 북직례를 두드리고 있을 연대에 예비마를 죄다 몰아주지 않았나.
그치들은 쉴 틈도 없이 말을 갈아타고 번개처럼 좌충우돌하면서, 황하 남부지역인 북직례의 하간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을 거다.
기동력이 절대조건인 만큼, 예비마 또한 죄다 끌고 갈 수밖에 없었지.
‘그렇다고 말을 더 가져오는 건, 공청의 의심을 살수도 있었고 말이야. 있는 대로 버텨야지. 뭐.’
“식수는 문제없지?”
“예. 미리 준비해두기도 했고, 저희도 운하를 써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좋군.”
산동상인들은 “아니 코앞에 있는 적을 두들기러 가면서, 뭐 하러 이렇게 많은 물통이 필요한 거야?”라고 의문을 표했지만, 그치들이 이렇게 많은 기병대군을 이끌어보기나 했겠나.
한바탕 시원하게 달리고 온 군마가 퍼먹는 식수의 양은 엄청나서, 군마들은 질서정연하게 운집해 운하의 물을 먹으며 수분을 보충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청도에 올 때부터 이미 홍형청을 치려고 마음먹지 않았나.
이런저런 계획을 대략적으로 세워놨고, 조현에 머물면서 하남의 지형을 정찰해서 홍형청 군대의 이동경로를 예측해, 그에 맞는 전장과 계획을 여러 개 준비해 놨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운하를 끼고 이동할 경우, 홍형청의 발을 묶고 반대로 식수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역으로 적을 끌어들인 거지.
“그래도 잘 되고 있으니, 계속 밀어붙이면 되겠군.”
“예.”
연오랑의 자신만만함이 옮았는지, 최윤덕 또한 자신만만하게 전장을 굽어봤다.
길게 늘어진 전열. 그 앞과 뒤에서 거세게 밀어붙이자, 홍형청의 군대의 전열이 서서히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흡사 압착기에 넣고 누른 것처럼 옆으로 삐져나오기 시작한 것.
거북이처럼 진군하던 선두는 이미 멈춰 서서 오히려 뒤로 밀려나고 있었고, 후미는 엉덩이를 찌르는 창 끝에 더더욱 빠르게 앞 제대에 달라붙었다.
만 명이 넘는 대군이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다양한 형태로 제대를 쪼개는 건, 그게 눈과 귀로 보고 들으면서 지휘할 수 있는 최대단위이기 때문.
옛 명나라의 군제를 유지한 홍형청의 군대도 마찬가지로. 백호소, 천호소로 묶인 백호대, 천호대별로 제대를 이뤘다.
한 덩어리로 뭉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백명 단위로 뭉쳐서 사각꼴의 제대를 형성해 각 제대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포진해 있었던 거지.
허나 선두와 후미에서 강한 압력을 받자, 각 제대간의 간격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나의 제대 안에서는 어깨를 맞대고 밀집해야 기병의 돌파를 막을 수 있다지만, 제대끼리 서로 어깨를 마주할 정도로 바짝 달라붙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제대를 움직일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옴짝달싹도 못하고 그대로 돈좌될 거라는 걸 하급지휘관들은 알고 있었고, 화들짝 놀라 제대를 반전.
앞에서, 뒤에서 밀려오는 다른 제대를 피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옆으로 비켜날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 결과. 두어 차례의 돌격이 더 지나고 나자, 홍형청의 군대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양에서, 조금 두툼한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악!”
“크헉!”
물론 그렇게 제대를 반전하는 와중에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불쑥 돌출되거나 낙오된 제대를 조선군은 가만 놔두지 않았다.
흉흉한 기창이 날아와 어설픈 병장기를 지나쳐 몸을 꿰뚫고, 묵직한 월도가 날아와 갑옷 통째로 짓이겨 무릎을 꿇리고, 하남인들이 아직 구경해보지 못한 편곤이 회전해 머리통이 터져나갔다.
고작해야 백호대 단위로 뭉쳐서 떨어져 나온 이들이니, 수가 월등한 기병의 공격에 무슨 수로 저항할까.
대대는 말 그대로 정면으로 보병을 밟고 지나가버렸고, 말발굽이 지나간 자리에는 온통 허물어져 신음하는 병사들만 남았다.
“계속 밀어붙여라!”
“무너지지 마라! 막아라!”
삐빅! 중대장, 소대장들이 연신 불어재끼는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기병대를 들뜨게 하고.
둥둥둥! 전열 중앙에서부터 터지는 우렁찬 북소리가, 어설픈 창칼을 쥔 보병들의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았다.
전열이 억지로 깨지고 제대가 분열하기 시작하자, 이따금씩 날아들던 화살의 반격도 사라진지 오래.
창을 든 보병들마저도 서로 맞닿아 짜부되기 전에 얼른 옆으로 피했는데, 궁병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이들은 기병대의 공격에 그냥 닿기만 해도 녹아내리는 터라, 누구보다 빠르게 보병대의 꽁무니에 달라붙어 제대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확실히 나름 진법훈련은 열심히 한 것 같네. 하긴 그건 돈이 많이 안 들긴 했겠지.”
“예. 적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군요.”
“우릴 포위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쉽진 않겠지만... 그거 말곤 답이 없을 겁니다.”
연오랑과 최윤덕은 시시각각 변하는 전장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흡사 강평을 내리듯 중얼거렸다.
앞뒤에서 강한 압박을 받자, 홍형청의 군대는 보다 적극적으로 제대를 재배치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동료의 등에 창을 꼽을 만큼 앞뒤 제대가 바짝 붙고 있고, 가만히 있다가는 병사들의 배와 등이 서로 닿을 지경이다.
저대로 가만 놔두면, 다음 수순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압사당하게 될 게 분명. 그렇게 한둘씩 동료의 발에 밟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면, 전염되듯 제대가 무너져 분열하는 건 한순간이다.
그랬기에 오히려 홍형청의 군대는 더욱 빠르게 제대를 재정렬해서, 선두와 후미에 집중된 조선군을 포위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전열의 중간에 위치한 제대를 옆으로 보내서, 전열의 길이는 줄이고 오히려 뻗어 나온 손처럼 역포위망을 만들려 하고 있던 것.
‘하지만... 기병을 상대로 그게 쉬울 리가 있나.’
연오랑은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난장판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흡사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것처럼, 중앙 제대를 빼서 옆으로 이동시켜야 되지 않나.
종대전열에서 횡대전열로 포진을 바꿔 포위망을 만들기 위해선, 중앙제대는 미친 듯이 달려가 끝에 자리 잡아야 한다.
옆에 달라붙는 제대가 늘어날수록, 달려 가야할 거리도 늘어나기 마련인데... 월등한 기동력을 가진 조선기병이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자신들 스스로 전열을 부수고 틈을 보인 거나 마찬가지이니, 조선기병들 입장에선 뭍으로 날아온 물고기를 낚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
그렇게 발이 보이지 않게 정신없이 이동하던 백호대를 야금야금 뜯어먹자, 홍형청의 군대는 또 한 번 작전을 바꿔 움직였다.
퍼즐을 끼워 맞추듯이 제대를 옆으로 한 칸 이동시키고, 중앙제대를 밀어 올려 그 빈자리를 끼워 맞추려고 하고 있던 것.
“무너질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밟으면 밟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반전한 홍형청의 군대를 보고 있던 최윤덕은 여전히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지만,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
연오랑은 사방에서 먼지구름과 함께 피보라가 일어나는 걸 보면서도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보이는 것처럼. 전군을 돌격시켜 밟으면, 충분히 밟을 수 있을 수 있을 거다.
기사공격은 적을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보단, 적을 압박해 제대를 깨트리는 게 목적.
그렇게 제대 간의 간격이 벌어지고 각 제대 속에서도 빈틈이 보이면, 그 빈틈을 헤집고 돌격해서 밟아버리는 게 기병전술의 시작과 끝이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이고, 기사를 하는 기병주제에 중기병 수준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막강한 충격력을 선사해 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그저 승리가 끝이 아니란 말이지.”
“...”
“천하의 눈이 우릴 지켜보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완벽한 대승이지.”
“예.”
연오랑이 뭘 말하는지 아는 터라, 최윤덕도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은 조선의 군력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고, 그저 뜬소문만 익히 들었을 따름. 몽골과 여진을 연이어 두들겼지만, 뭘 어떻게 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나.
이번 싸움은 조선군의 쇼케이스나 마찬가지이고, 산동과 하남호족들 나아가 다른 성의 호족들에게도 보여주는 경고장 같은 거다.
“우린 이 정도로 잘 싸우니까, 감히 우리에게 까불지 마라.”라는 거지.
그래서 연오랑은 단 한명의 기병조차도 헛되이 다치는 걸 우려했고, 그래서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은 거다.
더 좋은 패를 이미 준비해놨는데, 뭐 하러 무리를 하겠나.
“계획대로 간다. 다들 몸이 근질근질 할 테지만, 무리하지 말라고 전하도록.”
“옙!” “충성!”
연오랑이 명이 떨어지 무섭게, 다시금 연락병들이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갔다.
몇 번의 돌격이 이어지는 동안. 홍형청의 군대는 진군을 완전히 멈췄고, 전열 또한 드디어 바뀌었다.
운하를 따라 횡대로 길게 늘어졌던 전열이 이젠 거의 정사각형의 꼴이 됐고, 그러면서도 더욱더 횡대로 분열해 선두와 후미를 보강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가 된 걸 알아차린 걸까? 뜬금없이 운하 저편에서 불꽃이 하늘로 치솟아 노랗고 붉은 빛을 뿜어냈다.
진군을 시작하기도 전에 빠져나와, 전장을 크게 돌아 운하 반대편으로 향했던 화기대.
초석광산을 지키는 연대에서 빼온 화기대까지, 합쳐서 총 60문의 야전화포를 보유한 화기대는 유유자적하게 남하를 시작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먼지구름이 살벌하게 일어나는 걸 볼 수 있으니, 전장을 헷갈릴 일도 없다.
그들은 어느새 은근슬쩍 운하로 달라붙었고, 화기대장은 망원경으로 홍형청 군대의 병사들의 얼굴이 보일 정도까지 근접했다.
조선기병이 뜬금없이 운하 건너편에 등장했지만, 그 수가 몇 되지도 않고 그저 운하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게 끝 아닌가.
화기대의 존재에 대해서 모르는 홍형청 입장에선, 화기대는 운하로 도하하는 걸 막는 예비대로 보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쪽에선 피 튀기며 싸우는 와중에, 반대편에선 서로 발맞춰서 행군하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으나... 이내 곧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운하는 강둑처럼 높이 솟아 있지도 않았고, 무릎정도까지 밖에 올라오지 않는 낮은 제방이 감싸고 있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서로가 훤히 보일 정도.
“쟤들 이제 멈춘 것 같지?”
연대기병과 마찬가지로 무장한 군마에 올라타 있던 화기대장은, 망원경을 가진 포대장들에게 혹시나 싶어 되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홍형청이나 지휘부의 위치는 찾았나?”
“예. 저기 가장 큰 깃발을 휘날리는 곳 아니겠습니까. 저기가 가장 중앙이기도 하고요.”
“음.”
운하 건너편에선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우글거려서, 솔직히 누가 누군지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돛처럼 크게 펄럭이고 있는 장군기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애초에 난장판 속에서도 알아보기 쉬우라고 크게 만든 장군기이니, 망원경으로 보면 더 쉽게 알아차리기 마련.
게다가 지휘부는 안전한 곳에 꼭꼭 숨어 있어야 하니, 운하에 바짝 붙은 중심부에 위치해 있지 않겠는가.
힘껏 펄럭이고 있는 장군기는 기만을 위한 위장이라고 보긴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