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챕터35. 남하하다 (3)
“화기대장님. 적진이 분열하는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 움직이는 군요?”
“자기들끼리 밟혀 죽지 않으려면 별 수 있겠어?”
모두는 장기판 위에 오른 홍형청이 뜻대로 움직여주는 걸 보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고, 이내 곧 철퇴를 내리칠 기회가 온 걸 직감했다.
“확실히 멈췄군. 방열을 시작해라.”
“옙!”
“충성!”
화기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포들은 머리를 돌려 운하 건너편을 노리기 시작했다.
운하의 폭은 채 100미터도 되지 않았고, 육안으로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100미터도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니, 우람한 군마를 앞세워 시야를 가리면 그 뒤에서 뭘 하는지는 보이지도 않지.
화포병들은 능숙하게 방열을 끝마쳤고, 이내 청도에서 사용하고 남은 폭죽을 피어 올렸다.
피유웅!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하늘에서 불의 꽃이 피어올랐다.
다만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터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연거푸 폭죽이 피어오르자 청명한 하늘에 진회색빛의 먹구름이 끼어 흩날렸다.
“알아봤겠지?”
이미 다 계획된 일이지만, 화기대장은 혹시나 하는 우려를 내비쳤으나.
“기병이 후퇴합니다!”
“후미도 후퇴합니다!”
역시 고된 훈련을 받은 이들답게, 폭죽 신호를 알아차리고서 병력을 빼고 있었다.
“좋아! 모두 장군기를 조준했나?”
“옙!”
“발포!”
“발포!”
화기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시야를 가린 전마가 비켜나고 60문의 화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콰콰쾅!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불벼락이 떨어지자, 장군기가 위치해 있던 부분이 쑥대밭이 되어 허물어졌다.
아무리 구경이 작은 야전화포라지만, 그래도 주먹보다 더 큰 철환을 쏴대는 물건이다.
그 작은 철환에 담긴 힘은 막강해서, 잔뜩 밀집해 있던 병사들의 몸통을 아예 반으로 뚫어버리고도 힘이 남아돌았다.
단 한방에 십수명씩 사지가 날아간 이들이 픽픽 쓰러졌으니, 60개의 철환은 말 그대로 강철의 불벼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장군기가 쓰러졌습니다!”
“계속 쏴! 아예 지워버려!”
“옙! 발포!”
“발포!”
화기대는 지금껏 싸우지도 않고 느긋하게 산책만 하지 않았나.
안 그래도 힘이 남아도는데, 전공이 눈에 훤히 보이기 시작하자 손놀림은 더욱 빨라졌다.
콰콰쾅! 또 한 번의 일제포격이 이어지자, 다시금 장군기가 위치한 부분에 지진이 일어나 병사들이 우르르 쓰러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들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었고, 예비대로 빼둔 기병대도 있지 않았나.
그치들을 노리고 포격이 날아들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철환에 직접 맞은 전마는 몸이 뻥 뚫려 쓰러졌고, 난데없는 포격에 발목이 날아간 전마들도 부지기수.
기수조차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전마들이 날뛰기 시작하니, 지들끼리 물어뜯고 밟고 난리가 났다.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기병대가 그 꼴이 났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콰콰쾅! 한번 더 포격이 떨어지자, 기병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낀 전마들은 기수를 던져버리고 온 사방으로 달려가며 밀집된 전열을 안에서부터 뒤흔들었다.
“하하. 역시 예상대로군! 계속 발포하라!”
“발포!”
“적은 넘쳐난다! 포각을 바꿀 필요 없어!”
“장전을 끝마치는 대로 바로 쏴!”
화기대장의 흥이 옮겨 붙었는지, 포대장들도 연신 목청을 높여 신이 난 손놀림을 보여줬다.
‘너무 잘 들어맞아서 오히려 소름이 돋는군.’
화기대장은 지옥도가 따로 없는 적진을 살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선군이 기사를 이용해 적을 압박한 건, 그것만으로도 제대를 분열시킬 수도 있지만 이번 작전의 경우. 오히려 적을 뭉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홍형청 군대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고.
제대 간의 간격을 유지하지 못하고 벌어지면, 그 틈을 파고들어 기병이 돌격해 온다. 좁아지면 자기들끼리 압사 당한다.
그 결과 종대에서 횡대로 변신을 꾀했는데... 운하 반대편에 위치한 화기대 입장에선 반대로 횡대에서 종심이 깊은 종대로 변한 꼴.
그것도 가장 맞추기 쉽고 가까운 타격지점에, 인의 장막에 꽁꽁 보호되고 있던 홍형청의 지휘부가 위치하게 됐다.
이건 “여기 맞춰주세요!”라고 판을 깔아준 건데, 이걸 놓치면 그간 피땀흘려가며 한 훈련이 개고생밖에 안 되는 꼴 아닌가.
닥치고 쏘는 대로 무조건 적이 맞을 수밖에 없으니, 화기대는 화포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미친 듯이 불을 토해냈다.
콰콰쾅! 폭음과 함께 철환이 날아온다.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동료는 어느새 무릎이 날아가 쓰러져 있고, “히익!”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면 뒤에 있던 동료들이 일렬로 주르륵 쓰러져 “아악!” “내 다리!”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땀인지 눈물인지 피 인지 모를 액체를 얼굴에서 닦아내고 있자, 퍽! 옆에서 치고 간 동료에 의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아악!” “끄억!” 멍하니 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포격을 피해 마구잡이로 도망치는 동료들이 보였다.
갑옷을 입든, 맨 몸이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늘에서 쏟아지는 강철의 벼락은 모든 걸 집어삼켰고, 그걸 피해 모든 동료들이 아우성치며 비 맞은 개미떼처럼 날뛰고 있었다.
그 때. 쾅!! 저쪽 앞 제대 쪽에서 굉음과 함께 불길이 피어올라 먼지구름을 확 피워냈다.
켁켁. 자기도 모르게 마신 흙먼지를 토해내고 있자, 불길 너머로는 인세의 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끼워 맞추기도 힘들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가 온 사방으로 흩날렸고.
하늘에서 떨어진 팔다리에 얻어맞은 병사들은 “흐헉!” “도망쳐!” “살려!” 하나같이 기겁해서 제자리에 발이 묶여 쓰러지거나, 자신의 앞을 막는 동료를 아랑곳하지 않고 창칼을 휘두르며 피를 부르고 있었다.
명령을 내리거나 지휘를 내려줘야 할 지휘관들은 이미 어디로 간지도 모르겠고, 자신들이 정예병이라며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던 기병대 또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 되지 않았나.
얼마 되지도 않는 화포와 화약이 유폭으로 폭발한 여파는 치명적이어서, 고급지휘관이든 일반 병사든 가리지 않고 죄다 평등하게 저승으로 보내버린 것 같았다.
“으...”
“도망쳐야 돼.”
“빠져나가야 돼...”
병사는 자신과 똑같은 몰골을 하고서 병에 걸린 사람마냥 중얼거리고 있는 동료를 힐끔 바라봤다.
쥐고 있던 창대가 방패라도 되는 것 마냥,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꼭 쥐고 있었는데... 어째 그럴수록 창대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도망... 그래. 도망쳐야지. 그런데 명령은...?’
병사는 황망한 눈길로 난장판이 된 주변을 둘러봤다.
밀집된 제대를 형성하고, 그 제대 안에 속한 병사는 시야가 극도로 좁아진다.
보이는 거라고는 그저 동료의 뒤통수밖에 없고, 다른 제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이럴 때 필요한 게, 고된 훈련을 통해 형성된 단결력과 사기 이른바 군기다.
비명소리, 고함소리,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 사방에서 울리는 북소리, 기병의 말발굽 소리등.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자신을 옥죄어 오는 두려움을 어깨를 맞댄 동료와 지휘관을 보며 꿋꿋이 버텨내는 거지.
훈련이 되지 않은 오합지졸은 이 두려움을 버티지 못해서, 정작 적과 부딪치지도 않았는데도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알아서 허물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이래서 하급지휘관의 역할이 중요했고, 백호장이든 천호장이든 그들이 괜히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말 위에 올라타 시야를 높여 전체를 조망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자기 부하들이 자신을 쉽게 볼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있던 것.
하지만 병사의 눈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백호장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속해 있던 제대조차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의기양양하게 휘날리던 군기들도 죄다 쓰러져 보이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건 온통 피와 시체들 뿐.
“아아악!” “도망쳐!” “피해라!”
병사는 결국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따라, 자기도 모르게 발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 발놀림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도망친다. 어디로 가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 벗어난다.
그 생각만이 병사의 머릿속에 가득 찼고, 다른 수많은 병사들처럼 그저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무너졌다!” “와아아!”
화기대장과 포대장의 눈에 적진이 완전히 허물어진 게 보이기 시작하자, 힐끔힐끔 전장을 살피던 화포병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자신들 눈에도 적진이 쑥대밭이 되어 적군이 두서없이 패주하는 게 보였으니까.
“중심에 위치한 제대가 부서졌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음...”
화기대장은 눈을 번들거리는 포대장의 물음에, 애써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망원경을 이리저리 굴려봤다.
적진은 기병대를 막기 위해 겉면을 견고하게 구축한 상태. 그런데 뜬금없이 뒤에 있던 이들이 무질서하게 패주하면서 그 겉면을 두들기고 있었다.
안에서부터 폭발이 일어나 껍질을 부수려 하고 있는 상황.
그 껍질이 보다 쉽게 부서질 수 있게, 한손 거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최대한 고각으로, 선두와 후미를 노린다.”
“옙!” “충성!”
포대장의 명령이 이어지기 무섭게, 화포병들은 다시금 방열해 포각을 바꿨다.
화포 옆에는 탈착식으로 된, 꼭 접이식 부채처럼 생긴 반구형의 물건이 붙어 있었는데, 이건 포각을 쉽게 조정할 수 있게 만든 포각 계산기였다.
180도를 나눠서 빗금으로 각도를 표시해 놓은 물건으로, 이 빗금에 화포의 기울기를 맞춰서 포각을 조정하는 거지.
그렇게 각도를 높여 시원하게 화포를 쏘자, 뒤에서 밀려오는 병사들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전열이 몸살을 앓았다.
위에서는 포격이 떨어져 제대 하나를 지워버리고, 뒤에서는 아군이었으나 이젠 적군이 된 거나 마찬가지인 패잔병이 밀려드니... 그나마 버티고 있던 제대마저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나게 화포를 쏘고 있는 와중에,
“포격중지 신호입니다!”
포대장 중 한명이 하늘을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삐유융! 퍼퍼벅! 화기대가 쏜 것과 마찬가지의 폭죽신호가 터져서, 안 그래도 어지럽고 지저분해진 하늘에 검회색 연기를 덧칠하고 있었다.
“포격 중지! 대기!”
“포격 중지!”
“그만 쏴라!” “멈춰!” “대기!”
화기대장의 명령에 화기대는 용케 재정신을 차리고 손을 멈췄고... 이제 자기 손을 떠난 전장에 기병대가 휘몰아치는 걸, 손에 땀을 쥐며 지켜봤다.
“끝났군요.”
“음.”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치는 최윤덕을 보며, 연오랑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될 줄 알고서 진행한 작전이니 당연히 나올 결과지만... 그래도 홍형청의 군대는 확실히 훈련을 해왔는지 생각보다 오래 버텼다.
다만 연오랑은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폭죽신호라. 이거 더 다듬으면 꽤 쓸 만할 것 같은데...’
폭죽신호는 조금 애매한 물건이긴 한데... 폭죽의 색을 다양하게만 만들 수 있다면 나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처럼 거리가 멀어서 효시나 깃발로 명령을 내리기 힘들 때는, 하늘에 터지는 신호만큼 확실한 게 없으니까.
“쓸어 담을까요?”
최윤덕은 딴 생각에 빠져 있던 연오랑에게 재촉하듯 물었고.
“어. 마무리해라. 어차피 패주한 이상 더 싸울 필요 있나. 최대한 많은 포로를 잡는다.”
“옛!” “충성!”
연오랑의 심드렁한 대답에, 연락병들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지휘부에서 쏘아올린 폭죽신호는 포격중지명령인 동시에, 무자비한 사냥을 알리는 신호 아니었나.
적진이 안에서부터 허물어진 걸 알아차린 연대기병은, 수확을 앞둔 농부처럼 설레어하며 벌써부터 포위망을 만들고 있었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살려준다!”
조선기병은 낫질하는 사신으로 변신해서, 메뚜기 떼 마냥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적군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조선군이 지난 세월 동안, 여진족을 상대로 지겹도록 해온 포위 섬멸 작전 아닌가.
기병들은 어색한 중국어를 목청껏 외치면서, 무기도 내팽개치고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적군의 등을 발로 걷어차 쓰러뜨리느라 정신없었다.
그렇게 피의 수확이 시작됐다.
도토리 키 재기긴 허나 어쨌든 그나마 주변에서 가장 높은 구릉에 올라, 꼬박 반나절이 걸린 전투의 마무리를 지켜보던 이들이 있었다.
홍형청의 최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모인 하남호족과, 그런 하남호족이 괜히 조선 정찰대에 걸려 줄초상 당하는 걸 막기 위해 온 산동호족.
끝으로 남직례와 절강을 대표하는 소주와 항주에서 온 상인호족까지.
거의 백여명에 가까운 이들이 웅크리고 서서, 전투의 행방을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워낙 멀어서 병사들은 그저 개미떼처럼 우글거리는 형상으로 밖에 안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잘 알 수 있었다.
명필가의 손에 들린 붓처럼, 조선기병은 유려한 필체를 그려가며 홍형청의 군대를 농락했다.
단 한 번의 끊어짐도 없이, 여기 치고, 저기 치고, 틈이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서 물어뜯고, 옆에서 달려들면 냉큼 빠져나가고.
보고만 있어도 약 올라 죽을 것 같은데, 당하는 홍형청 군대 입장에선 어떻겠는가.
화룡점정은 뜬금없이 터진 포격과 그 포격에 재수 없게 얻어맞아 유폭이 터진 일.
이 먼 곳에서도 열기와 폭발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홍형청의 군대는 완전히 박살났고, 홍형청의 시체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
“...”
“끝났군.”
모두가 충격을 받아 입조차 뻥긋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런 사태를 그나마 짐작했던 산동호족들이 살짝 허무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정말 끝났군.”
“그 골칫덩어리가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이야.”
“정녕 상상 이상이군... 그간 들려오던 소문이 마냥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일세.”
하남호족들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다리가 저리도록 길게 이어진 전투의 소감을 줄지어 늘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