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챕터35. 남하하다 (4)
조선군의 실력은 정녕 상상이상이었고, 연오랑이 원한 반응을 그대로 내놨다.
이들은 혹시나 해서 품었던, “우리가 조선군을 상대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한여름 햇볕에 놓인 얼음처럼 완전히 녹아버렸으니까.
이들조차도 어찌하지 못한 골칫거리였던 홍형청을, 조선군은 말 그대로 녹여버렸다.
더 큰 문제는 저게 조선군의 전력도 아니지 않나.
조선본토에 있는 병력이 밀려오면, 그땐 산동이고 하남이고 남아나지 않을 거다. 이 땅을 지배하는 건 둘째 치고, 적어도 호족가문은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북직례의 소식이 추가로 더 온 게 있나?”
“새로운 소식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미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
산동호족 연태 공가의 후계자인 공형의 말에, 모두는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이들의 우려는 이미 북직례에선 현실이 된 상황.
얼마나 약탈을 당했는지 모르겠다만... 조선군은 몽골군보다 더 지독하고 체계적으로 북직례를 물어뜯고 있었다.
“하하하! 조선과 적대하지만 않으면 되는 데,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나? 아주 속시원하고만. 우리 서주는 아무리 퍼줘도 아깝지가 않네. 하하하!”
“맞습니다. 하하!”
심난한 다른 도시의 하남호족들과 달리. 하남의 서주호족들은 불구대천의 원수를 해치운 것 마냥, 그 누구보다도 반기며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서주. 그 역사가 무려 삼국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도시이자 지역. 그리고 산동과 하남으로 이어지는 운하의 교차점.
서주는 상구현과 바로 맞닿아 있었고, 홍형청이 등장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홍형청이 운하의 허리를 끼고 앉아 패악질을 부렸던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이니... 지금 상황을 누구보다도 좋아할 수밖에.
조선이 과한 요구를 하더라도, 허리띠를 졸라매고서라도 다 퍼줄 의향이 있을 정도다.
“조약대로만 이행하면 손해 볼 건 없을 겁니다. 어르신들. 조선은 딱히 하남 땅에 욕심내지 않을 테니까요.”
“음...”
“그건 그럴 것 같긴 한데...”
“지금껏 조선조정과 저희가 직접 통교한 전례가 없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조선은 의외로 명분보다 실리를 찾지 않습니까. 굳이 상구현을 건드려서 껄끄러운 사이가 되길 바라지 않을 겁니다.”
“흐음.”
“음...”
공형은 흡사 조선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 마냥 말을 이어갔고, 하남호족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무려 청도를 조차해준 산동인들이 나쁠 건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다만... 조약에 따라 조선에 지불할 대가는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좋을 겁니다. 시간이 지체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
“...”
공형의 말은 꼭 협박처럼 들렸으나, 녀석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들썩일 따름.
하남이 미적거리면 조선만 짜증을 내겠는가. 조선과 바로 닿아 있는 산동이 먼저 고달파진다.
“괜히 꼼수부리다가 서로 피곤해지지 맙시다.”라는 의도가 웃음 속에 숨어 있으니, 하남호족들은 다시금 마음을 붙잡는 수밖에 없었다.
시끄럽게 떠들지 않아도 일심동체로 마음이 한곳으로 모였고, 어느덧 호족가주들의 시선이 낯선 이들에게 몰렸다.
굳이 이 자리에 있어야할 이유가 없는, 소주와 항주호족들이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
“그대들도 마찬가지의 심정이겠지?”
이미 알거 다 알고, 서로 안면을 트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가.
각 성으로 구별되긴 하나, 어지간한 대호족과 상인들은 서로 연결고리가 있기 마련.
특히나 운하를 끼고 같은 경제권으로 묶인 하남호족과 소주, 항주호족은 더욱 그러했다. 당장 소주는 남직례에, 항주는 절강성에 속해 있지만, 정작 둘은 한몸처럼 움직이고 있지 않나.
“뭐...”
“그렇네.”
그래서일까? 소주, 항주호족들은 시원하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하남에게 홍형청이라는 골칫거리가 있다면 남직례에도 비슷한 골칫거리가 하나 존재했고, 모두가 그걸 알고 있고 있으니 허세를 부릴 수도 없다.
“조차...라고 했나? 그 생경한 조약이?”
“예. 가주님.”
“자네들과 긴밀하게 상의를 해야겠어.”
“저흰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형은 소주호족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거미줄에 자신만 묶일 수는 없는 법.
산동이 뭐 좋아서 청도를 조선에게 떼어줬겠는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다.
남직례와 절강 또한 산동과 똑같은 처지에 몰렸으니... 자신만 손해를 보는 건 상인답지 않은 처사.
공형은 물귀신이 되어 소주와 항주를 끌어당겨서, 조선이라는 거미줄에 엮어버릴 속마음을 애써 웃음 속에 숨겼다.
*****
회전에서 패배하더라도 병사들이 한순간에 몰살당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패배를 직감하고, 패주하는 순간부터 학살극이 벌어지기 마련.
홍형청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지.
조선기병을 직접 상대하며 사상당한 병력은 채 일천이 못 됐고, 포격을 받아 죽거나 다친 병력도 일천에 못 미쳤다.
그럼에도 지휘부는 소멸됐고, 반나절동안 간신히 유지하던 사기가 허물어지자... 남은 병력은 그대로 패잔병이 되어 마구잡이로 패주했던 것.
그나마 남은 지휘관이라도 있었으면, 패주한 병력을 잘 수습해서 후방에서 재결집 했겠지만... 보병이 기병의 추격을 뿌리치는 게 쉬운 일일까.
장애물 하나 없는,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에서 도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게 조선군은 남은 병력을 모조리 포로로 잡은 후에, 무인지경이 된 상구현을 곧장 내달려 점령했다.
그렇다고 포로의 처지가 고달팠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홍형청을 제거한 이상 조선은 여기서 빨리 손을 떼고 싶었고, 하남호족은 최소한으로 상한 상태의 상구현을 차지하길 원했다.
이를 위해선 상구현의 주민이나 마찬가지인 포로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니,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굳이 죄다 잡아 죽일 필요가 없었던 거지.
조선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히려 홍형청의 병사들조차 친절히 치료해줬다.
나름의 명성과 조선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포장했지만, 실상은 그저 군의관들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하남인들이 죽든 말든 조선에겐 아무 상관도 없으니, 이보다 속편한 실험장이 또 어디 있을까.
치료받다가 살면 운이 좋은 거고, 죽으면 운이 나쁜 거지.
핏빛처럼 검붉은 두정갑을 입은 군의관들은 열심히 손을 놀리며, 조선의 자비를 몸소 실천했다.
가사와 흡사하게 생긴 회색빛 두정갑을 입은 군종승들도 바삐 움직였다.
죽은 이들이 불교를 믿든 말든, 이 또한 무슨 상관일까.
그저 살아남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죽은 이들에게 안식을 주면 그만.
괜히 시체를 남겨두면 전염병만 퍼지고 문제만 생긴다.
군종승들은 포로를 이용해 단체 화장을 하고, 제단을 만들어 작게나마 장례도 동시에 진행했다.
원정전쟁 때부터 익히 해온 탓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발 빠른 움직임을 보여줬고... 이런 모습에 오히려 하남호족들이 더 당황했다.
이렇게 빠르게 뒷수습이 진행될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게 고작 일주일 만에 상구현의 모든 곳이 안정화되고, 개봉,정주,허창,서주의 호족들이 가병을 이끌고 들어오자 곧장 말머리를 돌려 청도로 되돌아갔다.
불어날 대로 불어난 상구현을 어떻게 나눠먹든지, 그건 하남호족들이 알아서 할 일.
조선군은 “우린 약조대로 했으니, 이젠 너희가 약조를 지킬 차례다.”라는 걸 몸으로 보여줬고, 하남호족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한바탕 산동,하남,북직례를 휩쓴 태풍이 지나갔지만, 청도는 웅크리고 있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번잡해졌다.
이젠 공청이 없는데, 조선이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가 없지 않나.
그간 미뤄뒀던 주둔지 건설 및 군용선소의 건설에 곧장 돌입했다.
청도포구는 민항인 동시에 군항의 역할도 겸하게 될 거라서, 포구의 한쪽에 성채를 쌓아 접근을 막고 선박을 수리할 수 있는 선거와 기계들을 조립하기 시작.
군항과 선거는 조선군이 주둔할 주둔지와 붙어 있고, 앞으로도 산동인의 출입을 금할 예정이라서 나무부두와는 사뭇 다른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었지.
그 말은 조선에서 엄청난 수의 건축가와 기술자가 밀려왔다는 뜻이고, 그에 맞춰 엄청난 수의 선박과 연대병들도 함께 몰려왔다는 뜻.
“또 오는군.”
“그러게 말일세.”
연오랑을 대신해 청도를 총괄하고 있던 황보인은, 수평선 저편에 등장한 거대한 그림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다만 옆에서 양념을 치고 있는 이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눈을 흘기고 말았다.
“안 바쁘십니까?”
“나야 바쁠 게 있나. 대감께서 돌아오신 다음부터 움직일 테니, 지금은 푹 쉬어둬야지.”
“흐응.”
황보인은 흡사 자신을 놀리는 것 같은 박홍신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불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 태평해서 눈꼴사나울 지경이다.
“그래도 해군 덕분에 일이 빨리 진행된 것도 있지 않나. 우리도 육군 못지않게 땅 파는 건 일가견이 있으니까.”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는 건, 착호군 1기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전통이고 해군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은 해군사령부 및 신형부두를 자기 손으로 건설했고, 그간 여진인들이 관리하지 않았던 만주의 강을 다듬으며 보급창과 수참을 건설해 왔다.
고작 1,2km밖에 안되긴 하지만 무려 운하까지 파버릴 정도로, 땅파기에 진심이지 않나.
사천이 넘는 일꾼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인터라, 박홍신의 말은 절대로 틀린 게 아니었지.
“그나저나... 전함이 계속 충원되는 걸로 봐선, 조정에선 이번 기회에 해군을 제대로 굴리려는 모양입니다.”
“실전만큼 좋은 훈련이 없다고 하지 않나. 어업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곡물을 뜯어냈으니, 최대한 부릴 수 있는 만큼 부려봐야지. 흐흐.”
박홍신은 괜히 신이 나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황보인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터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황보인도 초창기 착호군을 보고서 눈이 돌아갔고, 그들을 이끌고 원정을 떠날 때 얼마나 들떴었는가.
칼을 찬 장군들에게 잘 훈련된 대병을 지휘하는 건, 그야말로 평생의 염원이자 희열 아닌가.
해군으로 변모한 수군 입장에선, 지금 상황이 착호군이 원정전쟁을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이니...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서 어린아이처럼 들뜬 게 분명.
청도에 주둔하고 있는 해군뿐만 아니라, 본토에 있을 해군들도 소식을 듣고 마음과 몸이 붕 뜬 상태일 거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지 않았을까?
그 때문일까? 지금 청도로 온 신형전함은 무려 18척으로, 조선이 보유한 신형전함의 대부분을 이곳에 밀어 넣었다.
“본토에 있을 해군을 전부 이곳에 투입하는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황보인은 혹시나 싶어 그리 물었으나, 박홍신은 “뭔 소리 하는 거냐?”라는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인가? 보급? 해군 보급이라고 해서 육군과 크게 다를 게 없는데? 설마 병력의 공백을 말하는 건가?”
“예.”
“그럴 리가 있나. 아직 기선군이 남아 있고, 왜구도 없어진지 오래 되서 지금은 아국 해안을 얼씬거리는 이들도 없네. 배가 없어서 문제였지, 사람이 없어서 문제가 생기진 않았네.”
“흐음.”
황보인이 미심쩍은 모습을 보이자, 박홍신은 “외방에 오래 나와 있더니, 뭘 모르는고만?”이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신나게 입을 놀렸다.
해군이 창설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짠! 하고 등장할 순 없다.
당연히 기선군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수군호를 민호로 전환해서 인원을 축소하면서 해군에 흡수되고 있는 상황.
그 결과. 기선군을 제외하고도 해군 병력만 무려 3만에 가까웠다.
지난날의 기선군에 비하면 수가 적긴 하지만, 숙련도로 보나 훈련도로 보나 기선군과 비할 바가 못 된다.
오히려 병력에 비해서 타고 다닐 배가 적은 게, 더 큰 문제였던 것.
신형전함에는 대략 250~300명 정도가 승선하니, 육지에 머무는 병력이 있더라도 일단 전함이 100척 넘게 있어야 짝이 맞는다.
허나 신형전함은 청도에 머무는 동안 열심히 찍어냈어도, 이제 겨우 30척을 넘어가는 수준.
이러니 해군은 땅 위에 만들어 놓은 실물크기의 전함에 올라서, 돛을 다루는 육상훈련만 죽어라 했다. 그리곤 배를 돌아가며 타면서 실제훈련을 이어갔지.
그러고도 병력이 남아서, 대략 1만 정도는 만주의 강을 정비하고, 수참을 건설하고, 조운 및 물자운송을 겸하고 있었다.
“작년에 말려 놓은 목재가 완성되고, 원산과 조산의 선소에서 일하는 장인들도 슬슬 손에 익지 않았나. 요즘은 달에 두 척씩은 나오고 있네. 훈련은 배가 나오기도 전부터 죽도록 해왔으니, 배만 나오면 곧장 이곳으로 보내도 문제될 건 없지.”
“음.”
황보인은 얼핏 들었던 풍문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해와 서해가 그렇게나 차이나는 겁니까?”
다만 궁금증이 밀려와 다시금 되묻고 말았다.
해군출신들은 하나같이 이 소리를 하는데, 정말로 그런 걸까?
“말도 말게. 무릉도에 갔다 오는 것에 비하면, 산동에 오는 건 누워서 떡먹기나 다름없으니까.”
박홍신은 자랑을 하듯 혀를 내두르며, 흡사 설객 마냥 열심히 혀를 놀렸다.
누가 보면 해군을 홍보하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다.
해군훈련소와 훈련원이 동해에 위치해 있는 건, 중국과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동해가 훈련하기에 더 좋아서다.
수심이 깊다는 말은 그만큼 파도도 거칠고 풍랑도 거치니, 동해를 겪고 나면 서해는 잔잔한 미풍처럼 느껴질 정도지.
원래 역사에서 영국해군이 세계최강으로 군림했던 이유도, 험악하기 짝이 없는 북해바다를 노닐던 이력 때문 아닌가.
북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해는 다른 바다에 비하면 험한 편이었지.
이렇게 동해바다를 돌며 훈련을 진행하자, 무릉도. 미래에는 울릉도라 불리는 섬의 역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