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챕터35. 남하하다 (7)
“잘 해봐라. 실패해도 나쁠 건 없을 테니까. 말이 다니기 힘든 곳에 낙타를 써먹으면 되겠지.”
“흐흐. 걱정 마시죠. 창주에 오가는 상인중에서 낙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녀석은 연오랑의 응원에 힘을 받았는지, 더욱 쾌활하게 창주에서의 생활을 풀어놨다.
한참 이야기꽃을 피웠고 이젠 연오랑이 질문할 차례.
헌데 뜬금없는 걸 물었다.
“요새 양녕대군은 어떻게 지내고 있냐?”
부마가 되기 전부터 그랬지만, 부마가 된 후로 연오랑은 세인의 눈을 의식해서 효령,양녕대군을 의식적으로 멀리해 왔었다.
물론 친하게 지내는 이인도 따지고 보면 왕자지만... 녀석은 서자에, 나이도 한참 어린 동생이고, 어린 나이에 착호군에 들어와 구르면서 조정대신들과 연줄도 없지 않나.
그래서인지, 이인은 당황해서 되묻고 말았다.
“예? 갑자기 그건 왜...?”
“다른 게 아니라 효령대군을 뜬금없이 만났더니, 양녕대군이 뭐하고 있는지 궁금해져서. 요즘도 사고치고 다니냐?”
“아뇨. 정신을 차린 건지, 새로운 재미를 찾은 건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사고를 안 치고 있죠. 의외로 장사에 소질이 있던데요?”
어려서부터 연오랑과 오래 붙어있어서 그런지, 녀석은 이복형에 대한 존중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사에 기록되진 않았지만, 어쩌면 어릴 적에 개차반처럼 구는 양녕에게 된통 당했을지도 모르고.
“장사?”
“예. 염전기업을 허가받은 건 알고 계시죠? 그걸 잘 키우더니 양주釀酒기업으로 발을 넓혔죠. 하여간 누가 술 좋아하는 인간 아니랄까봐.”
“호오.”
‘이건 몰랐네? 그 인간이 정신을 차렸을 줄이야. 아닌가? 성격이 지랄 맞아서 그렇지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양녕은 그 지랄 맞은 성질을 뛰어넘을 정도로,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명필가로 이름이 높지 않았나.
연오랑은 뜻밖의 소식에 흥미를 보였고, 이인은 투덜거리면서 설명을 늘어놨다.
원래 역사에서는 양녕을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말이 많았지만, 지금 역사에선 그런 말을 하는 신료들이 단 한명도 없었다.
운석핵꿀밤으로 조선사상계가 분열하면서 몇 되지도 않던 학맥과 인맥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유향소조차 없어진지 오래고, 그걸 다시 입 밖으로 꺼내는 사람마저 없다.
지방향촌을 파고들어 훗날 사림으로 변모할, 근본성리학을 추종하는 사학계열. 이들은 연이은 개혁조치로 인해 완전히 사라진 상태.
관직이 수십배로 늘어나면서 관리들은 정치관료에서 행정관료로 변모했고, 양전사업 등으로 인해 양반사대부와 지방호족은 정치력을 잃어버리고 그저 자금력을 가진 기업가로 변모했다.
군부의 창설이 가시화되면서 상비군으로 변모한 조선군은 날이 갈수록 강맹해졌고, 동시에 정치권력 및 조정신료들과도 거리가 멀어졌지.
당장 전라도엔 황희가 이끄는 착호군이, 경상도엔 태종이 이끄는 착호군이 있고, 북방에는 진짜 실전을 겪은 육군기병연대가 줄줄이 포진되어 있지 않나.
이 말은 즉. 폐세자인 양녕에게 달라붙어서 그를 부추겨 권세를 얻으려는 사람도 없고, 반대로 양녕이 손을 내민다고 해서 그를 따라 반기를 들 가문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
명분으로 보나, 사상으로 보나, 군력으로 보나, 세종은 넘을 수 없는 산이 된 상태인데... 어떤 정신 나간 가문이 양녕과 손을 잡고 반정을 꾀하겠어.
자연스럽게 양녕은 조정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지.
‘그래서 양녕은 자기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 지냈다는 거군.’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인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오래전. 세종은 궁방전과 공신전을 모두 조정으로 흡수하면서, 그 대가로 염전기업을 허가해줬다.
양녕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그도 받았던 땅을 토해내고 충청도의 해안가로 거처를 옮겨 염전기업을 시작했다.
왕이 되지 못한 한을 풀려는 건지, 아니면 왕이라는 굴레를 벗어서 속이 시원했는지 모르겠다만... 그는 생각보다 염전기업을 꽤 잘 키워냈지.
그렇게 자금을 모으더니, 제 버릇 못 버린다고 양주釀酒기업을 설립했다.
술을 제조하는 양주기업은 조선에서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사업으로. 예전이라면 “식량으로 삼을 곡식도 없는데, 어디 술을 만들어!?”라고 탄압했겠지만, 지금은 식량 걱정을 안 하는 시대 아닌가.
온갖 곡물로 만든 소주,청주,탁주는 물론이고, 과수원이 생겨나면서 과실주와 혼합주가 발전하기 시작했고.
북방으로 진출하면서 요동, 몽골, 여진의 술제조기술이 들어오고, 제주를 통해 일본, 동남아시아의 술까지 야금야금 들어왔다.
이에 발맞춰서 양주기업과 운송기업이 손을 잡고, 남방의 술을 북방에 내다 팔고 북방의 술을 남방에 팔고 있는 상황.
의외로 조선의 술은 외국상인들에게 쏠쏠하게 팔리는 수출품 중 하나였다.
그야말로 술의 전성시대가 펼쳐졌으니,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양녕 입장에서는 천국이 따로 없지 않을까?
그렇게 양주기업을 제대로 키운 양녕.
그는 전국의 술을 맛보고 다닌다는 핑계로 사방팔방 싸돌아다니면서, 각도의 유명한 기생집이라는 기생집은 다 들려서 놀고 있다고 했다.
“옛 버릇을 못 버렸나 보군?”
“이름난 술은 기생집으로 가장 먼저 가는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핑계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죠. 게다가 요샌 어지간한 도시에도 기생집이 너도나도 생기고 있어서, 그 인간 입장에선 살판났겠죠. 조정에선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 데 말입니다.”
“음...”
연오랑은 사정없이 양녕을 까내리는 이인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확실히 돈이 제대로 돌긴 도는 모양이야.’
속으로 이 생각이 먼저 들어서, 오히려 기뻤으니까.
예전에는 기생집이라고 해봐야 사람이 몰리는 한성,개성,평양에나 조금 있던 게 고작이었다. 술과 음식을 파는 주막이나 객주 따위는 있지도 않았고.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어지간한 도시마다 기생집이 들어설 정도면 그만큼 소비자가 늘었다는 뜻이고, 비싼 기생집 말고 상대적으로 값싼 주막과 객주는 더 많이 생겨났을 거다.
이젠 술을 집에서 만들어서 자급자족하는 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술을 사먹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지표니... 이것 하나만 봐도 조선경제가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걸 알 수 있지.
‘특히나 조정에서 신경을 쓸 정도면... 술시장이 진짜 엄청나게 커졌나 보군.’
지금조정은 예전조정과 달리 엄청나게 비대해졌고, 할 일 또한 엄청나게 많지 않나. 고작 기생집 따위에게 신경을 쓰기에는 커져도 너무 커졌다.
그런 조정이 관심을 가질 정도라면, 이쪽 시장의 성장세가 무시무시하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그렇게 놀고먹고 지낸단 말이지? 사원들 처우는 어떤데?”
“그게... 이 인간이 상재가 있다고 했잖아요? 염전기업이나 양주기업 사원은 꽤 잘 대해주고 있습니다. 손찌검도 안하고 월급도 따박따박 잘 주고요.”
“오...? 그 버릇은 또 고친건가?”
“글쎄요. 아무래도 처지가 달라졌으니, 보는 시야와 행동거지도 달라진 게 아닐까요? 게다가 마냥 놀고먹는 것도 아닌 게, 저번에는 새로운 술을 만들었는데 이게 의외로 호평을 받아서 돈을 꽤 벌었다고 하더군요.”
“흐음...”
이인의 말도 일리가 있어,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금의 양녕은 “술 좀 그만 먹어라.” “공부해라.” “그만 좀 놀아라.” “여자 좀 그만 불러라.” 등등. 세자시절에 그를 억압해 왔던 굴레가 단 하나도 없다.
사고만 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걸 다할 수 있고,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술과 여자를 마음껏 즐길 수 있지 않나.
그는 지금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행동거지를 나름 조심해야할 거고, 이젠 자기 돈으로 놀고먹어야 하니 그만큼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을 거다.
‘왕족이 술을 파는데 누구도 뭐라 안하는 조선이라... 진짜 많이 변했군.’
원래 역사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지금 역사에선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
그가 이끌어낸 세상이지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쩌면 양녕은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 생활을 계속 지속하는 걸지도.’
아무리 기업가라지만 왕족이 술을 팔고 다니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어쩌면 “난 왕위를 위협할 위험인물이 아니다!”라고 표현하는 위장전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인들의 평은 어떠냐? 조정에서 뭐라고 안하든?”
“처음에는 조금 말이 있었는데 요즘은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죠. 이러나저러나 그 인간만큼 풍류를 즐기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맞지.”
“양녕이 극찬한 술! 양녕이 인정한 기생! 이러면 이름값이 팍팍 오를 정도라서, 기생집과 양주기업에선 그 인간의 방문을 잔뜩 기대하고 있죠.”
“오... 어쩌면 그래서 정신을 차린 걸지도 모르겠군?”
“예. 뭐. 그럴 수도요.”
탐탁지 않게 보는 이인마저도 그건 인정하는지, 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는 끄덕였다.
‘하긴 양녕도 인간인데, 인정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마찬가지겠지.’
왕의 자리는 물려받은 거지만, 풍류가와 사업가로서의 명성은 양녕이 스스로 쌓아올린 거다.
일종의 샐럽이 된 거랄까?
똑같은 행동을 해도 옛날이었으면 “세자라는 놈이 술만 처먹고 다니냐.”라는 말을 들었겠지만, 지금은 “오. 시음을 하시는 겁니까? 이번 술은 어떻습니까?”라고 공경을 받는 상황.
양녕은 결코 멍청한 인물이 아니니, 자신이 손수 이뤄낸 명성과 업적을 괜히 성질을 부려서 망치진 않을 거다.
‘양녕은 이제 완전히 신경을 꺼도 되겠네.’
본래도 별 관심이 없었지만, 양녕에 대해서 아예 제쳐두기로 다시금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기생집과 술이라...”
“왜요? 형님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렇게 기생집, 객주와 주막이 도시에 마구 생겼으면, 슬슬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아... 그 부분은 뭐. 조정에서 논의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야겠지.”
술 먹고 사고치는 건 예나지금이나 똑같지 않나.
술집거리에서 온갖 문제가 발생하는 건 이미 예정된 상황이다.
‘게다가 이권이 있으니 슬슬 지저분한 놈들이 달라붙을 수도 있겠지. 시대가 한참 다르지만 검계 같은 놈들이 튀어나올 수도 있잖아? 아닌가. 그건 조금 너무 갔나.’
연오랑은 속으로 머리를 굴려댔다.
원래 역사에서 조선중후기에 등장하는 검계는 단순히 조직폭력배를 넘어서 사회제도에 불만을 품은 반란분자 비슷한 존재였다.
술집의 이권을 차지하려고 칼부림을 하는 건 당연한 건데, 그 배경에는 양반을 증오하고, 사회를 부정하고, 신분제를 배제하는 등의 꽤 막나가는 사상을 품고 있었다.
당연히 그 조직원들도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 많아서, 꽤나 잔혹하게 굴기도 했지.
하지만 지금 조선에선 신분제를 조정이 알아서 부수려고 하고 있으니, 검계 같은 우악스런 조직이 생겨날 이유가 없다.
술집이권을 노리는 평범한 파락호, 폭력조직. 흔히 왈짜라 불리는 이들만 은근슬쩍 생겨나지 않을까?
‘뭐... 원래 역사에서 세조가 이들 왈짜패거리를 반정에 동원했다는 말도 있으니까. 수는 많지 않더라도 있긴 있겠지.’
다만 이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건 쉽지 않을 걸로 보였다.
원래 역사에선. 궁궐과 도성을 숙위하는 병사들 중에선, 칼을 차기 귀찮다고 칼날을 줄이거나 손잡이만 끼우거나.
갑옷이 무겁다고 찰갑을 끼워 넣지 않은, 겉껍질만 갑옷형상을 한 위장갑옷을 입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역사에서의 숙위군은, 북방에서 피 맛을 보고 돌아온 진짜 야전군인이다.
중앙군 및 착호군이 육군으로 바뀌면서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직순환이 이뤄졌고, 그로 인해 한성에서 근무하는 걸 휴가라고 받아들이는 이들조차 생기지 않았나.
궁궐을 숙위하는 내금위 등은 훈련대와 기사대에서도 가려 뽑은 이들이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왈짜패가 조금만 문제를 일으켜도, 하루아침에 싹 쓸어버릴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그래도 군대와 경찰은 업무가 너무 다르단 말이야.’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더욱더 머리를 굴려봤다.
지금 시대에는 딱히 군대와 경찰의 구분이 없다.
포도청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형조에서 필요할 때마다 병조 휘하의 무관, 군병들을 불러서 쓰는 형태였다.
수십년 후 성종 때에 가서야 포도청이 창설되고, 그 구역조차 도성과 경기 일대에 불과했다. 지방에서 사건이 터지면 보내고 말고 하는 거지.
조선중후기로 가면 상업이 발달하면서 당연히 이권을 노린 범죄사건이 불어났고, 자연스럽게 포도청 또한 제대로 된 조직과 체계를 갖추면서 덩치를 키워나가게 된 것.
‘하지만 지금은 벌써 상업자본이 생겨났단 말이지. 자연히 경찰의 역할을 할 조직의 필요성이 생겨났을 거야.’
미래를 당겨왔으니,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함께 따라오는 건 당연한 일.
이권을 노린 범죄가 늘어날 테니, 이걸 대비할 조직 또한 창설이 필요할 거다.
“포도청의 창설이라...”
“포...도청이요? 도둑 잡는 기관을 말씀하는 겁니까?”
“어. 포도捕盜라는 말이 조금 그런가? 도둑도 잡고, 수배자도 잡고, 치안도 유지하고. 뭐 그러는 조직이지.”
“흐음.”
이인은 “어차피 숙위군이 있는데 그게 왜 필요하지?”라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완전무장한 연대병이 도성과 도시를 들쑤시고 다니면 모양새가 나쁘잖아. 전쟁 난 것도 아닌데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백성들 입장에선 불안할 테니까.”
“예. 뭐...”
이인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지금 조선에서 연대병이 안돌아 다니는 곳이 있기나 한가? 조선내지마저 착호군이 돌아다니고 있잖아?’라고 반문을 숨기지 못했다.
“네가 말하지 않았냐. 조정에서도 논의하고 있을 거라고. 도둑놈 잡는 일에 연대병을 투입하는 건 수지타산이 안 맞는 일이지.”
“예...”
“게다가 연대병은 사람 죽이는 일만 전문적으로 익혔는데, 도둑놈 잡는 일을 잘하겠냐? 그에 대한 전문가를 키우는 게 낫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