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챕터35. 남하하다 (8)
“그것도 일종의 전문화, 특성화겠죠?”
“그렇게 보면 그럴 거고.”
이인은 대충 이해했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조선을 이끌어가는 화두는 자주화, 전문화, 특성화이니, 그런 상설조직이 생기는 것도 어떤 면에선 나쁘지 않아보였다.
“크게 신경 쓸 건 없다. 내가 알아서 서신을 보내마.”
“옙!”
둘은 다시금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
“...”
잠깐의 침묵이 머물렀다.
할 이야기는 이제 거의 끝났으니,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할 시간이 됐으니까.
낙타를 노래 부를 정도로 창주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녀석이, 이 먼 산동의 청도에는 대체 왜 왔을까.
“네가 온 걸 보면, 이제 정식으로 움직이려는 모양이지?”
“예. 이제 새로운 부서가 만들어졌으니, 제대로 밥값을 해야죠.”
“외교무역부라...”
‘하긴 어떻게 보면, 늦어도 한참 늦었지. 이제야 진정으로 중국을 떨쳐내고 일어나는 모양이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이인을 보며, 연오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안 그래도 새로운 부서가 많이 생겼는데, 외교무역부가 생긴 게 뭐 대수냐 하겠지만... 이번엔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운석핵꿀밤 이후. 주자가례에 근거해 만들어졌던 국조오례의와 경제육전은 전면재검토에 들어갔고, 명이 망하면서 자연스레 기존 국제외교의 큰 틀이 무너졌다.
천명, 중화, 사대, 황제국이 이 시대의 외교관계를 정립해주는 뼈대였는데, 이 모든 게 부서졌으니까.
게다가 조선에 현대적인 의미의 외교관이나 외교부서가 있었던가.
전객사典客司는 국조오례의에 의한 황제국, 혹은 제후국을 대하는 절차와 의전을 담당하는 실무조직이었고, 사역원의 역관은 통역사의 역할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정책결정은 조정대신들이 한 대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서 도출.
사신 또한 그때그때 적임자를 뽑아서 보내는 방식이지, 외교관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서는 따로 없었던 것.
하지만 이젠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조선의 강역은 너무 넓어졌고, 그 만큼 직접적으로 통교하는 나라도 많아졌다.
몽골, 우량카이3위, 여진, 일본, 기타 동남아시아의 소국, 나라도 아닌 주제에 나라만큼이나 거대한 요동, 산동 등의 중국세력.
이들을 대체 무슨 기준으로 줄을 세워, 예전의 예법에 맞춰 대하겠나.
동아시아의 큰형님으로 행동하는 건 훗날의 중국왕조가 부담되어 일찌감치 포기하고, 조공이 아닌 사무역으로만 진행하다보니 그간 접하지 못했던 온갖 문제가 튀어나왔다.
기존의 틀을 깨부수지 않는 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으니, 자주화를 외치던 조선은 그 틀을 깨부수기로 결정했다.
이제 줄 세우기는 그만하고, 그냥 다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거지.
얼핏 보면 “당연한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것 자체가 수백년을 이어온 중화사상을 깨부순 것과 다름없다.
“나만 문명인, 나 빼고 다 야만인 오랑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난 거니까.
물론 일반 백성들 중에선 “왜구놈들, 야인놈들.” 이러면서 멸시할 순 있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교육이 미흡해 의식수준이 아직 부족하니까.
적어도 조정의 기조와 조정신료들의 생각이 바뀐 것만으로도 충분히 괄목할만한 성과지.
‘그리고 이걸 완성한 게, 나나 세종이 아니라는 점이 더 주목할 만하지.’
연오랑은 이 부분이 더욱더 기특하고 대견하게 느껴졌다.
지금껏 이어진 개혁조치는 전부 연오랑이 밑그림을 그리고, 세종과 태종이 살을 붙여 만들었다.
조정신료들은 “이거 이렇게 해도 되나?” “이게 맞는 건가?” 싶으면서도, 딱히 다른 방법이 없으니 “이거라도 해보자.”라는 식이었지.
헌데 이번 일은 세 사람이 언질을 줬으나, 조정신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일이니 감격할 수밖에.
물론 속을 까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자기 밥그릇이 달려 있었다.
운석핵꿀밤 이후로, 주자가례에 맞춰 국가의례를 만든 예조는 폭풍에 휩싸였다. 주자가례가 망가졌으니, 국조오례의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판이니까.
예조의 속아문 및 사역원등의 부서 또한 전부 잠정휴업상태에 들어가서 다른 부서에 속해 일을 해오지 않았나.
할 일이 없어지면 책상을 치우는 게 인지상정.
이대로 가다가는 예조 자체가 반토막이 나고, 온갖 속아문 자리가 없어질 판국이니... 이들은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뭔가 그럴싸한 걸 만들어내야 했다.
그리하여 예법에 정통한 전객사, 계제사稽制司 관리들, 외교문서를 관리하던 승문원承文院 관리들, 무역에 정통한 의주의 호조 관리들.
귀화교육당으로 흡수된 사역원 관리들, 무역과 관세, 기업을 연구하는 집현전 관리들, 사신행을 여러 번 다녀온 노신들까지.
이들이 전부 모여 머리를 맞대어 만들어낸 게, 바로 외교무역부였던 것.
이인은 창주에서 무역을 하면서 외교무역부가 할 일을 이미 예습한 상태나 마찬가지였으니, 자연스럽게 외교무역부로 적을 옮기게 됐지.
그리고 이 외교무역부가 자신을 뽐낼 사건이 곧장 터졌다.
조정이 산동의 일에 끼어들어서, 청도라는 있지도 않던 항구를 차지하기로 결정한 것.
조차라는 조약은 지금껏 있지도 않았고, 연판장 조약이라는 것도 있지도 않았다.
연오랑이 큰 틀을 짜긴 했지만, 외교무역부는 이번 작전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할 대사건임을 직감하고서, 이번 일에 심혈을 기울였지.
결국 성공했고 하남까지 정리했으니, 외교무역부는 확실히 조정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허나 아직 일은 끝나지 않았다.
청도만큼이나 중요한 다음 조약이 남아 있었으니까.
“소주와 항주상인회 사람들을 만나봤지?”
“예. 살펴보니, 항주뿐만 아니라 영파, 태주부, 온주부의 해안도시 상인회도 함께 왔더군요.”
“어떻더냐?”
“살짝 놀란 눈치던데요? 제가 올 줄은 몰랐던 모양입니다.”
“흐응.”
연오랑은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하고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마인 연오랑이 일을 벌인 것만으로도 솔직히 부담스러운데, 조선의 왕자가 여기에 더해졌다. 서자든 뭐든 어쨌든 조정을 대표해서 온 왕자니까.
그만큼 이번 일을 조선이 중히 여긴다는 뜻이니, 남직례와 절강상인들도 쉽게 생각할 수 없었겠지.
“그래도 큰 틀은 이미 정해졌으니까 별 문제는 없겠지? 산동이나 하남과 다른 형태의 조약을 맺는 건, 모두가 껄끄러워질 테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하. 천진이 박살난 걸 보고서, 화들짝 놀라서 조약을 수정했는데, 그게 발목을 잡은 것 같은데요.”
“아마도...”
‘분명 산동상인들은 자신만 손해를 보는 걸, 눈뜨고 보고 있진 않았겠지.’
연오랑은 그리 생각하며, 이인의 웃음에 합류했다.
천진을 박살내고 산동반도 해안가를 조선해군이 위협하며 청도로 다가오자, 산동인들은 재깍 머리를 굴렸다.
조선해군력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막강했고, 선택지는 둘밖에 없다.
바짝 엎드려 조선의 등에 올라타서 편히 가든가, 아니면 조선해군력과 비등하게 힘을 모아 수군력을 키우든가.
하지만 후자는 지금껏 해왔던 일이나, 그러고도 천진을 압도하지 못해서 매번 약탈당하지 않았나.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던 거지.
그 결과 10년으로 맺었던 조약을 30년으로 늘려서, 북평부의 수군을 조선해군의 힘을 빌려 말려 죽일 생각을 했는데... 이게 어쩌다보니 남직례와 절강상인에게 악수가 됐다.
같은 형태의 조약이라면, 그들 또한 30년 조차조약을 맺어야 할 판이니까.
“하지만 별 수 있나요? 그들도 공청, 홍형청과 같은 골칫거리를 처리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만 갈면서 놔두고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처리하길 바라겠지요.”
“그럴 거다. 처리할 수 있었으면 진작 처리했을 테니까. 게다가 그들도 천진소식은 들었을 것 아니냐. 신형전함이 남직례와 절강 앞바다를 돌아다니기 시작하면 생각을 완전히 굳히겠지.”
“예.”
이인도 동의하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진주광... 한漢왕이라고 했던가?”
“풉. 가짜 한왕이죠. 한왕이 왜 강주로 가지 않고, 남통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진짜 한왕의 후손은 아국에 있잖아요? 아마 남직례와 절강사람들도 다 알고 있을 겁니다.”
“큭...”
“차라리 오왕이라고 할 것이지, 한왕이라고 칭하는 건 웃기는 소리죠. 같은 성씨면 다 되는 줄 아나 봅니다.”
연오랑은 신랄하게 꼬집는 이인을 보며, 함께 비웃고 말았다.
원말명초 시절.
원에 대항해 홍건적이 일어났고, 그 홍건적은 분파하여 여러 군웅이 등장했다.
홍무제가 된 주원장 외에도, 사천에는 명옥진이 힘을 키워 명하라는 나라를 세웠고, 강서성 일대에선 진우량이 대한을, 절강에선 장사성이 오왕을, 복건성 일대에선 방국진이라는 꽤 큰 해적세력도 있었다.
주원장과 진우량이 맞붙은 그 유명한 파양호 대전에서 주원장이 승리했고, 장사성과 방국진 또한 결국 주원장에게 패배.
이렇게 남쪽의 한족 군벌을 모두 정리한 주원장은, 북으로 밀고 올라가서 원나라를 끝장내버린 거지.
흥미로운 점은 주원장이 진우량과 명옥진을 끝장냈으면서도, 그들의 자손들은 곱게 살려서 고려로 보냈다는 거다.
“진치화라고 했던가? 그 진우량의 자손 말이야.”
“맞아요. 진우량의 아들인 진리의 손자로, 지금은 평주에 있을 걸요. 아마도?”
“조정에서 그 녀석을 이용한다는 말은 없었지?”
“굳이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가 없죠.”
“음...”
연오랑은 조정의 생각을 읽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역사에선 진우량의 후손인 진리, 명옥진의 후손인 명승은 고려 때에 이주하여 역사에 파묻혀 사라졌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태조와 태종이 조금씩 도움을 주긴 했는데, 결국에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조선에 스며들었지.
그나마 특기할 점이라면 명승의 4남인 승신이 망국의 황족임을 부끄럽게 여겨서, 명씨에서 승씨로 개명했다는 정도다.
허나 지금 역사에선 이들의 처지가 꽤나 바뀌었다.
진리가 죽고 난 후. 근근이 살아가던 손자 진치화는 착호군이 창설되기 무섭게 곧장 달려왔다.
아버지인 진명선은 주색잡기를 일삼다가 얼마 남지도 않은 가산을 다 까먹고 죽었고, 그 얼마 있지도 않은 공신전마저 다 빼앗길 판국이니... 어떻게든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으니까.
전역한 후에도 군문에 남아서, 평주에서 복무 중이다.
명승의 후손인 명씨와 승씨 집안은 사정이 조금 나았는데, 그래도 엇비슷했다.
그나마 명씨 집안은 화촉군華蜀君에 봉해져서 작게나마 염전기업을 일굴 기회를 얻었지만, 승씨는 어쩔 수 없으니... 승신의 아들인 승조 또한 착호군 행정관리를 거쳐 역관이 된 상태였지.
아무튼. 가짜 한왕을 칭하는 진주광 앞에 조선에 살고 있는 진짜 한왕의 후손을 떡하니 대령하면, 그 꼴이 얼마나 웃기겠냐.
하지만 진치화가 회까닥 돌아서 진주광에게 넘어가버리면, 없던 명분을 조선이 가져다주는 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조성에선 혹시 몰라서 이 패를 꺼내들지 않은 거지.
“하지만... 가짜 한왕이라곤 허나, 그 세력만큼은 진짜지.”
“그래봐야 저희에 비할 바가 될까요.”
“그러니 협상을 잘해야 되지 않겠냐? 남직례와 절강이 해결하지 못한 칭왕자를 우리가 대신 제거해 주는 거니까 말이야.”
“옙!”
연오랑의 말에 이인은 각오를 다지듯, 굳게 답을 했다.
남직례와 절강호족이 굳이 홍형청의 최후를 관람한 건, 그들 또한 같은 골칫거리가 있었기 때문.
바로 지금껏 말했던 가짜 한왕. 장강의 출구이자 입구인 양주부 남통에 틀어박힌 군벌 진주광이다.
“어째 각 성마다 골칫거리가 하나씩 있냐?”싶겠지만, 선후가 거꾸로 된 질문이다.
명이 망한 후. 온갖 놈들이 한자리 해보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특히나 문제가 됐던 건 황제군을 이끌던 장군들.
그들은 어디든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뭐라도 해보려고 발악했지.
주변 사정을 보지 않고 덩치를 막 불려가던 이들은 호족연합에 의해 작살난 경우도 있고, 마구 불린 덩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속에서부터 무너진 이들도 부지기수.
적당히 덩치를 불린 후에 군벌이 아닌 호족가문으로 변모하여, 다른 호족들과 나름 평화롭게 공존하게 된 신흥호족도 다반사.
그리고 끝내 어떻게든 군벌로 살아남은 이들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홍형청과 진주광 같은 자들이다.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이십여년의 혈전을 거쳐 어떻게든 끝끝내 살아남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된 거지.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돈이 되는 요충지를 장악했다는 점. 홍형청은 운하의 목덜미를, 진주광은 장강의 목덜미를 물고 있었다.
“장강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으니, 다른 세력들이 얼마나 그를 죽이고 싶었겠냐. 그럼에도 지금껏 살아남은 걸 보면 분명 한 수가 있는 거지.”
“하지만 그래서 저희 입장에선 더욱 좋은 거죠.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희가 일개 군벌 따위에게 겁을 먹는 것도 웃기잖아요?”
“그야 물론 그렇지만, 굳이 그걸 자랑할 필요는 없지 않냐. 밀고 당겨서 최대한 뜯어먹는 게 최고지. 그게 네가 할 일이고.”
“예. 걱정 마시죠.”
이인은 걱정 말라는 듯, 가슴을 쿵쿵 두들겼다.
굳이 연오랑이 말하지 않아도, 외교무역부 관리들은 청도에 오기 전부터 진주광을 어떻게 요리할지 고민하지 않았나.
조선은 참수작전. 칭왕자 제거작전을 준비하면서 이미 산동의 공청, 하남의 홍형청, 남직례의 진주광을 한꺼번에 제거할 준비를 해왔으니까.
중국호족들은 이러한 조선의 의도를 꿈에도 몰랐고, 조선이 판을 짜놓은 대로 움직였다.
산동을 정리하니 하남이 끌려왔고, 하남을 정리하니 남직례와 절강이 딸려온 꼴이 된 거지.
“하지만... 우려되는 게 있는데요.”
“뭔데?”
“아무리 우리 손을 빌린다곤 허나, 정말로 상해를 저희에게 조차할까요? 상해를 알아보니, 영파 바로 위에 위치한 송강부 지역인데 말이죠.”
이인은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가며 우려를 표했다.
이 시대의 상해는 청도와 마찬가지로 한적한 어촌포구에 불과한 곳이었다.
당연히 조정신료들도 몰랐고, 연오랑이 콕 집어서 “여기가 좋을 거다. 절강상인들도 신경 쓰지 않은 곳이니까.”라고 말해주고서야 상해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지.
그 결과. 청도와 똑같은 상황이니 큰 문제가 없어보였는데... 살펴보니 절강 최대, 아니 중국 최대의 무역항인 영파와 너무 가깝게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