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챕터36. 질주하다 (4)
“적이 먼저 달라붙은 모양입니다.”
“그런가보군. 붙으면 승산이 있다고 본 걸까?”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나마 살길을 찾은 모양인데, 길을 잘못 찾았죠.”
“하긴...”
박무양은 옆에서 함께 지켜보는 평도전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다른 상인들이 맞을까봐 포격을 자제한 건데, 저렇게 둘만 덩그러니 달라붙으면 이야기가 달리지는 법.
도망가지도 못할 바에는 그냥 달라붙어서 선상백병전을 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단 한 번의 조란탄 일제포격에 누선들은 유령선으로 변신했다.
조각난 선체조각이 비처럼 쏟아지고, 더불어 누군지도 모를 선원들의 사지가 찢겨 피보라가 불어 닥치고, 갑판을 휩쓸고도 힘이 남아도는 조란탄은 장강을 사정없이 때려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흐음...”
더 볼 필요가 있나. 박무양은 이내 관심을 접고 시야를 더 넓게 펼쳤다.
‘저긴 또 왜 저러지?’
그는 망원경 너머로 펼쳐지는 기이한 광경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 맞은 개미떼마냥 사방으로 흩어지는 상선이야 당연한 건데, 저쪽에 뭉쳐 있던 무리에선 거꾸로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었다.
딱 봐도 상선의 선원들과 진주광의 부하들이 싸움이 붙은 모양인데... 이 판국에 서로 싸울 만큼 정신이 멀쩡한지 모르겠다.
‘아닌가. 우리가 온 걸 보고서 칼을 빼든 건가?’
문뜩 그런 생각이 떠올랐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남직례의 호족들이야 배다리를 만들어야 하니, 육군의 작전개시일을 알 수밖에 없다.
허나 해군은 다르지 않나.
절강상인들조차 해군이 언제 움직이는지 알 수 없으니, 지금 장강을 까맣게 채운 상선들은 조선해군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을 거다.
‘그럼에도 저렇게 기회를 잡고 칼부림을 부린다는 건...’
“정말 사이가 안 좋긴 안 좋았나보군. 절강상인이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가주에게 언질을 받았을지도 모르지요.”
“코앞에 진주광을 두고 있는데, 그렇게 입이 가벼웠을 리가 있나. 울고 싶었는데, 우리가 뺨을 때려준 격이겠지.”
“음...”
박무양과 평도전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조선함선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고, 이내 그물을 걷는 어부마냥 기계적인 반복 작업에 돌입했다.
뭉쳐 있던 상선을 억지로 흩트리고, 그 틈을 파고 들어가 누선을 향해 화살비를 날리기를 반복.
반항이 거센 이들에겐 대형쇠뇌에 기름항아리를 올려 쏴서 그냥 불태워 버렸다.
이곳저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에 반대로 상선들은 죄다 조선함선을 피해 반대편 강가로 우글우글 몰려드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제 모두가 감을 잡은 걸까? 저 놈들은 도망칠 생각도 안하고 오히려 진주광의 누선들이 박살나는 걸 구경하려는 눈치다.
‘하긴...’
속을 긁던 진주광이 박살나는 것도 좋지만, 그걸 떠나서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싸움구경 아닌가.
뭔 진 모르겠지만 분명 대해전이 벌어질 걸 직감하고서, 시체를 본 파리떼 마냥 뭉쳐있는 모양새다.
‘나쁠 건 없다. 남통포구가 박살이 나는 걸 지켜보면, 우리에게 꼼짝 못하겠지.’
어쩌면 저들 틈에 진주광의 부하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지만, 한푼도 되지 않는 놈들이 있어봐야 대세에 지장이 있겠나.
어차피 남통포구가 봉쇄되면, 진주광을 떠나 알아서 제 살길을 찾아야 할 거다.
“우린 이대로 전진했다가 반전해서 남통포구를 포위하는 게 좋겠군. 어떤가?”
“예. 그게 나을 듯 합니다.”
강이 워낙 넓어서 강바람이 심하게 불어오진 않지만, 여차하면 바다로 향할 수 있게 방향을 전환하는 게 낫다.
‘하루 이틀 봉쇄할 것도 아니고, 길면 한 달간은 여기에 떠 있어야 할 테니까.’
박무양은 벌써부터 지긋지긋한 선상생활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가 얼른 명령을 내렸다.
“9번함, 10번함에게 남은 누선을 나포하라고 하고, 우린 이대로 전진해서 반전한다. 4함대도 마찬가지로 9,10번함에게 나포명령을 내린다.”
“옙!”
견시병은 다시금 화려한 손놀림을 보여줬고, 뿔뿔이 흩어져서 사냥을 하던 함선은 다시 기함을 따라 줄줄이 이어 붙었다.
“함장님! 나포신호입니다!”
“오!”
함장 정종은 망원경으로 기함을 살피기 무섭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차피 작전만 성공시키면 전공은 알아서 따라오는 거지만, 그래도 적함을 직접 나포하는 건 또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자신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자기도 모르게 감사했다.
적이 막강하면 모를까. 저렇게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들을 쓸어 담는 건 누워서 떡 먹기 아닌가.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면 되는 일을 마다해선 안 되지.
“갑판장! 백병전을 준비하라!”
“옙! 백병전 준비!”
“백병전 준비!”
갑판장이 목청을 높이기 무섭게, 활을 쏘던 병사들 또한 복명복창하며 활을 내려놓고 무장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좋아.’
갑판장 김가호는 흔들리는 배 위를 성큼성큼 돌아다니면서, 부하들을 살펴봤다.
처음 겪는 실전에 병사들은 두려움과 흥분에 지배당해 눈이 맹수처럼 번들거리고 있지만, 무장을 점검하는 손놀림은 기계처럼 정교했다.
‘이런 정예를 내가 부릴 수 있다니...’
항왜출신인 그가 조선해군이 된 것도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갑판장이 된 것 또한 놀라운 일.
그가 처음 귀화했을 때의 조선이 사라진지 오래지만, 아직도 옛 기억이 남아 있는 그에게는 여전히 낯설었다.
혹시 이게 꿈이 아닐까 하고 볼을 꼬집어보지만, 그저 진득한 땀에 손가락만 미끄러졌다.
길게 파인 이마주름에 땀이 고이고, 그는 살짝 갑갑한 두정갑의 투구를 매만지며 다시금 선미를 돌아봤다.
이제 막 서른쯤 되었을 함장은 조타병에게 소리치며 배를 부리고 있고, 항해사 또한 함장 옆에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
고개를 돌려 선수를 살펴보니, 화포장과 화포부장이 선창 계단 옆에 기대어 서서 망원경으로 적함과 남통포구를 살피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어려...’
하나같이 죄다 서른도 안 된 이들.
중년의 원숙함보다는 청년의 패기로 가득 차 있는 이들이지만, 김가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정정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 이들 아닌가.’
다른 병사들처럼 배를 탄 세월은 김가호가 훨씬 많지만, 정작 밀려난 건 자신 아닌가.
직접 몸으로 겪고 눈으로 본 터라, 나이가 어린 저 녀석들을 믿을 수밖에 없다.
기선군이 해군으로 탈바꿈되자, 육군보다 훨씬 격한 인사이동이 벌어졌다.
어차피 노를 저어 가는 맹선이라면 수전이든 육전이든 거기서 거기다.
딱히 전술과 방진이라는 게 그리 특별할 게 없고, 물길에 대해 익숙하기만 하면 싸우는 방식은 땅에서 싸우는 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그저 서로 더 많은 배를 맞부딪쳐서, 단일 전선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 승리하는 거니... 기존의 문무관이 혼합되고, 육군,수군무관이 섞인 체제로도 버틸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범선은 아예 차원이 다른 배다.
돛만 열 개에 가깝고, 그 돛을 다루는 병사만 오십이 넘는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전에 없던 함포를 20문이나 품고 있지.
예전처럼 그저 배를 붙여서 싸우는 게 아니라, 곡예사나 조율사마냥 정교하게 조정해 배를 움직여야 하니... 함장을 비롯한 지휘관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게 너무 많을 수밖에.
이러면 어떻게 됐겠는가.
안 그래도 군부가 생겨나면서 이미 문무관이 분리됐는데, 한번 더 수군무관들이 우수수 잘려나갔다.
품계와 경력으로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려는 작자들이 꽤 있었지만, 범선을 다룰 줄도 모르는 데 어떻게 자리를 지킬 수가 있겠나.
이건 조정의 의지와 상관없이, 병사들이 지휘관을 신뢰하지 않고 거부할 정도였다.
결국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파릇파릇한 녀석들에게 밀려서, 능력이 부족한 옛 장군들은 눈치가 보여서라도 죄다 떨어져 나갈 수밖에.
이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바로 함대사령관들이다.
대마도 정벌 당시만 해도 박홍신,박무양,박성양 등은 중간 지휘관 중 하나였지, 최고지휘관도 아니고 품계도 그리 안 높았잖아?
헌데 지금은 어떤가.
그들 위에 있던 옛 장군들은 죄다 떨어져나가고, 이들이 최고사령관이 된 상황.
연오랑의 눈에 들어 해군이 창설되기 전부터, 용연의 선박연구소에서 함께 하던 이들만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던 거지.
항왜출신인 김가호가 군말 없이 자기보다 한참 어린 함장과 부함장, 항해사의 명령에 재깍 고개를 숙인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저 녀석들은 김가호와 똑같은 선에서 출발했지만, 실력으로 그를 찍어 누르고 함장이 되었으니까. 그가 잘했다면 평도전처럼 또 한명의 왜인출신 함장이 되어 주목을 받았겠지.
“...”
잠깐 상념에 잠겨 있던 김가호는 끼잉끼잉. 배가 울면서 흔들리는 걸 느끼며 현실로 돌아왔다.
함선은 어느새 적 누선 코앞에 와 있는 상태.
“접함 준비!”
“접함 준비!”
그의 외침에 갑판벽에 우르르 붙어 있던 병사들이 복명복창하며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쥐고 매서운 눈을 부라렸다.
범선은 속도를 조절하는 게 노선보다 어렵고, 당연히 적함에 가깝게 붙는 것도 어렵다.
밧줄을 던져 배를 서로 묶는 건 노선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그 수가 훨씬 많이 필요했던 것.
“지금이다!”
“던져!”
김가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붕붕 돌아가던 갈고리 밧줄은 투당당. 묵직한 소음을 내며 누선에 떨어졌다.
이미 한차례 화살비를 맞아 누선갑판에는 적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고, 갈고리는 아무런 방해 없이 갑판을 긁으며 몸을 비볐다.
투당! 그 중 유독 시끄러운 소음을 낸 건, 선수와 선미에 각각 장착되어 있던 대형쇠뇌.
대형쇠뇌에서 쏘아낸 갈고리 밧줄은 갑판을 긁은 게 아니라, 아예 갑판 바닥을 뚫고 처박혀 버렸다.
“당겨라!”
“돌려!”
반대로 조선전함은 바빠졌다.
갈고리 밧줄은 갑판벽 이곳저곳에 솟아 있는 나무뭉치와 도르레에 묶여 있었고, 병사들은 도르레 손잡이를 돌리거나 직접 밧줄을 잡아당겨 누선을 끌어당겼다.
끼잉...! 텅! 갈고리는 힘을 받아 누선의 갑판벽에 매달려 조선함선을 끌어당겼고, 힘을 버티지 못한 몇몇 갈고리는 그대로 튕겨나가 강물에 철푸덕 얼굴을 처박았다.
휘리릭. 힘을 일어버린 갈고리를 재빨리 회수해 다시금 던지기를 반복하자, 어느새 조선함선과 누선은 옆구리를 딱 붙이고 한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돌격준비!”
“돌격준비!”
‘이제 시작이다.’
김가호는 다시금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선, 병사들이 그물사다리를 갑판 벽 밖으로 내던지는 걸 바라봤다.
신형전함이 워낙 크다보니 오히려 거꾸로 절벽을 내려가는 꼴 아닌가. 이건 사다리를 타고 넘어갈 수 있는 높이가 아니다.
“엄호!”
“엄호!”
부갑판장은 돌격하는 병사들을 보호하려는 듯, 몇몇 병사들을 이끌고 선수로 향해서 화살을 재고 있었고.
“돌격!”
“와아아!”
이내 배가 완전히 멈춰 서자, 김가호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물사다리에 몸을 던졌다.
원숭이처럼 달라붙어 그물사다리를 타고 빠르게 내달렸고, 몇 번 발구름을 하기 무섭게 쿵. 적함갑판에 발을 디뎠다.
쿵쿵쿵. 동시에 병사들이 하나둘씩 갑판에 발을 디뎠고, 이내 곧 허리춤이 달린 무기를 꺼내 손에 쥐고 기다렸다.
‘후우...’
김가호 또한 깊게 호흡을 내뱉으며, 스르릉. 허리춤에서 장도를 뽑아들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햇빛과 물결에 반사된 햇살에 번들거렸고, 그 날카로운 짜릿함은 옛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그땐 이런 게 없었지.’
그는 본래 쓰던 왜도보다 한 뼘정도 더 길지만, 곡률은 심하지 않은 장도.
연오랑. 자신의 고향을 지워버린 잔인한 작자가 만든 물건이지만, 거부감보다는 오히려 신뢰가 먼저 들었다. 그 미친 인간이 만든 무기답게, 왜도보다 훨씬 나았으니까.
사철로 만든 왜도와, 코크스 강철로 만든 장도를 비교하는 게 말이 되나.
김가호는 장도를 제식무기로 주는 걸 보며 조선의 재력에 한번 놀랐고,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명품을 제식무기로 찍어내는 조선의 기술력에 두 번 놀랐었다.
‘음.’
힐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부하들은 각자 손에 맞는 무기를 쥐고 누각 입구와 선창 입구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는 양손에 전투도끼를 쥐고, 누구는 장도를, 누구는 방패와 장검을 쥐고 있어서 중구난방처럼 보였지만... 다들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거리를 두고서 벽처럼 진영을 만들었다.
기존 조선군은 무기가 제각각이었지만, 착호군이 만들어지면서 무기규격의 통일이 생기지 않았나.
여기에 훈련대와 훈련소가 생기면서 제식무기가 등장했다.
해군의 경우에는 장도, 양손도끼, 방패장검, 장창, 활이었고, 화포병이든 조타병이든, 돛줄병이든 할 것 없이 전부 집체교육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사람마다 손에 맞고 잘 쓰는 무기가 있기 마련.
다 똑같은 교육을 받고 무기술을 익혔음에도, 독문무기는 제각각 달랐고, 실전에서는 각자 손에 맞는 무기를 쓰는 걸 허락했다.
배에서는 땅에서처럼 견고하게 방진을 만들기 힘드니까.
그랬기에 저렇게 중구난방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력은 중구난방이 아니었지.
“던져!”
휘릭! 김가호의 명령에 끝나기 무섭게, 갑판병 중 한명이 솔방울과 천뭉치를 기름에 적신 불덩이를 선창과 누각 입구에 집어던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검은 연기를 풀풀 뿜어내는 물건이 안에 들어갔으니, 알아서 기어 나올 게 분명.
“크흐...!”
“켁켁.”
“죽여라!”
“나가! 나가서 싸워!”
아니나 다를까. 연기가 퍼지기 무섭게, 누각과 선창에서 우당탕 굉음이 터지더니... 적군은 곡식에 파묻혀 있던 좀벌레마냥 우르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화살비를 맞았다고 다 죽을 리가 없고, 배가 침몰할 일도 없다.
당연히 선창과 누각에 숨어 있다가 이 난리가 끝나면 다시 배를 몰고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았겠나.
헌데 연기가 피어오르자, 배를 태워버릴 거라고 오해한 적군이 이판사판으로 뛰쳐나온 거지.
하지만... 그런 그들을 화살비가 친절히 마중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