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챕터36. 질주하다 (5)
“커컥!”
“끄억.”
“화...”
기다렸다는 듯이 엄호사격이 이어지자, 적병은 입구에서 뛰쳐나오기 무섭게 허물어졌다.
모래성을 쌓듯 적병은 반구형을 그리며 푹푹 쓰러져갔고, 앞이 막혀 속도가 늦춰지자 안에서는 더욱 더 난리가 났다.
입구가 막히고 안에서는 검은 연기가 치솟는다.
적병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서 이대로 있으면 죄다 타죽을 거라고 생각하고서 무작정 입구를 향해 뛰쳐나온 것.
우당탕. 갑판에 깔린 시체에 걸려 넘어지고, 그 넘어진 동료를 밟고 뛰어오고, 그 뛰어오던 동료에 치여 쓰러지고, 그 쓰러진 이를 붙잡고 기어 나온다.
별로 크지도 않은 누선에 대체 몇이나 있던 건지, 입구는 어느새 시체밭이 되어버렸다.
“...”
지들끼리 지지고 볶는 난장판을 보면서도, 김가호를 비롯한 갑판병들은 자리를 지키고 서서 유심히 눈을 굴렸다.
‘... 꼴이 말이 아니군.’
왜구 시절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어느덧 두정갑과 장도가 익숙해진 탓일까?
그는 제대로 된 갑옷도 없이, 박도, 도끼, 갈고리, 몽둥이 등등.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나온 적병을 보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사격중지!”
삐빅! 신형전함에서 화살을 먹여주던 부갑판장의 명령과 함께 호각소리가 들려오자.
“밟아라!”
삐이익! 이번엔 김가호가 목청껏 소리치며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을 길게 불었다 땠다.
쿵쿵쿵. 강 위에 있지만 딱 달라붙은 탓에 크게 흔들리지도 않는 갑판을 느긋하게 나아가, 이리쿵저리쿵 정신없이 뛰쳐나오는 적병을 맞이했다.
“합!”
“으압!”
잔걸음으로 다가가 힘차게 장도를 내리그었다.
목표는 적의 손목. 빛살처럼 날아간 칼날은 순식간에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고, 적은 김가호에게 달라붙지도 못하고 박도를 내던지며 손목을 붙잡고 쓰러졌다.
‘후흡!’
호흡을 가다듬고서 다시 장도를 상단에 놓고 몸을 가렸고, 또 다시 종종 걸음으로 적에게 달라붙었다.
“으아악!”
반대로 적병은 옷도 입지 않은 맨몸뚱이를 내던지며 시체를 뛰어넘어 달려왔고, 김가호는 언제 전진했냐는 듯 곧바로 뒷걸음질 치며 칼을 매섭게 휘둘렀다.
휙휙! 사선을 그리며 날아간 칼날은 또 다시 적병의 손목을 노렸으나 오히려 손등과 손가락을 저미고 스치고 지나갔고.
“끄억!”
적이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내리 찍은 칼날이 역으로 치솟아 손목을 마저 쓸고 올라왔다.
“후...”
한호흡만에 이어진 연계에 적병이 쓰러지자, 김가호는 숨을 길게 내쉬며 힐끔 눈동자를 굴려 옆을 살폈다.
쿠쾅! 살짝 거리를 둔 옆에선 살벌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투도끼를 든 선원은 통나무를 내리찍듯 도끼를 휘둘렀고, 적은 박도로 도끼를 막아보지만 어느새 반대쪽에서 날아온 또 다른 도끼가 박도를 쥔 손목을 뼈가 보이도록 갈라버렸다.
푸헉! 피가 울컥 솟아오르기 무섭게, 부하는 전투도끼의 반대편 머리에 달린 추로 적의 옆구리를 때렸다.
거력을 이기지 못하고 적이 한쪽 무릎을 꿇고 무너지자, 퍽! 기다렸다는 듯이 도끼가 날아와 적병의 머리를 반토막으로 만들었다.
퉁탁.퉁탁. 묘한 박자감이 느껴지는 도끼질이 연거푸 이어진다.
단순한 검로임에도 꽤 막기가 애매한 게, 오른손으로 내리 찍는 동시에 왼손은 옆구리를 노리며 수평으로 들어오고, 사선으로 내리 찍으면 반대쪽 사선에서 도끼가 날아든다.
“크헉!”
검로를 알아차리고 도끼를 막아 세워도 문제다.
전투도끼는 손도끼와 달리 자루가 꽤 길다. 자루에 비하면 은근히 작은 도끼날이라곤 하지만 엄연히 쇳덩어리로 만든 도끼날인터라 박도로 직접 맞부딪치는 건 힘들다.
그렇다고 자루를 직접 막아내자니 어느새 파고든 도끼날이 뒤통수를 때린다.
파고들어 간격을 좁히자니, 전투도끼가 장도마냥 긴 것도 아니라서 파고들다가는 먼저 당하고 만다.
뭔가 요상하면서도 절묘한 무기인터라, 적병은 처음 보는 무기를 쉽게 상대하지 못하고 몇 번 막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캉! 내리찍은 도끼날은 적병의 박도를 타고 흘러 도끼날과 자루 사이의 홈으로 꽉 깨물었고, 휙! 도끼를 잡아당기자 “어억!” 적병은 비명을 내지르며 균형이 깨져 끌려왔다.
그런 적병을 맞이한 건, 어느새 가볍게 내민 전투도끼의 머리끝.
머리끝엔 작은 송곳망치가 달려 있었고, 균형을 잃어버린 적병의 목을 단번에 꿰뚫었다.
가볍게 내밀었다지만, 적병의 몸무게로 깔아뭉갠 모습이니 버틸 수가 있나. 또 한명의 적병의 목이 뚫려 피거품을 쏟아내며 쓰러졌다.
‘저기도 좋군.’
김가호는 조금 더 시선을 멀리해, 갑판벽 근처에서 싸우는 부하를 바라봤다.
등패와 직검을 든 병사가 맹렬하게 적병을 때려잡고 있었는데, 더 보지 않아도 결과가 어떨지 훤히 보였다.
방패,검 조합은 얼핏 보면 수비적일 것 같지만, 오히려 가장 공격적인 무기조합이다.
방패는 적의 공격을 무조건 막아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간합을 노리거나 빈틈을 찾으려고 눈치싸움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
특히나 저건 등패에 뒤편을 강철로 보강해서, 박살나거나 뒤집히는 걸 방지한 물건 아닌가.
부하는 살짝 가벼운 그 등패를 붕붕 휘두르면서 적의 무기를 쳐내고, 그 빈틈을 노려 장검으로 콕콕 찔러댔다.
이 또한 가볍게 내지르는 공격이지만, 맨몸으로 날카로운 날붙이를 무슨 수로 막을까.
적병은 몸에 구멍이 송송 뚫려 힘을 잃었고 끝내는 방패에 밀려 가슴팍을 보이기 무섭게,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날아든 장검이 가슴팍에 꽂혔다.
‘무난하군.’
삐빅! 앞에서 다가온 적병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나서, 김가호가 호각을 불어 선두를 잡아채자.
“후...” “하...” “후흡.”
피를 잔뜩 머금은 부하들은 길게 심호흡을 하며 제자리에 멈춰서더니 오히려 발걸음을 뒤로했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이열이 앞으로 나오고, 선두는 체력을 보존하며 제대의 가장 뒤로 들어갔다.
“다시 준비!”
순식간에 자리배치가 완료되고, 삐빅! 김가호가 호각을 불며 외치자.
“하!” “악!”
이번엔 자기 차례라는 걸 과시하기라도 하듯, 병사들은 거친 함성을 내지르며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으...” “크헉.” “이건 아니야.” “안 돼!”
기계처럼 돌아가는 도살극에 정신이 무너진 걸까? 누각과 선창에서 쏟아지던 적병들은 조선군에게 달려들지 않고 오히려 옆으로 비켜나 갑판벽을 따라 선수쪽으로 도망쳤다.
동료애 따위라고는 보이지도 않다.
선창 밑에서부터 밀고 나오던 이들이 죽든 말든 자기만 살겠다가 얼른 몸을 날렸고, 뭣도 모르고 일단 밖으로 나온 이들은 입구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무기를 휘두르는 조선군에게 참살당하고 말았다.
‘정말 엄청나군. 실전이 더 심해.’
김가호는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서, 일방적으로 적을 도살하는 부하들을 보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구의 칼이 날렵하고 강맹하니 어쩌니 하는 말이 많지만, 그건 해적질로 다져진 칼잡이와 농부나 다름없는 정병을 비교하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
이 시대는 중국, 조선, 일본 할 것 없이, 개인무술, 제식무술이라는 게 딱히 정형화, 제도화된 시대가 아니지 않나.
연오랑은 수백년 후의 무기술과 현대의 체계적인 훈련법을 가져와 교육시켰으니, 마구잡이로 경험을 통해 익힌 칼질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나름 칼질을 한다고 자부하던 왜구출신조차, 자신이 벌인 일에 화들짝 놀라서 “내가 이렇게 강했나?”라고 스스로 돌아볼 정도였으니까.
이내 안에 있던 적병이 죄다 튀어나와 나자빠지자, 선수로 도망친 적병들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병정개미마냥 검은갑옷으로 무장하고서, 지옥도를 만들어놓고 처음 그대로 서 있는 조선군을 보며... 몇몇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강으로 뛰어들었고.
‘됐군!’
동시에 김가호는 때가 됐음을 알고 어설픈 중국어로 선창을 내질렀다.
“항복해라!”
“항복해라!”
뒤이어 부하들 또한 오면서 벼락치기로 배운 중국어를 내뱉었고, 그 위엄찬 함성에 적병은 사기가 완전히 꺾여서 박도와 갈고리 등을 내던지고 손을 번쩍 치켜들고 말았다.
9,10번함이 순조롭게 나포작업을 이어가는 동안. 남통을 슬쩍 지나쳤던 함대는 다시 반전하여, 이번엔 더욱더 강가에 바짝 붙어 남통으로 다가갔다.
남통에서도 조선함선이 뭔 짓을 했는지 뻔히 봤을 것 아닌가. 시간을 충분히 줬으니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할 터...
“어떨 것 같나? 배를 몰고 나올까?”
“글쎄요... 저라면 안 나올 것 같습니다만.”
평도전은 장강 여기저기에 둥둥 떠서 물살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는 누선들을 가리켰다.
분명 다 죽진 않았을 텐데... 죽은 척 연기하고 있겠지만, 중요한 건 물에 나온 수군이 전멸했다는 뜻.
남통의 수군이 다시 배를 몰고 나와도 딱히 달라질 건 없지 않나. 죽을 자리를 알아서 찾아오진 않을 것 같다.
“흐흐. 천진이 어떻게 박살났는지 모르니, 일단 몸을 사리겠다는 거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난 오히려 반댈세. 적들도 우리가 화포가 있는 걸 알고 있는데, 설마 멍청하게 맞고만 있을까. 어떻게든 달라붙어 선상백병전을 해야 그나마 승산이 있지 않겠나?”
“음... 그건 그럴 수도 있는데, 저희에게 달라붙을 수나 있겠습니까?”
이미 전열을 잡고 옆구리를 정면에 놓고 있는데, 여길 향해 다가온다고? 그건 죽을 자리를 알아서 찾아오는 건데, 과연 그런 어리석은 짓을 감행할까.
하지만 박무양은 살포시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은 신형전함을 처음보고, 우리가 어떻게 싸우는지도 모르지 않나. 조란탄을 쏘긴 했지만 몇 번 쏘다 말았으니, 저들은 우리 배에 화포가 몇이나 있는지도 모를 걸세. 제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꼴이 되겠지.”
“흐흐. 예.”
박무양의 살벌한 웃음은 다시금 평도전에게 이어져 웃음꽃이 피고 말았다.
남통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오백보 안으로 진입하자 난장판이 된 남통포구가 맨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순시를 나온 함선이 진주량 수군의 절반쯤 되는 걸까? 포구에는 우뚝우뚝 솟은 누선과 앉은뱅이마냥 낮은 어선과 화물선, 나룻배와 크게 다르지 않는 어선이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보게. 역시 포기는 안했나 본데?”
“흐음.”
망원경으로 포구를 살피던 박무양이 몇 곳을 가리키자, 평도전은 냉큼 살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두는 난장판이 벌어져서 배에서 내려 도시로 들어가려는 이들, 반대로 도시에서 나와 배에 올라타려는 수군이 뒤섞여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시간을 끈 보람이 있군.’
일부러 바로 포격을 하지 않고 한바퀴 돌고 왔지 않나.
아마 어부나 상인들은 죄다 도시로 도망치는 중 일 테고, 반대로 수군은 배를 타기 위해 기어 나오는 중일테다.
‘어디 있을까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처럼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니 절로 흥이 났고, 박무양은 먹잇감을 찾는 맹수마냥 눈을 번들거리며 포구를 살폈다.
“포대는 찾았나!”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사거리에 들어오기 전에 먼저 찾아라!”
“옙!” “넵!”
박무양의 외침에 화포장은 물론, 망원경을 든 지휘관들 모두가 복명복창했다.
화기대가 등장하자 육군, 해군할 것 없이 최우선 정찰목표는 적 화포와 포대가 되었다.
그것 말고는 아군 화포를 무력화시킬 수단이 없으니, 무조건 먼저 찾아서 무력화 시키고 나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기 때문.
육군조차 포진지를 만들기 전에 적 포대부터 찾는 게 기본이니, 떠다니는 포대라 할 수 있는 해군은 그 경향이 더욱 심할 수밖에.
헌데... 아무리 살펴봐도 안 보인다.
‘지금쯤이면 쏠 때도 되지 않았나?’
아무리 자신들이 장강을 꽉 잡고 있어도 방어포대 정도는 만들었을 법 한데, 감감무소식이다.
‘설마 육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화포를 육지쪽 성벽으로 옮겨놨나? 해군까지 올 줄은 몰랐던 걸까? 아. 우리 함선이 몇 척이나 되는지 적은 모르는군.’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방어포대는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뭐가 어찌됐건 적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면 이용해 먹으면 그만이다.
‘음. 성벽을 직접 치는 건...’
박무양은 포구 뒤편에 절벽처럼 이어져 있는 성벽을 살피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남통은 역사가 천년을 넘어가는 오래된 도시고, 그만큼 성벽도 왕조의 변천에 맞춰 꾸준히 보수 및 증축이 되어왔었다.
높이는 대략 8,9미터, 겉은 벽돌을 두르고 안은 흙으로 채운 형태를 하고 있었는데, 중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지성으로 보였다.
‘역시 무리다. 계획대로 가야겠군.’
“포구와 부두를 먼저 친다. 대응포격이 날아오면, 그때 성벽을 노린다.”
“옙!”
견시병은 박무양의 명령을 듣기 무섭게 손을 놀렸고, 그의 명령을 알아들었는지 줄줄이 따라오던 함선에서 일제히 둥둥둥! 웅장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꼬리를 문 함선이 남통포구를 향해 점점 다가갔다.
거의 이백보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흡사 포위망을 만들 듯 길게 늘어섰고, 반대로 황급히 배에 올라탄 적병은 미친 듯이 노와 돛을 펴고서 강물을 밀어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둘이 엮어지고, 그와 동시에 시작이자 끝을 알리는 굉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쾅쾅쾅! 가장 선두에 있던 기함에서 포격이 시작되자. 콰콰쾅! 뒤이어 순차적으로 불꽃과 굉음의 잔치가 벌어졌다.
“아악!” “화포다!” “크헉!”
화포소리에 귀가 멍멍해질 정도지만, 망원경으로 포구를 살피던 모든 지휘관들의 귀에 적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무려 100문이다. 그것도 야전화포보다 구경이 더 큰 함포가 일제포격을 쏟아내지 않았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철환은 순식간에 포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펑펑 날아간 철환은 부둣가를 박살내고도 힘이 남아 땅을 튕기며 성벽 밑동에 틀어박혔고, 적함과 부두로 날아간 철환은 모든 걸 몸으로 갈아버리겠다는 듯 나무파편과 가루먼지를 날리며 어디론가 파묻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