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51화 (251/538)

251. 챕터36. 질주하다 (7)

“아악!”

“화살이다!”

투두둑투두둑. 소나기처럼 우르르 쏟아진 화살은 어설픈 전열을 중구난방으로 덮쳤는데, 이게 오히려 효과만점이다.

차라리 제대 하나에 집중됐으면 그것만 무너지고 말았겠지만, 관도를 따라 두툼하게 밀집된 중앙제대 전체에 쏟아지니... 선두건 후미건 할 것 없이 동시에 혼란에 빠져버린 것.

“아악!”

“크헉!”

“도망쳐라!”

혼란에 빠져 제대로 창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데도 조선군은 계속 다가왔다.

30보. 조선군이 활을 허리춤에 박아 넣고 기창을 뽑아들자, 징집병들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시작했고.

20보. 빙글. 기창을 세워 앞으로 정렬하자, 징집병들은 창을 비스듬히 들고 뒤를 돌아봤고.

10보. 탁. 눈만 보일 정도로 갑옷으로 꽁꽁 싸맨 이들이 생전처음 보는 엄청나게 긴 창을 옆구리에 단단히 고정시켜서 뾰족한 송곳을 만들자, 징집병들은 완전히 등을 돌려 뒤로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충격.

“아아악!”

“피해!”

“옆으로 뛰어!”

“논으로 빠져라!”

역청처럼 끈끈하고 묵직하게 밀고 온 기병대의 선두. 기사대와 선두제대가 부딪치기 무섭게, 콰콰쾅! 천지가 박살나는 굉음과 함께 제대 하나가 통째로 무너져 사라져버렸다.

사실 제대로 부딪친 것도 아니었다.

이미 제대 선두는 두려움에 잠식되어 있었고, 부딪치기도 전에 등을 보이고 도망치기 시작했으니까.

쿠르릉.쿠르릉. 쇠바퀴가 굴러가는 것 마냥 조선군은 관도를 따라 묵직하게 돌파를 감행.

선두 제대에 휩쓸려 그저 덩어리가 되어버린 후미제대. 이들은 기병에 치여, 죄다 관도 옆으로 밀려나 논두렁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가장자리에 있던 이들은 차라리 운이 좋았다.

관도 중앙에 위치해서 도망가지도 못한 이들은 그대로 말발굽에 짓밟혀서 형체도 찾기 힘들었으니까.

그렇게 관도를 따라 이어진 단 한번의 돌격으로, 징집병 전열은 완전히 두 동강이 나버렸고... 다음 수순은 그저 무질서한 도주의 시작.

애초에 싸울 마음조차 없던 이들이니, 천호장과 깃발병이 검은 물결에 파묻히는 순간. 논에 들어서 있던 징집병들은 죄다 창을 내던지고, 논두렁을 타넘으며 마구잡이로 도망쳤다.

“...!”

“히익...”

“허...?”

구릉에 올라 기병대의 돌파를 지켜본 이들은, 하나같이 낯빛이 해쓱해져서 신음을 흘려댔다.

길 안내를 하기 위해서, 신나는 싸움 구경을 하기 위해서, 조선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이삭을 쓸어 담기 위해서 따라왔던 남직례 호족들.

이들은 뭐 해보지도 않고 한 번에 끝나버린 싸움을 지켜보며, 다들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냥 겉으로만 봐도 조선군의 정예함은 느낄 수 있었는데, 이렇게 진주광의 군대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걸 보니 소름이 치솟았다.

“아예 상대가 안 되는군요.”

“회전에서 기병을 상대하려고 마음먹은 것 자체가 잘못이지.”

“이게 회전입니까? 어쩌다보니 그냥 마주친 거지.”

전쟁에 대해서 일 푼도 모르는 이들이지만, 열심히 입을 놀려대며 감상을 늘어놨다.

‘조선군과 싸우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군.’

그리곤 모두 같은 마음을 품고 속을 다독였다.

호족의 가병들은 분명 농부나 다름없는 징집병보다, 사기도 높고 개인무용도 뛰어날 거다.

하지만 호족가병이나 상인호위들이 대기병창진이나, 장창방진을 제대로 훈련해 본 적이 있던가.

호족과 상인간의 다툼은 전쟁이라기 보단 소규모 접전 혹은 단체 칼부림에 더 가까웠기에, 진짜 전쟁을 경험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줄을 잘 섰다는 생각과 함께, 까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도 장창방진인데...”

“저게 무슨 장창방진이오. 그냥 뭉쳐 있는 거지.”

“맞네. 보니까 제대로 전열과 제대도 형성을 못하던데,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진 거지.”

“진주광은 확실히 수군 빼곤 별 것 없는 모양이군. 우리가 진작 이렇게 뭉칠 걸 그랬네.”

“그런가?”

남 일이라고 또 안전하게 뒤에서 구경한 이들답게, 책으로 읽은 병법을 읊으며 훈수를 해댔다.

“...”

‘웃기는군.’

그런 그들을 호위 겸 감시하고 있던 소대장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그만 그런 게 아니라 소대원들 모두가 비웃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고 있었다.

‘직접 창을 들고 서면, 저딴 소리는 못할 텐데 말이지.’

기병인 그들조차도 대기병창진을 훈련할 때마다 오줌을 찔끔거린다.

사람 키만한 전마와 그 위에 올라탄 기병이 그림자를 가리며 다가오면, 속도에 상관없이 저절로 두려움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른다.

이건 훈련인 걸 알아도 막을 수 없는 사람으로서의 본능이고, 몇 번을 경험해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알면서도 동료들을 믿으며, 두 눈 꽉 감고 꾹꾹 눌러 참는 거지.

그러니 저 책상물림 샌님 같은 이들의 품평에, 자기도 모르게 같잖다는 생각이 절로 치밀 수밖에.

병종 간의 우열이니 상성이니, 창병이 기병에 강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에 운이 잘 맞아야 가능한 일.

그게 아니면 창병대가 기병대를 이긴 전투가 왜 역사에 남아 회자되겠는가. 그런 몇 번의 예외가 아니면, 항상 기병이 이겼기 때문이다.

조선군이 피해를 최소화 하려는 의도가 있긴 했지만... 홍형청의 군대가 유독 잘 싸운 거지, 대기병훈련이 안된 병사는 사실 저렇게 한 번의 돌격도 못 막고 와해되는 게 어찌 보면 일반적인 거다.

“갑시다.”

소대장은 통역을 통해 이들을 불러 모았다.

“멈추지 않고 계속 갈 테니, 우리도 이만 갑시다.”

“...!”

“패잔병은 소대가 하나가 남아서 고향으로 돌려보낼 거요. 본대는 남통으로 계속 진군이오.”

소대장의 말에 호족들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남아서 뒷수습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왠지 모르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들이 뭘 어쩌겠나.

그저 따라가는 수밖에 없으니, 얼른 소대장의 뒤를 쫓아 달려 나갔다.

*****

뜬금없는 조선군의 등장에 남통성 인근은 난리가 났지만, 그 난리를 일으킨 장본인은 장강에 파묻혀 있는 듯한 성벽을 보며 태평한 감상평을 늘어놨다.

“드디어 왔군. 저기가 남통.”

“흔한 도시이자 성이로군요.”

“저게?”

대대장의 말에 이순몽은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저게 흔한 성이면, 조선의 도시는 죄다 산골마을이라고 불러야 할 거다.

“뭐. 중국이지 않습니까.”

허나 이순몽 밑에서 오래 함께한 대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 많고 땅 많은 중국이니, 양주부 최고의 도시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않겠습니까.”

“끄응...”

딱히 틀린 말은 아닌지라, 이순몽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말았다.

조선에선 이런 거대도시가 몇 되지도 않는데, 중국에선 이 정도 규모의 도시가 흔하지 않나. 그저 놀랍고 또 부러울 따름.

남통은 역사가 오래된 도시라 인구가 대략 5만에 가까웠는데, 그만큼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벽돌성벽으로 도시를 전부 감싸고 있었는데, 그 둘레가 못해도 5키로미터는 될 정도였으니까.

그런 도시를 향해 고작 천명의 기병대가 달려왔건만, 이순몽이 이끄는 선봉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난리가 났다.

바삐 추수를 나왔던 농부들은 부리나케 성으로 도망갔고, 성에서는 징과 북, 종소리가 사정없이 울려 퍼졌고, 성에서 나오려는 이들과 성으로 들어가려는 이들이 뒤섞여 성문은 시장바닥으로 변했다.

성벽 위로는 병사들이 우글우글 올라오는 게, 정말 개미떼가 쫙 깔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순몽이나 대대장이나 천하태평한 눈을 하고서 망원경을 들어 성을 살펴갔다.

“어떤가. 저들이 나올까? 한번 해 볼만 하잖아? 저들 병력이 대충 4만쯤 된다고 했나? 우린 천명밖에 안되니까 붙어볼만 하지 않아?”

“여기서 말입니까?”

이순몽은 왠지 모를 기대감을 품고 그리 말했지만, 대대장은 피식 웃으며 손으로 주변을 쓱 한바퀴 훑었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확 트인 평원이다.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강에 붙어 있는 남통성이 있을 따름이고, 그 외에는 온통 황금빛 물결로 넘쳐나는 논뿐.

숫자의 우위가 있으면 뭐할까. 적이 성을 나오면 기병은 도망치면 그만이니,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을 거다.

“그래도 성 밖에서 전초진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저희가 몇이나 되는지 저들은 모르지 않습니까. 저희 잡겠다고 나왔다가, 매복에 걸릴 줄 누가 알겠습니까.”

“흐응.”

이순몽은 김 셌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조선군은 시간차를 두고 연대별로 하나둘씩 모여들겠지만, 적들은 그걸 모르지 않나.

이 한줌밖에 안 되는 기병대를 보며, 오히려 유인책이 아닐지 고민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저들의 발목을 잡는 건 또 있었다.

쾅.쾅.쾅쾅. 아스라이 들려오는 익숙하면서도 묵직한 소음이 이순몽과 대대장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포격이군. 해군이겠지?”

“예. 저희한테 쏘는 게 아니니 해군을 향해 쏘는 걸 텐데... 저들 화포가 뭐 얼마나 되겠습니까.”

쾅.쾅쾅쾅. 대대장은 “내 말이 맞지?”라고 말하듯,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춰 계속 이어지는 포격소리에 집중했다.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걸로 봐선, 남통성에서 쏘는 게 아니라 함대 전체가 느긋하게 한발씩 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포로로 잡은 농부에게 물어보니, 해군이 도착한지 벌써 4일째랍니다. 저렇게 아침,점심,저녁으로 때맞춰서 포격을 날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미 포구는 만신창이가 되어 봉쇄당했답니다.”

“어쩐지...”

이순몽은 오면서 봤던 반응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코웃음을 이어갔다.

미래에도 그렇지만, 특히나 이 시대의 전쟁은 무조건 전쟁의 징후가 보이기 마련이다.

병력을 모으고, 군수물자를 모으는 등의 준비기간이 필요한데, 조선군은 이걸 깡그리 무시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상비군체제로 변환된 이상, 장기전은 몰라도 단기전은 언제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이건 다른 세력이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이자, 돈지랄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지.

진주광은 이래서 고민에 빠졌다.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으니 조선군의 움직임에 대비를 하긴 해야 하는데... 지금은 딱 추수기간.

병력을 소집하기에도, 군수물자를 모으기에도 애매한 시기였다.

특히나 진주광의 주력은 장강의 수군이니, 육군에 대비하기 위해 연주부 전체에서 병력을 긁어모으는 건 큰 모험수였지.

만약 조선군이 안 쳐들어오면 헛발질을 한 꼴이고, 추수를 제때 못해서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될 테니까.

그래서 미적거리며 결국 추수 때까지 버텼으나,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북쪽에선 조선군이 남하한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그 소문을 듣기 무섭게 해군이 남통포구를 공격해 봉쇄해버린 것.

‘그래서 부랴부랴 대책을 수립했는데... 시간이 부족했던 거지.’

이순몽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진주광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훤히 읽어졌다.

옛 명나라의 행정구역은 성 밑에 부가 있었다. 조선으로 치면 도 밑에 목, 대도호부가 있는 식이랄까.

다만 땅 크기가 워낙 차이나다보니, 연주부의 영역이 거의 조선의 도에 비견될만한 크기라는 게 차이점이지.

문제는 이 거대한 땅에서 사람을 불러 모으려면 무조건 시간이 걸린다는 점.

육군이 정신 나간 속도로 밀고 내려오자 사방으로 전령을 보내 병력소집을 준비하게 했고, 해군에게 공격받자 진짜로 병력소집을 명했으나...

조선군의 진격이 더 빠르게 이뤄져서, 이순몽이 이끄는 선봉대가 각지에서 긁어모은 병력보다 더 빨리 도착하게 된 거다.

“그래도 전부 못 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글쎄요. 남통 인근은 몰라도, 북쪽이나 동쪽 해안가의 병력은 오지도 못하고 다 박살났을 겁니다. 저희도 한 부대를 만났지만 무시하고 지나쳤지 않습니까.”

“음...”

일단은 남통에 도착하는 게 먼저니, 선봉대는 행군하는 천인대를 발견했음에도 상대하지 않고 피해서 내려왔다.

어차피 선봉대 뒤로 나머지 연대가 줄줄이 내려오고 있지 않나.

그들이 내려오는 길에, 잘게 쪼개져 행군중인 천인대를 하나씩 맡아 분쇄시켰을 거다.

“그럼 남통성에 병력이 몇이나 있겠나?”

“음... 못해도 2만은 넘지 않겠습니까? 해군에게 포구가 봉쇄됐지만 배가 부서진 거지 수병이 전멸한 건 아닐 테고, 먼 곳의 병력은 오지 못했어도 인근 현의 병력은 성에 들어갔을 테니까요.”

“그래서 대충 계산하면 그 정도라 이거지? 허...”

이순몽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조선이 동원한 병력이 2만을 조금 넘는데, 고작 일개 부에서 뽑아낸 병력이 4만이고 진짜로 모인 병력이 2만을 넘는다.

아무리 군벌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사람이 넘쳐나는 중국을 제대로 증명하고 있다.

‘무장상태야 우리가 월등히 앞선다지만, 그래도 머릿수하나만큼은 기가 질리는 군.’

그는 옛 명나라 시절이 잠깐 떠올랐고, 이내 곧 각오가 곧추섰다.

이래서 중국이 통일되면 안 된다는 거다.

각 성별로 쪼개져서 물자의 이동이 매끄럽지 않은데도 이 정도인데, 하나로 통일되면 얼마나 거대한 힘을 뽑아낼 수 있을까.

무장, 훈련, 보급상태는 모르겠다만, 머릿수만큼은 수십만명을 뽑아낼 수 있을 거다.

이순몽과 대대장이 잠시 기가 질려 침묵에 잠겨 있을 때. 저편에서 특전대원이 달려와 보고했다.

“연대장님. 소개 작업을 끝마쳤습니다.”

성벽의 둘레가 아무리 넓다지만 말을 달리면 얼마 걸리지도 않는 거리.

선봉대는 도착하기 무섭게 반으로 쪼개져서 성벽 인근을 휩쓸었고, 성으로 도망치려는 이들을 붙잡고 성에서 나오려는 이들을 때려잡았다.

“이제 두시진 후면 후발대가 도착한다. 1,2중대는 정찰을 계속하고 남은 병력은 숙영지를 건설하도록. 적이 성 밖으로 나오면 그대로 후퇴한다.”

“옙!”

“충성!”

이순몽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령들은 빠르게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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