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53화 (253/538)

253. 챕터36. 질주하다 (9)

청도를 건설하는 와중에도, 붉은갑옷은 산동이 좁다하고 사방팔방을 싸돌아다녔다.

명성 높은 의원을 찾아 끌고 오고, 유명한 약방을 뒤지고 다니고, 고서는 물론 여염집의 부뚜막에서 반쯤 타버린 의학서도 박박 긁어모았다.

그리곤 한손엔 칼을 다른 한손엔 돈을 쥐고서, 산동의원들을 뽑아먹었다.

비전 의술을 알려주지 않으면 가만 안 두겠다고 협박을 하는데, 이걸 어떻게 버티겠나. 그냥 주는 돈이나 챙겨야지.

그렇게 긁어모은 의원들을 데리고, 군의관들은 청도 건설인부들의 진료를 시작했다.

현대에도 그렇지만 이 시대에도 건설현장은 위험천만한 곳이고,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 곳이다.

게다가 이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던 빈민들 아닌가. 공짜로 진료해 주겠다는데, 이걸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사실은 산동호족이 돈을 대줬지만 말이다.

그렇게 친절한 군의관에 대한 명성과 칭송은 널리 퍼졌고, 하남에서 홍형청의 병사들까지 치료해주면서 소문은 중국전역으로 퍼져갔다.

“안 그런가? 분명히 자넬 반길 걸세. 우리의 의도도 확실히 전달할 수 있고.”

“어리다고 무시나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감히 그럴 깜냥이 되겠나.”

“에휴... 알겠습니다.”

유 대위라 불린 이가 툴툴거리며 걸음을 옮기자, 통역을 통해 듣고 있던 현령과 휘주상인은 힐끔 군의중대장의 얼굴을 살폈다.

“...?”

“...”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만, 조선군은 죄다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다니지 않나.

그래서인지 나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수염은 성인이라면 당연히 기르는 건데, 그걸 안하고 있다.

“저게 대체 뭔 짓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으나... 신분이 높은 연대장조차도 턱수염을 밀어버렸으니, “저게 조선의 문화인가?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수밖에.

아무튼. 그런 걸 감안해도 군의중대장의 나이는 서른이 채 안되어 보이는 터라... 현령과 휘주상인은 서로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저렇게 어린 의원이 진짜로 실력이 좋을까?’라는 생각이 눈빛으로 교차했다.

하지만 이들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뭐든 안 그러겠냐만, 이론을 익히고 경험을 축적해야 전문가가 된다.

의술도 마찬가지다. 책만 달달 외운 의원보다 어쩌면 진료 경험이 많은 야매의원의 실력이 더 뛰어날 수도 있는 법이지.

그럼 군의관은 어떨까.

이론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거다. 천하의 의서란 의서를 가장 먼저 접해서 연구하는 이들이 군의관이니까.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중대원의 건강을 책임지고 일주일에 한번씩 진맥을 했다.

환자를 백명이나 진료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어느 마을과 고읍의 의원이 이렇게 많은 환자를 겪어보겠나. 그것도 단발성이 아니라 몇 년 동안 꾸준히 말이다.

게다가 민간의원들은 서로가 경쟁자니, 자신만의 비전을 쉽게 풀지 않는다.

허나 군의관은 어차피 군병인데 경쟁자가 웬 말인가.

오히려 서로 머리를 맞대고 뭐라도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면, 모두가 포상금을 받고 진급까지 가능하다.

더욱이 전역 후에 민간의원이 될 걸 생각하면, 무조건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게 최선. 결국 군의관 사이에선, 자신의 기술을 아낌없이 풀고 받아들이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군의관들이 나이는 어려도 고농축된 경험치를 빠른 시간에 쌓아올릴 수 있었던 거지.

조선내지의 날고 긴다하는 의원보다, 온갖 사건사고가 터지는 변방 군의관의 실력이 더 낫다는 말이 괜히 떠도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호위와 함께 군종승, 군의관, 휘주상인, 현령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장원으로 다가갔고, 연대기병은 장원을 포위하고 여차하면 칼부림을 부릴 준비를 끝마쳤다.

하지만... 역시 일이 잘 풀린 걸까?

장원의 정문 어귀에서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더니, 얼마 걸리지도 않아서 효가의 가주가 자식들을 데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홍해를 앞에 두고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선, 항복의 의사를 몸으로 표현했다.

한편. 순탄하게 흘러간 홍해의 연대와 반대로, 일이 지저분하게 꼬인 연대도 있기 마련.

“헉헉.”

“저 미친놈들.”

“감히 화살을 쏴?”

연대장 조비형은 쌍욕을 멈추지 않고 허둥지둥 뛰어오는 이들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 말았다.

“...”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꽁지 빠지듯 도망치는 걸 보니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작 옆에 있던 군종승과 군의관이 그들을 보호해 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모든 연대가 그러하듯, 그 또한 남직례 호족과 항복한 군현의 관원을 앞세워 항복을 권유했는데... 되돌아오는 건 화살세례였다.

“자... 장군!”

“대인!”

이번 기회를 통해 뭐라도 뜯어내려던 속셈이었을까.

호족과 관원은 조비형에게 달려와 일러바치듯 과장된 몸짓을 하며 애원해댔다.

누가 보면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줄 알겠다.

저놈들을 혼내주라고 목청을 높여대는데, 꼭 꽥꽥거리는 오리 같아 보여서 다시금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이렇게 허우대만 멀쩡한 놈들을 믿은 내가 잘못이지.’

“...”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끔 주변을 살피자, 다른 지휘관들 모두 비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요상한 걸 눈치 챘는지, 결국 둘은 입을 다물고 슬금슬금 시선을 피해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하는 게 좋으려나...”

그는 단단한 목책과 망루로 무장한 마을을 보며, 턱을 긁으며 생각에 잠겼다.

신군율이 재정되면서 조선군의 군공측정방식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나.

수급을 베어다가, 자신의 전공을 증명하는 무식하고 원색적인 방법은 사라진지 오래. 그저 주어진 명령을 시간 맞춰 딱딱 수행하는 게 곧 전공이다.

적을 다 쳐죽이든 한명도 죽이지 않든, 그건 아무 상관도 없고, 오히려 적을 죽이는 것보다 아군이 상하지 않는 게 더 높게 평가됐지.

“고작해야 목책으로 보강한 마을을 무너뜨리는 건 문제도 안 되는데... 이러면 앞으로의 일이 꼬일까 걱정이군.”

“어차피 한번쯤은 싸웠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면서 지나온 마을과 군현이 쉽게 항복했지만, 염상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그런가?”

“예. 뭐... 그렇지 않겠습니까.”

조비형의 혼잣말에 대대장들이 자신만의 감상평을 늘어놨다.

“염상이란 말이지.”

“그것도 원래는 거칠다는 밀염상이었죠.”

“사령관께서는 염호마을을 온전히 얻길 바라시는데...”

그가 연오랑의 명령을 입에 올리자, 다들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땠다.

“대적하는 이들은 어차피 염상들 아니겠습니까. 소금 장인들은 아마 집에 숨어 있을 겁니다.”

“화포로 목책 입구만 무너뜨리고 밀어붙이면 금방 끝나지 않겠습니까.”

다들 이런저런 계획을 늘어놨고, 조비형은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음...”

‘어찌하는 게 좋을까.’

다른 의견이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자, 뒤쪽에 있던 소,중대장들 중에서 눈을 매섭게 번뜩이는 무관에게 시선이 멈췄다.

‘오! 차라리 잘됐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보여주는 게 더 나을지도.’

그는 뜻 모를 생각을 혼자 하고선, 이심전심의 눈빛을 뿌리는 무관과 눈이 마주쳤다.

“홍 대위. 자네가 해보겠나?”

“맡겨만 주십시오.”

“좋아. 자네 중대에게 맡기지. 시계를 가져오라.”

“옙!”

조비형이 그리 말을 하자, 부관병 중 하나가 보급마차로 냉큼 달려가 뭔가 큼지막한 물건을 가져왔다.

사람 머리통보다 조금 큰 물건으로 쇳덩이와 나무가 결합된 물건.

나무로 만들어진 네 개의 다리가 수평을 유지했고, 쇠로 만들어진 안쪽은 비스듬히 기울어져서 숟가락으로 파먹은 것 마냥 움푹 파여 있었다.

안쪽 중앙에는 바늘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침이 박혀 있었고, 표면에는 어지럽게 음각으로 파인 선들이 빼곡했다.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로, 기병연대가 돌아다니면서 써먹을 수 있게 축소화 시킨 물건이었지.

뾰족 튀어나온 침의 그림자가 안에 파인 시침을 가리키고 있었고.

“반 시진을 주지.”

조비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는 다시금 시각을 확인했다.

“충성!”

홍 대위 또한 마찬가지. 그도 시각을 확인하고선 경례를 하기 무섭게 뒤로 빠져나갔다.

“저들을 써보시려는 겁니까?”

“나름 좋은 기회 아닌가. 이번에 독자적으로 성과를 올린다면, 충분히 제식편제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지.”

조비형은 대대장의 말에 히죽 웃으며 이를 보였고, 대대장은 조비형이 저 중대에 쏟은 관심과 지원을 아는 터라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내 질서정연하게 정렬하고 있던 연대에서, 홍 대위가 이끄는 한 개 중대가 빠져나와 목책 근처로 천천히 나아갔다.

“후...”

‘기회다.’

홍 대위. 홍사석은 옆에서 함께 달리는 동료, 부하들을 보며 각오를 다졌다.

무과에 합격해 무관이 되었으나 어느덧 육군에 편입되어 북방을 누비고 다녔고, 어쩌다보니 조비형이 준비한 새로운 프로젝트에 발을 디디게 됐다.

이번에 그 성과를 점검받게 됐으니, 자신들이 헛짓거리를 한 게 아닌 걸 확실히 증명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간 열심히 갈고 닦은 실력을 보여줘야지. 안 그런가!”

“옙!” “충성!” “하!”

모두가 같은 마음인지, 홍사석의 뜬금없는 외침에, 소대장들은 물론 백명의 중대원들 모두가 목청 높여 기합을 내질렀다.

“퍼져서, 포위하고, 공격은 자유롭게 진행한다. 시간은 많으니까 무리하지 마라!”

“옙!”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대원들은 마을을 포위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이곳 마을은 염호. 말 그대로 소금을 만드는 마을로, 목책 주변은 논밭 대신 잡풀과 땔감, 이런저런 물건들만 나뒹굴고 있었다.

말을 달리기에 어렵지 않은 땅 인터라, 중대원들은 순식간에 마을 뒤편까지 달려가 포위를 끝마쳤다.

다만 고작 백명으로 이 큰 마을을 어떻게 다 포위할 수 있을까. 그저 듬성듬성 기마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목책 안에 있던 적들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저 먼 거리에서 뜬금없이 사방을 포위한 기병을 보며 “저건 또 뭐하는 건가?”라는 심정으로, 목책 위에 올라 욕을 내지르고 있었다.

“...”

하지만... 적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홍사석을 비롯한 중대원들은 소음을 귀에서 지우고 자신만의 싸움에 빠져들었다.

쓱. 평범한 화살집보다 훨씬 작은 화살집으로 손이 옮겨지고, 손가락 끝에서 고리에 매달린 긴 막대기가 함께 흔들렸다.

곧은 대나무를 수직으로 일도양단해 버린 것처럼 생긴 나무막대기. 통아에 작은 화살을 끼워 넣고 동시에 활시위에 얹었다.

“후흡.”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시위를 잡아당겼고, 튼튼한 흑각궁의 몸체가 비틀리듯 납작해졌다.

‘저놈. 거리는...’

홍사석의 눈은 거의 백오십보의 거리를 일순간에 좁혀 들어갔고, 박도를 들고 유독 과하게 팔을 흔드는 인물에게 빨려 들어갔다.

팔근육이 비틀리듯 당겨지고, 활시위는 찢어질 정도로 팽팽해졌고, 말머리를 비켜간 조준선은 정확히 적병과 일직선으로 놓여졌다.

‘지금.’

퉁!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화살은 비상을 시작했다.

쉑쉑쉑쉑! 동시에 홍사석 뿐만 아니라, 모든 중대원들의 손에서 편전이 튀어나갔다.

편전이 워낙 작은 물건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뜬소문처럼 통아 때문에 화살이 안 날아갔다고 착각한 걸까. 그도 아니면 이렇게 먼 거리에선 못 맞출 거라고 생각한 걸까.

뭐가 됐건, 적들은 숨지도 않고 맨몸을 내밀며 허세를 부리고 있었는데...

“어억!” “크헉!” “켁...” “화살이다!”

순식간에 목책 위에선 난장판이 벌어졌다.

거의 대부분의 편전이 적병에게 꽂혀 비명소리가 난무했고, 급소에 맞은 이는 한방에 목숨을 잃었고, 화살을 뽑기도 힘들 정도로 깊이 박힌 편전의 힘에 놀라 목책 아래로 굴러 떨어진 이도 있었다.

‘좋아!’

홍사석은 자신이 목표로 삼았던 이가 허물어진 걸 알고서, 속으로 만세를 내질렀다.

‘침착.... 흥분하지 말고.’

하지만 이제 시작인데 벌써 좋아할 수 있나.

이내 곧 마음을 가다듬고서 천천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가면서 다시금 장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냥 아닌 사냥이 펼쳐졌다.

“오...!”

“과연!”

“좋구나!”

망원경으로 목책을 살피던 지휘관들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역시...’

조비형 또한 마찬가지. 그도 어째 손이 근질근질해졌는지 자기도 모르게 화살집을 매만지다가, 괜히 머쓱해져서 손을 떼고 말았다.

“실력이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다니? 저 정도면 충분히 명사수지. 족히 백오십보는 되어 보이는데, 다들 백발백중 아닌가.”

“맞네. 말을 타고서 저 정도면 손에 꼽힐만한 실력이지.”

“음...”

지휘관들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상황을 직시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궁병은 정확하게 쏘는 것보다 멀리 쏘는 게 더 중요했다.

궁병 운용의 대부분은 일제사격을 통해 화망을 형성. 뭉쳐 있는 적 제대를 향해 왕창 쏟아 붓는 거다.

힘을 길러 멀리서 쏘면 쏠수록, 한발이라도 더 맞출 수 있는 거지.

물론 이러면 정확도가 형편없지만, 어차피 적은 우글우글 몰려있는데 무슨 상관일까.

다만 소규모 교전에선 원거리 사격뿐만 아니라 정확도까지 필요하게 되니, 실제 교전거리는 오십보 안팎으로 팍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무려 백오십보 밖에서 하나같이 백발백중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뽐내고 있다. 그것도 일반 화살이 아니라, 다루기가 까다로운 편전으로 효과를 내고 있었다.

“좋군.”

“좋은 정도가 아니라, 흡족한 수준 아닙니까. 연대장님.”

“그런가?”

“예.”

조비형은 대대장의 아부 아닌 아부에, 자기도 모르게 히죽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저들을 키워낸 게 자신이니, 저들의 공이 곧 그의 공이 될 테니까.

‘남은 마을을 처리하면서 계속 굴려봐야겠어. 정말로 정식 편제가 될지도 모르겠군. 명칭을 뭐라고 해야할까? 저격대? 궁사대?’

그는 속으로 자화자찬과 다짐을 함께 하면서, 희망찬 미래를 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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