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56화 (256/538)

256. 챕터37. 공성하다 (2)

둘은 계속 걸음을 옮겼고, 이내 남통성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북적거리는 소음이 더욱더 거세졌다.

조선군 숙영지는 남통성에서 고작 3,4키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그 뒤쪽에 위치한 마을로 온 지방에서 몰려온 상인들이 죄다 한자리에 모여 있었으니까.

남직례의 미래를 놓고 연판장 조약을 위해서 거의 모든 호족과 상인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 이들이 수백,수천이니 당연히 이들을 호종하고, 먹고 마시고 쉴 수 있게 해줄 상인들이 달라붙기 마련.

여기에 만오천에 가까운 조선군의 보급 또한 남직례와 절강 상인이 해결해줘야 하니... 대장장이, 가죽장이, 술도가, 예기와 창부, 수선장이 등등. 별의 별 사람들이 죄다 몰려들었다.

오래전 연합군이 거용관을 공성할 때 따라왔던 보조군이, 지금은 남직례와 절강 상인에게 대체된 꼴이지.

‘진짜 전쟁하는 거 맞나? 원래 이런 건가?’

방회는 거대한 시장처럼 변해버린 마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워낙 어릴 적이라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예전 내전 때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

‘하긴 그때야 관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절이 달라졌지.’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나라가 있었을 땐 비록 군상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관이 알아서 보급을 처리해줬다. 물론 백성들을 징발해서 부려먹긴 했지만, 지금처럼 난장판은 아니었지.

사실 그것도 힘들면, 그냥 전시징발이라는 명목으로 마을을 직접 약탈했고.

그에 비하면 지금처럼 군상과 상인이 직접 군대에 달라붙는 게, 어찌 보면 훨씬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

“저기 보게. 오늘도 사람이 몰려 있군. 저게 뭐 재미있는 일이라고. 쯧쯧.”

학명은 혀를 차면서도 어째 관심을 끊지 못한 걸까.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길이 향했고, 방회 또한 홀린 듯 함께 따라갔다.

추수를 마친 논바닥엔 사람들이 무리지어 몰려 있는 곳이 여러곳 있었는데,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에서 갑자기 “와아아!”하고 환호성이 들려왔다.

둘은 환호소리에 이끌려 조금 더 발걸음이 빨라졌고, 이내 불쑥 튀어나온 논두렁과 그 위에 세워진 단상에 사람들이 오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거. 밀지마쇼.”

“누구야!?”

둘은 시장바닥마냥 시끄러운 군집을 물고기처럼 헤집으며 앞으로 들어갔고, 이내 곧 모두가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걸 보며 걸음을 멈춰 섰다.

“들어라!”

검은 투구에 금색 띠를 두른 조선군이 입을 열자, 옆에 있던 통역이 목청을 높였다.

“이 자의 이름은 곽청보로. 연주부 각통현에 살던 이로...”

통역은 계속해서 입을 놀렸고, 둘 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시선이 조선군과 통역을 거쳐 목에 칼을 차고 있는 이에게 쏠렸다.

“...”

어째 오늘과 같은 일이 하루이틀 벌어진 일이 아닌 모양이다.

목에 딱 맞게 채워진 칼은 불길한 붉은빛에 완전히 물들어 있었고, 목만 내밀고 묶인 사내는 재갈이 물렸음에도 “읍읍!”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처연하면서도 불쌍했건만, 사람들은 동정은커녕 쌍욕을 하며 통역의 말에 맞장구치며 외쳐댔다.

“죽여라!”

“쌍놈의 자식!”

“천벌을 받을 놈!”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소리치는 관중을 보며, 방회는 홀로 냉정을 잃지 않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들 중에서 저 곽청보라는 자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진주광의 부하로서 그간 패악질을 일삼은 게 분명했겠지만, 직접 당한 당사자도 아니지 않나.

허나 광기에 휩쓸린 사람들, 진주광의 압제에 고통 받은 백성들 입장에선 그런 건 안중에도 없던 모양이다.

“판결을 내리겠다. 사형!”

“와아아!”

이들이 알까 모르겠다만... 판군사대 소속 무관이 판결을 내리자, 모두는 만세를 외치며 다시금 환호성을 질렀다.

“집행하라.”

“옙!”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 머리통만한 도끼를 든 도수부가 망설임도 없이 도끼를 내리쳤다.

쾅! 한방에 목이 떨어져 나가면서 피가 흩날렸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와아아!” “잘 죽었다!”라고 미친 소리를 내뱉었다.

“치워라.”

판군사대 무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선군은 목과 시체를 끌고 군중 밖으로 향했고, 이내 곧 논두렁 밑에서 다리를 벌벌 떨고 있던 다른 병사를 처형대 위로 끌고 올라왔다.

불문곡직하고 일단 죽이고 보니 완전히 겁에 질렸는지, 바지가 오줌에 잔뜩 젖어 있는 게 보였다.

“보아하니 동쪽 해안의 염전마을에서 끌려온 모양인데... 차라리 거기서 처리하지, 왜 힘들게 여기까지 끌고 왔을까.”

“뻔하지 않나. 우리보고 보라고 저러는 거겠지.”

방회는 냉소를 숨기지 못하고 이죽거렸고, 학명의 소매를 끌고 군중 밖으로 향했다.

얕은 수작이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않나.

연주부 백성들은 자신들의 울분을 풀어준 조선군을 한동안 칭송하게 될 거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엊그제도, 동쪽 염전마을에서 온 포로가 처형당한 거로 봐선, 동쪽 해안가도 완전히 정리가 된 것 같다.

‘이젠 진짜 남통성 밖에 안 남은 건가.’

방회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리를 빠져나왔고, 학명이 옆구리를 콕콕 찌르자 상념에서 벗어났다.

“저기 보게. 효과는 확실하다니까.”

“저 놈이야 멍청해서 그런거고.”

“큭큭.”

학명은 방회의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처형대가 한 눈에 보이는 곳엔, 손으로 밀면 그냥 부서질 것 같은 어설픈 감옥이 반쯤 쓰러진 채로 세워져 있었다.

다만 그 안엔 포로가 아니라, 비단옷을 입은 청년들 몇이 넋을 놓고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조선군이 자신들을 죽이지 않을 게 분명하지만, 처형식을 계속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산지옥을 겪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게... 왜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어디든 주제 파악을 못하고 날뛰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둘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옥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조선군이 거침없이 진주광을 밀어붙이자, 슬금슬금 기어들어온 남직례 호족 자제 중에선 호기롭게 까불거리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가 직접 싸울 걸 그랬다.” “조선군도 알고 보면 별거 아니다.” “이렇게 쉬운 일에 조선군에게 너무 많은 걸 퍼주는 게 아니냐.” 등등.

겁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허세에 도취되어 사람들을 선동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조선군이 가만 놔뒀겠는가.

당연히 죄다 잡아다가 곤죽으로 만들어 옥에 가둬놨다.

백성들 다 보는 앞에서 저 꼴로 만들어 놨으니, 앞으로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 정도로 체면을 구겼지만... 어쩌겠나.

목숨을 구한 것만으로도 다행인줄 알아야지.

아니나 다를까 저 어리석은 자식들과 반대로, 가주와 집안어른들은 눈치가 있어서인지... 조선군에게 군소리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선처를 구할 뿐이었다.

목적지를 향해 휘적휘적 계속 걸음을 옮기다 보니, 또 다른 무리를 마주하게 됐다.

헌데 이곳 논두렁은 저 옆에 있던 논두렁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코를 맵게 하는 싸하면서도 매캐한 냄새가 풍겨오고, 생나무가 타는 모양인지 검회색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다.

간이 화장터 앞에는 목탁을 두들기며 염불을 외우는 회색갑옷의 군종승들이 모여 있었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조선말을 대충 얼버무리며 법문을 따라하는 백성들이 보였다.

“씁...”

“흐음.”

한쪽에선 처형이 집행되고, 다른 한쪽에선 처형당한 포로를 화장하고 다비식을 하고 있으니... 이제 대체 뭔 해괴한 짓거리일까.

허나 이 또한 백성들 입장에선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법력 높은 조선의 승려가 이렇게 직접 장례를 치러주니, 나쁠 건 없다고 여기는 것이겠지.

어쩌면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던, 자신의 죄가 씻기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르고.

“...”

“...”

화장터를 지나쳐 계속 나아가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은 간이천막과 차양이 잔뜩 쳐 있었는데, 그 안에선 신음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왔다.

힐끔힐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막사 주위를 돌다보니, 운좋게 얼마 걸리지 않아서 낯이 익은 사람을 찾아냈다.

그나마 갑옷 대신 특이하게 생긴 녹색 옷을 입고 있어서 다행이다. 다 똑같은 붉은 갑옷이라서 찾기도 힘들었을 테니까.

“저... 의원님.”

“바쁘니까 다른 사람한테 가봐.”

중국말을 할 줄 군의관은 거의 없었는데, 대화가 통하는 걸 보니 제대로 찾아왔나 보다.

군의관은 김이 펄펄 나는 옹기에서 빨래를 꺼내면서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저었으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자 짜증 섞인 얼굴을 숨기지 않고 머리를 치켜들었다.

“뭐야?”

“저희입니다. 일전에 진료를 해주셨는데.”

“학명이라 합니다.”

둘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하자, 군의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박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아! 엉덩이가 까진 공가와 학가의 후계자들이군?”

“에... 뭐.”

“예.”

둘은 너무 적나라한 표현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손이 부족한데 잘 됐네. 빨래부터 같이 널지.”

“...예.”

군의관이 히죽 웃으며 얼룩진 광목천을 내밀자, 둘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이곳은 군의관이 머무는 야전진료소였는데, 오라는 조선군은 거의 없고 이런저런 이유로 다친 백성들과 상단 일꾼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군의관들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진료를 해줬다는 점.

이 또한 조선군의 명성을 높이기 위함일지도 모르지만, 나쁠 건 전혀 없었다. 사실 백성들에게는 공짜로 해주지만, 속을 까보면 진료비용을 남직례 호족에게서 다 뜯어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희 집안 어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 어른들도 다 왔지?”

“예. 그렇습니다만...”

“그럼 가서 말 좀 전해라.”

“...?”

“거지새끼들도 아니고, 피 묻은 붕대와 진료용 앞치마는 왜 자꾸 훔쳐가는 거야? 어차피 이거 다 너희 집안 돈으로 사오는 건데, 가만 놔두면 너희만 손해 본다?”

“...!”

“자꾸 이러면 진료 안 해주는 수가 있어. 도둑놈들 때문에 내가 직접 빨래를 하는 게 말이 되냐?”

둘은 뜬금없는 말에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이어지는 살벌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여기 진료소가 문을 닫으면, 애꿎은 욕은 호족들이 다 먹게 될 테니까.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둘은 황급히 빨래를 널었고, 펄펄 끓는 빨래에 손이 익어 붉게 변해갔다.

호호 입바람을 불어가며 손을 식히면서, 자기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그런데 의원님. 굳이 이렇게 삶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어. 너 같으면 피 묻은 붕대를 그대로 쓰고 싶냐? 이렇게 팔팔 끓이고 햇볕에 말려서 소독하는 거지. 아. 소독이 뭔지 아나?”

“...”

군의관은 혼자 답하며 중얼거렸고, 둘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그저 손만 바삐 놀렸다.

이내 빨래를 모두 널고 나자 군의관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둘은 오리새끼마냥 쫄래쫄래 따라갔다.

자리에 도착하기 무섭게, 이런저런 말도 필요 없이 군의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약 떨어져서 왔지? 바지 까고 뒤로 돌아봐.”

“...”

부끄러웠지만 별 수 있나.

이미 경험했던 터라 둘은 냉큼 바지를 깠고, 군의관은 만족스러운 눈을 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울혈도 많이 빠졌고, 잘 아물었네. 조금만 더 바르면 되겠다.”

“...!”

반가운 소식에 둘은 냉큼 바지를 끌어올렸고, 군의관은 한지에 싸인 고약을 내밀었다.

“전처럼 불에 살짝 녹여서 하루에 한번씩 펴서 바르고, 상처를 감았던 붕대는 삶아서 햇볕에 잘 말리고. 알지?”

“예.”

“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짓을 시키진 않을 것 아닌가. 지금까지 계속하면서 치료도 잘 됐으니, 믿어서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나저나 어때? 효과 좋지?”

“예.”

“그렇습니다.”

둘은 절로 공경의 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남부럽지 않은 호족으로 살면서 이런저런 의원과 약재를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효과 좋은 고약은 처음 봤다.

조선이 의학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못 들어 봤는데, 정녕 상상외였지.

“그래야지. 우리가 얼마나 개고생하면서 만든 물건인데.”

“...”

둘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군의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옛 기억에 빠져들었다.

착호군이 처음 창설될 당시. 그 때도 이 녀석들과 같은 처지가 된 이들이 수두룩했다.

무관 지망생이야 그나마 허벅지에 굳은살이 박였지만, 어쩌다보니 착호군에 끌려온 녀석들은 격한 기병훈련을 처음 해봤으니까.

군의관들은 앓는 소리를 그만 듣기 위해서라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약과 금창약을 연구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딱 맞춰서 향약집성방이 완성됐고, 배봉마을에서 의학과 약학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왔다는 것.

해가 거듭될수록 임상실험체와 군의관들은 계속 늘어갔고, 경험과 실력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점점 더 효과 좋은 고약을 만들고, 석회와 뼈, 송진가루를 이용해 지혈이 쉽게 되는 금창약과 상처를 잘 아물게 해주는 금창약도 만들어 낼 수 있었지.

“아.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만... 다 끝났으니 가 봐도 돼.”

“저... 이거.”

군의관이 정신을 차리자 둘은 마제은을 조심스럽게 내밀었으나, 그는 정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누가 볼까 무섭네. 얼른 집어넣어. 그거 받았다가 줄초상 나니까.”

“...?”

“정 주고 싶으면, 후방의 보급대 알지? 거기 보급관에게 내 이름 앞으로 던져놔.”

“예? 예...”

너무나도 완강하게 거부하자, 둘은 거듭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선 야전진료소를 빠져나왔다.

‘군대를 따라온 의원조차 저럴 정도면... 진짜 무관들은 더 심하겠군.’

방회는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산동의 친우들에게 의주에서 거래하던 상인이 장난질을 하다가 알거지가 되어 쫓겨났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그게 마냥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아마... 조선군 무관에게 달라붙어 뭐라도 해보려는 집안은 전부 헛발질을 하고서, 오히려 잘못 찍혀서 낭패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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