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챕터37. 공성하다 (3)
약도 받았겠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둘은 눈이 마주치고선 이신전심으로 남통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회가 이해가 안됐던 것 중 또 하나는 조선군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지 않고, 공성하는 걸 그냥 구경하게 놔뒀던 것.
“가볼까?”
“그러지.”
느긋하게 걸음을 계속 옮기자, 저쪽 구릉 위에 수도 없이 서 있는 차향과 작은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는 오늘도 여전하군?”
“달라질 게 있을까. 아버님들이 오면서 우린 할 일도 없어졌잖아?”
“음...”
학명이 쓴웃음을 짓자, 방회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직례 호족의 후계자들이 길잡이를 자처한 건, 조선군의 움직임을 눈에 담고 그들의 의중을 파악해 빠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조선군이 진주광을 처리하는 건 처리하는 거고, 그 부스러기를 조금이라도 주워 먹으려면 발언권이 있는 인물을 보내야 했으니까.
남직례 북부에서부터 후계자들이 합류해 어느덧 후계자 모임 비슷한 게 만들어지자, 그 소식을 듣고 다른 후계자들도 부리나케 달려왔다.
후계자를 보낸 가문을 조선군이 좋게 봐줄지도 모르잖아?
허나...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양주부를 점령하고 나서, 조선군은 이들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남직례의 모든 호족 가주들을 소집했다.
“우리가 판을 깔아 놨으니, 이제 그 위에 올라서 너희들끼리 결정을 내려라. 빨리 연판장에 서명해라.”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지.
이렇게 가주들이 죄다 모여들자, 후계자들은 할 일을 잃어 버렸는데... 그냥 해산하기에는 조금 아깝지 않나.
대부분이 20대로 구성된 이들은 호기로움과 모험심, 공명심이 가득했고, 몇몇은 자기도 같이 싸우겠다고 허세를 부린 이들도 있었지.
당연한 말이지만 조선군은 단칼에 거절했고, 그 대신 공성전투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보는 걸 허락했다.
‘조선군은 꿍꿍이가 있겠지만... 살아생전 이런 구경을 또 언제 해볼까.’
방회는 그런 생각을 하며 구릉에 점점 다가갔고, 그런 둘을 발견했는지 누군가 느긋하게 다가와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그거 약봉지인가?”
“아.”
“어. 오랜만일세. 윤표.”
방회와 학명은 자신을 보며 히죽 웃는 청년을 보며, 멋쩍게 웃으며 애써 약봉지를 소매에 숨겼다.
괜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피어올랐기 때문.
“그게 뭐 대수라고. 조선군 의원의 실력이 좋긴 좋더군.”
청년은 피식 웃으며, 그 역시도 고약이 든 약봉지를 흔드는 게 아닌가. 윤표라 불린 청년 또한 회안부 출신으로, 둘과 함께 초창기부터 조선군을 따라왔다.
“어. 그거...?”
“자네도 갔다 왔나?”
“그야 당연한 말 아닌가. 다 같이 골골거릴 때, 제일 먼저 달려간 게 나였다고.”
“큭.”
청년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둘 모두 피식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가지. 자네들이 안 오던 사이에 꽤 많은 일이 있었어.”
“그래봐야 특별할 게 있겠나? 어차피 남통이 여전히 얻어맞기만 했을 텐데?”
“오... 그게 아니지. 그제는 진주광의 기병이 기습돌격을 감행했지.”
“...!”
둘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얻어맞기도 바쁜 놈들이 그래도 칼은 휘둘러 봤다는 건가?
“우리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걸 저들도 알 정도로 완벽하게 고립됐는데,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나? 화포를 처리하지 못하면 답도 없으니, 어차피 수성전엔 필요도 없는 기병을 동원해서 화포를 망가뜨리려 한 거지.”
“그래서 어찌됐나?”
“어찌되긴.”
청년은 “당연한 걸 왜 묻냐?”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 오백은 넘어보이던 기병대였는데, 적 기병이 성문을 빠져나오기 무섭게 조선기병이 사방에서 달려들더군.”
“오...”
“장관은 장관이었네. 지난날 몽골기병이 있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온 사방에서 화살비가 쏟아지는데, 기사를 하는 조선기병을 진주광의 기병은 따라붙지도 못하더군.”
그는 그 때의 장엄함을 떠올리는 듯, 맛깔나게 입을 놀렸다.
화포는 미끼 아닌 미끼가 되었고, 진주광의 기병은 피해를 무릅쓰고 화포에 달라붙으려 했다.
문제는 조선기병의 화력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강력했던 것.
스웜전술을 사용하면서 “때릴까? 말까?”를 반복하며 화살비만 먹이는데, 병력 수가 훨씬 많으니 화살비를 얻어맞는 것만으로도 돌격속도가 팍팍 줄어든 것.
그렇게 속도가 줄어들자 어느새 몰려온 또 다른 기병연대가 진주광의 기병대를 완전히 감싸버렸고, 적 기병을 중간에 놓고 조선기병은 타원형 모양을 그리는 거대한 벌떼로 변해 이리저리 몰아쳤다.
결국 적 기병대는 화포가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밀려가 완전히 압살 당해버렸지.
“자네들도 그걸 봤어야 했는데 말이야. 적 기병이 호기롭게 나오기에 단박에 조선기병에게 달라붙어서 육박전을 벌일 줄 알았는데, 조선기병은 얌체처럼 싸워주지 않고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더군.”
“음...”
둘은 충분히 가능할 거라 확신했다.
정신 나간 속도로 행군할 때. 자신들은 힘들어 죽는 줄 알았는데, 더 무겁게 무장한 조선기병은 아무렇지도 않게 힘이 남아돌았으니까.
보급품을 다 덜어낸 지금은 더 민첩하게 움직였겠지.
“그렇게 적 기병제대가 흐트러지고 길어지자, 틈을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조선군이 먼저 달려들더군. 기사를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묵직한 공격이었지. 제대로 막기는커녕, 조선기병이 달려들자 말머리를 돌려서 도망가려던 이들이 부지기수였다니까.”
“하긴... 진주광의 기병이 언제 기병전을 해봤겠나. 그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위세를 떠는 게 고작이었겠지.”
중국의 기병이 씨가 마른 건 이미 한참 된 일이고, 기병을 보유했다고 한들 보병하고만 싸워봤지 기병끼리 싸우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세력이든 자신의 최정예병인 기병을 마구 써먹어서, 자기 손으로 전력을 깎아먹는 어리석은 짓은 피했으니까.
“흐흐. 맞네. 그에 비해 조선군은 몽골군과도 싸웠다더니, 그게 허명은 확실히 아니었지.”
“흐음...”
과거 명이 있던 시절에 북원을 멸망시켰다지만, 중국인들에겐 아직도 몽골군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운석핵꿀밤의 반대급부로 꺼지던 불씨가 다시 피어난 지금은, 두려움 또한 망각되지 않고 생생히 살아 꿈틀거렸지.
그런 몽골군을 두들겨 팬 조선군이라... 남직례 호족들이 조선군이 시키는 대로 재깍재깍 움직이는 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얼른 가지. 자네들이 못 보던 이들이 꽤 많이 왔네. 저 멀리 휘주부는 물론이고, 안경부와 지주부의 호족들도 찾아왔으니까.”
“장강을 건너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렇네. 뭐... 그치들이야 사실 옆에 붙은 호광과 강서와 더 가깝게 지낸다지만, 어찌됐건 그들도 남직례 사람들 아닌가. 옛 명나라의 허울뿐인 행정조직이지만, 여전히 남아 있으니...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정리할 생각이지.”
“음...”
“연판장 조약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오히려 우리보다 그들에서 더 중요한 사안이 됐지.”
“...”
방회와 학명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열된 중국이라지만 옛 명나라의 지방행정조직은 아직 남아 있고, 그 지방행정관리직을 호족,상인 가문이 장악한 상태.
하지만 각 성의 경계에 위치한 곳은 처지가 애매했다.
그들은 “지방관직이야 너희들끼리 알아서 나눠 갖고, 우리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라. 그러면 확 그냥 다른 성에 붙어버린다?”라고 외치고, 애매모호한 자세를 고수하며 자기 배를 불리는 일에 열중했다.
허나 연판장 조약은 암묵적으로 인정되던 옛 명나라 행정구역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게끔 강제하고 있다.
이젠 박쥐같은 행동을 하다가는 이도저도 안 되는 꼴이 됐으니, 어디에 붙을지 확실히 정해야할 때가 된 거지.
“회주부야 회주상인이 남직례에 많이 진출했으니 이곳에 붙겠지만, 지주부와 안경부의 가문은 조금 애매하지 않나. 아마 고민이 많을 거야.”
“음...”
둘은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놓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주부는 장강 건너편에 위치해서, 사실상 남직례보다 강서성에 더 가까웠다.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던 응천부가 있을 시절에는 문제없었지만, 남경이 남경호수가 된 이상 그들을 옭아매던 그물이 없어졌다.
안경부 또한 남직례보단 호광에 더 가까웠고, 그들은 운하보다 장강에 더 집중하던 곳이니 사정은 마찬가지.
“설마... 연판장 조약이 완성된다고 해서, 갑자기 안경부나 지주부 사람들과 거래를 못하게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야 그렇겠지만, 남직례 전체가 한뜻으로 움직이게 되면 모두가 영향을 받지 않겠나? 어느 연맹에 속하냐에 따라서 세금이나 통행에 제약이 가해질 수도 있겠지.”
“시끌시끌하겠군...”
“산동과 하남이 이미 겪고 있는 일 아닌가. 이젠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거지. 아마 가주님들도 다 같은 생각을 했으니, 전쟁터나 다름없는 이곳까지 몸소 찾아오신 걸 테고.”
셋은 잠시 상념에 빠져 침묵하며, 조용히 걸음만 재촉했다.
그냥 지금처럼 어중간한 형태가 유지됐으면 어찌될지 모르겠다만, 산동이 옛 명나라 틀을 벗고 새로운 방향으로 완전히 결집한 이상.
다른 성도 그에 맞춰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비록 연맹 형태라지만 한쪽은 한마음으로 움직인다. 다른 쪽은 사공이 수십명이라서 갈피를 못 잡고 산으로 간다.
둘이 부딪치면 누가 우위에 서겠는가.
당연히 전자이고, 조선에 기대어 산동이 연맹을 만드는 순간, 모든 성이 연맹을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 거지. 칭왕자가 등장하는 건, 절대 눈뜨고 못 보니까.
‘골치 아프게 되겠어.’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러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남통성에서 대략 1키로 쯤 떨어진 구릉에 완전히 올라서자... 절로 감탄이 나오고 말았다.
“오...”
“와.”
“...”
셋의 눈에 진짜 전장이 펼쳐졌다.
조선군이 접근을 허락한 구역은 여기까지지만, 여기에서만 봐도 남통성과 공성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통성 외각은 조선군이 오자마자 싹 추수를 마무리 했기에, 논 대신 거대한 공터로 변해 있었다.
논에서 물을 뺀지 오래 되서 땅은 딱딱하게 말라 있었고, 비록 논두렁과 수로, 관도가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긴 하지만 충분히 말을 달릴 공간이 나왔다.
구릉 뒤편 한쪽에선 보란 듯이 농부들이 모여 있었는데, 커다란 통나무에 벼를 내리쳐 타작을 하고 있었다.
아마 저것도 남통성에서 뻔히 보일 테니, 속이 미치도록 쓰리지 않을까.
조선군은 남통성의 성문에 맞춰서, 동,서,남쪽 세 군대에 숙영지를 건설했고, 포대 또한 그에 맞춰 위치했다.
살짝 떨어진 세 포진지 사이론, 수도 없이 많은 조선기병이 이리저리 순찰을 돌면서, “어때. 꼽냐? 꼬우면 나오라니까?”라고 약을 올리고 있었지.
“저게 그 포대인가?”
“맞을 걸세.”
방회는 저 멀리 아른거리는 논두렁 한곳을 가리켰고, 윤표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군은 엄청난 수의 화포를 가져왔고, 논두렁에 반쯤 파묻듯이 화포를 전개해 포진지를 만들어 놨다.
솔직히 말해서 후계자들 중 그 누구도 저게 정확히 뭔지 몰랐고, 화포를 왜 저렇게 배치하는지, 그 무거운 화포를 대체 언제 어떻게 가져왔는지도 몰랐다.
그저 백문이 훨씬 넘는 화포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걸 처음 본 터라, 감탄에 감탄을 이었을 뿐이지.
“오늘은 화포를 안 쏘나 보군?”
“이제 곧 쏠 걸세.”
“자네가 어찌 아나?”
“흐... 사실 조선군이 중구난방으로 화포를 쏴서 솔직히 언제 쏠지 모르지만... 새벽녘에 쏘고 나서 지금까지 잠잠했으니, 이제 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윤표는 확신할 수 없이 객쩍게 말을 했으나, 어째 운이 좋았다.
쾅쾅쾅쾅!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장에서 굉음과 회색연기가 마구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니까.
“오!”
“와아!”
“좋구나!”
팔자 좋게 놀러 나온 이들답게, 후계자들은 하나같이 환호성을 지르며 술을 허공에 뿌려댔다.
이곳엔 차향과 천막만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의자와 탁자까지 가져와서 주안상을 펼쳐놓고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지만 않다면, 전장이야 말로 사나이의 웅심을 자극하는 최고의 유희 아닌가.
당연히 빠짐없이 찾아와 술과 함께 즐기는 중이지.
이런 행각을 조선군도 가주들도 방관했는데,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후계자들이 이런 식으로라도 친목을 도모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물론 조선군은 자신의 위용을 뽐내기 위해, 구경하는 걸 허락했고.
콰콰쾅! 모두의 환호성에 맞춰, 화포는 축하공연을 하듯 연이어 불을 뿜었다.
중앙에 위치한 포대에서 포격이 시작되자,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다른 쪽 포대에서도 불꽃이 피어오른 것.
남통성을 삼면으로 포위한 모든 곳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니, 귀가 멍멍할 정도로 메아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흐흐. 이게 끝이 아니지. 진짜는 따로 있네. 지켜보게.”
윤표는 놀란 눈을 한 둘을 보며 히죽 웃었고, 조용히 하라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 뿐만 아니라, 구릉 위에 오른 모두가 그렇게 침묵에 잠겨 있자... 콰콰쾅. 콰콰쾅! 흡사 콩 볶는 소리마냥, 포격소리가 가락을 맞추듯 끊이질 않고 멀리서부터 계속 이어졌다.
“와...”
“이건...?”
“장강의 조선수군이 쏘는 걸세. 이쪽에서 포격소리가 들리면, 장강에서도 남통을 향해 쏘는 모양이더군.”
“아...”
둘은 그제야 이해가 됐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군의 작전계획이야 알 수가 없지만, 조선이 엄청난 수의 수군을 동원한 건 이미 익히 듣지 않았나.
그 대단했던 진주광의 수군을 반나절 만에 해치워 버렸으니, 분명 수군 또한 엄청난 수의 화포를 동원했을 거다.
“가지. 소개해줄 사람이 있네.”
방회와 학명은 윤표를 따라 차향 한 곳으로 다가갔고, 그는 잔뜩 흥분해 있는 후계자들에게 둘을 소개했다.
‘음...’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각자 이런저런 감상을 늘어놨고, 둘은 잠시 전장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