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챕터37. 공성하다 (7)
절강의 대표적인 해안도시는 위에서부터 소주, 항주, 영파, 태주, 온주가 있었다.
모두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나라 시절부터 사람이 모여 살던 곳이며, 당나라 시절에 제대로 번성하기 시작했고, 청나라를 넘어 미래의 중국까지 계속 번성하게 되는 곳.
지금 역사에선 해상무역이 발달함에 따라, 원래 역사보다 더욱 북적거리고 발달하게 된 곳이지.
운석핵꿀밤 이후. 치열한 협작, 협박, 분열, 협력, 통합을 거쳐 각 도시의 호족, 상회는 어느 정도 안정화가 이뤄졌고, 앞으로 번영만 누리게 될 줄 알았으나... 뜬금없는 조선의 진출로 모두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됐다.
산동, 하남, 남직례는 이미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연맹을 만들기 직전.
절강 또한 그 흐름에 올라타든 무시하든, 어쨌든 서로 만나서 토의를 해볼 필요가 있었는데... 연오랑의 등장으로 인해 이 또한 꼬이게 됐다.
이젠 느긋하게 서로 간을 보면서, 눈치를 살필 시간이 없어졌으니까.
“후...”
“쯧쯧.”
“음...”
태주부 태주시의 대표로 온 제봉효, 온주부 온주시의 황학가. 소주의 육적, 항주의 손달, 영파의 용소평.
유년시절엔 원말명초를 겪었고, 홍무제의 탄압을 버텨냈고, 명이 망한 후 성세를 이끌어낸 인물들.
하나같이 머리가 하얗게 서리고 뼈마디가 시린 나이가 되었건만, 노구를 이끌고 천천히 낮은 언덕빼기를 올라갔다.
평상시엔 걷기는커녕 가마를 타고 다니는 가주들이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지 않나.
약한 척, 고달픈 척 연기하기 위해서라도 힘껏 발을 놀려 꼭대기로 향했다.
상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엔 새로 만들었는지 나무냄새가 짙게 나는 정자가 있었고, 이들이 올 걸 기다리고 있었는지 탁자와 찻잔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이 엉덩이 무거운 이들을 불러온 이가 우두커니 앉아, 허허벌판인 상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대호마냥, 가만히 앉아있어도 위압감을 물씬 풍기는 거한이 호피갑옷을 뒤집어쓰고 있다.
“...!”
가주들과 차양을 들고 따라온 시종들은, 자신들을 막는 긴 그림자에 놀라 잠시 발을 멈췄으나...
“가주분들만 오르시지요.”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터주는 기병의 말에, 얼른 눈짓으로 시종을 물리고 정자에 다가갔다.
“대인.”
“부마대인.”
하나같이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고,
“편히 앉아라.”
연오랑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살짝 어색한 북방 한어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어서, 가주들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곤 냉큼 엉덩이를 붙였다.
“...”
연오랑은 말없이 앉은 가주들을 한명씩 살폈고,
‘백호장군이라더니...’
‘만만치 않겠구나.’
가주들은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그들 또한 연오랑을 살폈다.
나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지만, 뭔가 말하기 힘든 기세라는 게 느껴진다.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밤바다처럼 깊어서 속을 읽을 수가 없고, 무릎 위에 올려 있는 낯선 모양의 장도는 수족마냥 자연스럽게 그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단편 중에 단편적인 모습이건만, 이것만 봐도 그간 들려오던 소문이 마냥 헛소문이 아니라고 직감했다.
‘이런 작자이니, 영파에서 난리를 피운 거겠지.’
괜히 기병을 동원해 등장했을까.
그건 여차하면 영파를 비롯한 해안도시에, 기병을 이끌고 상륙할거라는 무언의 시위였다.
“오느라 힘들었으니, 거두절미하고 말하지.”
“...!”
“절강연합을 만드는 건 잘 진행되고 있나?”
“예...”
“그렇습니다.”
“흥. 내지에 있는 호족들은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고 있겠지. 아국이 그곳까지 가진 않을 거라 믿고 말이야. 어쩌면 해안도시가 어찌되든 자신과 상관없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고.”
“...”
다짜고짜 정곡을 콕 찌르는 말에, 모두는 조용히 눈을 감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해안도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지만, 내륙의 경덕진, 금화, 려수 등에선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있을 거다. 물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긴 하겠지만, 적극적으로 손을 내민 건 아니지.
“허나 우리의 움직임은 둘째 치고, 지금 체제가 사상누각인 걸 너희 스스로가 느끼고 있을 텐데? 너희야 말로 제2의 방국진, 장사성, 주원장이 나오질 않기를 그 누구보다 바라고 있지 않나.”
“...”
연오랑은 그리 말을 하고서 눈빛으로 대답을 종용했고, 결국 육적과 손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그러하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육적은 심유한 눈빛을 마주하면서,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명은 망했으나 지방행정조직은 살아남았고, 지방호족들은 세를 키우면서도 행정조직을 얼렁뚱땅 유지하고 있었다.
호족들 간의 물밑작업을 통해, 포정사, 안찰사, 도지휘사, 등등의 자리에 중립성향의 명망 있는 외부 인사를 올려놓거나, 아니면 호족 출신 인물을 등용해 올려놨지.
그 밑의 관직은 더 말해서 뭐할까.
전부다 호족간의 협의를 통해 서로 하나씩 나눠 먹었고, 옛 명나라 체제를 얼기설기 유지해 왔다.
단적으로 병사들조차 그렇다.
관병의 절반은 군호에 속한 백성들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가문의 가병들로 구성되어 어설프게 하나처럼 움직이고 있었지.
당연하겠지만 이런 이중체제가 제대로 작동할 리가 있나. 한 번에 쾅! 폭발하진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이 일어나고 있었다.
“언제가 됐건 이걸 정리해야한다는 마음은 다들 있었을 테니, 지금이야 말로 때가 좋지 않나. 모두가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서로가 서로를 넘보는 건 쉽지 않겠지.”
“...”
모두는 그의 속뜻을 알아차리며, 다시금 고개를 조아렸다.
산동, 하남, 남직례가 통합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니 빈틈이 보이겠지만, 그들이 약점을 노출하고 일을 진행할 수 있던 건 조선이 버티고 있기 때문.
이걸 훼방 놓거나 방해하는 자가 있다면, 조선이 개입해 뭉개주겠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어차피 연합과 연맹은 이미 존재하지 않나. 이제부턴 그걸 수면 위로 올려서 공식화 하자는 거지. 포정사 등의 지방조직을 없애든 살리든 너희들끼리 잘 만들어봐라.”
“...”
“산동과 하남의 예를 봤겠지?”
“예.”
이들은 조선이 청도를 건설할 때부터, 유심히 지켜보지 않았나. 당연히 산동과 하남이 어떻게 연맹을 조직하는 지 훤히 알았다.
“어떤 형태를 갖추든, 어떤 방향으로 하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도저도 아니게 옛 명나라 관직과 구역에 따라서 붕 떠 있는 절강성을 진짜 절강연맹으로 만드는 거다. 이미 너희들이 한 일 아니냐.”
“...”
육적을 비롯한 모두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소주와 소주 인근에만 수십개의 상인,호족가문이 존재했고, 그들의 대표로서 육적이 이 자리에 앉아있다.
절강을 아우르는 연맹은 없지만, 개별 도시와 현을 아우르는 연합체는 상회라는 이름으로 이미 완성되어 있던 거지. 앞으로 할 일은 이걸 확장하는 것.
“그 부분에 있어서 선물을 하나 주지.”
“...?”
모두는 협박 아닌 협박을 듣다가 조심스럽게 눈을 키웠고,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 아국은 연맹에 속한 상인 혹은 호족에게만 거래를 허가할 거다.”
“음...”
“그건...”
폭탄 같은 선언에, 다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의주에서 진행되고 있는 무역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대상이건 대호족이건 배 한척 가지고 있는 중소상인이건, 그가 산동이든 절강이든 출신이 어디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이걸 강제하겠다는 뜻.
“산동을 비롯한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어때 이 정도면 내륙지방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지 않나?”
“...”
모두는 히죽 웃는 연오랑을 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과 직접 거래하지 않는 내륙지방이라고 해도 결국은 거래를 통해 먹고 살아야 한다.
만약 해안도시들끼리 연맹이 만들어지고, 이들이 조선을 핑계로 거래를 거부해버리면 어찌될까.
혼자 살겠다고 버티다간 연맹의 힘을 당해내지 못할 거고, 아니꼬워 다른 성에 붙자니 어차피 그게 연맹이 아니고 뭔가. 그럴 거면 그냥 익숙하고 가까이에 위치한 절강연맹에 붙는 게 낫지.
‘간단해 보이지만 꽤 절묘한 수다.’
‘북방의 물산을 장악한 조선이니, 이런 강제를 할 수 있는 거겠지.’
가주들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의 걸음을 떠올려봤다.
“그 조치와 함께, 연맹을 왕조에 준하게끔 아국조정이 인정해 줄 거다.”
“그건...!”
“정말이십니까!?”
연오랑의 말에, 모두가 예의도 잊고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그럼 내가 거짓을 말할까.”
“아. 아닙니다. 대인.”
“감사합니다.”
모두는 혹여나 심기를 거스를까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조선은 중국 상인을 동등한 객체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나라도 없는 일개 가문과 상회를 조선이 왜 신경 쓰겠나. 걸리적거리고 까불고 조선법을 어기면 무참히 짓밟아서 추방해버렸지.
허나 앞으로 연맹은 왕조국가처럼 인정해 준다고 했다.
물론 체급차가 있으니 거칠게 항의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아쉬움을 호소할 수준은 되지 않겠나.
결국 연맹소속의 가문,상회와 그렇지 않은 이들과의 격차는 벌어질 수밖에 없다.
당근을 던져줬으니 이번엔 채찍을 때려줄 차례.
“그리고... 아마 이 문제 때문에 고심이 많았겠지만, 남통과 양주부를 절강연맹에 속하게 할 순 없다.”
“...!”
“음...”
“크음.”
또 다시 폐부를 헤집는 발언에, 가주들은 신음을 참지 못하고 흘리고 말았다.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아니고, 핵심을 집어도 너무 매섭게 꼬집고 있다.
“너희가 불만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강 건너에 위치한 양주부를 절강에 떼어주면 남직례 호족들의 불만이 너무 거세질 거다. 애초에 그 땅은 예로부터 남직례의 권역이었고, 우릴 불러온 건 너희지만 지금 우릴 지탱하는 건 남직례니까.”
“...”
이치야 그렇지만 다들 속이 쓰려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조선은 흡사 용병처럼 굴었고, 조선을 끌어오기 위해 이미 남직례와 절강은 대가를 지불했다.
일시불로 지불하는 건 불가능하니, 앞으로 이자를 붙여 공짜로 의주에 중국물산을 가져다 바쳐야 하지.
문제는 조선이 정리한 남통성, 태주,태령성과 양주부를 어느 소속으로 할 거냐는 것.
‘하지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조선군이 빨리도 너무 빨랐다.’
‘이리도 강할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했을까. 생경한 조선함선이 나타났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육적과 손달. 나머지 가주들 모두 침잠한 눈빛을 뿌리며, 후회 가득한 무언의 대화를 나눴다.
이들도 조선군이 진주광을 쓰러뜨릴 거라고 확신했다.
조선수군이 중국 최강이라는 천진수군을 무너뜨렸으니, 당연히 남통수군 쯤은 이기겠지.
다만 조선수군이 어떻게 승리했는지 확인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지난날 천진수군은 해적보다 더한 존재였고, 요동수군을 견제하면서도 발해만 밖으로 나와서 무차별적으로 상선을 나포하고, 포로를 잡아 몸값을 뜯어내던 자들이다.
그러니 천진수군이 무너졌다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감히 발해만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확인하는 건 무리였지.
산동의 공청과 하남의 홍형청을 처리한 것도 봤다.
하지만 공청은 실질적으론 산동호족의 기습에 치명타를 맞았고, 홍형청은 되도 않는 회전을 벌이다가 한방에 쓰러졌다.
허나 진주광은 둘보다 병력도 많고, 실질적으로 양주부를 장악했을 뿐더러, 수성이 가능한 남통과 태령,태주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 딴에는 제 아무리 조선군이라고 해도, 진주광을 무너뜨리는 건 시간이 꽤나 걸릴 줄 알았지.
‘하지만 참으로 오산이었다.’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했지...’
그래서 남직례가 조선군의 보급을 도맡겠다는 말에 “그래. 군비를 대다가 피똥 한 번 싸봐라.”라는 심보로, 느긋하게 지켜보려 했는데... 전부 꿈이 되어버렸다.
군비지원으로 남직례의 힘을 빼려는 계획도, 전쟁기간동안 조선군과 추가협상을 해보려는 계획도, 상해 건설을 늦춰 상회보유금을 서서히 지출하려던 계획도, 연맹의 우두머리가 되어 다른 도시의 호족들을 흡수시켜 앞서가려는 계획까지.
조선군의 벼락같은 움직임에 이 모든 게 깨져버렸다.
‘이젠 오히려 우리가 압박을 받고 있지.’
‘이 자를 영파에 들이면 안됐어.’
‘그의 명성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외국의 상인들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줄이야.’
소주와 항주를 위해 꿍꿍이를 꾸몄던 육적과 손달은 다시금 쓴물을 되삼켰다.
이젠 상해건설을 미룰 명분이 없어졌고, 질질 끌 수 있는 처지도 못된다.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가서, 조선이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조선군은 영파에 상륙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줬고, 이젠 남직례와 절강을 넘어서 외국 상인들이 전부 상해를 주시하고 있으니까.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후우...’
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어찌할까.
그저 이를 악물고 연오랑의 말을 계속 듣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길게 보면 차라리 이게 낫다. 너희도 진주광처럼 장강을 차지할 누군가가 등장하는 걸 바라지 않을 것 아니냐.”
“...”
당연한 말. 그 주인공이 절강이 되면 좋지만, 그렇게 되면 온 사방에서 견제가 쏟아질 거다.
진주광처럼 백성들 쥐어짜서 군력을 유지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본질적으로 상인이다.
적을 많이 만들어 거래가 끊어지면, 남통과 양주부를 차지한들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팔아넘기지도 못할 거면 굳이 양주부의 소금과 목화를 차지할 이유가 없지 않나.
“허면... 남직례 연맹이 남통을 차지한다고 해도, 통행료를 걷거나 운하를 점거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한 말. 앞으로 장강 하류와 운하는 주인 없이,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하는 곳이 될 거다. 뭐 선원과 인부를 부리는 값이야 당연히 치러야 하는 거고.”
“음...”
“큼.”
가주들은 서로 재빨리 눈빛을 교차하며 말없는 대화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