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챕터38. 돌아보다 (1)
“까놓고 말해서 해적놈들이 활개 치는 건, 어찌됐건 너희에게도 불안요소 아니냐? 그놈들은 없는 게 낫고, 앞으로는 우리가 해결해 주겠다는 거지. 아니면 너희가 직접 할 텐가?”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을 들고 왔어...’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수다.’
“크흠.”
“끄응...”
가주들은 체면도 잃고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조선의 뜻대로 이뤄지면 제해권을 상실한다는 말과 동일. 앞으론 절강 앞바다가 아니라 조선 앞바다가 되는 거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조선해군이 절강상선에게 선상검문을 하겠다고 해도 거부할 수가 없는 거지.
이 꼴을 보기 싫다? 그럼 절강이 직접 수군력을 키우면 되는데...
‘허나 그게 말처럼 쉽게 될 리가 있을까.’
‘해적토벌은 차치하더라도, 제해권을 놓고 조선과 군비경쟁을 하는 게 가능할까?’
‘따라잡으면 따라잡을 수도 있을지 모르나, 그랬다간 모든 돈이 군비로 다 빠져나갈 것 아닌가.’
모두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해적을 토벌하려면 자체방어가 아닌 공세로 나아가야하고, 그러려면 돈을 쏟아 부어 수군을 키워야 한다.
쓸모도 없이 돈만 잡아먹는 군대를 키우는 건 모두가 싫어하는 일인데, 그걸 하겠다고 나서면 누가 좋아하겠나.
“조선수군이 해적을 대신 토벌해주는데, 니들은 뭐하고 있는 거냐? 설마 우리 돈 뜯어다가 너희 가병을 키우는데 쓰는 건 아니겠지?”라며, 연맹에 속한 내륙호족들이 시시콜콜 따지면서 정쟁의 빌미로 쓸 게 분명하다.
현실적인 문제도 겹친다.
이들은 조선해군이 남통을 포격으로 무력화시키는 걸 봤으니, 조선해군을 상대하려면 그와 흡사한 전력을 만들어야 한다.
기존에 없던 전문 전투함선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고, 거기에 화포를 장착하는 건 더욱 쉽지 않다.
‘화포는 어찌할 것이며, 화약은 또 어찌할 건가.’
‘산동은 이미 조선과 손을 잡았으니, 산동의 초석을 사오는 게 쉽게 될 리가 없을 터...’
‘화포병과 화약장을 키우려면 돈이 얼마나 들 것이며, 각 가문소속의 장인을 끌어 모으는 것도, 이들의 소속을 어디로 할 것인가도 문제가 되겠지.’
배도 문제지만 화약은 더 큰 문제.
하나하나 따져보면 첩첩산중이니, 지금 상태를 유지할 순 있어도 조선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거다.
그러니 또 “그런 헛짓거리 하지 말고 그냥 돈이나 벌자고!”라고 아우성을 치지 않을까.
이들의 근본은 어찌됐건 지방호족이자 상인이니까.
“...”
“...”
모두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고,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시간이 없는 건 알고 있겠지? 진주광은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거다. 그때 가서 부랴부랴 일을 진행하면 남직례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게 될 터...”
“...”
“모두 동의한 걸로 알고 있겠다. 자세한 사안은 정식으로 서안을 보내지. 빨리 연맹을 결성하는 게 좋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저렇게 말하는 데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저 고개만 숙였다.
그렇게 상해가 빠르게 완성되는 동안 강 건너편에선 공성전이 계속 이어졌고, 연오랑의 호언장담대로 진주광은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팔다리 다 잘라놓고 몸통만 남겨놨으니, 굶주린 개들이 주인을 몰라보고 물어뜯을 수밖에.
공성을 버티지 못한 진주광 친위파와 반대파가 충돌.
지켜보는 조선군과 남직례 호족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잔혹하고 지독한 내전과 하극상이 이어졌다.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간 건, 하나라도 더 죽여야 자신의 몫이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
반대파는 가차 없이 진주광 친위파를 몰살시켰고, 피로 시뻘겋게 물든 몸으로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한왕이라 자칭하던 자답게 진주광의 재산은 막대했는데 그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항복한 이들에게 나눠주고도 선창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전리품을 챙길 수 있었지.
그렇게 일 년이 조금 못되는 시간 동안 중국을 거칠게 흔들어놨던 조선군은, 상해 건설을 지도할 병력만 남겨두고서 언제 그랬냐는 듯 조선으로 회군을 시작했다.
*****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초봄에 떠났건만, 추수도 모두 끝마친 늦가을이 되어서야 조선땅을 다시 밟게 됐다.
근 8개월에 가까운 원정이었지만, 그만큼 고생한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소모된 전비는 중국호족에게서 뜯어내서, 백성들은 조선이 지금 전쟁을 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평온했다.
출정수당으로 뜯어낸 대금과 공청, 홍형청, 진주광, 북직례의 호족과 장군집안을 쓸어내면서 얻은 전리품들.
땅과 사람은 중국호족에게 넘겨줬지만, 그간 쌓아놓은 재물은 알뜰살뜰 챙겼는데 그 양이 전비의 2배가 넘었다. 꽤나 수지맞는 장사를 한 셈이 됐지.
여기에 연맹을 결성하게 만들고, 청도와 상해를 조차 받았으니, 무형적 이득 또한 만만치 않다.
사정이 이러하니 조정에선 “돈만 빨아먹던 군부가 드디어 한 건 했구나!”라는 격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전투보고서를 통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역전의 용사들이 하루빨리 귀환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대감. 포구에 도착했습니다.”
“오냐.”
이 원정을 진두지휘했던 연오랑.
그는 함장의 부름에 함장실에서 나와, 저 멀리 보이는 용연포구를 바라봤다.
공성도 끝났는데 그가 굳이 남아 있을 필요가 있나.
자고로 윗사람은 큰 줄기와 방향만 정해주고, 세부사항은 아랫사람이 처리해야 공훈도 챙기고 부서의 밥벌이가 생기는 법.
연맹결성은 이제 연오랑의 손을 떠나 외교무역부로 넘어갔으니, 그치들이 알아서 절강상인들을 요리할 거다.
‘오래 걸리긴 했는데... 그래도 계획대로 되긴 했네.’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진주광이 예상보다 조금 더 버티긴 했지만, 그래도 얼추 시간을 맞췄다.
“너흰 강화도로 가냐?”
“예. 개선식을 준비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곳에서 병력을 교체한 후에, 다시 청도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고생길이 훤히 열렸음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함장은 싱글벙글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답을 했다.
‘아무리 못해도, 병력이 다 오려면 한 달은 걸릴 거 같은데...’
연오랑은 머리를 굴려, 언제쯤 개선식이 진행될지 예상해 봤다.
청도와 상해에 남겨둔 병력을 제외하고도, 거의 만오천에 가까운 병력이 있고 전마만 이만오천필이 넘는다.
해군은 수병을 강화에 남겨두고 최소운용인원만 싣고 움직일 예정인데, 그래도 강화와 청도를 십수번 왕복해야 전부 옮길 수 있지 않을까.
개선식은 멀어도 한참 먼 일인데, 함장은 벌써부터 그게 눈에 그려지나 보다.
‘하긴... 해군이 개선식을 하는 건 또 처음이니까.’
육군은 몇 번해봤지만, 새롭게 탄생한 해군은 이번이 처음.
조선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니, 사서에 이름이 남아 대대손손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클까.
천진수군을 격파한 공적도 이번에 함께 처리할 거라서, 전국에 퍼져 있던 해군이 한자리에 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다 돈이긴 한데... 분위기가 좋으니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돈은 꽤 벌지 않았나.
조정은 병사들을 위무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개선식 비용을 아끼진 않을 것 같다.
“그나저나 병력이 적지 않은데... 강화에 주둔할 만한 곳이 있나?”
“이왕 모인 김에 포대와 성곽을 새로 축조한다고 하더군요.”
“알뜰살뜰하게 부려먹는 군?”
“흐흐. 다 대감께 배운 것 아니겠습니까.”
“...”
함장은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고, 연오랑은 할 말이 없어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병사들이 무기만큼이나 삽과 곡괭이에 친숙하게 만든 장본인이 연오랑 아닌가. 장군들은 전부다 그를 보고 배웠으니,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가만히 놔두면 사고만치는 병사들이니, 작업을 시켜서라도 힘을 쫙 빼버릴 심산인가 보다. 겸사겸사 성도 짓고.
“그래. 잘 했다.”
“사람이 워낙 많으니, 개선식 전에 끝마칠 수 있을 겁니다.”
함장은 이심전심이라는 듯, 히죽 웃으며 답을 했다.
이윽고 포구 안으로 들어오자, 휘황찬란하게 변신한 용연포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야... 엄청 커졌네?”
“예. 이따금씩 들릴 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더군요. 이곳이 대감의 고향이시지요?”
“고향은 아니지만, 뭐... 앞으로 고향이 되겠지.”
함장은 부럽다는 눈을 숨기지 못했고, 연오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용연포구는 천혜의 입지를 지닌 곳이고, 불꽃이 튈 계기만 있으면 폭발적으로 성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계기는 다름 아닌 강남의 미곡상들.
두 번 일하는 게 싫어서 조정은 곡물을 한성에 가까운 용연에 하역하게 했고, 강남상인은 용연에 물자를 풀고 빈 배를 끌고 의주로 가곤 했지.
그렇게 풀린 물량이 어마어마하고, 이걸 다시 한성을 비롯한 각 도시에 옮겨야 하지 않나.
포구 둘레만 수키로에 달하는 용연포구지만 이미 건물들로 꽉 차 있고, 부두에 몸을 기대고 있는 선박도 백여척이 훌쩍 넘어 보였다.
신형전함과 신형무역선, 신형조운선이 포구 한쪽에 가지런히 몰려 있었고, 반대쪽엔 생김새만 봐도 알 수 있는 강남미곡상의 상선이 바글바글 몰려 있다.
벌써 도착해 있는 걸 보면, 저치들은 전쟁통인 와중에도 열심히 곡식을 실어 날랐나 보다.
‘드디어 왔다. 오래도 걸렸어.’
“오느라 고생했다.”
“아닙니다. 대감.”
이윽고 배가 부두에 닿기 무섭게, 선실에 있던 수병들과 사람들이 우르르 갑판으로 올라왔다.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연오랑이 내리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
“강화까지 조심해서 가라. 나중에 개선식 때 보자.”
“옙! 충성!”
“충성!!”
함장의 선창에 맞춰, 오와열을 맞춰 정렬한 수병들이 목청 높여 경례를 했고, 연오랑은 가볍게 받아주고선 배다리를 건너갔다.
“오...?”
“어라?”
“누군데 저러지?”
“몰라. 수군 장군인가보지.”
어째 연오랑이 오는 걸 몰랐던 걸까?
수병들의 요란한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자, 부두에 몰려 있던 인부들의 시선이 쫙 쏠렸다.
과연 새로 유입된 백성이 대부분인지, 백호갑옷을 안 입은 터라 연오랑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 그저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따름.
“장군감이네, 저 인간 덩치보세.”라는 말이 솔솔 들리는 걸로 보아, 진짜로 그의 정체를 모르는 모양이다.
인부들을 헤치고 나아가며, 연오랑과 함께 온 이들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용연포구를 구경했다.
‘나 없어도 잘 만들어놨네.’
몇해 전에 용연을 떠나면서 도시계획을 짜놓고 가지 않았나.
그에 맞춰서 신도시 중의 신도시답게, 용연포구는 건물들마저 오와열을 맞춰서 절도 있게 서 있었다.
포구면 자고로 난잡하기 마련인데, 생선 비린내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구역 구분이 확실히 되어 있었다.
‘도로도 제대로 깔아놨고.’
용연은 코앞에 석회석 광산이 있고, 석회도로를 가장 먼저 시범적용한 곳.
회색빛의 석회부두에서부터 이어지는 도로는 거미줄처럼 엮여있으면서도, 반듯하게 이어져 있었다.
사두마차가 네 대는 한 번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대로에 들어서서 고개를 돌려보자, 어지럽게 오가는 사람들 저편으로 저 멀리 도시 밖 끝까지 회색빛이 이어지는 게 보였다.
‘진짜로 다 깔았네?’
부두와 포구 근처에만 깔 줄 알았는데, 여유가 있었는지 대로마저도 자갈도로가 아닌 석회도로를 깔아 놓았다.
여긴 원래 사람이 없던 황무지나 마찬가지인 곳이라서, 도로를 건설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없었겠지.
연오랑이 감탄하며 만족하고 있을 때.
“이게 무슨...?”
“여기가 조선이 맞나?”
“대체 이건 뭐로 만든 거지? 돌인가?”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함께 내린 이들은, 하나같이 경악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굴리기 바빴다.
이들은 남직례에서 데려온 선소장인들로, 어수선한 남직례에 머무느니 그냥 조선에 귀화하겠다고 마음먹고 가족까지 전부 데리고 왔다.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으로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는데... 내리자마자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지.
강남상인들로부터 요상한 풍문을 전해 듣긴 했는데, 포구가 이렇게 생경한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자신들이 밟고 있는 석회도로가 특이한지, 어린 아이들은 기병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거나 손으로 도로를 만지기 바빴다.
한참을 구경하고 있자, 드디어 소식이 닿은 걸까. 몇몇 이들이 황급히 달려와 채신머리없이 손을 흔들어댔다.
“어르신!”
“오랜만이다.”
“아니! 오시면 오신다고 언질이라도 해주시지요!”
“깜짝 선물.”
연오랑은 히죽 웃었고, 윤현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애매한 얼굴을 하고서 연오랑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녀석은 소년의 티를 완전히 벗어 던진 지 오래.
착호군에서 전역한 후로, 연오랑을 대신해 그의 사업체를 관리해 오지 않았나.
나름 용연을 키우면서 관록이 쌓였는지, 갓과 개량도포를 입은 모습이 꽤 멀쑥하게 잘 어울렸다.
원래 역사에서 갓은 양반의 전유물로 변해가지만, 지금 역사에선 그저 모자 중 하나로 전락해버렸다.
신분제가 흐릿해지면서 양민들도 갓을 쓰는 경우가 많아졌고, 목마장이 미친 듯이 늘어나면서 말총 값이 엄청나게 떨어졌으니까.
그래서인지, 윤현의 모습은 포구를 노니는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어보였다.
“...”
연오랑이 물끄러미 윤현을 바라보며 추억을 더듬고 있자, 괜히 분위기가 요상해졌다.
“저... 어르신?”
“아.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저 사람들은...?”
윤현은 옷차림부터 한눈에 티가 나는 중국장인들을 가리키며 말을 흐렸다.
한족인 건 알겠는데, 연오랑과 함께 온 게 뭔가 이상했으니까.
“남직례에서 데려온 선소장인이다.”
“그렇습니까? 그럼 따로 안내할까요?”
“어.”
연오랑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윤현은 함께 온 청년을 시켜 중국장인들을 따로 불러 모아 관아로 데려갔다.
“잠깐 걸을까? 구경할 게 많아.”
“흐흐. 그런가요?”
서신은 자주 나눴지만, 얼굴을 맞댄 건 꽤 오랜만이지 않나. 허나 둘은 어제 본 사람마냥, 멋쩍음 없이 곧장 어깨를 맞대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