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챕터38. 돌아보다 (2)
시시콜콜한 옛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고, 대화의 주제는 완전히 변해버린 용연포구로 이어졌다.
“강남의 배들을 봤는데, 따로 관리하는 거냐?”
“예. 가장 외각자리에 구역을 따로 만들어서 관리하고 있죠. 중국선원들은 포구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합니다. 저기 저쪽입니다.”
윤현은 망설임도 없이 포구 한쪽을 가리켰고, 그곳엔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벽돌성벽이 세워져 있었다.
적을 막기에는 애매한 물건이지만, 왕래를 힘들게 할 정도는 충분히 되어 보였다.
강남상인들은 “아니! 우린 가리지 않고 다 개방했는데, 왜 조선은 구역을 나눠서 가두냐!”라고 외칠 수도 있지만, 조선은 의주를 개방할 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나.
그 기조는 여전했고 바뀔 기미는 없었다.
이젠 조선의 기술력이 중국의 기술력을 앞서는 물건들이 꽤나 생겨났으니까. 기술유출을 막을 순 없겠지만, 최대한 늦춰야지.
“순찰은? 연대병이 도냐?”
“에이. 연대병을 동원하면 낭비죠. 영진군이나 기선군을 쓰고 있습니다. 어차피 싸우는 것도 아니고 순찰만 도는 거니까요.”
“음...”
이곳은 아직 양전사업이 진행되지 않은 황해도.
군부가 만들어지면서 영진군과 기선군이 전쟁에 동원되진 않았지만, 군호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야금야금 잘 써먹고 있는 모양이다.
“다른 구역은 어때?”
“전부 활황이죠. 전임현감도 그렇고 지금 현감도, 모두 잘 따라주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감히 어르신이 머무는 곳인데 헛짓거리를 할 수 있겠어요? 새로 뽑힌 사람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저희보다 더욱 적극적이던데요?”
윤현은 꼭 일러바치는 아이마냥, 현감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풀어놨다.
용연현은 황무지 위에서 모든 게 새롭게 만들어지는 곳인데, 반대로 성장할 준비는 모두 되어 있는 곳이다.
와서 방해하지 않고 숟가락만 올려도, 현을 성장시킨 공훈을 얼마든지 거둘 수 있지.
물론 이렇게 급성장하는 곳의 현감이라면 응당 끼어들어 자기 몫을 뜯어낼 법도 하지만... 여수구죄법이 너무 무섭다.
사헌부는 원래 역할이던 언론 및 관리의 감사와 탄핵의 권한을 잃어버린 지 오래됐고, 지금은 비위감찰 권한만 남았다.
이들은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욱더 눈에 불을 키고 비위감찰에 집중할 수 밖에.
수많은 관리가 새로 뽑히는 동시에, 옛 기억과 습관을 잊지 못한 자들이 파직되고 적몰되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었던 거지.
“그 정도로 빡빡하게 훑고 다니냐?”
“예. 뭐... 저도 들은 거라서 정확히 모르는데, 사헌부는 암행어사가 아니라 그냥 어사를 상설직으로 만들어서 비위감찰만 전문으로 하는 부서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답니다.”
“호오...”
“요샌 조선 전체가 들썩거리면서 사람들이 돌아다니잖아요? 누가 누군지도 알기 힘들고, 이 사람이 한성에서 온 관리인지 장사하러 온 상인인지 확인하기도 힘드니까... 알아서 몸을 사려야죠.”
“음... 그야 그렇겠네.”
‘잠깐만. 오히려 세종형이 좋아할지도 모르겠는데?’
어쩌면 이건 미래의 검찰 비슷한 기관이 될 지도 모르겠다.
육조체제는 은근히 서로 겹치는 영역이 많았다.
법제정, 법집행, 죄수관리, 특별 범죄대응에 대해서 의금부, 사간원, 사헌부, 형조, 병조 등이 힘을 합쳐서 그때그때 헤쳐모여를 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식이었다.
형조가 율법부로 변화되면서 이 부분에 대한 권한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사헌부도 이 틈에 껴서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거지.
‘그러고 보니... 사헌부 관원 중에선 사간원 출신이 많잖아?’
연오랑은 사헌부 관원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됐다.
사간원과 사헌부는 비슷한 역할을 했지만, 사간원의 경우에는 무려 국왕의 전제정치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였다.
한마디로 왕에게 개길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
이들은 업무 중에도 음주를 해도 됐는데, 맨정신으로는 감히 왕에게 쓴소리하기 힘드니까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반대를 하라는 의도였던 것.
허나 운석핵꿀밤 이후. 조선사상계가 분열되고, 조정은 개판이 됐고,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터지고 있는데... 사간원이 제 역할을 할 수가 있나.
태종이 뭐 할 때마다 시간만 잡아먹고 딴지만 놓던 사간원은 해체되었고, 인원 대부분이 사헌부로 전속됐다.
이미 한번 집을 잃어버린 이들이니, 이번에는 기필코 사수하려고 안달날 수밖에.
‘한번 알아봐야겠어. 어차피 포도청을 만들면 교통정리가 필요할 테니까.’
연오랑은 계속 상념을 이어갔고, 윤현 또한 계속해서 자랑을 늘어놨다.
포구끝 쪽에 중국상인이 머무는 구역이 있었다면, 그 옆과 뒤로는 미곡창고가 포구 중앙까지 이어졌다.
유독 사람이 번잡하게 돌아다니고 있으니, 절로 시선이 사로잡혔다.
‘이야... 떠난 지 3년도 채 안됐는데, 벌써 이 정도야?’
“오... 잘 만들었는데?”
“흐흐. 당연하죠. 이젠 이곳이 용연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됐죠.”
윤현은 자신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중앙대로와 그 옆에 끝도 없이 늘어진 상가와 객주를 가리켰다.
“진짜 시장이 만들어졌네. 몇 개나 되냐?”
“상점은 서른개 정도 되고, 객주도 열개 정도 됩니다.”
‘진짜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나보네.’
이 시대에 밖에 나와서 식사와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점심이나 저녁은 때맞춰서 집에 가서 먹는 게 기본.
그럼에도 객주가 번성하고 있다는 건, 이곳을 들리는 외지인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리라.
“장사는 잘 되냐?”
“물론이죠. 개성과 평양으로 가는 미곡도 이곳에서 풀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보니까 개성과 평양의 물산이 이곳에 만나서 삼남으로 가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차피 미곡을 운반하는 김에, 자투리 장사도 함께한다는 거군?”
“예.”
‘나쁘지 않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크군.’
“개성과 평양은 아직 양전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기업을 키우나 보네? 상인이 이렇게 많이 찾아올 정도면?”
“의주무역의 한축이 개성과 평양이니, 그치들은 호주와 용연이 열릴 때부터 눈치를 보던 자들이잖아요? 빠르게 움직였죠. 이젠 그럴싸하게 상단이라 부를만한 집안도 꽤 됩니다. 배를 사간 사람이 꽤 많거든요.”
“배라...”
‘하긴 배가 남긴 하지.’
해군이 창설되면서 기선군은 점점 해체되고 있었다.
군호에서 민호로 전환되었는데, 꽤 많은 수가 원래 하던 일인 조운선 운송을 그대로 이어가는 길을 택했지.
조선은 기존 조운 말고도 중국에서 수입한 곡물을 옮기는 게 여간 벅찬 일이 아니어서, 민간에 꽤나 위탁해서 옮기게 했으니까.
다만 대맹선보다 큰 신형조운선이 등장하면서, 기존 맹선의 처지가 애매해졌고.
용연의 조선소에선 그렇게 민간에 풀린 맹선을 개조해 신형어선으로 만들거나, 조금 수리해서 상선으로 바꿔 개성과 평양의 상인에게 팔았다고 했다.
중심부에 위치한 상점거리를 지나자, 새롭게 축조한 아치형의 석조다리를 건너갔다.
이 운하처럼 생긴 매끈한 강은 용연포구를 가로질러 광산마을까지 이어지는데, 곳곳에 다리를 놔서 양측을 이어주고 있었다.
“잘 만들었네?”
“흐흐. 건설기업에는 착호보조군에서 전역한 사람들이 꽤 왔거든요.”
“음...”
‘하긴. 그놈들이라면야 뭐...’
조선땅은 산만큼이나 하천이 넘쳐나니, 당연히 도로를 만들 때 다리가 필수 아닌가.
넓은 강이야 수로로 사용되어 배가 돌아다녀야 하니 다리를 못 놓지만, 그 외에 배가 다니지 않는 하천에는 석조다리를 계속 건설해 왔다.
그 기술이 나름 쌓여서 그런지, 이곳에 만든 다리도 꽤나 잘 빠졌다. 아치형모양으로 된 곳도 있고, 그냥 돌을 쌓아올려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다리도 드물지 않게 보였다.
“광산마을에서 바로 포구로 오지 못해서 불편할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다리가 없는 것보단 낫죠. 양측을 오가는 인원과 물량이 많아서 배로 옮기는 게 더 손해더라고요.”
“음...”
석조다리를 만드는 게 한두푼 드는 것도 아니고, 비싼 돈 들여서 만들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다.
반대편 포구에는 수산기업에서 건져 올린 생선을 파는 어물장, 염장생선을 보관하는 창고, 염장통으로 사용되는 나무통을 만드는 목공소와 옹기를 쌓아놓은 자기소.
그 옆에는 배를 만들기 위한 목재를 제조하는 공작기업. 용연포구를 만들 때부터 자리 잡았던 선박연구소와 조선소. 기타 온갖 창고와 기업상가가 부두를 따라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포구 끝. 방파제마냥 용연포구를 감싸고 있는 돌산 안쪽에는, 어중간한 성벽으로 구분해 놓은 해군주둔지가 아른 거렸다.
‘진짜로 이제 꽉꽉 들어찼구나.’
이 모든 건 따지고 보면 그의 손으로 만든 대역사 아닌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더 살펴보실래요?”
“아니. 나중에 천천히 살펴보자. 일단 집으로 먼저 가자.”
“옙!”
윤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새 윤현 부하가 가져온 말에 올라타 포구 밖으로 달려갔다.
그가 거금을 들여 만든 웅장한 저택은 포구 밖의 산어귀에 박혀 있지 않나.
한걸음에 달려가 문 앞에 다다랐다.
“후...”
“히히.”
자기도 모르게 크게 숨을 내쉬자, 윤현은 속마음을 읽은 듯 히죽 웃으며 눈꼬리를 올렸다.
“왜?”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어르신도 긴장되시나 봅니다?”
“그럼 긴장이 안 되겠냐.”
우스갯소리를 하며 긴장을 흘려보내고, 연오랑은 훌쩍 말에서 내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그가 포구를 노니는 동안 벌써 소식이 전해진 건지, 정선공주는 시비들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음에도, 그가 안으로 들어오기를 조용히 기다렸나 보다.
“어서 오세요.”
“어...”
배가 산처럼 부른 공주는 생기 넘치는 미소로 그를 반겼고, 연오랑은 한걸음에 공주 앞에 섰음에도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며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공주는 임신한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혈색도 좋고, 힘들고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밝게 빛나는 검갈색 눈동자를 지나 가볍게 올라있는 입꼬리로 시선이 향했고, 이윽고 시선은 계속 내려가 옷으로 숨길 수도 없이 부푼 배로 향했다.
‘음... 이렇게 큰가?’
임산부를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부인이 임신한 건 처음이지 않나.
“잘 지냈어?”
웃긴 웃는 건데 퍽 괴상한 표정을 숨기지 못해, 연오랑은 어색한 인사를 건넸고.
“풋.”
공주는 그런 그의 모습이 웃겼는지, 피식 웃고선 어쩔 줄 몰라 하는 연오랑의 손을 잡아챘다.
“음...”
“당신 아이에요.”
“으음...”
연오랑은 공주의 배에 손을 대고서,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신음을 계속 흘려댔다.
옷 밖으로도 느껴지는 두근거림과 뱃속에서 잠꼬대를 하듯 움직이는 아기의 몸부림이 손바닥에 그대로 전달됐다.
“내 아이란 말이지...”
막연히 상상하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그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그의 속내를 알아차린 걸까? 공주는 배시시 웃으며 그를 가볍게 안아줬다.
연오랑이 왔다는 소문이 쫙 퍼지자, 용연포구가 들썩거렸다.
현감을 비롯한 관원들이 버선발로 달려온 건 당연하고, 광산마을에 살던 연구원들, 포구에 자리 잡은 기업가들, 심지어 애걸복걸하며 관원들을 들볶은 중국 미곡상마저 찾아올 정도였지.
허나 여독을 푼다는 이유로 죄다 다음을 기약했고, 다들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오자마자 공주에게 빠져서, 신기함을 참지 못하고 공주의 배만 주물럭거리며 놀던 연오랑.
그는 달이 밝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공주에게 자유를 선사했고, 오랜만에 만난 녀석들과 술상을 폈다.
“괜히 너희에게 피해를 준거 같은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어르신.”
“흐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신 겁니까?”
“첫 아이를 볼 땐, 너도 안절부절 못 했잖냐.”
“내가 언제?”
연전위는 넋이 나간 사람마냥 헤실헤실 웃고 있는 연오랑을 보며, 연신 놀리기 바빴다.
다른 이들은 물렸다지만, 연씨 삼형제마저 물릴 수 있나. 녀석들은 연오랑을 앞에 두고 티격태격 말싸움을 늘어놨다.
“아무튼 부인을 돌봐줘서 고맙군.”
“저희가 돌봤겠습니까. 부인들이 도와 준거죠.”
“그게 그거지.”
“에이. 저희가 어르신께 받은 게 얼만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연오랑이 연신 고마움을 표하자, 오히려 녀석들이 더욱 멋쩍어서 뒤통수를 긁어댔다.
사실 맞는 말인 게, 녀석들은 하나같이 공주를 따라온 궁녀들과 결혼을 했고 진작 아이까지 낳았다.
궁녀의 삶이 고달프긴 하지만, 아무나 될 수 있는 건 아니니 당연히 미모는 합격.
궁에서 관심을 못 받은 공주이니, 그녀에게 붙어 있을 궁녀 또한 출신이 좋거나 야심 혹은 욕심이 클 리가 없다.
여기에 공주의 혼자놀이를 함께했으니, 나름 배운 것도 많고 사고도 열려 있기 마련.
반대로 녀석들은 칼질은 잘하지만, 죄다 미천한 신분에 연오랑과 친하다는 걸 빼면 내세울 게 없는 녀석들 아닌가.
녀석들이 궁녀를 신부로 받아들이는 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
궁녀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공주와 함께 궁에서 나왔고, 죽을 때까지 시비로 살지 않는 이상 새인생을 찾아야 하는데... 연오랑의 오른팔, 왼팔들과 함께하는 건 절대 아쉬운 선택이 아니었지.
그렇게 다들 결혼하고 새살림을 차렸지만, 공주가 임신했다는 소식에 부인들은 한걸음에 달려와서 공주의 수발을 드는 중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따로 떨어져 살아야 하잖아? 지금은 휴가 나온 거 맞지?”
“예. 군이 회군한다고 해서, 때 맞춰서 나왔죠.”
“뭐... 이곳이 저희의 고향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겸사겸사 입니다.”
“맞습니다. 시댁도 전부 이곳으로 이주했잖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흐흐.”
덩치도 산만한 녀석들은 어린아이마냥 헤실헤실 웃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