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65화 (265/538)

265. 챕터38. 돌아보다 (3)

‘음...’

연오랑은 손에 든 술잔을 매만지며, 시원하게 웃고 있는 녀석들을 조용히 바라봤다.

과거. 녀석들을 찾으려 다닌 건 사실 큰 이유가 없었다.

미래의 그가 만든 게임캐릭터가 진짜 사람이 됐는지 궁금했고, 만약 그렇다면 전설장수인 녀석들이 자신의 재능을 뽐내지도 못하고 역사에 파묻히는 게 아까워서였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서, 그가 녀석들의 인생을 이래라저래라 주무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나.

어쩌면 ‘내가 억지로 녀석들을 끌고 다닌 게 아닐까?’하는 고민을 이따금씩 하곤 했는데, 천만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나 보다.

“훈련소 생활은 어떠냐? 진짜로 군부로 나가지 않을 생각이냐?”

“음...”

“예. 별로...”

진지한 이야기를 던져보지만, 녀석들은 웃음기를 잃지 않고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

“에이. 어르신 때문이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담겨 있자, 녀석들은 손사래를 치며 격하게 부인했다.

연오랑은 총사령관으로서 여러번 군을 이끌었지만, 실질적으론 공식적인 직책과 관직이 없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는 어린나이에 너무 커버렸고, 조정에 몸을 담는 건 모두에게 부담스러웠으니까. 결정적으로 그 스스로 운신을 가볍게 하여, 온갖 곳에 관여하기 위해서 일부로 조정관직을 받지 않았지.

세종, 태종 또한 그를 한자리에 묶어 놓는 것보단,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게 훨씬 유용했고.

그럼에도 그의 그림자는 너무 짙어서, 연오랑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연씨 삼형제의 앞길마저 가려버렸다.

이 녀석들의 실력은 분명히 출중하니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인정도 받지만, 반대로 낙하산이라는 꼬리표를 떨쳐낼 수가 없다.

게다가 전공대로 녀석들을 대우하면, 대대장, 연대장 급으로 올려야 하는데... 여러모로 걸림돌이 많았지.

“눈치가 보이는 거냐?”

“뭐... 없다고는 할 수 없죠.”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은 신경 쓰이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음...”

연오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다들 그걸 받아 멋쩍은 미소를 흘려댔다.

착호군과 기존 조선군이 육군으로 개편되면서, 분명 실력 없는 이들이 떨어져나간 건 맞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장군급들 인사를 보면, 하나같이 명문가 출신이거나 뭔가 한 가닥 있는 자들이 대다수다.

최윤덕, 김종서, 황보인 같은 이들은 원래 역사에서도 한 가닥 하던 이들 아닌가.

그런 이들이 머리가 더 굳기도 전에, 연오랑을 만나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으니... 원래 역사보다 더 큰 인물로 자라는 건 인지상정.

그들뿐만 아니라, 역사에 남은 혹은 남지 못했지만 새롭게 등장한 모든 인물들이 그러할 거다.

“신분이 걸리긴 걸리는 모양이구나...”

“대놓고는 아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장군들이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니, 딱히 불만도 없고요.”

“...”

지금 조선군의 지휘관들은 본래부터 가락이 있던 무관출신이 대다수고, 무관이 되려면 결국 있는 집 자식인 것 또한 당연한 말.

병사들은 천민, 양반 가릴 것 없이 전부 뒤섞여 있는 게 분명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신분이 갈릴 수밖에 없다.

‘이건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거고,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앞으로 계속해서 육군이 이어지면, 실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천민, 양민출신도 지휘관으로 승진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이 격차를 뛰어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내가 손을 쓰면 오히려 욕이나 더 먹겠지.’

이래서 연오랑은 녀석들의 인생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녀석들은 알아서 자리를 찾아갔다.

‘어쩌면 내 탓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녀석들은 분명 일당백의 능력을 뽐낼 수 있는 용장이지만, 지금 조선군에 이런 용장이 필요할까.

그가 추구하는 건 조선군 전체의 질적 향상이니, 혼자서 무쌍을 찍는 장군보단 오히려 병사 전체를 잘 키워서 중대, 대대끼리 유기적으로 운용하는 게 더 낫다고 봤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녀석들이 아무리 칼질을 잘해도, 지휘 잘하는 지휘관과 크게 다를 게 없던 것.

그럴 바엔 오히려 방향을 바꿔서, 칼질 전문가인 녀석들이 더 많은 칼질 전문가를 키워내는 게 조선군 입장에선 훨씬 이득인 셈이었지.

“...”

“사실 저희가 원치도 않습니까.”

“인정을 못 받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정받으려고 아득바득 군공에 매달릴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훈련소가 차라리 저희에게 맞죠. 여기선 서로 신경질 부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녀석들은 연오랑의 마음을 읽었는지, 시원 털털하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고금을 막론하고 전투부대가 교육훈련, 군수보급 등을 맡은 2선부대보다 위치가 높은 건 당연한 말.

훈련소 또한 알게 모르게 기피되는 곳이고, 그런 곳에선 승진에 대한 경쟁도 생각보다 치열하지 않았다.

게다가 칼질만큼은 녀석들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으니, 훈련소에서 만큼은 최고의 대우를 받지 않겠나.

녀석들도 그걸 아는 터라, 지금 자리를 만족하는 거지.

“뭐... 나중에 마음에 안들면 전역해서, 사업을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 조운 말이 맞죠. 지금도 잘 굴러가고 있으니,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습니까?”

“다 어르신 덕분에 저희가 여기까지 왔으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녀석들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고, 연오랑도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녀석들 말대로 연오랑은 사람과 자본을 긁어모아, 한 자리씩 차려줬다.

활을 만지고 노는 걸 좋아했던 연조운은 공작기업을, 딱히 희망할 게 없던 연전위는 땅을 받아 농산기업을, 화척 출신인 연손찬은 집안 친지들과 함께 목장과 정육기업을 일구게 됐지.

미천한 신분인 녀석들이 예전에는 쳐다보지도 못 할 궁녀와 혼인하고, 각자 번듯한 사업체를 가지지 않았나.

이 정도면 충분히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으니, 오히려 연오랑에게 뭘 더 바라는 게 염치없는 짓이라 생각할 수밖에.

“후...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예. 걱정 마시지요.”

다들 자기도 모르게 술잔을 홀짝홀짝 삼키고선, 무거운 분위기를 풀 듯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럼 한동안은 이곳에 계속 머무시는 겁니까?”

“어. 개선식 전에는 그렇지 않을까? 아기 낳는 건 봐야지.”

“흐흐. 드디어 어르신도 후세를 갖는 군요.”

“당연한 거 아냐?”

연오랑이 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흘기자, 다들 같은 표정을 하고서 그를 힐끔거렸다.

“여자에 통 관심이 없으셔서... 혹시나 했습니다.”

“뭐. 인마?”

연오랑은 장난꾸러기마냥 구는 연손찬의 엉덩이를 걷어 차줬고, 녀석은 앓는 소리를 하며 땅을 굴러댔다.

*****

“이쪽으로 오게.”

연대기병은 양치기마냥 사람들을 이끌었고.

“예이.”

“빨리 오거라.”

꾀죄죄한 몰골을 한 수십명의 사람들이 인도에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 등짐을 한가득 끼고 움직이는 걸로 봐선, 어디 이사라도 가는 모양이다.

노인부터 젖먹이 아이를 품고 있는 여인까지 함께 있는 걸로 보아 한 가족으로 보이는 데... 그런 가족이 무려 열다섯. 한자리에 모이자 도로가 꽉 찰 정도로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저... 대인.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일단 자네들 수속부터 밟고, 그 다음은 다른 관리가 알아서 해줄 걸세. 나도 잘 모르거든.”

연대기병은 히죽 웃으며 말을 했으나, 듣는 입장에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가호의 가장으로 보이는 이들은 연대기병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숨기느라 바빴다.

허나 다른 이들은 신세계에 온 것 마냥, 눈을 굴리느라 정신이 없다.

남직례 출신들은 고층건물을 많이 봐왔기에 그냥 조선식 건물이 신기해 보였지만, 산동 촌구석 출신들은 이런 도시를 처음 본 터라 눈이 빙빙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 배에서 내리자마자 본 게, 중국 어디에도 없는 석회도로이니 당연히 생경했고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

“저거 보게.”

“소주하고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에이. 저런 건 못 보지 않았나.”

입을 쩍 벌리고 구경하기 바쁜 산동인들을 뒤로하고, 남직례인들은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목조 고층건물이야 특별할 게 없지만, 그런 건물마다 기와를 죄다 깔아놓은 건 분명 특이해 보였으니까.

“색도 여러 가지군?”

“그러게 말일세. 전부다 기와집이라... 조선이 원래 이렇게 잘 살았나?”

“난들 아나.”

어깨를 으쓱거릴 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조선과 거래하는 상인이라면 모를까. 중국의 일반 백성들이 조선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을까.

그저 예전에는 명과 사이가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제후국이었고, 요샌 사방팔방 전쟁을 벌여 승리한 무서운 나라라는 것 밖에 몰랐다.

그런 나라가 이렇게 부자인 걸 보며, 한편으론 놀랍고 다른 한편으론 안도했다.

이제부턴 그들도 이곳 조선에서 살아야 하니까.

“몇몇만 기와집이 아니라, 이곳 포구의 모든 건물이 죄다 기와를 깔지 않았나. 그만큼 널리 퍼졌다는 뜻이겠지.”

“맞지?”

“그럴 걸세.”

남직례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산동인들 조차도, 무심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요상한 도로만 봐도 그렇지...’

산동인 가장은 봐도봐도 신기한 회색빛 바닥을 발로 꾹꾹 눌러가며 생각을 이어갔다.

돌처럼 보이는데 워낙 평평하고 크니 돌은 아닌 것 같은데... 뭐가 됐건 이걸 도로에 깔아놓은 것 자체가 놀랄 일 아닌가.

이들은 시장을 구경하며 계속 나아갔고, 이내 위압적인 건물 앞에 도착했다.

“오...”

“음...”

큼지막한 검은색 기와로 무장하고 있는 웅장한 건물. 3층으로 된 신식관청이 눈에 들어오자, 자기도 모르게 절로 움츠려든다.

키를 넘어가는 담벼락 또한 검은 기와를 깔아놨는데, 그런 담벼락은 용연포구 중심부를 관통하며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흡사 중국 대호족의 장원과 비견될만한 크기.

다만 안에 정원이나 연무장은 없었기에 2,3층 건물이 담벼락 위로 다닥다닥 붙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조선은 참 검은색을 좋아하는 구나.”라는 생각이 문뜩 치솟는다. 조선군도 죄다 검은 갑옷을 입혀놓더니, 관청마저도 검은색 일색이다.

“들어가지.”

“예.”

“갑시다.”

기병들의 뒤를 쫓아 계속 나아가 관청 안으로 들어서자, 관청 안에선 한바탕 난리법석이 벌어지고 있었다.

뭘 모르는 중국인들이 봐도 어수선하고 분주해 보였고, 기병 또한 그걸 느꼈는지 돌아다니는 관원 중 하나를 붙잡았다.

죄다 제멋대로의 관복에 관모를 입고 다니는 터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녹패뿐이었는데, 연대기병은 능숙하게 찾아내어 불러 세웠다.

“귀화할 사람들을 인계하러 왔는데... 이게 뭔 난리인가?”

하급관리 또한 착호군 출신인 걸까? 기병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반갑게 웃고선 겁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

“아...! 용연군 대감과 함께 왔나?”

“그렇네만?”

“그래서 그런 거요. 여기가 용연인데, 용연군 대감이 오셨으니 난리가 나는 게 당연한 것 아니오? 현감부터 시작해서 죄다 대감 집으로 갔소.”

“음...”

일리가 있는 말에 기병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래서 나보고 기다리라고?”라는 짜증 섞인 눈빛을 숨기지 않고 뿌려댔다.

“수속을 밟으라했는데...”

“아. 그치들은 남았으니, 잠깐만 기다리쇼.”

턱수염을 바싹 밀어버린 청년 관원은 그리 말을 하고선, 후다닥 발을 놀려 다른 관원을 부르러 갔다.

이윽고 뒤숭숭하게 뭉쳐서 기다리고 있자, 다른 관원들 몇이 바쁘게 달려왔다.

“귀화인들을 데려 왔다고...?”

“맞네. 여기.”

기병은 인적사항을 적은 서류를 넘겨줬고, 관원은 손가락을 들어 인원수를 확인했다.

“수고했습니다. 잠시 쉬고 계시죠.”

“그러지.”

연대기병들은 귀찮은 일을 시킬까봐 냉큼 몸을 피했고, 청년 관원들이 이들을 대신 이끌었다.

“산동에서 온 것 맞지?”

“예.”

“정확히 어디서 왔나? 이름은? 가족은 총 몇 명인가? 본래 직업이 뭔가?” 등등. 관원들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물어보며 열심히 붓을 놀려댔다.

이윽고 모든 작업이 끝나자, 사람들을 이끌고 관아 밖에 붙어 있는 관용목욕탕으로 데려갔다.

“...?”

“욕탕이네. 욕탕은 알지? 그걸 크게 만든 거야. 다 같이 씻으라고.”

“...”

관원들의 한어는 어색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 속에 담긴 뜻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욕탕? 다 같이 씻으라고?’

중국도 안 씻는 건 아니니 욕탕을 모를 리 없으나, 일반 백성들이 욕탕에서 씻는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그냥 개울가에서 몸 담그고 씻는 게 끝이지.

그래서인지 선뜻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고, 청년관원들은 슬쩍 짜증 섞인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하여간 한족 놈들은 씻을 줄을 몰라요.”

“어째 강북출신이 더 심한 것 같지 않나? 아무리 강북에선 물이 귀하다고 해도 씻긴 씻어야 할 거 아냐.”

“난들 아나.”

청년관원들을 자기들끼리 구시렁구시렁 거리고선, 가족 하나를 뽑아 일단 욕탕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친절하게 욕탕 사용법부터 알려주고선, 중국에서도 흔히 쓰는 조두를 나눠줘 몸을 깨끗이 씻는 걸 감독했다.

이것도 다 경험의 산물이다.

이 무식한 놈들이 몸을 먼저 씻지도 않고 욕탕에 들어가는 바람에, 힘들게 덥혀 놓은 욕탕물이 똥물이 된 게 한두번인가.

정신 나간 놈들은 욕탕에 똥을 싸서, 진짜 똥물을 만들어 놓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수세미 열매를 말려 만든 천연 수세미를 사용해서 때까지 박박 밀고, 관원들이 눈대중으로 대충 맞춰서 가져온 새 옷을 입혀 놓자.

“오!”

“와...”

“어라?”

자기들이 봐도 말끔하게 바뀐 게 놀라운지,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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