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챕터38. 돌아보다 (4)
“자자. 한 가족씩 들어가게.”
“예!”
땟국물 하나 없이 뽀송뽀송하게 변한 걸 봤는데, 망설이는 이가 누가 있을까.
죄다 욕탕에 갔다 오자, 얼추 조선인 비슷하게 변했다.
“치수가 안 맞는 옷은 나중에 알아서 고치고.”
“예. 나리.”
소매 폭이 좁은 조선의복이 낯설었는지 아낙네들은 연신 팔을 건들거리고 있었는데, 관원의 말에 화들짝 놀라 냉큼 고개를 숙였다.
“우린 앞으로 자네들을 교육할 관원들이네. 나는 이 선생이라 부르면 되고, 이쪽은 권 선생, 김 선생이네.”
한명씩 소개를 하자, 모두가 하나같이 상전을 모시듯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자네들 살 집을 보러가야지. 갑세.”
이 선생이라 자칭한 관원은 거침없이 발을 놀렸고, 이내 집이 듬성듬성 들어서 있는 용연포구 외각으로 향했다.
“하나씩 올라타게. 가족끼리 타는 게 낫겠군.”
“...”
중국인들은 낯선 눈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채근하는 말에 역마차에 하나둘씩 올라탔다.
중국에서도 마차를 보긴 했지만, 이렇게 꼭 움직이는 움막처럼 생긴 승용마차는 처음보지 않나.
앉기 편하게 양옆으로 깔려 있는 의자도 신기했고,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천막을 꾹꾹 눌러보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와... 아부지. 저기!?”
두르륵. 요란한 소음에 파묻혀 낯설음과 두려움을 애써 밀어내기 바쁘건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은 모른 체 마차 뒤로 보이는 광경에 감탄을 내질렀다.
자갈도로를 타고 달려가고 있으니, 마차바퀴를 따라 구르는 자갈이 한눈에 들어올 수밖에.
평생을 마을에서 벗어나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니 만큼, 이렇게 많은 자갈이 한곳에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놀랍고 신기한 모양이다.
“자갈을 깔아놨군?”
“도로를 만들어놨나 봅니다. 아버님.”
“정녕 신기하구나...”
머리가 하얗게 선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고, 이내 모두가 중독되어 함께 풍경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줄줄이 이어지던 역마차는 이내 멈춰 섰고, 도착한 곳은 산동에선 상상도 못했을 멋들어진 기와집이었다.
“...”
자기도 모르게 기대감 섞인 눈으로 관원을 바라봤고, 이 선생은 이런 눈빛이 낯설지가 않은지 피식 웃고선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앞으로 살 집 맞아. 가서 구경하게.”
“와아아!”
“정말입니까?”
가족들은 더 크게 벌릴 수 없을 정도로 입을 쩍 벌리며 집안으로 달려갔고, 이 선생은 감격하고 있는 가장 중 한명을 손짓으로 불렀다.
“자네. 산동 보산에서 왔다고 했지?”
“예.”
“공청의 부하가 제대로 대우를 안 해줬나보군? 이런 집은 처음 보나?”
“그렇습니다.”
가장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말 그대로 이렇게 크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비록 중국식 집은 아니지만 그게 뭔 상관인가. 방이 여러개 있는 기와집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유리... 그러니까 파리玻璃, 초자硝子 장인이라고 했는데 맞나?”
“그렇습니다.”
“가족들 모두 유리 다루는 기술을 배우고 있고?”
“예. 나리.”
“좋아!”
이 선생은 히죽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귀화인들을 잘 정착시키면 그게 다 그의 공훈이 될 테니까.
과거 삼국시대에는 유리를 만들어 썼지만, 고려가 들어서면서 유리 제조기술을 잊어버렸다.
조선이 들어서고도 마찬가지였고, 과거 명에게 “유리 기술 좀 알려주세요.”라고 요청해 봤지만 그들이 콧방귀나 꿨을까. 그저 비싼 값에 사오는 수밖에 없었지.
중국의 경우에는 당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유리를 만들기 시작하고, 송대에 번성했으며 원,명을 거치면서도 계속 유지됐다.
유리처럼 비싼 물건이 또 없으니, 아무리 초지에 환장하는 몽골족이라도 그걸 날려버리진 않았으니까.
그런 중국의 유리 산지 중에서 유명한 곳이 바로 산동의 보산으로, 공청이 산동에 오면서 날름 집어먹었다.
자기 영역 안에 돈이 될 게 분명한 물건이 있는데, 그 작자가 놓칠 리가 있나.
문제라면 장인의 처우가 개차반이었다는 것.
조선도 개혁이 시작되기 전엔 장인의 처우가 개판이었지만, 공청의 부하는 일자무식 칼잡이 군인출신 아닌가.
조선보다 더욱 심해서, 유리 장인들은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짜여 지는 신세였지.
산동에 대해서 조사한 연오랑은 만세를 외치며 때를 기다렸다.
이윽고 공청 파벌의 가문을 박살내면서, 보산의 특산물인 유리, 유약, 향로 장인들을 왕창 빼돌렸다.
특히나 보산에서 만든 향로는 보산로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무려 한나라 시절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명성이 이어지는 향로 중 하나였다.
걸림돌이라면 산동상인들이 이걸 눈 뜨고 가만 보지 않았기에, 장인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난리통에 죽은 척 신분세탁을 하고서야 데려온 거지.
“자네 집안 말고도 다른 집안도 많이 이주했네. 알고 있나?”
“... 그렇습니까?”
“그래. 어쩌면 여기서 만날 수도 있을 걸?”
“아...!”
가장은 얼마 전 기억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공청이 무너질 당시에 무수히 많은 집안이 박살나고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그 중 대다수가 조선군에 의해 끌려갔던 모양이다.
이 자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빼돌린 온갖 중국 장인이 한가득. 이번 전쟁을 통해 얻은 수확은 단순히 재물이 끝이 아니었던 거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뽑아먹듯, 조선군은 알게 모르게 온갖 직종의 중국장인들을 어마어마하게 납치해 왔다.
“그러니 앞으로 잘 가르치고, 배워야 할 걸세.”
“...?”
“내가 왜 선생이겠나. 자네들에게 조선말과 조선문자, 조선법과 문화를 가르칠 사람일세.”
“아... 과연 나리께선 선생이 맞습니다.”
“반대로 자네는 유리 기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하네. 아마 하다보면 재밌을 걸세. 조금 힘들기도 할 거고.”
노가다 반복작업은 이미 조선 장인의 필수항목이자 덕목이 되었으니, 완벽한 배합비율을 맞추기 위해 이 자 또한 한동안 개고생을 해야 할 거다.
장인의 고집이 웬 말인가. 그랬다간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좋게 대우해줄 때 말을 잘 따라야 하는 법이다.
“자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배울 테니 그런 줄 알고... 자네는 내일부터 곧장 일을 하게 될 걸세.”
“벌써 말입니까?”
가장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유리 만드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당연히 준비할 게 많아서,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대충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허나 이 선생의 반응은 천하태평이다.
“뭐 문제 있나? 내가 유리 장인들을 만나봐서 아는데, 유리 만들 때 필요한 게 모래, 석회, 해초라고 하던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럼 뭐가 문젠가. 바다에 나가면 널려 있는 게 모래고, 저기 보이는 산 중에는 석회석 광산이 있네.”
이 선생은 물끄러미, 저 하늘 한쪽에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산을 가리켰다.
“가마는 이미 강철을 뽑아내는 신형고로와 도자기를 굽는 도요가 넘쳐나니 유리 가마쯤이야 문제도 아니지.”
“허헙!”
강철고로는 뭔지도 모르겠다만, 이미 오면서 용연에 깔린 수많은 기와를 보지 않았나. 기와를 굽는 가마 정도면 유리는 충분히 구워낼 수 있다.
“하지만 해초는...?”
“해초도 문제없네. 우린 해초를 키우거든.”
“예에...?”
가장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것도 없어 보이는 해초가 귀한 이유는, 이걸 키울 수가 없어서 파도에 쓸려 뭍으로 올라온 해초를 주워서 썼기 때문이다.
돈은 둘째 치고 구하는 게 힘들다면 힘들었지.
그런 해초를 키운다고 말하고 있으니,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지을 필요 없네. 나도 해초를 키우는 건, 여기 와서 처음 봤거든. 아무튼 김, 미역, 파래, 다시마 등을 키우고 있으니 물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세.”
“예...”
사실 전부다 연오랑이 소유한 수산기업에서 양식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미분을 만들 때 필요한 다시마를 중점적으로 키우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열심히 하게. 아국은 중국과 달라서, 자네가 일을 잘하면 잘할수록 돈을 벌 수 있네.”
“...?”
“음. 기업이라는 게 있는데... 이건 조금 복잡하니 다음에 알려주지. 알았나? 앞으로 내 말 잘 듣고 잘 적응하게. 혹시나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어찌 그런 사특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이 선생이 심드렁하게 답을 하자, 가장은 절대 그럴 일 없다는 걸 몸으로 표현하듯 머리를 깊게 숙였다.
“뭐... 도망친다고 해서 얼마나 도망치겠나? 아국은 아무 곳이나 중국과 거래하지 않으니, 도망쳐봐야 고향으로 갈 배도 구하지 못할 걸세.”
“...”
“게다가 고향에 가봤자 거지꼴을 면치 못할 텐데, 그럴 바엔 여기서 떵떵거리면서 풍족하게 사는 게 낫지 않나? 이렇게 좋은 집을 놔두고 뭐 하러 개고생을 하나?”
“암요. 그렇습니다.”
“물론 낯선 아국에서 사는 게 쉽지 않겠지만, 자네 자식을 생각해보게. 나처럼 훌륭한 관원이 될 수도 있다고. 호족이 지배하는 중국에서 그게 가능할 것 같나?”
이 선생은 자화자찬을 하듯 손을 활짝 벌리며 웃어댔고, 가장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하는 짓이 조금 요상하긴 해도, 말이야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
원정을 갔던 조선군이 회군하고, 개선식을 하니 뭐니 하고 난리가 벌어지고, 중국에서 반강제로 데려온 온갖 장인들이 새인생을 시작할 때.
저 먼 남쪽 끝 고성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지 좀 마쇼.”
“누구보고 큰소리야?”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 그런다고 올 사람이 안 오나?”
옷차림을 보아하니 다들 번쩍번쩍한 게 다들 잘나가는 집 사람들처럼 보였건만, 어째 하는 짓은 동네 애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쯧쯧.”
“자네가 혀만 차고 있을 처지인가.”
“그럼 뭐 장단 맞춰 춤이라도 출까. 올 게 왔는데, 놀랄게 뭐 있겠나.”
사내는 쓴웃음을 지었고, 마주한 사내 역시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고 말았다.
“그나저나 진짜로 여기까지 왔군?”
“그러게 말일세...”
둘은 다시금 소회를 토해냈고, 눈빛은 점점 탁해졌다.
좋은 게 분명하지만, 한편으론 속에서 쓴물이 솟아났으니까.
황희가 이끄는 착호군은 전라도를 서에서 동으로 밀고 갔고, 태종이 이끄는 착호군은 경상도를 북에서 남으로 밀고 왔다.
그리고 드디어 태종이 이끄는 착호군이 경상도의 끝자락 남부 해안까지 다다른 것.
“그럼 그런 거지. 현청이 왜 이렇게 난리가 났냐?”라고 묻는다면, 이유는 간단했다.
착호군은 이곳 변두리 촌구석 고성현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뒤집어서 탈탈 털어버릴 테니까.
“전에는 죽고 못 살던 이들이 다 같이 한몸이 됐군?”
“잘못 걸리면 다 죽게 생겼는데 별 수 있나.”
사내는 피식 비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조선의 모든 현은 양반사대부와 향리로 대표되는 지방호족이 대립하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론 둘 다 지주집안이었다.
허나 양전사업은 이들의 토지를 가리지 않는다.
필요하면 필요한대로 소유권을 가리지 않고 땅을 자르고 붙여서, 수로를 파고 저수지를 만들고 도로를 깐다.
보상을 해준다지만 어느 집안 땅이 몰수될지 모르니, 저렇게 안절부절 못할 수밖에.
“그래도 저치들은 멀쩡해 보이는데?”
“저 집안이야 오래전부터 기업을 일궜으니, 땅에 크게 미련이 없겠지.”
“음...”
저쪽 한편에서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는 몇몇을 보며, 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성은 남해 끝자락에 위치해 있고, 바로 옆에 붙은 창원, 거제 모두 유배지로 쓸 정도로 별 볼일 없는 곳이다.
허나 양전사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하동에서 온 이들의 꼬드김에 넘어간 해안가 집안들은 모험이나 다름없는 수산기업에 뛰어들었다.
안 해도 말라죽을 거라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나.
이 위험천만한 도전은 보란 듯이 대성공.
하동기업은 김, 미역 등의 해초와 굴 양식방법, 신형어선을 활용한 어업방법을 알려줬다.
헌데 열심히 해초를 키우다보니, 해초를 집어먹고 사는 전복을 덩달아 양식하게 된 것.
지금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서, 해초양식을 포기하고 아예 전복양식으로 갈아탄 집안도 있었지.
이렇듯. 전에는 왜구 때문에 무서워서 버려뒀던 해안가 일대의 집안은 무섭게 성장했고, 반대로 내륙에 살던 지주들은 온갖 압박을 받아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저치들은 착호군이 창설되자마자 자식들을 보냈지 않았나. 그 녀석들이 전부 떵떵거리는 진짜 관리가 됐으니, 오히려 양전사업을 환영할 수밖에.”
“흐음.”
지난날 착호군이 창설될 때.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이들이 바로 기업을 준비하거나, 중앙관직에 목말라 있던 지방호족 집안들.
그치들이 전역한지가 한참 됐고, 대부분이 관리나 군인으로 변해 조정과 군부에 눌러 앉았으니... 줄 하나는 제대로 잡은 거지.
“향리도 못된 집안들이 저렇게 떵떵거릴 줄은 몰랐는데 말일세.”
“뭐 어쩌겠나. 딱히 잘못된 것도 아니고.”
“...”
듣던 사내가 슬쩍 눈을 흘기자, 다른 사내는 피식 웃으며 흘러 넘겼다.
“그리고 향리도 향리 나름인 거지... 저 중에서도 분명 옥석이 가려질 걸세. 그리고 우린 누가 될지 대충 알지 않나. 그걸 지켜보는 것도 꽤 재밌을 걸세. 내기라도 하는 게 어떤가.”
“됐네.”
사내는 히죽 웃는 친우를 보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말이야 저렇게 하지만, 사실 그렇게 가볍게 논할 문제가 아니었다.
향리는 지방종신직이나 다름없었는데, 이젠 향리직이 중앙조정에 편입됨에 따라서 임명과 승계 또한 조정의 방식을 따르게 됐다.
예전처럼 지역 유지라고 해서 향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과거만큼 어렵지는 않지만 거의 흡사한 시험을 봐서 통과해야 될 수 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