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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267화 (267/538)

267. 챕터38. 돌아보다 (5)

물론 한 번에 다 잘라버리고 시험으로 뽑는다고 하면, 지방향리들이 다 들고 일어설게 분명하지 않나.

그래서 조정은 연수원이라는 걸 만들어서, 신입관리를 교육시키는 한편 기존 향리들을 데려와 교육시킨 후에 내부시험을 거쳐 다시 향리로 임명할지 말지 결정했다.

‘저기서 의기양양하게 있는 이들이나, 안절부절 못하는 이들이나 죄다 한성으로 올라가 머물면서 옥석이 가려질 거란 말이지.’

“그래도 대부분은 합격하지 않겠나? 요즘처럼 관원이 되기 쉬워진 시대에 과거보다 쉬운 향리직은 거뜬히 합격하겠지.”

“글쎄...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 걸세. 배워야 할 게 산더미일 텐데... 일머리는 있어도 공부머리는 없는 이들이 버텨낼지 모르겠군.”

“흐응...”

그래도 나름 지방유지인데, 사람을 다루고 일처리하는 방법을 모를까.

허나 연수원에서는 진짜로 과거마냥 온갖 신학문을 배우고 익혀야 할 텐데, 나이도 적잖게 먹은 이들이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게다가 상피제도 때문에 향리직을 포기하는 이들도 꽤 될 걸? 특히나 저치들처럼 기업을 일구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럴 걸세.”

“하긴, 이제야 돈을 좀 벌기 시작했는데, 가문을 내팽개치는 건 쉽지 않겠지.”

“그럴 걸세.”

조선에는 상피제도라고 해서, 가까운 친인척끼리 같은 관청에 근무하지 못하고, 자기 고향에서 근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지방관직이 중앙관직에 예속되면서 이 법 또한 적용됐으니, 향리들은 죄다 고향을 떠나 다른 임지로 부임해야 되지 않나.

이걸 쉽게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안 그런가?”

“아닐걸? 다들 잘만 적응하던데 뭘... 나를 보게. 내가 왜 이런 촌구석까지 왔겠나.”

“자네...”

자기 고향을 무시해서 일까. 사내는 슬그머니 눈을 흘겼고, 약을 올린 사내는 히죽히죽 웃으며 능구렁이마냥 흘러 넘겼다.

“...”

허나 꼬집어줄 논리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약을 올린 사내는 착호군 군의관 출신으로, 의약부에 소속되어 이 촌구석 현에 임명된 향리 중 한명이었다.

의원이 정식 관리가 된 것도 놀라운데, 그런 의원이 지방의 현에 부임하는 걸 예전이라면 상상이나 했을까.

‘이게 어찌 쉬운 일일까. 정말 개혁이라 부를 만하구나.’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한탄과 감탄이 절로 나왔다.

향리가 왜 세습되고 유지됐던가.

지방의 사정을 모르는 현감을 돕기 위해서, 토박이 출신을 붙여 놓은 거다.

헌데 이들을 다 뒤섞어버린다는 건... 이젠 지방의 특수성이라는 게 없어졌고, 토박이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지방행정을 돌릴 수 있다는 뜻이리라.

“...”

“...”

둘이 잠시 침묵하며 생각에 잠겨 있기 무섭게, 누군가 먼지를 풍기며 달려와 소리쳤다.

“왔습니다! 왔어요!”

어느 집 노비인지 모르겠다만 누군가 그리 외치자, 난리법석이던 현청은 일순간 전운이 감돌았다.

다들 각오를 굳게 다지고, 표정도 근엄하게 바꾸고서 줄을 맞춰 정렬.

동시에 두두두. 말발굽소리와 함께, 자랑하듯 의기양양하게 말을 몰고 오는 맹수갑옷들과 그 뒤를 따라 관복을 입은 이들이 몰려왔다.

잠깐의 대치와 눈싸움이 벌어졌지만, 어째 저쪽의 기세가 월등히 앞서고 있다.

착호군에서 온 이들은 점령군마냥 눈을 부라렸고, 향리와 양반사대부집안 사람들은 결국 하나둘씩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이걸 중재 아닌 중재를 할 고성현령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아보기 힘든 묘한 표정을 짓고선 입을 열었다.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모여 있구려. 잘 했소. 사헌부 집의執義 정흠지라 하오.”

“...!”

종3품 집의면 현령보다 급이 높은 터라, 가장 선두에 섰던 인물이 입을 열기 무섭게 다들 바짝 긴장했다.

게다가 착호군 관리를 이끌고 온 수장이 사헌부 관리라니? 사헌부는 지들 살겠다고 남들 물어뜯는 악독한 놈들 아닌가. 이건 일단 고성현을 털고 보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바로 시작할 수 있겠군. 안내하게.”

“예...”

현령은 대세를 읽고 냉큼 발을 놀렸고, 향리와 양반사대부집안 사람들 모두 바삐 현청의 마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성현의 지주들이 죄다 모였는데, 한자리에 모이는 게 어디 쉽나.

다들 그냥 현청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엉덩이를 붙였고, 정흠지를 따라온 관리들이 주르륵 현청마루를 끼고 앉았다.

“다들 소문은 들어서 알 테니, 따로 설명을 할 건 없을 것 같은데... 궁금한 게 있소?”

“저... 상왕전하께서 직접 오시는 겁니까?”

“아니오. 상왕전하께선 동래에 머물면서, 거처를 마련하실 거요.”

“아...!”

“휴...”

정흠지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탄식과 안도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촌구석 지주들 입장에선 태종의 존안을 직접 보는 건 영광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엄청난 부담이다.

사실 솔직한 심정으론 역시 안 왔으면 했는데, 천만다행히도 그렇게 됐다.

“그럼 착호군이 몇이나 오는 겁니까?”

“양전사업을 고성현에서부터 진행하기로 한 바, 보조군까지 합치면 대략 삼만정도 올 예정이오.”

“삼만!”

“허...!”

“그렇게나 많이!”

다들 까무러치게 놀라서 웅성거렸다.

고성은 특색이 없어서 땅만 넓고 사람은 적어서, 마을사람들을 다 합쳐봐야 만 명도 안 되는 현이다.

그런데 그보다 몇 배나 되는 사람이 몰려온다는 말에, 다들 기겁할 수밖에.

저 많은 사람을 대체 뭔 수로 먹여 살릴 건가.

“주둔지는 보급이 용이한 포구에 건설할 예정이오. 고성에는 수군진이 있는 걸로 알고 있으니 거길 개보수할 거요.”

“음...”

현령의 눈알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졌다.

남해는 왜구가 시도 때도 없이 오던 곳이었고, 고성 또한 마찬가지.

다만 대마도정벌 이후 왜구가 뚝 끊기고, 해군이 창설되면서 기존 수군진의 방비를 대충하지 않았나.

현령은 군사에 관한 일체업무를 담당하는 병방兵房에게 눈짓을 보냈고, 병방 또한 바쁘게 눈을 굴리며 무언의 대화를 날려댔다.

“다른 궁금한 사안이 또 있소?”

“저기...”

정흠지가 시원시원하게 답을 이어가자, 모두는 조심스레 손을 들고 질문을 이어갔다.

허나 궁극적인 답은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흰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따라와라.”였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 진행되자... 심드렁하면서도 열의에 찬 눈으로 사람들을 보던 두 사내는, 관심을 접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정흠지와 함께 온 관리들 중에서, 누군가 자신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눈짓하자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맞나?”

“맞네.”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오히려 관리가 자신들을 보며 피식피식 웃음을 삼키는 게 아닌가.

“허허... 숙자가 맞구나!”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외치며, 오랜만에 보는 동문. 김숙자를 알아봤다.

누군가는 침울하고, 누군가는 활짝 웃는 첫 만남이 끝나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알아서 흩어졌다.

착호군 관리는 진짜 점령군마냥 현청을 차지하고 눌러 앉았고, 모였던 이들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만 우연치 않게 김숙자를 만난 두 사내는, 그를 몰래 빼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허... 어째 전보다 살림이 더 핀 것 같은데?”

“...”

김숙자의 말에 사내. 곽호선이 슬쩍 눈을 흘겼다. 빈정거리는 건지, 감탄하는 건지 알수가 없다.

“뭐 어떤가.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자네...”

또 다시 약을 올리듯 사내. 최운룡이 입을 열자, 곽호선은 친우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아무튼 들어가지.”

“그럽세.”

집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묘하게 알싸한 향이 흘러나왔고, 곽호선은 노복을 시켜 냉큼 주안상을 차려오게 했다.

“후흡.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인데...?”

“약초네. 내가 이 친구 덕을 많이 보고 있지.”

“허...?”

김숙자는 놀랐다는 듯, 슬쩍 곽호선을 곁눈질 했다. 이 친구가 약초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전에 서신을 보낼 때는 이런 말이 없었지 않나?”

“그게 몇해전 일인가. 있는 땅도 다 잃어버릴 판국이니 뭐라도 해야 하는데... 내가 아는 거라곤 글줄 몇 자와 약을 보는 것 말곤 없지 않나. 집안을 건사하려면 뭐라도 해야지. 굶어죽을 순 없으니까.”

“...”

“...”

웃으며 말을 하지만 마냥 웃기지만은 않은 사연이라, 김숙자와 최운룡 모두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스승님 기일에 찾아뵀나?”

“무슨 염치로 찾아가겠나.”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바빠서 못 갔네.”

“음...”

김숙자는 어느새 노복이 내온 술을 한입에 털어 넣어, 씁쓸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들 이심전심인지, 나머지 둘 또한 김숙자를 따라했다.

‘우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오르니, 친우들과 함께 했던 옛 시절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지만 세 사람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학자인 길재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허나 공부를 시작하기 무섭게 무슨 일이 터졌는가. 운석핵꿀밤으로 인해 조선사상계가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다.

조선에 불만을 품고 고향으로 낙향한 근본성리학자들.

정몽주 학파를 이어받은 이색, 길재, 이숭인등은 언젠가 날아오를 날을 기다리며 후학을 키우려 했는데... 그게 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거지.

세상은 점점 혼란해졌고, 천명을 잃어버린 온 세상이 근본성리학자들을 잡아먹으려 으르렁거렸다. 저놈들 가만 놔두면, 조선마저 천벌을 받을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스승인 길재와 스승님의 친우분들 또한 엄청난 공세에 시달렸고... 어쩌면 그 때문에 오기가 생겨서, 더욱더 근본성리학에 매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세종이 등극하고 연오랑이 자본유학을 들고 튀어나와 개혁이 시작되자... 근본성리학자들은 완전히 묻혀버렸다.

‘당장 나를 봐도 그렇고, 친우들을 봐도 그렇지 않나.’

셋 모두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짓을 버젓이 하고 있으니, 마음에 품었던 칼은 이미 오래전에 바스라진 거지.

“자네는 어찌 지냈나?”

무거운 분위기를 풀려는 듯, 곽호선이 먼저 입을 땠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야 뭐 얼떨결에 어사가 됐다가, 그 후로는 집현전에 들어갔네. 그리곤 세상 구경을 했지.”

‘맞다. 세상 구경이지.’

김숙자는 자기도 모르게 옛 기억이 떠올랐다.

집현전에 들어가 스승님의 뜻을 펼쳐보려 했지만, 될 리가 있나. 집현전은 그 당시 복마전이나 마찬가지였고, 하급 관원인 그가 목청을 높여봐야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근본성리학이야 말로 운석핵꿀밤의 원흉으로 지목받는 마당에, 어느 누가 그의 주장을 들어주겠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는 집현전에서 농사직설을 만들고, 그걸 전파하는 임무를 받았고... 말 그대로 세상 구경을 했다.

저 남쪽 나주부터, 저 북쪽 의주와 호주를 거쳐, 더 멀리 만주신도시까지 가서 여진인에게 농법과 농기구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고 다녔으니까.

“세상 구경이라... 팔자 좋구만? 나는 착호군에 들어가서 개고생을 했는데.”

“내가 군의관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뻔히 아는데, 개고생은 무슨.”

“허허. 이 사람 보게? 군의관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살 꿰매는 게, 그저 바느질 하듯 뚝딱뚝딱하면 되는 줄 아나?”

최운룡은 장난기 섞인 말투로 김숙자를 잡아먹으려 들었다.

입을 그렇게 노는데, 눈빛은 어째 더욱 침잠해진다. 사실 최운룡의 인생도 김숙자와 크게 다를 게 없었으니까.

착호군이 창설될 당시에는 착호군에 가고 싶지 않아하는 집안이 꽤 있었고, 그런 집안은 사노비 네 명을 보내는 걸로 대신할 수 있었다.

머리에 든 건 많아도 최운룡은 집안이 한미해서 노비를 대신 보낼 수 없었으니... 어쩌겠나. 칼질은 영 체질이 아닌 터라, 군의관으로 빠지게 됐지.

“사대부라면 응당 백성을 위해 의술을 알아야한다.”는 말에 따라 공부를 하면서 의술도 익혔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인생을 풀어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자네는?”

“나야 뭐... 자네들보다 처지가 낫지 않나. 그냥 저냥 지냈네.”

“흐음.”

반대로 곽호선은 노비를 대신 보내는 걸로 착호군에 딸려가지 않았다. 그땐 그도 나름 길재의 제자로서 오기와 자부심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자본유학으로 완전히 넘어갔고, 만백성이 새롭게 탄생하는 조선을 환영하고 있는데, 근본성리학이 설 자리가 남아 있을 리가.

그저 차일피일 세월만 까먹으면서 아득바득 버텨보려 했지만, 날이 갈수록 조정의 압박은 심해졌다.

까닥하면 와서 사노비 풀어놓으라고 압박하고, “이제 양전사업 시작된다? 땅을 잃어버리기 전에 뭐라도 살 구멍을 찾는 게 좋을 걸?”이라며 시비 걸고,

관노비 사노비 할 것 없이 먹고살 구멍만 있으면 마구 속량시켜주니, 곽호선 집안의 노비들도 은근슬쩍 눈치를 보기 시작.

수많은 관리와 지주들을 골로 보내버린 여수구죄법과 기업규제법, 토지제한법, 고리대금법이 시행되자, 버티지 못하고 급속하게 가세가 기울어졌다.

여수구죄법은 뇌물을 받은 관리는 물론 주는 사람도 함께 처벌하니, 현령을 비롯한 향리에게 힘을 쓰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나마 땅은 그리 많지 않아 토지제한법에 걸리진 않았지만, 그 없는 땅으로 수익을 내게 해주던 사채가 고리대금법으로 인해 불가능해지자 진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어쩌겠나. 자존심과 분기 때문에 버티자니 집안이 망할 꼴이니, 뭐라도 해야 했고... 곽호선 또한 의술을 배운 터라, 그나마 아는 약초기업을 설립하는 걸로 살길을 도모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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