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챕터38. 돌아보다 (6)
“한 때는 이가 부서지도록 분하고 서러웠는데... 그것도 얼마 안가더군. 모든 백성이 지금의 세상을 반기고 있는데, 나 홀로 잘못됐다고 외쳐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
“...”
곽호선의 침울한 말에, 모두가 같은 마음인터라 말없이 술잔만 기울였다.
그들이 추구하던 이상향은 완전히 박살났는데, 어째 세상은 더욱 살기가 좋아지고 백성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난다.
자신이 익히고 따른 모든 게 부정당했는데, 그 고통을 어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허나 한편으론 그들이 그토록 공부했던 목적은, 결국 백성들을 편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나.
자기의 뜻과 다르다고 궁극적인 목적마저 부인할 수 없으니, 결국은 스스로의 뜻을 접는 게 맞는 거지.
“인경은 뭐하고 지내는 줄 아나?”
“학당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려 했는데...”
“잘 안됐나 보군.”
“...”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의 동문인 배인경도 처음에는 이상을 꿈꿨지만, 곧장 냉담한 현실을 마주했다.
근본성리학을 배워 고전을 달달 외워봐야, 책문이 중심이 된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 있나. 그럴 바엔 세상 구경이나 하면서 이런저런 책을 두루 읽는 게 더 나았다.
사승관계를 통한 연줄? 근본성리학 계열은 조정에서 힘도 못 쓰는데, 배인경의 제자가 되어서 뭐할까.
길재의 이름값이 높은 건 사실이지만, 조정에서의 영향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결국 제자를 구하지 못해 학당은 망했지.
“지금은 집현전에서 조선법을 만들고 있네. 뭐... 솔직히 말하면 말단이라서 힘은 별로 없지.”
“흐음.”
결국 그는 현실에 굴복해 임시관리를 거쳐 집현전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마지막 남은 심지에 불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사실 그것도 잘 안 되고 있었다.
사상계가 분열하고, 조정이 자본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어찌됐건 자본유학도 유학의 기치를 품고 있다.
성리학의 모든 걸 부정하는 건 아니니, 모두가 동의하고 분란이 일어나지 않는 기본과 필수적인 내용만 품고 법에 반영하고 있었다.
관리들이 보기에, 고리타분하면서도 시대착오적인 근본성리학자의 주장은 씨알도 안 먹혔지.
“지금 와서 농본주의를 외쳐봐야 누가 따르겠나.”
“...”
그 누구보다 농업전문가인 김숙자의 말에, 둘은 그저 술잔만 매만졌다.
그들이 생각하던 농본주의와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결과는 어떤가.
상업과 공업이 발전하면서 농업생산력 또한 수직상승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잉여물산과 상품작물이 튀어나왔고, 이걸 팔아먹지 않으면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
이 판국에 “자급자족하는 고립된 향촌사회로 돌아가자!”라고 외치는 건, 다 같이 굶어죽자는 말과 크게 다를 게 없지.
또한 “상업과 공업을 억제해라”라고 말을 했다가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 전에 관리들에게 먼저 쌍욕을 먹게 될 거다.
미친 듯이 부풀어 오른 조정의 덩치를 유지하기 위해선, 그만큼 많은 재화. 특히나 대외무역이 필수적이니까.
여기에 또 “예전처럼 작은 정부를 추구하자!”고 외쳤다간, 자기 밥그릇을 잃어버릴 수많은 관리들에게 몰매를 맞게 될 거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거스를 수 없는 파도에 휘말린 꼴이 됐다.
“흐흐. 인경은 고생 좀 하겠네.”
“그래도 잘 지내고 있네. 오히려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학식은 전보다 더 늘었네.”
“오... 걱정 안 해도 되겠고만 그래.”
“그럴 걸세. 아! 막내 사제는 어떤가?”
김숙자가 히죽 웃으며 답하고 되묻자, 이번엔 곽호선이 입을 열었다.
“영손은 요새 장사한다고 돌아다니고 있네. 의주와 제주를 오가면서 외국서적을 구해 필사해서 팔고 있더군. 전엔 제주에서 저 먼 천축국 서적을 구했다면서 자랑을 하더군.”
“허...”
김숙자는 아직도 앳된 얼굴이 기억나는 신영손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동문들보다 나이가 어린 만큼 더욱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을 터, 그 혼란을 깨고 성장했는지 아니면 반항심에 몸을 던졌는지 모르겠다만... 아예 상업의 길로 나아갔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
“우려하지 않아도 되네. 생각보다 근심 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더군. 게다가 요새 아국의 군세가 워낙 이름 높지 않나. 외국상인들이 끔뻑 죽는 모습에, 생각이 많이 바뀐 걸로 아네.”
“아...”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안 그래도 외국상인들은 북방을 장악한 조선의 군력을 두려워했는데, 지금은 무려 중국 본토에 가서 휘젓고 왔다.
근본성리학자들 뿐만 아니라 몇몇 노신들 중에서는 아직도 중화,모화,사대주의를 가슴속 어딘가에 품고 있는 이들이 있겠지만, 이젠 입 밖으로 꺼내는 이가 없다.
더불어 안 그래도 힘없던 근본성리학자들의 주장은 또 한번 힘을 잃었다.
“우리한테 처맞는 중국놈들의 사상을 우리가 곧이곧대로 따를 필요는 없잖아? 우리가 무슨 여진이나 몽골처럼 근본이 없는 것도 아니고.” 라는... 논리로는 말이 안 되지만, 감성적으로는 말이 되는 주장이 조정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흠...”
“음.”
“흐읍.”
다들 같은 심정인터라, 다시금 신음을 안주 삼아 술잔을 털어 넣었다.
‘쩝. 술맛은 좋군.’
제대로 만든 소주라서, 분위기를 못 맞추고 입맛을 돋우고 있다.
술맛에 홀렸는지, 김숙자는 한번 더 술잔을 털어 넣고서 속마음을 털어놨다.
“내가 서신으로 말했던가? 오래전, 어사에 막 부임했을 때 용연군 대감을 만났다고 말이야.”
“아... 말했네.”
“자네가 욕을 엄청 써놨지.”
용연군은 여전히 폭풍의 핵인데, 그 이야기를 잊어버릴 수 있나. 워낙 예전 일임에도, 지금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용연군 대감이 말했네. 조선을 바꿔놓을 거라고.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성현의 말이 모두 진리는 아니라고 말이야.”
“...”
“치기 어린 소리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해야겠나. 억지를 부리자니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고, 아무것도 안하자니 세상을 회피하는 꼴 아닌가.”
“...”
“그럴 바엔 ‘과연 얼마나 잘하나 보자!’라는 삿된 심보로 조정에서 일을 했는데... 배운 게 너무나도 많네. 너무나도 많아. 북방의 여진인들과 귀화인들을 상대하다보니,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더군.”
그 누구에게도 풀어놓지 못한 소회를 풀어놓자, 최운룡과 곽호선 모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건 그들과 같은 근본성리학자 출신이 아니면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니까.
고기 맛을 보면 잊을 수 없다는 말처럼, 백성들은 배움의 빛줄기를 쬐기 무섭게 새싹이 피듯 매섭게 성장했다.
그들이 보기에 근본성리학자들이 주장은 “나랏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무식한 네놈들은 시키는 일이나 잘 해라.”라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주장으로 밖에 안 들렸던 것.
온갖 것이 신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특성화, 문헌화, 학문화되고 있는데, 기껏해야 망한 중국놈들 사상을 주저리주저리 읊는 선비들의 말이 백성들 귀에 들어오겠나.
성현이 어쩌니 저쩌니, 반상의 도리가 어쩌니 했다가는 돌팔매를 맞기 딱 좋았지.
이걸 말려야할 조정조차 반대로 양반과 호족을 찍어 누르려고 호시탐탐 눈에 불을 켜고서, “어? 감히 조정의 뜻을 따르지도 않는 놈들이, 니들이 뭐라고 백성들을 괴롭혀? 죽어봐라.” 이러면서 칼을 붕붕 휘두르지 않나.
원래 역사에선 삼남지방에 “선비와 양반이 많아 숲과 같다.”하여 사림이라 불렸건만, 지금 역사에선 숲은커녕 나무하나 제대로 남은 곳이 없었다.
죄다 어떤 식으로든, 자기 살길을 찾아가느라 바빴지.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길재의 제자들처럼 말이다.
“그런가...?”
“그렇네. 양전사업으로 인해서 잘리고 찢어지고, 흩어진 집안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이주한 집안 또한 부지기수네.”
“맞아. 내가 착호군에 있을 때도 그랬지. 까불다가 적몰되어 북방으로 간 집안은 셀 수도 없을 걸? 뭐... 기회의 땅인 북방에서 한몫 잡으러 떠난 집안도 많고.”
“음...”
김숙자의 말에 최운룡이 냉큼 덧붙였고, 외지 사정을 잘 모르는 곽호선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양반사대부도 이제 양반사대부라 부르기도 뭐한 판국이니, 더욱더 그렇지 않겠나?”
“맞네.”
“음...”
“이런 평지풍파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나라가 멀쩡히 굴러가는 걸 넘어, 무섭도록 성장하고 있으니... 결코 잘못된 길로 가는 건 아닌 게 분명하겠지.”
“...”
김숙자의 말을 끝으로 다들 침묵에 잠겼다.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지만, 세상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자신들이 잘못됐다는 뜻이니까.
양반사대부. 근본성리학자들의 근본이자 핵심이 무너지고 있는데, 어째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있다.
군부가 창설되면서 무반이 완전히 없어졌으니, 이제 양반이 아니라 일반이라 불러야 할 판국이다.
또한 신입관리를 어마어마하게 뽑았고, 지방향리조차도 조정관리가 됐다.
거기에 문관 밑에는 잡직관원으로 양민과 관노가 실무자로 포진되어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속량되어 조정관리가 됐다.
문제는... 지금 시대는 양반신분제가 아닌 양반관료제이니, 관리가 곧 양반을 뜻하지 않나.
달리 말하면 하루아침에 천민이 양반이 되고, 양반사대부의 경쟁자이던 향리가 양반이 되고, 길을 가다 마주치는 수많은 이들이 죄다 양반이 되었다는 거다.
이걸 쉽게 받아들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서로 마음에 안 들어서 까 내리기 바쁘니, 정치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양반층 자체가 형성될 수 없는 거지.
일이 이렇게 되자 조정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개나소나 죄다 양반이 되어서, 기존의 권익을 인정하면 나라가 망할 판국인데?
음서제도는 이미 오래전에 폐지.
군역은 착호군이 등장하면서 오히려 양반과 호족이 군대에 더 많이 가게 됐고, 군부가 생기면서 모병제로 전환되어 군역자체가 없어질 판국이다.
노역 또한 마찬가지로, 기업을 일군 집안은 직접 몸을 쓰는 대신 국방세를 내며 돈으로 대신하고 있다.
생원이니 진사니 하는 정책은 싹없어졌고, 양반에게 부여하던 부분적 면세특권도 전부 해체.
법으로는 양인에 양반과 양민이 모두 포함됐으나, 암암리에 인정하던 우월적 특권 또한 전부 날려버렸고.
양반의 직위 또한 직계가족이 아니라 본인에게만 해당하게끔 바뀌었다.
결국 심리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양반신분계층은 꿈에서나 볼 일이 되어버린 거지.
이러니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근본성리학자 집안이 버텨낼 수 있나.
예전에는 “우리 마을 터줏대감. 지조 있고 기개 높은 어르신 댁!”이라며 우러러봤다면,
외지인들로 뒤죽박죽 뒤섞인 지금은 “저치들은 뭔데 저렇게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다녀? 한 곳에서 오래 살았다고 유세부리냐? 확 망해서 저놈들 땅을 우리한테 줬으면 좋겠네.”라고 흘겨보는 거지.
“다... 다른 곳에선 그 정도란 말인가?”
곽호선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끔찍한 말에,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지만.
“내가 말했잖나. 왜 내 말은 안 믿고, 숙자 말은 믿는 건가?”
“...”
최운룡은 헤실헤실 웃으며 대꾸를 쏟아냈다.
허나 그 속에 담긴 뜻은 결코 웃기지 않았다.
두 사람은 착호군에 있으면서, 태종이 무자비하게 양반사대부 집안을 족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아... 나라가 어찌되려고...”
곽호선은 참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한탄을 흘리고 말았다.
성리학자들이 추구하던 이상향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뤄, 정확히 말하면 왕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권도權道와 패도를 막고 신하들이 보조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건데... 양반사대부가 다 없어져버리면 이게 가능케나 하겠나.
“상왕전하와 전하께선 고금에 다시없을 현인이시니 문제가 없겠지만, 미래에도 선군이 나올 거라고 어찌 단언할 수 있겠나. 제어할 방법조차 없이 이대로 계속 가서, 훗날 암군이나 폭군이 나오면 나라가 어찌되겠나.”
“...”
“...”
곽호선은 울분에 찬 목소리를 내었지만, 김숙자나 곽호선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다른 배경을 가진 온갖 인간군상들이 모인 착호군에 있을 때, 항상 들었던 반론이 떠올랐기 때문.
“그거야 조정관리들이 알아서 하면 되는 거지, 니들이 뭔데 니들만 하겠다고 하는 거냐? 양반사대부들만 해야 되는 법이라도 있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양반사대부의 권위를 높인다고 해서, 나라가 똑바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잖아?”
“관리와 양반사대부를 동일시하려 하지 마라!” “이 배때지 부른 지주 놈들이 땅을 더 가지려고 수작부리네?”라는 주장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양반출신이 아닌 수많은 관리를 지켜 보건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
“군왕의 전횡에 대해서는 분명 우려할 바가 없는 건 아닌데... 그게 자네 생각만큼 쉽진 않을 걸세.”
“...!?”
곽호선은 눈에 불을 켜고서 김숙자를 바라봤다.
아무리 현실에 타협해 뜻을 꺾었다고 한들, “그렇게까지 굽혔냐!”라고 외치는 듯 했다.
“어째서인가?”
그는 으르렁거리듯 말을 토해냈고, 김숙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답을 했다.
김숙자라고 어찌 이런 생각을 안 해봤겠나. 하지만 현실은 또 이상과 달랐다.
“조정에 몸담지 않은 자네는 감이 잘 잡히지 않겠지만, 작금 조정은 너무 커졌네. 아국은 이제 누구 혼자서 이리저리 흔들 수 있는 쪽배가 아닐세.”
“...?”
“...”
개혁이 있기 전, 조정의 문관 수는 고작해야 7,8백명이었다.
이것도 원래 역사보다 빠르게 집현전을 만들어, 관원을 늘려서 이 정도다.
이게 말이나 되는 숫자인가 하겠지만, 사실 이 밑에는 잡직관원 수천명이 존재했지. 다만 무관의 경우, 중앙군 갑사가 포함되는 탓에 정식관원이 수천명을 넘어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