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챕터38. 돌아보다 (7)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셀 수 없을 정도로 관리가 늘어났고, 전문화, 특성화로 인해 겸직과 체아직 또한 없어졌네. 그래서 지금 잡직과 지방향리직까지 전부 집어삼킨 조정의 관원 수가 몇인 줄 짐작할 수 있겠나?”
“...?”
둘은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안 잡혀서, 고개만 갸웃거렸다.
“군부에 속한 이들을 빼고도, 아무리 못해도 삼만이 넘네.”
“허헙!”
“...!”
경악할 수치에 둘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언제 이렇게 많이 늘어났는지도 모르겠는데, 그걸 떠나서 저 많은 관원의 녹봉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많은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많은 것도 아닐세. 이곳 고성에 관노를 포함해서 관원이 대충 백명쯤 있다고 치면, 전국의 현을 따져봤을 때 충분히 그 정도 숫자가 나오지 않나.”
“그건 그렇긴 한데...”
“허...!”
그나마 세상 구경을 한 최운룡은 대꾸를 했으나, 곽호선은 여전히 말문이 막혀서 금붕어마냥 입만 뻐끔거렸다.
“그래서 예전처럼 말 한마디, 손짓하나로 나라를 굴릴 수가 없네.”
예전이야 현령에게 명령 내려서 “뭐 내놔라!”라면 아래서 알아서 쥐어짜서 올리면 그만이지만, 지금은 전부다 한 몸통이니 그런 식으로 일처리를 할 수가 없다.
“아래서 알아서 올려서 위에선 받기만 한다.” 라는 기조가 완전히 무너졌으니, 이거 까닥 잘못 건들면 현 하나가 박살나는 게 아니라 근처의 현까지 전부 박살나는 거다.
“게다가 육조를 넘어서서 부서가 너무 많아졌네. 당장 운룡도 전에는 있지도 않던 의약부에 속해 있지 않나.”
“그건 그래.”
최운룡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근본성리학을 익힌 자신이 의원이 되고, 의약부라는 생경한 부서의 관원이 되어 지방현에 부임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이렇듯 새롭게 생겨난 부서가 한두개인가? 자네가 모르는 부서가 지금도 생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생길 걸세. 육조가 뭔가. 한 이십조, 삼십조는 되지 않을까?”
“...”
김숙자는 말장난을 해봤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아서 다들 미동조차 없었다.
“그 말은... 군왕께서 봐야할 게 너무 많다는 거군?”
“맞네. 옛 명나라의 주원장은 신하들을 믿지 못해서 잠도 안자고 직접 사무를 처리했다지만, 지금 아국의 상황을 보건데 군왕께서 모든 걸 다 하려고 하시면... 옥체가 성치 않을 걸세.”
김숙자는 차마 무도한 말은 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돌려 말했다.
속뜻은 “혼자 하려고 하면, 잠도 못자고 과로로 뒤질 거다.”라는 뜻이리라.
“의정부서사제로 되돌아갈 일은 없으니, 결국 지금처럼 각 부서장 체제로 유지되면서 부서장에게 권한을 나눠주는 수밖에 없는 거지.”
“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
매일같이 회의를 하긴 하겠지만, 시시콜콜한 자잘한 것까지 전부 왕의 재가를 받아 움직였다가는 제때 대응조차 못할 거다.
“게다가 이렇게 많아진 부서끼리 의견 조율이 쉬울 것 같나?”
지금은 관리가 너무 많고 어지러워서, 흔히 말하는 당파나 계파조차 불분명하고, “앞으로도 과연 당파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여기에 특성화와 전문화가 더해져서, 여러 부서를 뺑뺑이 돌려서 만능 일꾼을 만드는 방식도 때려 쳤다.
결국 부서간의 전문성은 높아졌지만 반대로 독자성도 함께 높아져서, 흔히 말하는 밥그릇을 놓고 벌어지는 정치싸움도 쉽지 않은 거지.
같은 부서 출신 아니면, 밑에 사람들이 쉽게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도 이러한데, 앞으로 이십년, 삼십년 후에는 어떨 것 같나.”
“으음...”
“흠.”
둘 모두가 머리를 맹렬하게 굴려댔다.
바닥부터 실무경험을 하고 박박 기어 올라온 신입관리들이 중진이 되어 요직을 차지할 텐데, 그때가 되면 그야말로 완벽한 실무전문관료의 탄생 아닌가.
제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했다가는 “뭣도 모르면 조용히 있으시죠.”라는 말 밖에 못 들을 거다.
이건 유학적 명분 싸움이 아니라, 눈앞에 놓인 현실에 관한 논의니까.
‘반대로... 양반사대부도 마찬가지겠지.’
원래 역사처럼 양반사대부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라고 상소 쓰고 의견을 낼 수 있을까.
파벌조차도 제대로 형성이 안 되니, 아마 조정에선 “쥐뿔도 모르면 닥치고 전문가 말이나 들어라.”라면서 단박에 찍어 누르고 무시해버릴 거다.
“게다가 이렇게 부서가 많아지고 세분화될수록, 조정은 더욱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네. 뭐 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지.”
“그건 분명하네.”
“음... 인정하네.”
이건 곽호선도 쉽게 순응했다.
지금의 조선은 너무나 복잡하고, 서로 얽히고설키고 있다.
예전에야 하는 일도 비슷하고, 처지도 비슷하고, 각 현이 따로 노니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쉬웠다.
허나 지금은 지주들이 땅에서 벗어나 기업을 일구고 이른바 물류와 유통이 시작되면서, 민관이 전부 하나가 되어 돈으로 엮여있지 않나.
조정 부서 중에서 뭐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는, 전체가 영향을 받아 어떤 부작용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이젠 조정 그 자체가 생명력을 얻은 것.
왕은 큰 틀과 줄기를 잡고 조정을 이끌 수는 있어도, 자기 뜻대로 이랬다가 저랬다가하면서 마구잡이로 주무를 수 없는 거지.
“앞으로 조정이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르나... 적어도 지금의 조정이 앞으로의 조정과 똑같을 거라고 단언하지 말게. 세상은 너무 빨리 바뀌고 있으니까.”
“후...”
“으음...”
김숙자의 설명에 다들 긴 한숨을 내쉬고, 술만 꿀꺽꿀꺽 들이켰다.
“헌데... 영명하신 전하께서 이걸 예상 못할 리가 없을 텐데, 그럼에도 이걸 견지하는 이유가 있겠지?”
“따지고 보면 나도 말단이라서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당연히 이유가 있지 않겠나.”
김숙자의 말에 의문을 던졌던 최운룡조차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종이 똑똑한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으니, 자신들이 발견할 정도의 허점은 이미 알아차리고도 남았을 거다.
“가장 큰 이유는 전문성과 독립성이 강화되면서, 관리들이 정치관료가 아니라 행정관료로 변한다는 거겠지.”
“음...”
둘은 김숙자가 뭘 말하는지 곧장 알아차렸다.
관직자리가 얼마 없고, 그 조직조차 작다면 결국 그 안에서 말싸움하면서 아웅다웅하는 거다. 이미 태조시절부터 쭉 봐왔던 것 아닌가.
헌데 앞으로는 개별 부서 내에서 줄을 타고 나름의 자리다툼이 있을지 몰라도, 다른 부서가 끼어드는 건 힘들다.
이는 모든 부서에 영향력을 끼쳐 왕권을 위협하는 권신權臣의 탄생을, 아예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지.
“게다가 훗날 암군이 등장해도 비대해졌으면서 독립적인 다수의 부서가 생기면, 쉽게 망가뜨릴 수 없다고 본 거겠지.”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관료제의 무서움이 뭔가. 히드라마냥 머리를 자르고 잘라내도 계속 생겨난다는 거다.
왕이 윗선을 갈아 치워도 밑에서 올라올 이들이 수두룩하고, 그들의 능력이 딱히 부족한 것도 아니다.
몇 개 부서가 전횡에 휘둘려 망가진다고 해도, 전부다 부서지기에는 덩치가 너무 큰 거지.
즉. 왕의 삽질로 나라가 망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뜻이다.
게다가 조정이 세분화되어 복잡해짐에 따라 부정적으로는 연쇄반응으로 다 같이 망가질 수도 있지만, 긍정적으로는 몇 개가 망가져도 다른 부서의 도움으로 더 빨리 회복할 수 있다는 것.
“그렇군...”
“결국 문제가 생길 걸 알면서도, 체급을 키우는 게 결국은 전하께 이득이라고 보고 계신 거겠지.”
“음... 완전한 관료제를 이룩해서 궁극적으로는 양민에게 최고위관리까지 가는 길을 열어주어, 양반사대부와 지방호족을 전부 찍어 누르고 말이지.”
“그럴 걸세. 조정이 그렇게 커져서 지방 촌구석까지 영향력을 끼친다면, 더 이상 지주들의 지지와 도움은 필요가 없겠지.”
“허... 조선 건국에 일조한 사대부집안에게 어찌 이럴 수 있나.”
곽호선은 뻔히 보이는 미래를 굽어보며 한탄을 내뱉었고, 둘 모두 동감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악랄함에 치를 떨었다.
땅과 권위를 모두 빼앗고 돈만 던져주고 있는데, 조선은 자본유학을 받아들여 돈에 환장하게끔 만들고 있지 않나.
이젠 명성 높은 명문가가 아니라 그저 부잣집만 남는 세상이 찾아올 거다.
이렇게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 없이 돈만 보는 세상에선, 절대로 지주들. 아니 기업가들이 하나로 뭉쳐 조정과 각을 세우지도 못할 거고.
“거기에 요새 조정을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는 감찰부 문제도 있고, 내수별좌를 내수사로 바꾸면서 정리도 하고 있으니... 전하께서도 이래저래 고민이 많으실 텐데, 그래도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걸세.”
“후...”
“음.”
저 먼 한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자세히 알 순 없지만, 들리는 소문만 봐도 결코 여기서 멈춰 서지 않을 것 같다.
“쩝... 그나저나. 내일부터 함께 살아도 되나?”
이제 무거운 대화는 그만하려는 건지, 김숙자는 불쑥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
이게 뭔 소린가 싶어, 눈을 흘기며 바라보자.
“숙소가 없어서 게르에서 자야한단 말일세. 가죽 냄새도 이젠 질렸네. 그러니 신세 좀 지지.”
“쿨럭.”
능글맞은 김숙자의 말에, 곽호선은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며 술을 뱉어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고집만큼은 대나무가 친구하자고 할 정도로 꼬장꼬장했던 김숙자인데, 몇 년 사이에 어쩜 이렇게 능구렁이처럼 변했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서 눈이 밤송이마냥 커졌다.
“뭘 그렇게 놀라나?”
“그럼 안 놀라나?”
“자네도 저기 북방에서 지내보게.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몸 성하고 싶으면 알아서 자기 몸은 챙겨야 하는 법일세.”
“큭큭.”
“에혀...”
부끄럼도 없이 말을 내뱉는 김숙자를 보며, 비슷한 경험을 한 최운룡은 함박웃음을, 곽호선은 신음과 한숨을 내쉬었다.
*****
느긋하게 말을 타고서, 끝도 없이 펼쳐진 보리밭과 콩밭을 가로지른다.
논 옆으로 파고든 큼지막한 버드나무는 힘없이 허리를 굽히고 있었고, 죄다 비슷한 몸짓을 한 버드나무 군락은 흙도로를 따라 끝도 없이 이어졌다.
슬쩍 높은 언덕을 타고 올라가자, 저 밑으로 네모반듯하게 쫙쫙 쪼개진 논들과 그 논두렁과 이어지는 도로, 도로가에 빠짐없이 박혀 있는 버드나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너무 각을 잘 맞춰서 꼭 버드나무가 논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
“왜 그런가?”
“자넨 안 놀랍나? 난 볼 때마다 놀랍네.”
“거. 매일같이 보는데 뭘.”
타박하듯 말을 하지만, 사내 역시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내 고향이 이렇게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야.”
“흐흐. 그건 그렇지.”
둘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며, 허리춤에 끼고 있던 손때 묻은 활대를 매만졌다.
기나긴 인고의 세월이었다.
이곳 함흥은 함길도에서 나름 큰 고읍이라곤 허나, 딱히 특별할 게 전혀 없는 흔하디흔한 북방 촌구석이었다.
변화가 생긴 건 착호군이라는 기상천외한 군대가 등장하고 부터다.
‘그때 선택을 잘했지.’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히죽 웃고 말았다.
착호군은 맹수를 사냥하는 군대고, 당연히 사냥 및 추적을 할 줄 알아야 했다. 이걸 위해서 연오랑은 전국의 사냥꾼을 죄다 긁어모았고, 사내와 친우 또한 함께 딸려갔지.
그곳에서 신세계를 맛봤다.
연오랑이 만든 착호군은 평범한 백성들이 보기에도 괴상한 군대였고, 한편으론 모든 걸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백과사전과도 같은 존재였지.
나름 사냥을 잘한다고 자부하던 사내였지만... 그곳에서 수많은 사냥꾼들을 만나서 서로 논의하고 토의하며, 무려 “사냥법”에 관한 훈련서, 교육서를 만들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일평생 돌멩이 가득한 밭을 일구고, 시시때때로 산만 타면서 사냥을 해왔던 사내에겐, 착호군 시절은 인생의 전성기이자 생각이 많아지던 성장기와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착호군에 끌려온 모든 양민, 천민들이 죄다 같은 마음일 거다.
그렇게 착호군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곳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착호군에 가서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은 사람을 봤는데, 이곳엔 무려 오만에 가까운 사람이 한자리에 몰려 있었으니까.
출신도 다양해서, 인근 현에서 데려온 함길도민, 삼남에서 올라온 조선인, 호주에서 온 여진인과 몽골인, 만주신도시의 여진인, 저 먼 설주의 야인여진까지.
안 그래도 별 볼일 없던 촌구석이,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지.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보를 세우고, 저수지를 만들고, 농지를 개간해 땅을 일구기 시작.
앞으로 이백년 후에나 본격적으로 등장할 함흥평야를 지금 시대에 만들어낸 거다.
이 개간 작업은 무려 이년이나 걸렸고, 드디어 올해 처음 씨를 뿌려 모두의 환호 속에서 수확을 할 수 있었다.
“기억나나?”
“뭘 말인가?”
상념에 잠겨 있다가 뜬금없이 물어서 일까? 동료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이 땅에서 벼를 키워 쌀밥을 먹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네.”
“으음...”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인터라, 동료는 진심을 읽어 빈정거리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함길도의 주식은 기장,콩,수수였고, 보리조차도 귀한 곡식이었다. 쌀은 잔칫날에나 운 좋게 먹을 수 있는 곡식이고.
그런 쌀을 이 땅에서 키울 수 있다니, 그 감격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농사일이라곤 제대로 해본적도 없는 야인여진부터, 대대로 함흥에 살아온 토박이 농부까지.
모두가 황금빛 벌판을 두고 눈물을 줄줄 흘려댔었다.
“이리도 쉬운 걸 왜 못하고, 우린 왜 지금껏 곤궁하게 살았을까?”라고 묻고 싶겠지만, 간단히 말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해군과 수산기업이 건져 올린 생선이 없었다면, 평야를 개간하러 온 오만명은 전부 굶어죽거나 난동을 부렸을 테니까.
개간을 위한 기술도, 인력도, 식량도, 재원도, 모두 중국과 여진을 두들겨 패고서 차지한 거니, 예전 조선이라면 함흥평야의 개발은 꿈도 못 꿨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