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70화 (270/538)

270. 챕터38. 돌아보다 (8)

그렇게 평야 개간이 완료되자, 다른 현에서 왔던 현민은 되돌아가고, 새로 유입된 이주민들만 남았는데 그 수가 무려 삼만.

사람도 없고 별 볼일 없던 함흥이, 전국에서 손꼽힐만한 거대 현으로 변모하게 됐다.

“그만 구경하고 가지.”

“그럽세.”

둘은 밭을 가로지르며 계속 나아갔다.

지나가다보니 가로수로 심은 버드나무에 달라붙어, 잎과 줄기를 뜯어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놀림이 어색한 걸로 보아 딱 봐도 소소하게 잡일하러 나온 농부들 같아 보이는데, 개량관복을 입은 인물의 손짓에 따라서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다.

“...?”

“...?”

갑옷을 입진 않았지만 마구엔 사냥창을 세우고, 허리춤에는 화살통과 화살을 끼고 있어서일까? 서로는 서로를 어색한 눈으로 바라보며 행동이 굼떠졌다.

‘여진인이 맞나 보군.’

‘그러게 말이야.’

무장한 사람을 앞에 두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꼴이, 이렇게 평화로운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야인여진이 분명하다.

그치들이 보기엔 이렇게 무장하고 나타난 작자들은, 부족을 약탈하러 온 적대부족일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거. 왜 사람들 겁주고 그러쇼?”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냥을 하러 가는 길이라...”

“팔자도 좋네.”

딱 봐도 관리로 보이는 인물이 그렇게 빈정거리자, 둘은 얼른 자세를 고치고선 미소를 머금었다.

“약재를 만드는 모양입니다?”

“어...?”

둘이 아는 척을 하자, 관리는 살짝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함흥에 새로 이주한 여진인들은 “이걸 뭐 하러 따는 거야?”라면서 귀찮아했으니까.

“저희도 착호군에 있을 때 많이 땄죠.”

“용연군 대감께 머리통 까져가면서 말입니다. 하하.”

“오? 착호군에 있었어?”

“예.”

“하하. 나도 군의관으로 일했지.”

역시 낯선 사람과 친해질 땐, 공통점을 찾는 게 최선인가보다.

둘이 아는 척을 하자 관리는 금세 싱글벙글 웃으며 미소를 지었고, 쓸데없이 시시콜콜한 옛 이야기를 풀어놨다.

버드나무 잎과 줄기를 해열제 및 진통제로 써온 건 너무도 오래되지 않았나.

조선에서도 약으로 써먹고 있었는데, 연오랑을 필두로 의원과 약제사들은 여기에 식초를 섞어 조금 더 먹기 편한 환으로 제작했다.

여기저기서 쏠쏠하게 잘 팔리는 물건이기도 하고, 자잘한 자상과 부상을 달고 사는 군대에선 필수품이나 다름없는 물건이었지.

“고생하십시오.”

“가보겠습니다.”

“어. 조심히 가라고.”

“예.”

생전 처음 봤는데 할 말이 뭐 얼마나 있을까. 어느새 대화거리는 떨어졌고 둘은 가볍게 고삐를 당겼다.

일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계속해서 함흥현성으로 나아갔다.

사람이 밀려들었으니 당연히 현청이 있는 고읍도 새단장을 했고, 기존에 있으나마나했던 성벽은 깔끔이 밀어버려서 둘의 눈엔 현성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자박자박. 자갈도로에 들어서자 확실히 고읍에 들어선 느낌이 난다.

“여기까지 확장했네?”

“그러게 말일세. 계속 늘릴 모양인데?”

사내는 도로 옆 맨땅에 수북이 쌓여 있는 자갈산을 가리켰다.

이 거대한 평야를 뒤집어엎어서 개간했는데, 돌 수급에 문제가 있을 리가.

큰 돌은 보나 저수지를 만드는데 쓰고, 어중간한 크기는 집을 만드는데 썼고, 손가락만한 자갈은 긁어모아 파쇄해서 자갈도로를 만드는데 써먹었다.

고읍을 새로 만들 때부터 자갈도로를 깔기 시작했는데, 손이 빌 때마다 야금야금 늘려나가서 어느덧 고읍 밖까지 이어졌다.

“이대로 쭉 늘리면 포구까지 닿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

“계획은 그렇지 않겠나.”

둘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포구에서부터 이곳까지 이어지는 흙도로를 따라왔는데, 언젠가는 이 흙도로가 자갈도로로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다.

현성 어귀로 다가가자, 제대로 보이지도 않건만 북적북적함이 느껴졌다.

이 현성에 사는 사람만 오천명에 가깝고, 함흥은 남으로는 원산, 북으로는 광산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단천, 동으로는 흥남포구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다.

그렇다보니 여길 오가는 외지인들도 많아서, 관청을 중심으로 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현성 경계까지 삐져나온 시장거리의 귀퉁이에는 흡사 창고처럼 생긴 거대한 2층 건물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목적지.

둘은 냉큼 발을 놀려 현성입구로 다가갔다.

웅장한 석재 건물이 둘을 가로막고, 바람에 맞아 펄럭이는 깃발이 둘을 반겼다.

깃발에는 한문이 아닌 훈민정음으로 함흥관이라고 써 있는 게 아닌가.

힐끔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건물 벽에도 함흥관이라 써놓은 큼지막한 현판이 달려 있었다.

“성벽도 아니면서 관은 무슨.”

“그래도 생긴 건 성벽처럼 생기지 않았나.”

둘은 피식피식 웃어대며 이름만 거창한 함흥관 안으로 들어갔다.

낮은 돌담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자, 건물 처마 밑 그림자에 숨어 인생무상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바로 눈에 띄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밖을 구경하고 있는 사내가 있었는데, 어째 어울리지 않게 호피를 깔고 앉아있다.

“어...? 왔나?”

“예. 소대장님.”

“착호군 나온 지가 언젠데 소대장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대장이라는 말이 듣기가 싫지 않은지, 사내는 벌떡 일어나서 둘을 반겼다.

“막동아!”

“예. 사장님!”

사내가 외치기 무섭게, 건물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소년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말들은 마구간에 묶어놓고, 날붙이는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방으로 옮겨라.”

“옙.”

소년은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냉큼 몸을 날려 말을 몰았고, 마구에 실려 있던 무기를 꺼내 끙끙거리며 옮겼다.

“여진인이군요?”

“어. 부모가 없는 녀석이라 데려다 키우고 있네. 어차피 일손도 필요하니까.”

“예.”

사내는 히죽 웃으며 답하고는 둘은 그늘 밑으로 끌어들였다.

“그나저나 애지중지하던 물건은 왜 밖에 내놓고 깔고 계십니까?”

“흐흐. 이거? 내가 잡은 거 아니냐.”

사내는 하도 깔고 앉아서 번들번들해진 호피를 만지며 실실 웃어댔다.

“소대장님이 잡긴 뭘 잡았습니까. 저희가 잡은 거죠.”

“섭섭한 소리 하네. 내가 이놈 주둥이에 화살을 팍! 박아 넣었더니, 그제야 숨이 끊어지지 않았나. 그럼 내가 잡은 거지.”

“예예.”

한두번들은 이야기인가. 또 똑같은 말싸움이 시작되려 하자 둘은 대충 흘리며 흔들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허나 사내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나보다.

“이게 보통 귀물이 아니란 말이지. 내가 이걸 딱! 깔고 앉아 있으면 여진인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냐. 목욕탕 주인이 아니라 호랑이를 잡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그러니 끔뻑 죽어서 고분고분해졌지.”

“예.”

둘은 대충 짐작이 되어 피식 웃고 말았다.

착호군 출신이니 호피에 무덤덤한 거지, 평범한 백성들이나 저 멀리 북방에서 온 여진인들 입장에선 구경하기 힘든 귀물 아닌가.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던 호랑이가 저렇게 가죽만 남아 있는 걸 보고서, 자연스럽게 사내에게 꼼짝 못했을 거다.

“신선놀음을 하시는 걸 보면, 장사가 잘되나 봅니다? 들어보니 목욕탕을 새로 하나 더 열었다면서요?”

“어. 회상마을에서 하도 애걸복걸해서 말이야.”

“애걸복걸은 무슨... 그냥 돈 벌려고 하신 거겠죠.”

“꿩 먹고 알 먹고. 뭐 그런 거지. 뭘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그러나.”

사내는 손사래를 치며 핀잔을 줬다.

둘이 괜히 함흥관이라는 현판을 보고 웃었던 게 아니다. 사실 이 건물은 목욕탕이었으니까.

착호군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목욕탕과 한증막이 들어섰고, 나름 돈벌이를 궁리한 사내는 전역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대로 사업을 벌였다.

함흥평야가 개간되어 사람이 불어났으면, 당연히 목욕탕도 들어서야 하지 않겠나.

겨울이면 꽁꽁 어는 함길도에선, 조선문화에 완벽히 익숙하지 않은 여진인마저도 목욕탕과 한증막을 즐겼으니까.

그렇게 함흥현성을 중심으로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마을에 목욕탕을 하나씩 짓기 시작했는데, 그게 벌써 7개로 불어났다.

“마을의 목욕탕이 나름 돈이 벌리는 모양입니다?”

“나쁘지 않지. 사실 제대로 씻으려면 필요한 게 한둘이 아니잖나.”

“예. 뭐...”

둘은 착호군 이전 시절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탕 장사가 잘된 건, 사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사노비가 없는 일반 양민이라면, 집에서 욕조를 구비하는 것도 쉽지 않고, 목욕물을 덥히기 위해 땔감을 구하는 것도 일이고, 매일같이 내천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도 일이다.

이런 수고를 다 할 바에는, 그냥 돈을 조금 내고 목욕탕을 찾아가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던 거지.

특히나 하천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에는 더욱 그랬다.

“자네들도 온 김에 씻을 텐가?”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동안은 산에서 머물러야 하니, 씻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그래. 명성 자자한 함흥관을 그냥 지나치면 곤란하지.”

사내는 자화자찬을 숨기지 않았고, 둘은 사내의 말장난에 익숙한터라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깔끔하게 씻고 나오자, 소대장 사내는 둘을 데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손에는 묵직한 쌀주머니를 들고, 개선장군마냥 의기양양하게 시장거리를 향해 나아갔다.

“으... 귀찮고만. 이거.”

쌀주머니를 이리저리 흔들며 입을 열자, 둘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귀하디귀한 쌀을 두고, 저딴 배부른 소리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농담하는 거 아냐.”

“...?”

“이거 보관하는 데 얼마나 귀찮고 품이 드는지 아나? 목욕탕 주인인 내가 곡식창고를 짓게 생겼다니까?”

“정말 부자 되셨네요.”

“부자고 나발이고, 곡식창고도 대충 지을 수 없어서, 제대로 지으려고 했는데... 그거 짓다가 지금까지 번 돈을 다 날려먹게 생겼어.”

“음...”

그래도 둘은 역시나 배부른 소리를 한다 싶어서, 조용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솔직히 이거 나중에 문제될 걸? 나야 고작해야 목욕탕 몇 개 가진게 전부지만, 진짜 기업과 사업을 하는 집안은 어떻겠냐? 쌀하고 면포 보관하느라 죽을 맛일 걸.”

“음... 그런가요?”

“분명 그럴 거야. 게다가 그렇게 큰 거래를 하려면 서로 옮기는 양이 무지막지할 텐데... 그것도 다 어찌 보면 인력 낭비지.”

“조정에서 어련히 알아서 잘 하지 않겠습니까?”

“뭐. 그렇겠지?”

듣는 사람도 없는데 투정부려봐야 뭐하겠나. 조정에서 알아서 처리할거라 믿을 수밖에 없다.

이윽고 몇 발 떼지도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

낮임에도 사람들이 나름 북적거리는 객주였는데, 사람들 행색으로 보아 상인 짐꾼들이 분명해 보였다.

“양가야. 소대장님 오셨다.”

“오...?”

사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저편에서 고기를 다듬고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자네들도 왔나?”

“오랜만이군.”

다 같은 착호군 출신 아닌가.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반가워, 고기를 다듬던 사내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넷은 순식간에 탁자 하나를 차지했고, 소대장 사내는 쌀주머니를 툭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아. 이거 무거워서야 원. 들고 다니기가 여긴 귀찮은 게 아니네.”

“속편한 소리 하십니다. 언젠 쌀밥 한 번 먹어보면 소원이 없다고 하시던 분이.”

“흠흠. 그건 옛날이고.”

소대장 사내는 손을 내저으며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양반이긴 한데 몰락한 양반이었고, 그래서 한몫 잡아보겠다고 착호군에 들어가지 않았나.

세 사람 모두 함흥 출신이라서 서로의 과거는 얼추 다 알고 있는데, 요새 벼락부자가 됐다고 옛날 일은 까맣게 잊었나보다.

“거. 잡소리 말고. 뭐가 되냐?”

“마골탕하고 양고기가 됩니다.”

“우골탕이 맛있는데... 우골탕은 없냐?”

“다들 농사짓기 바쁜데, 잡아먹을 소가 있겠습니까?”

양가라 불린 사내가 슬쩍 눈을 흘기자, 소대장 사내는 냉큼 입을 다물었다.

함흥도 농사를 짓기 쉽지 않은 곳이라, 기업이 생겨날 때 꽤 많은 집안이 목장을 시작했다. 덕분에 말이나 양은 넘쳐나는데, 소는 오히려 귀했던 것.

그래도 이렇게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게 어딘가.

예전에는 고기가 헤엄친 국물만 먹어도 잘 먹었다는 말이 나왔는데, 지금은 이렇게 고기를 맘껏 사먹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하긴... 얼른 가져오게.”

“예.”

사내가 떠나자, 소대장 사내는 귓속말을 하듯 목소리를 줄였다.

“양가 저놈. 용연군 대감께 성을 하사받더니 너무 건방져졌어.”

“...”

뜬금없는 헛소리에 둘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흘겼다.

“상왕전하와 대감께 성을 하사받은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수만명이 넘을 겁니다.”

“그런가...?”

지금 역사에선 유학적 가부장제가 퍼지지 못했고, 고려의 문화가 꽤나 남아있었다.

태조, 태종대에도 계속 귀족집안과 양반집안이 몰락하고 반대로 노비는 무수히 속량되면서 신분제가 문란하지 않았나.

성 또한 그러해서, 성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있고, 씨족생활을 하면서도 성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도 모르고 안 쓰는 사람과 알면서도 안 쓰는 사람 등등.

이 또한 뒤죽박죽이었지.

이에 태종과 연오랑은 착호군을 끌고 다니면서,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성을 하사했다.

이는 행정적 편의성을 높이려는 의도와, 성을 하사함으로서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고, 성이 있다는 걸로 으스대는 양반,호족들을 깔아뭉개기 위함이었지.

이런 정책을 찔끔찔끔 펼치면 반대여론이 형성될 수도 있었겠지만, 수만수십만명에게 전부 성을 하사해버렸으니 이걸 어떻게 감당하겠나.

되돌릴 수도 없으니, 조정에서도 그냥 백성들 모두가 성을 갖게 하는 게 차라리 편했다.

이후 여진인과 귀화인 수십만명이 밀려오자,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치들을 조선인으로 만들려면 조선식 이름을 지어줘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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