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챕터39. 탄생하다 (1)
밖으로 나와 상쾌한 숲내음을 맡으며 걷고 있자, 장원 곳곳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와 인사와 보고를 함께 건넸다.
이곳은 특이하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그물을 걸어놓은 곳이 많았는데... 이게 전부 다 사육장.
아마 조선천지 어딜 가도 이런 광경을 보긴 힘들 거다.
“...”
‘만드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좋구나.’
스스로 생각해도 뿌듯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응방은 해체되었지만, 나라에선 매 사냥과 사육을 금지하진 않았다.
기업이 공인되고 나서 별 희한한 게 튀어나오고 있으니, “하고 싶으면 해라. 대신 전과 같은 특혜는 없다.”라는 분위기랄까.
문제라면 매사냥과 사육을 결코 쉽지 않아서, 다른 직업도 많이 생기고 있는데 뭐 하러 힘들게 매를 잡으러 다닐까.
매 사육에 진짜 흥미가 있거나, 이걸로 한몫 잡아보거나, 이 일 아니면 정말 할 줄 아는 게 없는 이들만 덩그러니 남게 됐지.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야.’
웃음꽃이 피어 있는 부하직원을 보며, 사내는 다시금 과거를 더듬었다.
그렇게 백수가 된 이들을 긁어모아, 이렇게 번듯한 기업을 만들었으니 자기가 생각해도 뿌듯하다.
“사장님.”
“...”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어느새 다가온 사내가 입을 놀렸다.
“밤새 문제는 없었습니다. 꿩들은 전부 그대로 있고, 알은 네 알이나 낳았습니다.”
“오. 그래? 좋아.”
꿩 사육장을 확인하고 온 사내가 중얼거리기 무섭게, 다른 사육장을 확인하고 온 사내들이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닭과 토끼도 문제없습니다. 사장님. 올빼미 놈들도 못 들어왔습니다.”
“으흠.”
올빼미도 나름 맹수 아닌가. 여긴 매사육장인데 웃기게도 올빼미 놈들이 날아와서 만찬을 즐기곤 했다.
“새로 산 그물은 어떤가?”
“꽤 좋습니다. 촘촘한 게 확실히 우리가 어설프게 만든 것보다 훨씬 낫더군요. 다음에도 포구에서 쓰는 그물을 사오는 게 낫겠습니다.”
“음...”
사내는 가볍게 머리를 굴려, 그물 값과 건물 짓는 품삯을 비교해봤다.
‘집안에서 키워도 어차피 낮에는 밖에 풀어놔야 할 테니까...’
꿩이든 닭이든 오리든, 이 시대엔 미래처럼 틀에 가둬놓고 키우는 게 오히려 돈이 더 들지 않나. 당연히 밤에는 창고우리에 가두고, 낮에는 밖에다 풀었다.
이걸 사육이라 할지, 방목이라 할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대부분의 농장에선 이런 식으로 길렀지.
다만 산속에 처박힌 이곳은 맹수들이 보기에 맛집이나 다름없었고, 맹수4종세트 대신 올빼미나 여우가 들어와서 잡아가곤 했다.
‘도망치지 못하게 막으려고 만든 건데, 어째 안에서 나가는 걸 막는 게 아니라 밖에서 오는 걸 막는 꼴이 되었단 말이지.’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래저래 생각해 볼 때, 어찌됐건 그물을 사는 게 더 나아 보인다.
계속 내려가자 또 저편에서, 자랑하듯 황급히 뛰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옆에 딸린 사냥개도 함께 신났는지, 컹컹! 짖으며 달려온다.
“형님! 이것 보시죠.”
똘망똘망한 눈을 숨기지 못한 소년은, 양손에 품고 있던 여우를 흔들어대며 목청을 높였다.
축 늘어져 있긴 한데, 주둥이와 네발이 묶여 있는 걸로 보아 아직 살아 있나보다.
“흐흐. 순찰하고 있는데 요망한 울음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제가 후다닥 달려가서 한방에 끝내줬죠.”
녀석은 몽둥이를 흔들어대며 자랑을 했다. 덫에 걸려 있던 여우를 용케도 사로잡았나 보다.
“어때요? 발이 다치긴 했는데, 제가 치료해볼게요.”
“네가?”
“그럼요. 저도 열심히 배웠다고요.”
아래 현에서 수의학을 배우더니, 자신감만 생겼나 보다.
‘나쁠 건 없겠지.’
“오냐. 잘 해봐라.”
“헤헤.”
소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자, 녀석은 헤실헤실 웃어대며 여우를 흔들어댔다.
사내도 관리였으니 양반 집안이긴 허나, 응방의 권세가 떨어진 게 언제던가. 애초에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한직이었기에, 별 볼일 없는 배경을 지닌 사내가 응방에 떨어진 거다.
결국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았고, 당연히 가족들도 끌어 모아 기업을 가업으로 키운 것.
공부 대신 노는 걸 좋아하는 막내 또한 함께 했는데, 어째 이 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참새처럼 조잘거리는 막내를 달고 사육장을 벗어나자, 산장 근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어허? 이것 보게?”
“하하! 저놈 침 뱉는 거 보게?”
“생긴 것도 요망한 게, 성질도 더럽고만?”
낯선 목소리가 잔뜩 섞여 있는 게, 아까 말한 사냥꾼들이 잔뜩 모여 있나 보다.
남의 집에 쉬러 왔으면 조용히 있을 것이지, '왜 저렇게 시끌벅적 하나?' 궁금해서 냉큼 발을 놀리자, 익숙한 얼굴과 낯선 동물이 함께 하고 있다.
“둘째 형님!”
의아한 사내보다 막내가 먼저 달음박질을 했다.
상행을 끝내고 돌아온 형을 맞이하는 것보다, 어째 자기가 잡은 여우를 자랑하려는 모양새다.
소년이 연신 입을 놀리자, 사냥꾼들도 함께 “와하하!” 웃어댔고, 소년은 사람들 틈에 껴서 머리만 삐죽 튀어나와 있던 동물을 보며 여우도 내던지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오랜만에 만난 형이건만, 낯선 동물에 눈길이 쏠려 관심도 없어졌나 보다.
“형님! 저 왔습니다.”
“저게 그거냐?”
사내 또한 마찬가지. 저 멀리 북방의 창주까지 갔다 온 동생보다, 저 낯선 동물에 먼저 시선이 쏠리고 말았다.
“흐흐. 암수 한 쌍을 샀습니다. 어떻습니까?”
“호...”
구경거리가 된 게 기분이 나쁜 건지, 낙타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며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게 낙타란 말이지?”
“예. 오면서 타고 왔는데, 말보단 못하지만 나름 타는 맛이 있습니다. 키가 커서 빨리 달릴 때 애를 먹긴 했는데, 뭐... 짐 실으려고 산거지 타려고 산건 아니라서.”
“흐음...”
낙타가 조선내지에 들어온 지 꽤 시일이 흘렀고, 마구 퍼지진 않았지만 소문은 알음알음 퍼지지 않았나.
항상 “낙타. 낙타!” 노래를 부르더니, 기어코 사가지고 왔다.
“보통 비싼 게 아닐 텐데...”
“생각보다 안 비싸던데요? 요새 몽골인들이 낙타장사에 맛이 들렸는지, 서쪽에서 온 상인들이 엄청나게 풀고 있다고 합니다. 아국이 낙타를 사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하긴...”
사내조차도 조선이 북방 설원까지 쳐들어가서 그 땅을 조선땅으로 만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는데, 저 먼 서쪽 과벽(고비)사막의 몽골인들이 동쪽에 낙타시장이 열릴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요새 신나서 동쪽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다.
“키우는 방법은 배웠느냐?”
“뭐... 별거 없던데요? 대읍에 사는 수의들 중에선 몽골출신도 있으니,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철없는 소리를 하고 있자,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가늘어졌으나...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낙타가 노새,나귀,말보다 산에서 짐 나를 때는 훨씬 낫다고 하니, 산장에 필요한 물건을 옮길 때 쓰면 얼추 수지타산은 맞을 것 같다.
사막과 설원에서도 멀쩡히 산다고 하니, 함길도 산이면 원래 살던 곳보단 나을 것 아닌가.
“네가 책임지고 사육하는 방법을 배워라.”
“걱정 마시죠. 그래서 암수로 사오지 않았습니까.”
동생의 자신만만한 말에 다시금 피식 웃고 말았다.
기업을 일구고 나서 동생도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하지 않았나. 알아서 잘 할 거라 믿었다.
해후 아닌 해후를 하고 있자, 낙타를 구경하고 있던 사냥꾼 중 한명이 앞으로 나왔다.
멀쑥한 얼굴에 머리에는 골무처럼 생긴 마상건을 두르고 있는 사내다.
‘착호군 출신이군.’
요샌 천민도 갓을 쓰고 다니는데, 저렇게 괴상한 모자를 쓰고 다니는 이들은 착호군 출신 밖에 없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 밑 함흥에서 함흥관이라는 목욕탕을 하고 있는 강창수라고 합니다.”
“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유현석이라 합니다.”
둘은 서로 공대하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함흥은 바로 지척에 있는데, 나름 유명한 함흥관을 모를까.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풍문은 익히 들었다.
“헌데...?”
“오랜만에 바람 쐬러 나왔습니다. 한동안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값은 치르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신분확인도 됐겠다, 주머니도 두둑해졌겠다, 유현석은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다만... 이런저런 사냥감이야 이미 해체를 했는지, 가죽,뼈,살코기로 분리되어 짐에 실려 있었지만, 저 꿈틀꿈틀 거리는 망태기는 참으로 해괴하다.
“저건...?”
“아. 오면서 여우를 좀 잡았습니다. 산채로 잡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원...”
너스레를 떨 듯 말을 했지만, 유현석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입이 벌어졌다. 덫에 걸린 여우가 아니고서야, 여우를 산채로 잡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두더지마냥 땅을 살피며 여우굴을 찾아서, 사방에 파놓은 여우굴을 전부 지키고 있다가 잡았을 테니, 그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굳이 산채로 잡을 필요가 있나?’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자기 일도 아닌데 뭐 하러 신경 쓸까. “아. 그러십니까.”하고 대충 흘리고서 산장으로 안내했다.
한동안 산속에 살아서 사냥꾼들도 죄다 거지꼴이나 다름없었기에, 욕탕과 한증막에서 씻고 나오자 하나같이 말끔하게 변해있었다.
산중에서의 식사야 뭐 얼마나 대단하겠냐만, 시장이 반찬이지 않나.
다들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꿩뼈를 우려낸 꿩국과 꿩죽을 먹으며 무용담 아닌 무용담을 뽐냈다.
한창 호기심 많은 막내는 사냥꾼들 사이에 껴서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있고, 산장 주인인 유현석과 그의 동생 유현명, 목욕탕 주인 강창수가 머리를 맞대고 모였다.
“들어보니, 매 사육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예.”
“요새 벌이가 어떠십니까?”
“...?”
뜬금없는 말에 유씨 형제가 슬그머니 눈을 흘기자, 강창수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오해하지 마시고...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입니다.”
“...?”
강창수가 그리 말문을 트자, 둘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함흥관은 나름 돈벌이가 되는 걸로 알고 있으니... 사기는 치지 않을 거라 믿고, 일단 들어보자는 심산이다.
“제가 듣기로 요샌 내지에서 매를 파는 게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음...”
더 말해 뭐할까. 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권세와 재물을 가진 이는 자신을 돋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기 마련. 남들과 차별된 뭔가를 가져서, 자랑하고 싶어 했다.
사냥매는 그런 허영심을 채워주는 꽤나 좋은 물건이었다.
문제는 개혁이 시작되고 부터다.
“잘은 모르지만, 전하께서 등극하시고 나서부터 난리법석이지 않습니까. 풍비박산난 대호족이나 거대가문이 한둘이 아니고, 다른 부잣집들도 조정의 눈치를 봤을 거고...”
꽤나 매섭게 꼬집는 강창수의 말에 둘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혁이 시작되면서 지주집안들은 기업을 키우며 자기 살길을 찾느라 바쁘지 않았나.
한가롭게 매사냥을 즐길만한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 돈으로 차라리 기업을 일구는데 보태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죠. 그래서 우리집안이 의주에 집중했던 거고.”
“예. 그랬을 겁니다.”
조선내지의 판로가 줄었으면, 당연히 외부로 눈을 돌릴 수밖에.
명은 망했어도 중국호족은 그대로 남아 있고, 중국부자들이 돈을 펑펑 써대는 건 조선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 아닌가.
그치들도 과시하려는 마음은 똑같아서, 조선매를 사들여 매사냥을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다만 과거 응방소속 관원이 한둘이 아니고, 유현석처럼 매사육기업을 키운 집안도 한둘이 아니다.
특히나 황해도 해주와 백령도의 매는 과거부터 유명해서, 그곳에는 매사육기업이 꽤나 생기지 않았나.
함길도 사냥매는 이름값에 밀릴 수밖에 없었고, 둘째인 유현명은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자 저 먼 창주까지 가서 몽골과 거래하고 온 거지.
“꽤나 잘 풀렸지요.”
동생 유현명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자, 강창수는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가 얼른 표정관리를 했다.
북방에서의 거래가 잘 풀리면, 이들을 이용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서다.
“몽골상인들이 값을 꽤 잘 쳐준 모양입니다?”
“예. 몽골은 아직 귀족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섬서의 물산이 북방으로 들어가는 터라 살림살이가 꽤나 풀린 모양입니다.”
‘한방 먹었지?’라는 표정으로 유현명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북원잔당은 아직 귀족이 남아 있고, 매사냥을 귀족의 전유물이자 자신들의 전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명나라가 등장한 후로 끊겼던 거래가 다시 부활한 거니, 옛 고려 때의 공물을 생각하며 달라붙는 건 당연지사.
그래서 꽤나 비싼 값에 팔아넘겼고, 다음 거래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다.
“하지만 다른 기업도 북방으로 진출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자고로 여우굴처럼 돈 벌 구석은 여러개 만들어야 하니, 내지에 파는 방법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외다. 단순히 돈 문제만이 아니라서...”
이런 고민을 사장인 유현석이 안 해봤을까.
매를 사가는 대부분은 매로 사냥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 허영과 자랑을 위해서다.
당연히 사냥감을 풀어놓고 “자 사냥감을 잡아라!”라고 매를 날려 보내고 그걸 구경하면서 자화자찬하고, 또 다른 뭇사람들에게 “봤냐? 어때? 멋지지?”라고 자랑을 하는 게 주목적이다.
헌데 양전사업이 진행되면서, 이젠 들판에서 매사냥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착호군 때문에 사냥감 자체가 줄지 않았습니까.”
사냥꾼조차도 일거리를 잃어서 북방으로 올라오는데, 취미삼아 하는 매사냥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그래서 유현석은 머리를 굴려 아예 꿩,닭,토끼를 함께 길러서, 매와 함께 사냥감을 세트로 파는 방법을 궁리해 낸 거지.
“바로 그겁니다!”
유현명의 말에 강창수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