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챕터39. 탄생하다 (2)
“자고로 매사냥의 백미는 여우를 잡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아예 여우를 키워서 함께 파는 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마 다른 매사육기업에서도 이런 건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흐음...”
“여우를 키운다고요?”
둘은 생전 처음 들어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말았다.
저 먼 몽골에서야 매로 늑대도 사냥한다고 하지만 조선이나 중국에서 누가 그러겠나.
매가 다치지 않고 사냥할 수 있는 가장 큰 짐승은 여우고, 당연히 여우를 잡는 게 가장 재밌고 짜릿하기 마련.
다만 착호군 때문에 여우를 구경하기도 힘들어졌으니, 아예 여우를 키워서 함께 팔자는 거지.
“설령 매와 함께 못 팔더라도, 여우가죽은 값이 꽤 나가지 않습니까. 그냥 여우만 팔아도 손해볼 건 없지요.”
“아... 그래서 저렇게 사로잡아온 겁니까?”
“예.”
유현석이 아까 봤던 걸 떠올리자, 강창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러 여우를 산채로 잡았나 했더니 이런 속셈이 있었다.
“유 사장님이 이런저런 짐승을 사육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꿩이나 토끼를 키우는 것도 가장 먼저 습득하셨다지요? 여우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창수의 본래 속셈이 드디어 나왔다.
유씨 집안은 짐승 사육에 일가견이 있었다. 새끼매를 잡아 키우는 걸 넘어, 아예 교배를 시켜 알을 낳게 해서 순식간에 매를 왕창 불리지 않았나.
여기에 꿩도 그렇고 토끼도 그렇고, 이치들이 생각해낸 사육방법을 통해 득을 본 함흥의 농장주들이 한둘이 아니다.
“흐음...”
“게다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냥 도망치지 못하게 울타리에 가둬놓고 키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우도 풀어놓고 키우고 도망치지만 못하게 막으면 될 것 같은데...”
“음...”
“게다가 만약 여우를 키우게 되면, 훨씬 값비싼 담비도 사육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담비라...”
초피라고도 불리는 담비 가죽은 호피나 표범피를 제외하고 가장 비싸게 팔리는 가죽 아닌가.
만약 여우사육을 통해 담비도 키울 수 있다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거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유씨 형제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윤현석은 다른 문제를 꺼냈다.
“뭐. 다 잘되면 좋겠다만... 그렇다고 해도 중요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 군요.”
“...?”
“여우를 풀어서 대체 어디서 사냥을 한단 말입니까? 지금 조선땅에 공터라 불릴 만한 곳은 거의 없고, 있어봐야 산기슭이나 산중턱인데... 그런 곳마저도 다 주인이 있지 않습니까. 남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자신을 뽐내며 사냥할만한 장소는 찾기 힘들 겁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만... 해결책을 찾지 못했습니다.”
“...?”
그럼 지금껏 이딴 소리를 왜 했단 말인가.
슬쩍 눈을 흘기자, 강창수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몰라도 다른 분은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
“조선에서 가장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권세가 높은 분이 있지 않습니까?”
“...!”
둘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을 찾아냈다.
용연군 연오랑은 조선에 온갖 폭풍을 일으킨 요주의 인물 아닌가.
“흐흐. 제가 착호군 시절에 용연군 대감과 안면을 쌓았으니, 서신을 보낼 생각입니다. 분명 해답을 찾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뭐. 설령 잘 안되더라도 여우를 키워서 가죽만 팔아도 남는 장사고...”
“흐음...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그러시지요.”
가산을 불릴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한 건지, 유씨 형제는 강창수와 밤이 깊도록 대화를 이어갔다.
*****
“자자. 천천히 천천히.”
“옳지. 그렇게 계속 천천히 돌게.”
“예. 무사부님.”
돌처럼 단단한 체형을 가진 청년은 손발이 따로 놀며 말 위에서 허둥지둥 거리는 농부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가 다시 히죽 웃었다가를 반복했다.
‘이것도 업무라면 업무인데...’
농부가 승마를 배워서 뭐할까 싶다지만, 요새 말 타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목마장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집에서 말을 키우는 집도 하나둘씩 늘어갔고, 조부모,부모,형제들이 한곳에 모여 사는 집안에선 더욱더 그러했다.
관상용으로 사놓은 건 아니니, 다들 “나도 탈 줄 알아야 되는데...?”라는 생각을 갖기 마련.
그런 꿍꿍이를 품은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어설프게 모여 승마를 익힐 바에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사람한테 배우는 게 좋지 않나.
양전사업이 끝난 이곳 예산현에는 승마선생이라고 손꼽을 만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항교에서 할 일이 없어 놀고먹던 무사부. 문 교생이었다.
“에혀. 내 팔자야.”
무사부는 고작해야 말 서른필 밖에 키우지 않는 작은 목장을 빙빙 돌고 있는 농부들을 뒤로하고,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집중했다.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게, 또 한바탕 몰고 오는 모양이다.
잠시 소란스러움을 지켜보고 있자, 오늘도 어김없이 감탄소리가 터져 나온다.
“말이다!”
“오... 크다!”
“저거 봐라! 똥 싼다!”
허리춤에도 오지 않는 꼬꼬마들은 차마 무서워서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울타리 밖에서 머리를 내밀고 달라붙어 목청을 높여댔다.
“보모 왔는가.”
“목자는 잘 있었나?”
근처 목장으로 출장 아닌 출장을 나온 무사부는, 뒤에서 들리는 약 올리는 말에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흘러 넘겼다.
어디 하루 이틀인가.
이치도 할 일이 없어서 농땡이를 피우며 놀러온 모양이다.
“향교는 어찌하고?”
“훔쳐갈 것도 없는데 뭘 어찌하고나.”
“글공부는 어쩌고?”
“산과 들이 모두 스승인데, 책만 판다고 뭘 알겠나.”
“쯧쯧.”
헛소리를 늘어놓는 동료를 보며 무사부는 가볍게 혀를 찼고, 문사부라 불리는 채 교생 또한 피식 웃고 말았다.
“교육당에서 교생으로 와서 몸 편하고 좋을 줄 알았는데... 이거 좀이 쑤시는 군.”
“나는 오죽하겠나? 작년까지만 해도 난 북방 설원에서 호랑이를 잡으러 다녔다고.”
“호랑이는 무슨. 자네 호피갑옷도 없잖나?”
“그야 호랑이가 내가 무서워서 피해 다니니까 그랬던 거고.”
실없는 소리를 하자, 채 교생은 피식 웃으며 목장에 둘러친 울타리에 기대고 섰다.
“그나저나... 정말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음...”
무사부는 지들끼리 노는 애들을 한번, 알아서 빙빙 도는 농부들을 한번. 휙휙 고개를 돌려 보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허송세월을 보낸 게 벌써 반년이 훌쩍 넘어간다.
일이 없어도 녹봉은 나오니 나쁠 건 없다지만... 일이 너무 없어서 괜히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이 들 정도다.
귀화교육당과 직업교육당이 예조, 이조의 관원들과 합쳐져 교육부가 만들어졌고, 교육부에는 자연스레 향교가 들어왔다.
지방행정조직이 중앙에 흡수되었으니 향교의 재원 또한 이젠 중앙에서 처리하게 됐고, 교육부 인원들이 이제 교생이 되어 전국의 각 현에 부임했지.
특이한 거라면 그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무사부가 정식으로 창설되어, 기존 착호군 출신 중에서 글줄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이 대거 임용됐다는 점.
전역한 착호군은 양반사대부 출신이 넘쳐나니, 문제될 건 전혀 없었다.
다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던 게, 선생은 있으나 학생이 없다.
“내가 향교에 다닐 때만해도 꽤나 사람이 있었는데 말일세.”
“그야 옛날 일이고, 요새 향교에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게다가 자네가 이것저것 잡다하게 안다지만, 기업의 사원과 비할 바는 못 될 테고.”
“뭔 소리인가. 나는 알만큼 아네. 가르칠 사람이 없다니까.”
둘은 또 다시 실룩실룩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향교는 나이와 출신을 가리지 않았고, 강제 또한 없었다. 와서 배우면 배우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그래서 과거 향교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애어른 할 것 없이 다 섞여서 수학했고 그것마저도 자율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기존 향교에서 수학하던 이들 중에서 태반이 이미 관리가 되거나 가업을 이으러 떠났고, 남은 건 소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아이들만 남게 됐다.
무사부가 문사부보고 괜히 보모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지.
“차라리 예전처럼 문묘배향이라도 하면 모를까. 요샌 그것도 안하잖나.”
“음...”
운석핵꿀밤 이후로, 공자 등의 성인을 향교에서 모시는 일이 없어졌지 않나. 이젠 죄다 중앙조정에서 알아서 하는 일이니, 향교는 진짜 학술적인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만 남게 됐다.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안보여. 나이가 조금 찬 녀석들은 각자 집안의 직업을 물려받으려 하고, 요새 팔자가 폈다지만 농부들 자식들이 향교에 오기나 하겠나?”
“쟤들은 뭔가.”
“쟤들은 그냥 현성 근처에 사니까 놀러오는 거고.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끄응...”
딱히 할 말이 없어 앓는 소리만 냈다.
무사부는 말 그대로 무술을 가르치라고 내려 보낸 교생인데, 저런 꼬꼬마들에게 무슨 무술을 가르치나.
애들은 그냥 저렇게 놀라고 놔두는 게 좋은 거다.
“북방에 있을 때보다, 어째 내지가 사정이 더 요상하게 됐단 말이지.”
“음...”
둘 모두 착호군을 거쳤기에, 북방에서 여진인을 어떻게 교육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시절엔 여진인을 강제로 모아놓고 애어른 할 것 없이 집체교육을 시키지 않았나.
특히나 애들을 죄다 모아놓고 가르치는 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조선말과 글을 배운 자식들이 집에 가서, 일 마치고 돌아온 여진부모를 알게 모르게 가르쳤으니까.
“뭔가 거꾸로 된 것 같단 말이지.”
“그건 그래.”
하지만 조선내지는 어떤가.
이 시대엔 아동노동이 당연한 거라서, 부모가 논밭에 나가면 애들도 함께 나가 손을 돕고, 그것도 힘들면 갓난아기 동생을 조금 큰 꼬꼬마가 업어 키우는 게 당연한 시대다.
향교에 나와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이들이 없고, 지금 저기 모인 꼬꼬마들은 농부가 아니라 현성 근처에서 나름 먹고살 만한 집안의 자식들인 거지.
이래서야 어째 조선인보다 여진인이 더 교육을 잘 받는 상황이 되지 않았나.
이건 말단 중에 말단인 둘이 봐도, 뭔가 이상한 상황이었다.
“헌데... 아산은 사정이 많이 다르더군.”
“...?”
무슨 말인가 싶어 바라보자, 문사부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내 동기가 바로 옆 아산에 있지 않나. 거긴 수산기업이 많이 있어서, 오히려 향교가 미어터진다고 하더군.”
“아...”
무사부는 무슨 말을 하는지 곧장 알아차렸다.
조그마한 땅이라도 있으면 사원 식구들이 거기서 농사라도 짓겠지만, 오롯이 봉급 받아 생활하는 사원의 자식들이 뭘 하겠나.
기업에 데려가서 부모와 함께 일을 하자니, 기업 입장에선 이걸 사원으로 쳐줘야 하는 건지 말아야하는 건지도 애매하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애들을 굳이 기업에 둘 필요도 없지 않나.
결국 부모들은 죄다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애들은 할 게 없으니 향교로 몰려든 거지.
“거긴 미어터지고, 여긴 널널하다는 거군.”
“그렇지. 게다가 생각해보게. 현이 아무리 작다지만 걸어 다니면 몇 시간은 걸리네, 현성까지 와서 공부를 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하긴.”
현에서 딱 하나 있는 게 향교고, 당연히 멀리 있는 마을에서 향교까지 오가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뚝딱 날아갈 거다.
“몇몇은 오고 싶어도 못 오고 있을 걸세.”
“이래서 역차별이라는 거군?”
“맞아. 우리가 북방에 있을 때는 농부든 광부든 군인 자식이든 가리지 않고 죄다 가르치지 않았나. 그런데 여긴 아니란 말이지.”
“음... 문제가 생기겠군.”
“그럴 걸세. 북방과 내지를 오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북방 사정을 내지 백성들이 들으면 어찌 생각하겠나. 왜 자신들은 그렇게 안 해주냐고 불만을 품게 되겠지.”
“...”
‘하긴 농부들 중에서,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일리가 있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과거에는 이 벽을 뚫는 길이 오롯이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 밖에 없었기에, 양반 양민 할 것 없이 모두가 공부에 매달렸다.
요새 기업이 생기고, 자기 땅을 불하받아 먹고 살기가 편해진 백성이 많아진 건 분명한 사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분상승의 욕구와 가세를 피고 싶은 욕구는 모두가 가지고 있을 거다.
결국 모든 백성들이 향교에 자식을 보내고 싶어 하지만, 여유가 없어 보내지 못하는 것일 뿐.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북방에서 여진 아이들을 집체교육을 시킨 건, 면세의 혜택도 있고 한 고읍에 전부 몰려 살아서 가능한 건데... 여기서 그게 되겠나?”
“오기 힘들면 우리가 찾아가는 방법도 있겠지. 자네도 한성에서 역마차를 타 봤잖아. 그거 만드는 게 뭐 어렵겠나.”
“흐응?”
뜻밖의 해답에 무사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채 교생은 지금 향교에서 역마차를 만들어서, 현 귀퉁이에 있는 마을에 사는 백성자식들을 태우고 오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음... 그건 확실히 가능성이 있군. 다만 백성 자식들을 전부 교육시키려면 재원이 엄청나게 들 텐데...?”
“글쎄... 찾아보면 뭐 있지 않겠나?”
“...?”
“우리야 뭐 말단이라서 아는 게 없지만,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트인 분이 계시지 않나?”
“...?”
뭔소리인가 하고 바라보자, 문사부는 악동처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용연군 대감께 서신을 보낼 걸세. 아마 분명 또 조정대신들의 뒤통수를 때릴 만한 계책을 내지 않겠나.”
“끄응...”
용연군 때문에 뒤통수를 맞은 게 한두번이 아니지 않나.
그 인간이라면 충분히 상상도 못할 방법을 찾아낼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