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74화 (274/538)

274. 챕터39. 탄생하다 (3)

시간은 손살 같이 지나가 어느덧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북쪽에선 쌀쌀한 찬바람이 슬슬 밀려오고, 저 먼 북방에선 벌써부터 강이 얼어붙었다는 소식이 하나둘씩 들려왔다.

겨울은 침묵과 고요의 계절이니, 미리미리 대비를 해야 하는 법.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을 집집마다 구비하고, 땔감대신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조운선에서 석탄운반선으로 바뀐 함선이 부지런히 수로를 누볐다.

반대로 수산기업은 더욱더 바빠져서, 조선의 모든 해안가는 어선을 재정비하고, 그물을 새로 짜는 등 하나같이 분주해졌다.

산천초목이 모두 잎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기고 사라지는 겨울에는, 제대로 된 먹거리를 구하기 어려워 더욱더 수산기업에 의지해야 되지 않나.

본격적인 어업이 시작된 것도 벌써 몇 년 지나서, 이젠 각 계절마다 찾아오는 생선을 얼추 구분했고, 각 수산기업마다 비법 아닌 비법으로 자기들만의 어장을 확보했다.

겨울바다에서 조업을 하는 건, 손이 얼어붙을 정도로 혹독한 작업이지만... 뭐 어쩌겠나. 한몫 단단히 잡으려면, 열심히 나가서 그물을 당겨야지.

목마장에서 쉬고 있던 말들도 바빠지기 시작.

수로가 끊기면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바. 예전이라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어떻게든 버텨냈겠지만...

사람이라는 게, 한번 편리함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불편함으로 되돌아가기는 쉽지 않은 법.

한번 시작된 물류와 유통의 흐름은 막을 수 없어서, 목마장의 말들이 마차와 수레를 끌고 한바탕 눈밭을 질주할 시간이 찾아왔다.

연오랑의 저택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그나마 석탄광산이 근처에 있어서일까? 누군가 눈치 빠르게 설립한 운송기업의 석탄마차가 집집을 누비고 다녔고, 연오랑의 저택 앞에도 똥을 싸듯 푸짐하게 석탄을 쏟아내고 사라졌다.

“음...”

연오랑은 툇마루에 앉아 석탄을 옮기는 이들을 느긋하게 바라봤다.

공주가 출산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어딜 돌아다닐까.

집에서 공주 배만 주물럭거리면서 놀다가, 개선식에 가서 얼굴만 비추고선 곧장 다시 돌아왔지.

“뭘 보고 있어요?”

“응?”

그가 풀린 눈을 바로잡고 옆을 바라보자, 부푼 배를 감싼 공주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볼 때 마다 신기하네.’

그는 대답대신 그저 헤벌레 한번 웃어주고선, 옆에 앉으라고 콩콩 툇마루를 때렸다.

그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핏줄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천만 다행으로 공주는 임신을 했어도 꽤나 몸 상태가 좋았다.

공주는 이 시대의 평균과 비교해도, 키가 꽤 크고 덩치도 있지 않나.

여기에 어릴 때부터 혼자 논답시고 줄넘기 등의 맨몸운동과 부인운동법으로 알려진 요가를 꾸준히 해온 탓에, 임신을 했어도 골골거리는커녕 밥을 더 많이 먹어서 힘이 남아도는 것 같았다.

‘잘 된 거지. 뭐.’

몸이 튼튼할수록 미숙아나 조산을 할 가능성이 줄어드니,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연오랑이 언제나처럼 배를 주무르며 태동을 느끼려 하자, 공주는 눈을 실룩거리며 다시금 되물었다.

“뭐 보고 있냐고요.”

“아. 석탄 나르는 거 구경하고 있지.”

“흐응.”

심드렁한 대답에 공주도 그저 연오랑의 어깨에 기대고선, 물끄러미 구경을 함께 했다.

‘연탄이 더 나을까?’

연오랑은 애들 주먹만한 석탄을 보며 속으로 딴생각을 해봤다.

미래의 연탄과 완전히 똑같을 순 없지만, 연탄이야 그저 석탄을 가루로 만든 후에 톱밥을 조금 넣어서 틀에 찍어내면 끝 아닌가.

‘하도 옛날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북한에선 석탄가루를 배급받아서 집집마다 수제연탄을 만들어 썼다고 들은 거 같은데...’

다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를 그도 그렇고, 조선 백성들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석탄을 가루로 만드는 것 자체가 손이 많이 가니까.

“석탄 사용법은 잘 알고 있지?”

“그럼요. 써온 게 벌써 몇 년인데...”

연오랑이 없는 동안에도 집안을 지키던 게 공주 아닌가.

그녀는 연오랑을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동안, 함께 따라다니면서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그래도 북방에서 들려온 소문은 익히 들었잖아? 항상 조심해야 돼.”

“네.”

공주는 또 잔소리를 하나 싶어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북방에서 들려온 소식은 다른 게 아니라, 온돌에 석탄을 넣고 마구 사용하다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누가 죽었다는 소식들이다.

북방식 가옥이 성행하면서, 요양용, 손님접대용으로 사용하던 온돌은 일상이 되어 마구 퍼져나갔다.

겨울에 추운 거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삼남지방이야 그나마 따뜻하다지만, 한성만 해도 겨울에는 한강이 얼어붙을 정도로 춥다.

허나 이 시대엔,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새로 지은 가옥은 구들장을 깐 후에, 그 위에 석회를 깔고, 장판 대신 도톰한 한지를 발라 마감을 한다지만... 그야 편하라고 하는 거고, 이걸로 연탄가스를 막을 수 있나.

그저 경고를 열심히 하고, 미리 대비하는 수밖에.

사람이 없을 때 석탄으로 방을 바싹 덥히고, 잘 때는 잔열을 유지하기 위해 나무를 태우라 누누이 알리고.

설령 찬바람이 들어오더라도 문을 살짝 열어놓고 자거나, 아예 신식가옥은 벽의 위아래에 작은 여닫이창을 만들어 환기를 시키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말을 해봐야, 꼭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는 게 사람 아닌가.

시키는 대로 안했다가 누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다시 나태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경각심을 가지는 거지.

조정에선 이 문제를 가지고, “석탄은 위험하니 금지하자!”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말이야 쉽지 그게 되겠나.

석탄과 엮인 기업이 한둘이 아니고, 온돌집이 너무 늘어나서 나무 땔감만으로 감당했다가는 죄다 민둥산이 될 판이다.

거기에 온돌이 아니어도 화로나 벽난로, 마구 늘어나고 있는 객주의 부엌에서 석탄을 쓰는 경우가 흔한데, 이걸 막았다간 난리가 날 거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겠지.’

지금이야 이렇게 난리법석이지만 훗날 일상이 되면, 습관이나 규범처럼 알아서 자리 잡지 않을까.

“큼큼. 아무튼 조심하라고.”

“네.”

연오랑은 끝내 한소리 했고, 공주는 피식 웃고 말았다.

계속 지켜보고 있자, 석탄을 옮기는 일꾼들에게 뭐라뭐라 말을 쏟아내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지휘관이라도 되는 것 마냥 이리저리 손짓하며 일꾼을 부리는데,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다.

‘하긴 궁에서도 저랬을 테니까. 나름 상궁 아니야.’

연오랑은 여인의 내력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유 집사는 혼인 안 한데?”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긴 한데... 눈에 차는 사람이 없나 본데요?”

“그렇다고 계속 혼자 살순 없잖아? 대충 눈 딱 감고 하라고 해.”

“...”

공주는 슬쩍 눈을 흘기며 연오랑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공주의 유모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대충 할 수 있나.

공주의 입김으로 여기저기 찔러보고 있긴 한데... 공주를 엎어 키워서 그런지 몰라도 그녀도 보통 여인은 아닌 터라 남편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궁에서 따라온 궁녀 중에서 남은 사람은 유 집사뿐이잖아? 더 늦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그건 그런데...”

공주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 터라, 괜히 시름만 깊어졌다. 공주를 따라온 궁녀들은 대부분 공주 또래고, 다들 알아서 결혼해서 떠났으니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자기를 놓고 입방아를 찧는 걸 알아차렸는지 유집사가 잽싸게 다가왔다.

“어르신.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지요.”

“어.”

“...?”

“혼인 언제 할 거야?”

“...”

공주의 유모라고 하지만 기껏해야 삼십대 초반 아닌가. 아직 한창 때인데 일만 하긴 아깝지.

다만 연오랑은 차마 속마음을 내뱉지 못했고, 유 집사 또한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설마... 다른 집엔 있지도 않은 여 집사라고 해서, 남편감들이 죄다 지레 겁먹고 매파가 안 오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유 집사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흘리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뜩 들어서다.

집사라는 말은 이 시대엔 애초에 있지도 않으니, 당연히 연오랑이 만든 단어이자 직책.

이 시대도 주인을 대신해 노비를 관리하고 자잘한 집안일을 대신하는 청지기나 가령家令, 겸인傔人 같은 직책은 있었다.

다만 아예 양반 혈족이거나, 노비 중에서 골라 세운 인물이었다는 게 한계지.

허나 유 집사는 양민임에도 연오랑의 집에서 숙식하며 일하지 않나. 그래서 집사라는 괴상한 직책을 만들어냈고 처음에는 어색했어도... 이젠 뭐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설마 다른 집에서 뭐라고 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흐음.”

연오랑이 눈을 실룩거리자, 유 집사는 아니라고 연신 몸으로 표현했다.

가부장적인 권위질서가 막혀버린 지금 시대에는 남녀칠세부동석 같은 말은 아예 있지도 않았고, 남존여비 사상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성이 공식적인 사회활동을 하는 건 분명한 제약이 있었고, 반대로 집안일에 있어서는 안방마님의 입김이 강력했지.

하지만 안방마님이 노비를 부리는 것하고, 청지기 쯤 되는 여집사가 사용인을 부리는 건... 뭔가 느낌이 조금 다르지 않나.

“고공雇工들이 말을 안 듣는 경우도 있나?”

“절대 아닙니다.”

“그럼 빨리 남편감부터 알아봐.”

“예...”

불똥이 어째서 그쪽으로 다시 튀는지 모르겠다만, 연오랑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유집사는 냉큼 몸을 날렸다.

가시방석에 앉았던 것 마냥 불편했는지, 공주에게 눈인사하기 무섭게 사라진다.

“남들이 유 집사 뒷담화하는거 본 적 있어?”

“글쎄요...”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턱을 긁었다.

사실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공주 앞에서 못마땅한 소리를 하겠나. 당연히 들어본 적이 없다.

“흐음... 사실 문제 될 것도 없잖아? 다들 말을 안 하고 쉬쉬해서 그렇지, 요새 기업 중에서 부인이 끌어가는 집안이 많을 텐데?”

“그거하고 조금 다른 거 같은데...”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을 흐렸다.

많은 양반사대부, 지방호족 집안이 기업으로 탈바꿈했고, 이제 공부뿐만 아니라 돈놀이도 익혀야 되는 시대로 변모했다.

허나 지금까진 공부를 한 남편이 바깥일을, 부인이 집안의 재산을 관리하고 집안일을 도맡아하던 집안이 한둘이 아니지 않나.

기업을 일구는 건 어쩌면 가세를 불리는 것과 닿아 있어서, 가장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부인이 뒤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실 말이야 기업이라고 하는 거지, 따지고 보면 집안사업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여 집사가 있든 말든 뭔 상관이야. 일만 잘하면 그만이지. 안 그래?”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연오랑이야 그저 상궁 출신이니 일을 잘해서 집사로 임명한 거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뭔가 심모원려가 있겠거니 착각할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그런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니면 설마 고공 때문에 그러는 건가?”

“아마... 유 집사보단 오히려 그치들을 대하는 게 더 어색할 걸요.”

“흐음.”

냉큼 이어지는 공주의 대답에 연오랑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딱 봐도 음흉해 보이는 게, 분명 또 뭔가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고공은 중국에서 들어온 말로, 주인집에서 숙식하며 돈 받고 일하는 일꾼. 즉 머슴이다. 신분은 당연히 양민이었고.

문제는 딱 이 시대엔 조선에 머슴이 없다는 거다.

집에 사노비가 널려 있는데, 뭐 하러 돈 주고 양민을 고용하나.

원래 역사에서도 조선후기에나 들어서야, 농촌에 잉여인력이 늘어나면서부터 머슴이 본격적으로 늘어나게 되지.

이래서 연오랑 집안과 엮이는 이들만 골치 아파졌다.

노비가 아닌데 하는 일은 노비가 하는 일을 하니, 이들을 양민으로 대우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애매했던 것.

게다가 연오랑은 세종과 태종의 총애를 받는 부마요. 알게 모르게 조선을 끌고 가는 요주의 인물 아닌가.

그런 작자가 이런 수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상대하는 집안 입장에선 더욱더 골치가 아파지는 거지.

실제로도 연오랑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든, 아니면 “연오랑이 분명 요상한 짓거리를 벌일 테니 미리미리 대비하자.”라는 심정으로 연오랑이 하는 짓을 따라하려는 집안이 생겨나고 있었고.

“하지만 돈을 주면 일을 더 잘하잖아?”

“그건... 그렇죠?”

연오랑 집에서 일하는 이들은 대부분 공주가 데려온 노비들이니, 공주가 보기에도 전보다는 살짝 나아보이는 것도 분명한 사실.

“따지고 보면 기업 사원이랑 다를 게 뭐가 있어?”

“...”

논리적으로 봤을 때는 틀린 말이 아닌지라 할 말이 없지만, 공주는 자기가 생각해도 애매해서 대답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기업에서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거나, 집안에서 돈을 받고 집안일을 하는 거나. 이치적으론 다를 게 없잖나.

하지만 달리 말하면 사노비 대신 고공을 쓰라는 말이니... 양반사대부나 호족집안에선 생돈이 나가는 걸로 느껴질 수밖에.

그리고 공주가 느끼는 게 맞았다.

연오랑은 사노비를 해방시킬 방법으로 이걸 미리미리 퍼트리는 거니까.

‘노비... 쓰벌. 없앨 수도 없고,’

아무도 모르게 속내를 꾹꾹 숨긴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간의 개혁으로 인해 노비의 수는 팍팍 줄어들었다.

관노비든 사노비든 할 것 없이 마구 줄었는데, 관노비의 경우에는 그 감소세가 엄청났지.

조선의 관노비는 단순히 허드렛일을 하는 노비가 아니라, 온갖 직종에 속한 수공업 장인이거나 특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신분적으로 묶어 놓은 이들이 대다수였다.

기존 나라의 땅을 일구던 노비는 그 땅을 그대로 받았고, 전문 기술을 가진 이들은 죄다 기업으로 빨려갔다.

사복시나 군기시 등과 같이 나라의 업무를 하던 잡직관원과 지방의 관노비들은 조정관원이 되어 속량됐다.

지금에 이르러 남은 관노비는 진짜로 관아의 허드렛일 하는 이들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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