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챕터39. 탄생하다 (4)
‘문제는 지금 당장은 이걸 없앨 수가 없다는 거지.’
연오랑은 손가락으로 공주의 팔뚝을 두들기며 생각을 이어갔다.
이 시대는 인력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시대다.
당장 연오랑의 집만 봐도 그렇다.
이 거대한 저택을 청소하고 보수하고 관리하고, 빨래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땔감을 구해오고, 주인의 심부름도 하고, 서신도 보내고, 말도 관리하고, 등등.
이 모든 걸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하는데, 관리들이나 양반집 혈족이 이걸 다 할 수가 있나.
집 한채 있는 양민이야 가족끼리 해결한다지만, 부잣집일수록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다.
‘관비도 그렇지. 이건 더 복잡하네...’
어지러운 머릿속을 반영하듯, 공주의 팔뚝을 노리는 손가락은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를 반복했다.
관에 속한 여자노비들을 흔히 밤시중이나 드는 존재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다.
실상은 식모, 가정부, 기타 잡일꾼, 유흥도우미, 심지어 간호사와 간병인 비슷한 역할까지 하는 존재지.
이래서 관아에는 여전히 관노비들이 남아 있었고, 관리가 늘어 관청이 더 커진 지금에는 속량된 사노비들이 일거리가 없어서 다시 관노비가 되는 일도 벌어질 지경.
하지만 세종과 태종은 여전히 지주들의 사노비를 날려버리길 바라고 있고, 그걸 위한 가장 큰 압박이자 명분은 관노비를 없애는 것.
“나라에서도 노비를 안 쓰는데, 니들이 감히 뭔데 노비를 부리냐!?”라고 외치면 할 말이 없어지니까.
‘그런데 돈이 없단 말이지.’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돈이다.
이 관노비를 전부 고공으로 바꿔버리면 해결될 문제지만, 수만명이 넘는 이들의 인건비를 한 번에 감당할 수 있나.
지금도 이것저것 벌어놓은 일이 많아서 재정이 간당간당하니, 이 문제는 계속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
연오랑은 찌푸린 얼굴을 얼른 폈다.
이건 조정이 부자가 되면, 별다른 반발 없이 어련히 해결될 문제니까.
지방행정이 중앙조정에 흡수되고 온갖 부서가 생겨났다는 건, 그만큼 전문성이 강화되고, 매뉴얼화되고, 세분화 되었다는 뜻.
쉽게 말해 일이 더럽게 어려워지고 책임소지가 명확하니, 예전처럼 “이렇게, 저렇게 해라.”라고 해봐야... 관노비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거지.
진짜 행정일은 말직 관원이 직접 해야 할 터, 관노비들은 말 그대로 잡스런 일에만 종사하게 될 거다.
그 정도야 뭐... 조정예산이 불어나면 해결되지 않을까?
‘하지만... 사노비는 조금 애매한데.’
연오랑은 눈을 가볍게 찡그렸다.
사람이 남들보다 우월해 보이고, 잘나 보이길 바라는 건 인간으로서의 본성이다.
제 아무리 자기 수양을 갈고닦은 선비라도 뭐 얼마나 다르겠나. 그렇게 외치는 양반들 중에서, 자기 손으로 직접 농사지어 먹고 살면서 공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이런 우월감을 표현하는 방법은 쓸데없이 복잡한 예법을 따르거나, 돈을 펑펑 써가며 과시를 하거나, 체면을 강조해 자존심을 살리는 거지.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저 체면이 조금 걸린단 말이지.’
비록 지금 역사에선 양반사대부의 기세가 확 꺾였지만, 저 체면문화는 아직도 남아 있다.
사실 이게 양반의 문제겠는가. 세상 어딜 가도 잘난 집안은 다 체면을 차리기 마련이지.
그리고 저 체면을 차리는 것엔, 어디 갈 때마다 노비들 부려서 함께 데려가고, 자기 손으로 직접 일을 안 하고 남을 부리는 게 일반적인 행태라는 거다.
‘이건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닌 건데...’
의식구조를 바꿔야 하는 거라 쉽지는 않아 보이지만... 저 체면을 살리는 방법을 노비들 부리는 게 아니라 다른 쪽으로 유도하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다.
“칭송 받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예...?”
“그게 말이지.”
연오랑은 가볍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놨고, 공주는 고운 눈썹을 깔고 생각에 잠겼다.
이내 입을 떼고 하나씩 집어간다.
“충혼비를 세우는 건 어때요?”
“흐음... 안될 걸. 충혼비는 현충사가 있으니까.”
“흐응.”
공주는 입을 오물거리며 반문을 곱씹어봤다.
조선은 유교적 원리에 입각해 만들어져서 충,효,열을 중시했고, 이걸 민간에 퍼트리려 했다.
이는 통치제도의 미비한 점을 개인의 윤리의식 고취로 보완하고, 동시에 신분제를 견고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 건데... 지금은 있지도 않잖아?’
원래 역사에서는 몇해 후에 삼강행실도를 반포해 민간 백성들의 유학의식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지금 역사에선 삼강행실도를 만들 생각조차 없다.
오히려 충의 가치를 효나 열보다 더 높이려고 작업 중이지.
“그래서 현충사를 세워 전국의 충신을 모아 왕실이 직접 관리하잖아? 지방 가문의 자존심 세워주자고, 자기들 터전에 비를 세우는 건 인정할 수 없지.”
현충사는 호국영령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개혁 이후 벌어진 전쟁의 전상자뿐만 아니라 전조나 삼국시대 왕조의 성왕 혹은 존경받는 충신들.
끝으로 지방가문의 이름난 충신들마저도 전부 끌어와 한자리에 묶어 놨다.
다른 일체의 특권 없이 그저 “왕실에서 제사를 지내주니 영광으로 알아라.”라고 마침표를 찍은 거지.
어찌 보면 가문의 영광을 위로 끌어올려서 좋아 보이지만, 반대로 가문의 영광이 동네의 영광이 되어 동네주민들에게 존경받는 걸 막아버린 꼴이다.
“현충사의 건립 목적 중 하나가 사실 그거였잖아?”
“음... 그건 그렇네요.”
공주도 이해했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연오랑과 함께한지 벌써 몇해 던가.
그녀는 연오랑이 세종,태종과 함께 궁극적으로 무얼 노리고 개혁을 진행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녀 또한 왕실의 일원이니,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효는 어떨까? 효행록도 무용지물이 됐잖아?”
“네.”
이건 공주가 궁에 있을 때부터 본 거라서, 냉큼 고개가 끄덕여졌다.
효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개인윤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충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국가 통치의 가장 기본적 이념으로 인식되었다.
고려 때에 중국에서 이십사효도가 들어와 효행록을 만들었고, 조선이 들어서자 이걸 병풍으로 까지 만들어서 왕실에서 사용했다. 나중에는 중국효자 말고 삼국,고려의 효자의 이야기를 실어 보완했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거꾸로 간다.
효행록이 나쁜 건 아니지만, 굳이 망한 중국놈들의 효자이야기를 들먹일 필요는 없지 않나.
굳이 이런 거 없어도 다른 방법이 있다.
“다른 방법이라... 아! 사찰의 승려를 이용하는 군요?”
“으엉?”
연오랑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바라보자, 공주는 괜히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바로 코앞에 공의회가 벌어지고 있잖아요? 놀러 가봤죠. 고승들이 제 발로 찾아오기도 했고.”
그녀는 괜히 뜨끔했는지, 자신의 배를 쓱쓱 매만지며 방패삼아 내밀었다.
“난 또 뭐라고.”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도 이제 아이를 가졌으니, 혹시나 싶어서 불공이라도 다녀온 모양이다.
더불어 신분이 공주인만큼. 공의회에서 말싸움을 하고 있던 고승들도 극진히 대접할 수밖에 없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겠지.
“그래서 정비되고 있는 사찰에서, 그런 일을 할 거라고 얼핏 들었죠.”
“맞아. 아무리 무지렁이 백성들이라지만 효행을 모를까. 다만 그걸 굳이 유학적 신분질서로 끌어올 필요는 없는 거지.”
“네.”
효를 이용해 왕-양반-양민-천민으로 이어지는 계단적 충성관계를 만들어 신분질서를 고착화시키는 걸 막고, 그냥 왕-양민만 남아 충성의 직거래를 하겠다는 거지.
“굳이 중간에 양반이나 지주를 끼워 넣을 필요 없잖아? 전조 때의 승려들은 전조왕실에 빌붙어 살았으니... 조정에서 직접 관리하는 것보다, 승려들이 백성들 다독이고 교육시켜 왕실에 충성하게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일걸?”
“승려들도 거부하지 않을 거고요.”
“죽다 살아난 놈들인데 거부는 무슨. 시키는 대로 하면 알아서 떡이 나오니, 입 꾹 다물고 따라와야지.”
“큭큭.”
연오랑의 우악스런 말에 공주는 헛웃음을 내고 말았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정말로 연오랑의 못된 물이 잔뜩 들었나보다.
고려 때에도 호국승려는 유명했으니, 효행은 효행대로 충은 충대로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을 거다.
더불어 백성들도 재미도 없는 소학이나 효경을 읊는 것보단, 절간에서 법문을 듣는 게 더 귀에 잘 들어오겠지.
“열녀비는... 더 힘들겠네요.”
“그렇지.”
연오랑은 가볍게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대엔 주로 남편이 죽은 뒤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여성을 열녀로 인식했다.
시간이 흐르면 점점 과격해져서, 손가락을 자르거나 다리 살을 베어 먹이는 등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고, 심지어 남편이 죽은 뒤 목을 매어 따라 죽는 경우도 생겨났지.
지방에서 이렇게 열녀에 목을 맸던 건, 집안의 명예를 높이고 동네에 세금과 요역을 면제해 주는 등의 실질적인 혜택을 줬기 때문.
이래서 없던 열녀를 만들어내려고, 생과부를 억지로 죽게 만드는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는 곳도 있을 정도였지.
허나 이 시대는 그 정도까지 가진 않았고, 지금 역사에선 더욱더 그러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민간 백성들이 재가를 하든 말든 조정에서 신경이나 썼나. 죄다 양반가문만 해당됐던 건데,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잖아?”
“그렇죠...?”
공주는 차마 왕실이 양반사대부, 지방호족을 찍어 누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게 껄끄러워서, 대충 말을 흐렸다.
“재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왕실에는 이득이 되니, 열녀를 인정해 줄 필요가 없지.”
“...”
“굳이 그런 의도가 아니어도. 생과부로 늙어죽는 것보다는 재가를 하는 게, 나라 전체로 봤을 때도 훨씬 이득이고.”
공주도 여인인지라 동의하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자식도 없이 생과부로 늙어 죽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나.
‘다 돈 때문이면서, 열녀니 뭐니 헛소리만 한단 말이지.’
연오랑 또한 속으로 쌍욕을 날려줬다.
열녀의 문제를 깊게 들어가 어두운 속내를 파헤쳐보면, 결국 돈과 가세의 문제다.
이 시대엔 여권이 상당히 강력하고, 시집온 부인은 남편집안에 종속된 게 아니라 처가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시대다.
결혼은 진짜로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니, 재가를 한다는 건 이 결합이 깨진다는 뜻.
더불어 결혼을 했으니 친가재산을 부인이 상속받아 떼어가니, 자식이 죽은 것도 억울한데 가산까지 뜯기게 생겼다.
여기에 만약 자식이 있다면, 친가 자식일까, 외가 자식일까, 재가한 집안의 자식일까? 이 또한 복잡한 문제다.
더불어 조정 입장에선 양반을 줄이고 싶은데, 재가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양반 또한 함께 늘어나지 않나.
이래서 원래 역사에선 성종 때에 재가녀자손금고법이라는 것까지 만들어서, 재가한 여인의 자식은 청요직淸要職에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 법까지 나왔지.
하지만 지금 역사에선 정반대의 상황이다.
양반의 권위와 특권은 계속 깎아 먹고 있으니, 양민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양반 집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좋다.
재가 문제로 양반 집안끼리 서로 다툼이 일고, 상속문제로 집안내부에서 난장판이 벌어진다? 이 또한 세종과 태종이 바라는 일 아닌가.
지들끼리 계속 그렇게 싸워서, 잘게 부서져 세가 약해지면 좋은 거지.
“서얼을 인정해준 것과 같은 맥락이야.”
“으음...”
공주는 이해가 된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서얼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든 사생아로 만들든 조정이 신경 쓰지 않고 집안일로 치부한 것처럼, 재가 또한 나라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게 아니라, 집안일로 치부하겠다는 거군요?”
“그렇지. 양반을 없애고 양민으로 끌어내리려고 하니, 당연히 양민을 대하듯 대해줘야 하지 않겠어?”
“오...”
꽤나 살벌한 말을 해보지만, 공주는 그저 감탄을 늘어놨다.
“흐음. 그럼... 충,효,열 모두 써먹기가 곤란하고, 체면을 세워주는 게 또 뭐가 있을까. 가마?”
“...”
“아니지. 가마는 요새 타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공주는 자문자답하며 계속 머리를 굴렸다.
당상관 이상만 가마를 탈 수 있는데, 요즘은 정승조차도 가마를 안타고 말을 타고 다닌다.
의주와 호주에 있는 허조나, 삼남의 착호군을 이끄는 황희는 당연한 거고, 심지어 한성에 남아 있는 맹사성조차도 홀로 말을 타고 돌아다니지 않나.
삼정승이 모범을 보이면, 아랫사람들은 눈치가 보여서라도 가마를 못 타기 마련.
이래서 요샌 육조거리 근처에 거대한 마구간이 들어서서, 출퇴근 하는 관원들의 말을 관리하는 기업까지 생겨났지.
“그렇죠?”
“어. 그건 나름 국책사업이니까. 가마는 당연히 불가지.”
세종과 태종은 연오랑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선을 말박이의 나라로 만드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나.
집집마다 마구간이 들어서고, 온 백성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걸 최종목표로 잡고 있으니... 삼정승이야 말로 가장 모범을 보여야할 사람들이다.
“그럼 또 뭐가 있을까...”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공주의 모습이 나름 귀여워 연오랑은 가만히 지켜봤고, 그녀는 뭔가 답을 찾았는지 눈을 번쩍 떴다.
“공덕비라고 봐야할지, 공적비라고 봐야할지 모르겠는데... 이건 어때요?”
그녀는 신나서 조잘조잘 입을 놀렸다.
“지금 국방세를 낸답시고 기업집안마다 다리도 놓고, 도로도 만들고, 보도 만들고 하잖아요? 그걸 누가 만들었는지 떡 하니 포상하는 거죠.”
“음...”
‘틀린 말은 아냐.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연오랑은 눈빛을 반짝이는 공주를 보며, 잘했다는 듯 히죽 웃어주고선 머리를 굴려봤다.
기업을 만들고자 하는 집안은 연오랑이 만든 초창기기업이나 연구소에 가서 선진기술을 배워와 기업을 설립했다.
이 과정 속에서 연오랑, 정인지, 하동청년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기업내규를 따르게 만들었지.
조정은 이 기업내규를 바탕으로 기업법을 만들고 있는 중이고, 이런저런 잡다한 내규를 제외하곤 국방세가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