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76화 (276/538)

276. 챕터39. 탄생하다 (5)

‘사실 국방세는 나중에 세금 걷기 쉬우려고, 꼼수를 부려서 약을 친 건데 말이지.’

기업으로 변모한 집안의 수익은 지금의 법제도에서는 산출할 수가 없다.

해서 자발적으로 국방세를 내게 길들인 후에, 나중에는 직접 기업에서 세금을 걷을 때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였지.

그래서 기업은 국방세를 낸답시고 직접 지방의 인프라 건설에 돈을 쏟아 붓고 있는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나라에 공적과 공덕을 세우는 것 아닐까?

“그렇죠?”

“일 리가 있어.”

‘이것도 일종의 기부체납 비슷한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기부를 많이 하거나 사재를 털어 만든 건물이나 다리에 “누구누구 기탁금으로 만들었음.”이라고 비석하나 세워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음. 잠깐... 그렇게 따지면 충혼비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글쎄... 목적이 조금 다르니까. 백성들이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지 않을까?”

“흐으응.”

충혼비는 “이러이러했으니, 이 집안에 존경을 표하고 이를 본떠서 왕실과 조정에 충성해라.”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공적비는 그저 “누구누구 돈으로 만들었음.”이 끝이지 않나.

저걸 보면 백성들이 “오. 저 집안 돈 많네.” “그래도 만들어주니까 고맙긴 고맙네.” 정도의 약한 호의를 표할 뿐, “다리를 만들어주다니! 감사합니다. 어르신!”이러면서 충성을 표하진 않을 것 아닌가.

“안 그래?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물건이 한두개가 아닐 텐데... 매번 보다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공경의 마음도 무뎌지기 마련이지.”

“흐음... 그럴까나.”

“게다가 따지고 보면 조정에 세금 내는 대신 만든 거니, 무조건적으로 호의를 보낼 것도 없잖아?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그렇다고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공경할 건 아니란 말이지. 못된 심보를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세금 더 적게 내려고, 저거 만든 게 분명하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고.”

“흠.”

‘설마 그렇게까지 심사가 꼬인 사람이 있을까?’ 싶다가도, 나름 일리가 있다 생각되어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공사는 기업집안 여럿이 힘을 모아서 하니까... 공적비에 함께 이름을 올리는 집안이 많겠네요?”

“그렇지.”

연오랑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맥락을 읽고 동의를 표했다.

하나만 있으면 우뚝 설 수 있지만, 공적비에 빼곡하게 기금을 출연한 집안을 왕창 적어봐라. 그게 뭐 얼마나 강력한 충격과 영향이 있겠나.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지.

“으응...”

공주는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 앓면서, 공적비의 득실을 열심히 가감하며 머리를 굴려댔다.

“그래도 확실히 효과는 있겠네요. 어차피 생색낼 거, 제대로 내는 게 뭐가 됐든 이득일 테니까요.”

“그렇겠지.”

연오랑 또한 궁리를 해본 결과 같은 의견이었다.

먼 훗날 어느 나그네가 다리를 지나다가 “이 다리의 이름이 뭐요?”라고 물었을 때. “용연 연가교요.”라고 답할 수 있다면, 연씨 집안이 내색은 안 해도 얼마나 뿌듯해 할 건가.

나름 올바른 쪽으로 재물을 풀어 백성의 환심을 산거니, 그 정도면 충분히 봐줄 수 있지.

“그렇지?”

“네. 만약 이게 잘 풀린다면, 다른 가문에서도 나름 이름값을 올리려고 하지 않겠어요? 이유야 어쨌든 결국 백성들 생활이 더 나아지겠죠. 그렇다고 해서 권세와 영명이 크게 높아지진 않겠지만...”

“그런 사소한 공적비라도 없으면 부끄럽겠지.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체면에 집착하는 집안일수록.”

“네.”

공주는 자신도 음모 아닌 음모를 꾸민 게 마음에 드는지, 웃음을 참기 힘들어 입꼬리가 씰룩씰룩 춤을 췄다.

나 홀로 높이 서는 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을 끌어내리면 되지 않나.

누구 하나 잘했다고 칭찬받고 공적비가 세워지면, 다른 집안도 우후죽순 마을에 투자해 공적비를 받으려 할 거다.

“음... 표창장도 나쁘지 않겠네.”

“표창장이요?”

공주는 뜬금없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연오랑이 생경한 단어를 만들어 쓰는 게 어디 하루이틀인가. 분명 또 뭔가 특이한 생각을 품은 게 분명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중국의 공신들이 받는 구석九錫이나 단서철권과 비슷하고, 조선으로 치면 공신첩이나 궤장과 비슷한 건데...”

연오랑은 미래의 기억과 옛 시대 기록을 하나로 뒤섞어 입을 풀었다.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공신에겐 해택이 주어지기 마련.

단서철권처럼 면책특권을 받든가 아니면 “왕에 버금가는 수레를 탈 수 있다. 왕 앞에 칼을 차고 나설 수 있다.” 등등의 예외적인 특별한 법제를 허락받곤 했다.

고려나 조선에서도 공신녹권 같은 공신첩을 내려주곤 했지 않나.

여기에 딸려오는 일체의 특권과 특혜를 배제하고, 그저 왕의 서신만 멋들어지게 포장해서 내려 보내는 거지.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보다 이걸 원하지 않겠어? 무려 왕의 친필 서한인데? 설령 특혜나 특권이 없다고 해도 말이야.”

“음...”

공주는 일리가 있다 생각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조선의 대세는 기업이라는 형태의 자본가로 향하고 있고, 양반, 양민할 것 없이 다 똑같은 기업가가 된다면... 그 중에서도 체면을 찾을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되지 않겠나.

“여기에 가령 올해 사노비를 가장 많이 속량시킨 집안을 추려 표창장을 내려주면 어떨까?”

“으... 속이 엄청 쓰리겠네요.”

공주는 자기가 생각해도 참으로 얄미워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쌤통이라는 듯 눈빛은 반짝인다.

참 골치 아플 거다.

대세를 따르는 집안이라면 빨리 사노비를 정리하고 기업으로 갈아탈 거고, 그게 싫다고 버티는 집안이야말로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인데... 그런 이들을 물 먹일 물건이 반대편에게 들어간다?

이 꼴을 그냥 보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또 뭐가 있을까나...”

남의 속을 쓰리게 만드는 게 재밌는지, 공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런저런 의견을 내놨다.

“복제를 제한하는 건 어때요?”

“그건 안 돼.”

“...”

단칼에 자르는 말에 공주는 슬쩍 눈을 흘겼으나, 이내 곧 이어지는 말에 납득했다.

“양반과 양민, 천민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드는 게 큰 목적인데, 오히려 다른 쪽으로 강요하는 꼴이 될 거야.”

“음...”

지금도 관복을 가지고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는 판에, 신분별로 의복을 강요하면 되나.

오히려 그런 제한이 없는 지금. 돈을 번 천민이 비단옷을 입고서, 허름한 마의를 입은 양반을 깔보고 있다.

오히려 이걸 독려해야지 견제하는 건 곤란하다.

“체면... 체면을 올려주는 게 또 뭐가 있을까. 사치품은 어때요?”

“그걸 나라에서 직접 강제하는 건 보기 안 좋지. 다만 사치품을 양반집안에 마구 푸는 건 나쁘지 않겠다.”

“그런가...?”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연오랑의 입에 집중했다. 그게 그렇게 까지 효과가 있을지 잘 모르겠다.

“들어봐.”

“...”

조선이 절용검약을 미덕으로 삼고 사치허영을 멀리한 건, 고려 때에 만연했던 사치풍조가 백성들의 피땀 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허나 운석핵꿀밤 이후. 의주에 무역관이 생기면서 인식이 조금 바뀌었다.

절용검약이 좋긴 좋은 건데, 그렇다고 사치와 허영이 무조건 죄악이라고는 보지 않게 된 것.

까닭인 즉 공무역이 무너진 후. 조선이 중국에 내다파는 물건은 죄다 사치품 아닌가.

일반물품은 중국물품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보니, 있는 거 없는 거 박박 긁어서 중국에 팔아넘길 특이하고 특별한 사치품들을 찾아 헤맸지.

“요새 중국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고급 한지나 송연묵을 생각해봐.”

“...?”

“종이야 글씨만 쓸 수 있으면 그만이지 뭐 하러 눈처럼 하얗고 뽀얀 종이가 필요하겠어? 먹도 글씨만 쓸 수 있으면 그만이지, 향이니 점도니 따지면서 실상 얼마 차이가 나지도 않는 고급먹이 왜 필요 하겠어?”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걸 만들면서 파생되는 게 얼마야? 종이기술과 먹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고, 그걸 비싸게 만들어 팔아 넘겨서 들여오는 곡식과 중국물품이 또 얼마야.”

“으흠.”

공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연오랑은 시선을 올려 공주의 긴 머리칼을 품고 있는 나비장신구가 달린 은비녀를 가리켰다.

“그것도 마찬가지지.”

“이거요?”

공주가 삼단 같은 머리칼을 흘러내리며 비녀를 꺼내보이자, 연오랑은 비녀를 넘겨받아 가볍게 흔들었다.

손길에 따라 피리링.피리링 소리를 내며, 비녀 끝에 달린 나비의 날개가 가볍게 움직이며 묘한 소리를 자아냈다.

진짜 나비날개를 만든 것 마냥, 은으로 만들었음에도 둔탁한 금속 느낌이 안날 정도다. 미래의 떨잠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보다 훨씬 작고 정교하다.

“비녀는 그저 머리만 고정시키면 그만인데, 굳이 이렇게 화려하고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

이치야 맞는 말이지만, 공주는 자신이 아끼는 비녀를 두고 그런 소리를 하자 슬쩍 눈을 흘겼다.

저건 정작 연오랑이 선물로 준 물건인데, 왜 저걸 가지고 뭐라고 하나 싶다.

“큼큼.”

연오랑은 괜히 찔려서 헛기침을 하고서, 못 본 척 말을 이어갔다.

“이 비녀를 만들어서, 왕실에 진상하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봐.”

“아...”

공주는 가볍게 과거를 더듬어, 연오랑이 말하는 속내를 더듬어갔다.

연오랑이 하동에서부터 데려온 세공기술자들의 솜씨는 빼어났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온갖 것을 만들고 제자를 키웠다.

그렇게 배운 제자들이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공작기업을 설립. 그들은 온갖 장신구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간 평범하게 쓰이던 장신구를 모조리 몰아낼 정도로 훌륭했지.

“그렇게 입소문이 나자 어떻게 됐지?”

“풍조가 싹 바뀌었죠.”

공주는 유행의 선두주자가 된 게 나쁘지 않은지, 활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자는 신분과 나이를 불문하고 아름다워 보이길 바라기 마련.

가체가 등장한 것도 그게 예쁘다고 생각해서, 왕실부터 기생을 타고 민간까지 퍼져나가지 않았나.

원래 역사에서도 이 가체는 갈수록 커지고 화려해져서, 이게 너무 무거워서 목뼈가 부러져 죽는 경우도 있었다. 비싸기도 엄청나게 비싸서, 혼수로 가체 마련하다가 가산을 다 날려먹기도 했지.

상투도 싫어하는 연오랑이니, 당연히 그 꼴이 보기 싫었다.

세상에는 별 특이한 게 다 멋으로 인정된다지만, 나무토막과 가발을 엮어 굳이 머리에 쓰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가체를 밀어내기로 마음먹었고, 비주류에 머물고 있던 첩지와 족두리, 비녀를 더욱더 정교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뿌렸다.

그저 덩치 크고, 보석이 주렁주렁 박힌 물건이 아니라, 실물을 보는 것 같이 정교한 세공술로 만든 장신구를 풀어버린 거지.

“그래서 결국엔 가체를 밀어냈잖아. 요새 왕실에서 가체는 한물 간 유행이라고 본다면서?”

“네.”

원래 역사에선 비녀나 장신구도 조선중후기에 가면 신분에 따라 차별을 두지만, 이백년은 이른 지금 역사에서 그런 게 있을 리가.

제대로 된 예법을 정하지 못해서, 조정이 움직이는 것보다 민간에 유행이 확산되는 게 더욱 빨랐다.

“이 일로 조선의 금,은,동세공사들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짐작이나 돼?”

“오...!”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안 해본 터라, 공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왜 이 생각을 못했는지, 왠지 스스로 바보같이 느껴진다.

“아...!”

“...?”

“안 그래도 장 좌랑이 서신을 보내서 신세한탄을 하더라고요. 갑자기 왜 그랬나 싶었는데, 저 때문에 한소리 들었나 보네요. 히히.”

“...”

장영실은 세종과 함께 시계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데, 뜬금없이 왕실에서 “야. 이거 봐라. 이렇게 정교한 장신구를 민간에서 만들었는데, 조선 제일의 장인인 너흰 뭐하는 거냐?”라고 핀잔을 들었을 게 분명.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겨서, 괜히 공야사 장인들이 욕을 먹었나 보다.

“뭐... 알아서 하겠지. 아무튼 비녀만 그렇겠어?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 반지는 어때?”

“음...”

공주는 괜히 뜨끔해서, 목덜미를 더듬어 금사金絲를 매만졌다.

성리학적 지배이념이 강조될수록, 비중국적인 문화는 쇠퇴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 시대엔 남녀 할 것 없이 온갖 장신구를 하는 게 보편적이었는데, 중후기로 가면 반지 말고는 제대로 남는 게 없어지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자주화의 물결이 강해지면서, 고려 때의 장신구 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앞으로도 꺼질 기미는 안보였다.

“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뭔가 제재는 해야 되지 않아요?”

“그렇겠지?”

“그럴걸요.”

공주는 냉큼 비녀를 돌려받아 머리를 묶고선 조용히 답을 했다.

“양반과 양민의 차별을 없애는 게 큰 목적이니까... 결국은 왕실과 양민 둘을 구분지어서 제한을 둬야겠지?”

“예. 아마도...”

왕실의 권위를 높이길 바라는 세종과 태종이니, 아무리 합리적이어도 왕실이 민간과 똑같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다. 반대로 양반과 양민,천민은 똑같이 만들어야 하고.

“체면을 살리기 위한 방편으로 사치를 이야기 했으니까, 당연히 재료에 제한을 두면 힘들 테고...”

“...”

“아무래도 크기와 무게에 제한을 둬야겠네. 아니다. 무게에 제한을 두면 그것도 문제가 되겠네.”

연오랑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연신 머리를 굴려봤다.

이 시대의 사치품은 미래처럼 성능엔 별 차이가 없으나, 이미지메이킹과 이름값으로 팔리는 명품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명품과 사치품은 기술력과 자본력의 총아로, 일상에서 쓰이는 물건과는 확연히 티가 나지.

‘원래 역사에서도 유럽에서 사치품을 만들면서 기술력이 올라갔잖아?’

피스톨이라 불린 권총은 시계장인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졌고, 보석 등을 박아 화려하게 만들어진 권총은 그 자체로 예술품이 되어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인식됐다.

그렇게 귀족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권총에는 온갖 신기술의 향연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파생된 결과물이 다른 영역으로 퍼져나가 총기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줬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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