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77화 (277/538)

277. 챕터39. 탄생하다 (6)

‘지금 내가 하려는 짓도 똑같은 거잖아?’

이렇게 정교한 세공기술이 발전할수록, 지금 만들고 있는 시계도 소형화 할 수 있을 거고, 부싯돌을 비롯한 다른 물건들을 만들 수도 있다.

지금은 비록 무른 금,은을 사용하지만 나중에는 철과 합금을 이용한 주조,단조기술 또한 발전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재료에 한계를 두면 안 되지.’

자고로 많은 사람이 써야 더 많이 만들 수 있고, 그래야 더 다양하고 새로운 기술이 나오기 마련.

사람도 몇 없는 왕실에서만 특정 재료를 사용하면, 모든 방면에서 고르게 발전하기 힘들 거다.

“으음... 크기라. 그래. 아무래도 크기를 제한하는 게 좋을 거 같아.”

“...”

그는 자문자답을 하며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거꾸로 가면 되는 거지.’

왕실과 민간만 구별하면, 체면을 살리기 위해 사치를 하고 싶은 이들은 그 가운데에서도 분명 자신이 특별하길 바랄 거다.

헌데 크기가 제약이 걸려, 모두가 동일한 조건에 구속된다면 어느 쪽으로 발전하겠나.

더 다양하고 특이한 재료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남들보다 훨씬 정교하고 화려한 장신구를 원하게 되겠지.

‘그게 곧 기술의 발전이란 말이지.’

공주가 차고 있는 저 금목걸이줄 조차도, 한번 꼴 걸 두번, 세번 꼬아 정교하게 만들게 되면 그게 다 기술력이다.

“안 그래?”

“예. 분명 그렇겠네요.”

“아...! 또 생각났다.”

연오랑은 뜬금없이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이제 보니 정답 중 하나를 발밑에 두고 찾고 있었다.

“...?”

“후원제도가 있구나.”

후원이라는 말이 뭔지 모르겠지만, 공주는 일단 잠자코 기다렸다.

“내가 용연공작기업을 도와주는 게 후원이잖아?”

“...?”

“그게... 염전기업, 수산기업, 버섯농장, 목마장만 가지고, 나머지는 다 넘겨줬잖아?”

“네.”

이건 연오랑이 없는 동안 공주가 윤현을 통해 관리했기에, 누구보다 잘 알았다.

기업제한법을 만든 게 연오랑이고, 그의 요란한 행각 때문에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당연히 꼬투리 잡힐 짓은 안해야 되니, 소유하고 있던 기업을 하동에서 함께 올라온 마을 사람들에게 여럿 나눠줬다.

막대한 수익을 내는 소금, 대체할 경쟁자가 없는 미분, 몽골에서 들여온 한혈마와 연오랑이 노래 부르는 사냥개들.

화수분과 같은 이 네 기업은 포기할 수가 없는 거니, 나머지는 넘길 수밖에.

“대신 내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넘긴 기업에서 꽤 쓸만한 물건을 만들면, 당신이나 내가 그걸 싸게 받아서 홍보를 해줬단 말이지.”

“홍보요?”

“음. 그게.”

연오랑은 계속해서 입을 놀렸고, 한참을 듣고서야 그녀는 이해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보니, 스폰서니 하는 명확한 개념과 명칭은 없지만, 이런 행태가 중국이나 조선에 지금껏 없던 건 아니잖나.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니다.

“그러니 이 후원자가 되는 거야말로, 남들에게 과시하는 데 최고란 말이지. 당신이 만약 양반집안이라고 생각해봐. 당신이 도와준 장인이 걸작을 내놓고 그 장인이 ‘공주님의 지원과 후원 덕에 이런 걸작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을 하면, 그게 얼마나 파급력이 크겠어.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걸?”

“흐음... 그건 그렇네요.”

“만약 그 장인을 거둬서 자기집안 기업의 이름값이 높아지면, 그 또한 체면 차리는 데 최고 아니겠어?”

“네.”

충분히 일리 있다고 생각되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자기 집 강아지가 재주만 부려도 뿌듯한 게 사람인데, 나라에 명성을 떨친 장인을 보유하면 얼마나 뿌듯하겠나.

“그렇게 민간에서만 이름을 날리는 게 아니라, 제대로 왕실의 인증까지 받는다면 금상첨화란 말이지.”

“...”

“아...! 그러고 보니 또 있었네.”

후원을 주제로 잡고 머리를 굴리자, 미래의 기억들이 꼬리를 잡고 줄줄이 늘어진다.

굳이 공돌이 장인만 후원할 필요 있나.

미래에도 후원이란 자고로 예술가, 음악가, 재능 있는 아이들에게 하는 게 보편적이지 않았나.

“으... 까먹으면 안 되는데.”

“...”

연오랑이 머리를 감싸고 생각을 풀어내고 있자, 공주는 말없이 쓱. 공책과 연필을 내밀었다.

그녀는 기계공학에 관심이 많고, 틈나는 대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남기기 위해 필기구를 머리맡에 두고 살았다. 지금도 변하지 않았고.

“역시 내 부인이군.”

연오랑은 냉큼 받아서, 열심히 연필을 놀리기 시작했다.

‘후원이라...’

공주는 조용히 연오랑의 이야기를 곱씹어 봤다.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게, 충분히 널리 퍼질 가능성이 보였다.

당장 그가 사용하는 저 공책이라는 것도, 지금껏 있지도 않던 물건 아닌가. 싸구려 혼합지를 엮어 서책처럼 만든 물건이, 격한 호응과 함께 불티나게 팔릴 줄 누가 알았을까.

저걸 만든 게 연오랑이니, 당연히 연오랑의 유명세도 함께 퍼졌지.

‘만약 저걸 다른 집안이 만들었다면, 그 집안의 이름이 널리 퍼졌을 거잖아?’

명성을 높이기가 쉽지 않은 지금에선, 저런 식으로 가문의 이름을 날리는 건 모두가 환영할 거다.

연오랑은 열심히 손을 놀리고, 공주는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다과를 준비한 유 집사가 웬 청년관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

유 집사는 조용히 다과가 올려 진 앉은뱅이 상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현청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

모두가 말없이 자신을 주목해서 일까.

청년은 연오랑을 한번 공주를 한번. 정말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 목청을 높였다.

“대감과 공주자가께 인사 올립니다!”

“오냐. 조용히 말해라.”

“풉...”

연오랑의 심드렁한 대답과 공주의 웃음소리에, 청년관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보아하니 짬 낮은 신입관리를 골탕 먹이려고 보낸 모양이다. 아니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연오랑을 상대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다들 미루다가 막내가 당첨된 걸 수도 있고.

“가까이 와라.”

“옙!”

“무슨 일이냐?”

“그게...”

청년 관리는 조심스럽게 서신을 유 집사에게 건넸고, 유 집사는 냉큼 받아 연오랑에게 넘겨줬다.

“서신? 나한테 올 게 있나?”

혼잣말을 하고서 겉봉을 살펴보니, 하나는 정인지에게 나머지는 누군지도 모르는 인물이 보냈다.

‘누구야. 얘들은.’

“나 없을 때도 이런 서신이 자주 와?”

“아뇨. 딱히...”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 집사를 바라봤고, 유 집사 또한 고개를 내저었다.

연오랑은 정치적으로 매우 미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식관직도 없으면서 세종,태종의 오른팔이니, 연오랑과 안면을 트는 건 세종,태종과 직접 안면을 트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간댕이 부은 작자가 이런 미친 짓을 하겠나.

그걸 떠나서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연오랑이 먼저 뚝배기를 날려버릴지 누가 알겠어.

해서 서신을 보낼 사람이 없고, 기업에 대해 문의를 하고 싶은 이들은 공손하게 두 손 무겁게 해서 직접 찾아오는 편이었다.

“흐음... 너 뭐하냐.”

“예?예.”

“꼼지락거리지 말고, 옆에 앉아라. 차나 마셔.”

“예에...”

청년관리는 이래도 되나 싶어서, 엉기적거리며 발을 옮겨 유 집사의 눈짓을 따라 조심스럽게 툇마루에 엉덩이를 붙였다.

“음... 당신도 읽어봐.”

연오랑은 쓱쓱 서신을 읽어 내리고선 공주에게 넘겼고, 공주 또한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어째 세 서신 모두 꽤나 재밌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도 지금껏 했던 이야기와 엮으면 뭔가 작품이 하나 만들어질 것 같다.

“오...?”

공주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작게 감탄을 하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서신이라...”

‘그러고 보니, 서신도 어찌 보면 체면과 관련 있잖아?’

연오랑은 번뜩 이 생각에 떠올라, 묻고 말았다.

“당신. 장 좌랑에게 서신을 어떻게 보냈어?”

“에? 저야 유 집사에게 맡겼고, 유 집사는 관아로 넘겼죠.”

“아...”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신분이 공주이니 일단 관아에 던져주면, 알아서 해결해주지 않겠나. 괜히 물어봤다.

“야.”

“예옙!”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던 신입관리는 화들짝 놀라 목청을 높였다.

“민가에서 서신을 보낼 때, 대충 어떤 식으로 처리 하냐? 이 함흥과 예산에서 온 서신은 누구 손에 들려서 온 거야?”

“아. 그게...”

청년관리는 열변을 토하며, 사사로운 잡다한 것까지 열심히 풀어놨다.

연오랑이 짐작했던 것처럼, 서신은 글줄을 쓸 줄 알고 나름 여유가 되는 이들만 보내는 물건이었다.

당연히 양반이 주가 됐지.

허나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혼합지와 연필이 퍼지면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급속도로 불어났다.

여기에 착호군이 들쑤시고 다니고, 관리의 순환근무가 시작되면서 전국에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나.

그렇다보니 고향을 떠나 이주한 사람도, 장사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도, 업무 때문에 타 지역으로 떠난 사람도 부지기수라서, 공문서는 물론 민간서신의 왕래 또한 미친 듯이 치솟았다.

“여유가 있는 집은 노비를 보내는 게 보통인데, 너무 멀거나 그럴 여력이 없는 집안은 아는 사람 편에 보내고... 그것도 힘들면 보통 행상에게 맡기는 편입니다.”

“음...”

“두 서신 모두 행상을 통해 관아로 왔습니다.”

“역참을 이용하지 않고?”

“승여사... 아니. 물류교통처는 관의 문서만 다루지 않습니까. 하여 민간의 서신은 안 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그쪽은 조정의 공문서와 군병의 서신을 처리하는 것으로도 벅찬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하긴.”

병조 휘하의 속아문 승여사는 역참 관리 및 우편 업무를, 새롭게 만들어진 물류교통처로 넘겼다.

새롭게 정비된 역참과 수참이 몇 개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는 역참이 몇 개던가.

원래 역사의 역참보다 몇배는 커져서, 미래의 고속도로 휴게소와 비슷하게 변해 객주와 시장이 들어선 곳이 부지기수.

거길 관리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서, 공문서 전달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다 쓰는 모양이다.

“군병들이 서신을 많이 보내나 보지?”

“예!”

뭔가 쌓인 게 많았는지, 청년관리를 굳게 답을 했다. 사정을 보아하니, 이 녀석이 그 밀려드는 서신을 관리했나보다.

“착호군과 북방에서 근무하는 군병이 수만명이지 않습니까. 그치들이 별의 별 서신을 다 보내는데, 이 또한 공문서의 일종이라서 관아로 몰려오지 않습니까. 그걸 분류하고 전달하는 일 때문에, 제 업무를 할 시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오...”

지금이 기회라는 걸 알아차린 걸까?

녀석이 만날 수 있는 최고위 인물인 연오랑 앞에 서자, 녀석은 그간 쌓아왔던 울분을 조심스럽게 하지만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확실히 그럴 만해.’

연오랑도 녀석의 사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굳이 효행을 꺼내지 않아도, 일평생 동네에서만 살았던 녀석들이 착호군과 연대병이 되어 천하가 좁다하고 돌아다니면,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 일이 많을까.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그간 겪은 일을 빼곡히 적어서 집으로 보냈겠지.

삼남지방이 고향인 녀석들은 그저 설원 가득한 북방의 풍경만 적어 보내도, 그 자체로 집안을 흔들어 놓을 거다.

더불어 서신을 통해 꿈과 희망을 보고 자란 집안자제들은, 고향을 넘어 더 큰 세상을 가슴에 품게 될 거고.

‘이거 우체국을 빨리 만들어야겠는데?’

이미 우체국 역할을 하는 물류교통처가 있으니, 그 업무를 떼어내서 또 다른 부서를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관이 이 일을 담당하면, 체면을 크게 살릴 수 있잖아? 돈보다 체면을 중요시 하는 작자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 음. 값비싼 고급 우편의 수요도 분명히 있을 거야.’

연오랑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기껏해야 노비나 행상을 통해 서신을 교환하는 게 끝인데, 만약 고급우편을 만들어서 빠르게 그리고 진짜 관원이 서신을 전달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름 차려 입은 우체국 관원이 흡사 교지를 내리듯 집안에 찾아가서 서신을 전달한다? 그야말로 과시하는 데는 최고지.

받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심정은 같을 거다.

‘더불어 우편업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잖아? 돈 없다고 우는 소리하는 조정에서 싫어할 리가 없겠지.’

굳이 우표까지 만들 필요도 없다.

어차피 행상에게도 돈을 주고 서신을 보내는 건데, 그럴 바엔 차라리 믿을 만한 관아에 돈을 내고 서신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 하냐?”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그럼 관원을 더 뽑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흐흐...”

청년관리는 우렁차게 동의를 표하고선, 실없는 웃음소리를 삼키지 못했다.

아마도 자기 밑에 부하직원이 오는 걸 상상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 그리고...”

“...?”

물끄러미 바라보자, 녀석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현감이 대감어른께 혹시 석전을 해도 되는지 여쭤보라 했습니다.”

“석전石戰?”

“예.”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그게...”

연오랑이 심드렁하게 답하자, 녀석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관직도 없는 연오랑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 말이야 맞는 말인데... 실제로 그럴 리가 있나.

용연포구와 용연현은 연오랑이 다 만든 거나 마찬가지라서, 현감도 제멋대로 하는 건 눈치가 많이 보였다.

“석전이라...”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왜 하려는지 모르겠네. 요새 조금 살만 하다고 놀 거리를 찾는 건가?’

연오랑의 머릿속에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석전은 말 그대로 돌싸움이다.

이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무려 구한말까지 이어진 유서 깊은 놀이지.

다만 이 시대엔 아직 석전에 관한 규칙이 명확하지 않아서, 동네마다 규칙이 전부 제각각이었다.

“당신도 석전을 본적 있어?”

“어릴 때, 아바마마를 따라서 몇 번 봤죠.”

“음...”

원래 역사에서도 태종과 양녕대군이 석전을 좋아해서 구경하길 즐겼다고 하는데, 공주도 그 틈에 껴서 구경했던 모양이다.

“당신은요? 하동에선 석전을 안했어요?”

“당연하지. 그런 짓을 왜 해?”

“...”

공주는 세상 오만한 말에, 고개를 살포시 내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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