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78화 (278/538)

278. 챕터39. 탄생하다 (7)

과거. 연오랑이 꽉 잡고 있던 하동은 개혁의 시험 동네로서, 다른 지방과 비교해 혼자 수십년은 앞서가는 정신없는 동네였다.

그런 동네에서 석전을 할 틈이 있나.

그런 거 할 바에는 기업을 키워 돈 벌기 바빴고, 애들은 연오랑을 따라서 칼질과 승마, 자본유학을 배우느라 바빴다.

‘게다가 내가 때려잡은 호랑이가 몇 마리야?’

시도 때도 없이 호랑이를 잡아 자랑하고 다녔으니, 놀잇감이나 심심함이 머무를 틈이 있나.

하동은 굳이 석전을 안 해도, 구경거리가 많아서 백성들은 딱히 불만이 없었다.

“석전이라...”

“...”

연오랑이 다시금 혼잣말을 읊조리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세상 혼자 사는 그가 또 발칙한 생각을 시작한 걸, 금세 알아차렸나 보다.

‘쓸데없이 위험하고, 아무리 곱씹어 봐도 쓸모가 없어.’

거듭 생각해도 결론은 똑같았다.

석전의 필요성이라고 해야 될까? 백성들이 왜 석전을 바라는 지 이해는 된다.

요샌 아니지만, 극강의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하는 과거에는 다 함께 즐길만한 이벤트가 없다.

게다가 땅 파먹고 사는 농부들 입장에선, 지주나 혹은 다른 마을, 동네 사람들끼리 티격태격하면서 가슴속에 울화가 쌓였을 것 아닌가.

그걸 쥐불놀이나 석전을 하면서, 한바탕 시원하게 풀어내는 거지.

양반집에서 괜히 시끌벅적하게 제사를 지내고 잔치를 벌였을까.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고 명성을 높이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한번씩 동네사람들을 위해 이벤트를 벌렸던 거다.

다만 석전은 너무 위험하다.

돌 맞아 죽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심지어는 양반조차도 괜히 잘못 맞았다가 죽어도, 암묵적으로 죄를 묻지 않는 게 석전 아닌가.

‘돌팔매질이 분명 효과가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전쟁에서 본격적으로 써먹을 건 아니지.’

지금이 무슨 고대시대도 아니고, 화력병기가 등장한 시대에 돌팔매질이 전쟁터에서 효용이 있어봐야 뭐 얼마나 있겠나.

“용연에서 석전을 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냐?”

“예? 예. 그렇습니다. 사실 전에는 용연에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으니까요.”

“다른 곳은?”

“글쎄요... 관에 들어오기 전에 고향에서 몇 번 하는 걸 본적이 있는데, 다른 지방의 사정이 어떤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신입이 맞긴 맞는지, 청년관리가 힘없이 답을 했다.

“당신은 보기엔 어때? 우리가 연주, 원산, 경흥에서 지냈는데, 거기서 석전 하는 거 본적 있어?”

“아뇨. 그거 할 틈이 있겠어요. 게다가 거긴 여진인이 많이 살아서 석전에는 관심도 없었을 걸요.”

“음...”

‘다른 곳도 사정은 비슷할 거 같은데, 양전 사업이 끝난 곳에서 슬슬 말이 나오는 건가.’

연오랑은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심심해서 석전을 한다고? 그걸 대신해서 전국가적인 이벤트. 양전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나. 온 동네를 다 뒤집어엎고 온갖 귀화인과 외지인이 섞여들었으니 심심할 틈이 없었을 거다.

양전사업이 끝난 곳에서만, 슬슬 놀거리를 찾기 시작한 걸 테지.

‘다른 의도도 있을 거야.’

“공동체 의식이라고 해야할까...”

“...?”

“...?”

‘뭔 소리야?’

연오랑의 뜻 모를 말에 신입관리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이들은 태평하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불안하긴 불안 할 거야.’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시대가 퍽 불안하고 뭔가 안정되지 못하고 붕붕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졌을 거다.

생각해보면, 지금 역사에선 조선이 건국된 후로 지금까지 바람 잘 날이 없지 않나.

태조대에 고려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나라를 한번 갈아엎었고, 무수한 백성들이 속량되고 이주해서 풍파가 일었다.

이후 태종이 등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석핵꿀밤이 떨어졌다.

이땐 세상이 무너진 줄 알았을 거다. 양반집에서 곡소리가 안 나는 곳이 없었고, 그 곡소리가 곧 아귀다툼으로 이어져 사상논쟁이 벌어졌으니까.

태조대에 했던 정책을 다시 되돌리고, 사상논쟁으로 조정은 마비되고, 심심하면 반란 터지고, 의주에서 무역하면서 사무역시장이 꿈틀거린다.

아무리 무지렁이 농부라도, 뭔가 세상 돌아가는 꼴이 요상하다는 건 느꼈겠지.

결정타로 세종이 등극하면서, 또 다시 나라를 갈아엎기 시작.

지금까지의 혼란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하고 우악스럽게 하지만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변화가 일어난 거지.

소문으로만 들었던 여진, 몽골, 한족 귀화인이 자기 마을에 등장하고, 막연히 원수로만 생각했던 왜인 또한 마을에 정착했다.

귀화인뿐만 아니라 생전 가보지도 않았던 저 함길도의 백성이 전라도로 내려오고, 그 반대의 상황은 더 많이 벌어진다.

자기가 알던 세상이 부서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

지금껏 아무리 혼란과 파도 속에 살았어도, 불안과 피로를 느낄 수밖에.

백성들은 자신에게 좋게 세상이 변했지만... 무언가 의지하거나 믿고 따를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했고, 예전처럼 자기마을, 자기동네, 자기고향을 하나로 묶어줄 매개체를 갈구했다.

연오랑과 두 왕은 이런 심리를 한껏 이용하여, 백성들의 구심점을 기존 양반,지방호족이나 동네터줏대감에서 관아로 옮겨 왔다.

영원불멸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건. 돈 벌기에 바쁘고 하루아침에 날아갈 지방지주가 아니라, 굳건히 버티고 있는 왕실과 조정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겠지,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관보다, 서로 어깨를 마주하는 낯선 옆집이웃과 친해질 만한 계기와 동기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을 거야.’

연오랑의 결론은 이러했다. 그러니 먹고사는데 문제없는 용연에서도, 뜬금없이 석전을 하자고 말이 나왔겠지.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뭉치게 할 수 있는 놀거리가 필요하다는 건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미래의 기억이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미래의 놀거리라...’

음악, 영화, 스포츠, 생활체육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시대에 적용할 게 뭐가 있을까...’

그는 공책이 낙서를 하듯, 머릿속에 흘러나오는 단어와 생각을 모조리 꺼내 적어나갔다.

스포츠 하면 당연히 구기 종목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 시대에 어울리지도 않고, 필요도 없지. 아... 그나마 축국은 있구나.’

“당신도 축국하는 거 본 적 있어?”

“한성에선 이따금씩 봤는데, 다른 곳에선 못 봤네요.”

“너는? 너도 공 좀 차봤냐?”

“예? 가끔... 아주 가끔씩 해봤습니다.”

‘음.’

신입관리는 얼떨결에 조심스레 답을 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축국은 미래의 축구와 비슷한 놀이긴 했는데, 연오랑이 보기엔 물컹한 가죽공으로 차고 노는 놀이를 전부 통칭하는 걸로 보였다.

딱히 명확한 규정이 있는 건 아니고, 축구처럼 골대가 되는 구멍에 넣는 것, 족구처럼 네트를 넘기는 것, 제기차기처럼 공을 돌리는 것 등. 이것저것을 전부 축국이라 불렀지.

‘이것도 따지고 보면 보병훈련의 일환으로 만든 거잖아? 열심히 뛰어다녀야 도움이 되니까, 미래의 축구 비슷한 방식으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일단 축국은 합격.”

규칙이야 지금의 규칙과 미래의 규칙을 대충 섞어서, 보병훈련용으로 써먹을 수 있게 만들면 그만이다.

‘다른 건...’

이것저것 적었다가 쓱쓱 지우기를 반복했다.

스포츠는 하는 스포츠와 보는 스포츠로 크게 구분할 수 있고... 하는 스포츠의 경우. 모든 백성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제약이 적은 게 필수다.

‘게다가... 생활체육을 통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체력적으로 완성된 미래의 군병들이잖아?’

이런 음흉한 목적을 놓고 바라볼 때, 마음에 드는 건 구기종목이 아니라 올림픽종목과 같은 맨손체육이 더 괜찮을 것 같다.

“달리기라...”

‘하지만... 이걸 누가 하려고 하겠어. 굳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고.’

달리기로 시합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과연 쉽게 받아들일까.

그거 잘한다고 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정입장에서도 “말 타고 다니면 되지, 달리기를 왜 해?”라는 말이 절로 나올 거다.

“끄응...”

연오랑은 혼자 머리를 감싸고 골머리를 앓으면서, 이것저것 계속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내린 결론은...

“철인 3종경기는 괜찮겠네.”

“철인...?”

‘철인이 내가 아는 그 철인哲人인가?’

왠지 아닌 것 같아서, 신입관리는 연오랑의 혼잣말에 또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철인 3종경기는 나쁘지 않다. 자전거는 당연히 말 타는 걸로 대체. 달리기, 수영, 승마를 합치는 건, 사실상 훈련소에서 하는 훈련과 크게 다를 게 없지 않나.

‘미리미리 해서 민간에 퍼트리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떠냐. 사람들이 재밌어서 구경할 거 같냐?”

“글쎄요... 경주하는 건 재밌게 볼 것 같습니다.”

“저도요.”

“예... 저도 그렇습니다.”

그의 생각을 풀어놓자, 신입관리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모두가 동의를 표했다.

‘역시 박진감 넘치는 말타기가 더 재밌나 보네...’

역시나 달리기로 시합을 한다는 건, 그다지 흥미를 못 끄는 모양이다.

기타 온갖 올림픽 종목을 꺼내와 굴려보지만, 딱히 군사훈련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아. 근대 5종경기가 있었구나. 그거 잘 섞으면 뭔가 나올 거 같은데?’

철인3종경기에 사격, 펜싱을 섞은 걸 근대5종경기라 부르는데, 이거야 말로 딱 맞지 않나. 사격은 궁술로 바꾸고, 펜싱이야 지금도 칼질 훈련하니까 괜찮아 보인다.

‘일단 이것도 적어놓자.’

혼자 희희낙락하며 열심히 연필을 놀리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세 사람 모두 관심을 보인 건, 다름 아닌 승마.

‘말 타고 하는 스포츠라...?’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 무섭게, 연오랑의 후두부에서 강렬하게 치고 나오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이건 아마 모두가 좋아하지 않을까.

“격구는 어떨 거 같냐?”

“그건 좋습니다! 아앗!”

아니나 다를까. 입을 떼기 무섭게 신입관리가 재깍 말을 보탰고, 녀석은 자기가 말을 하고도 주제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냉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당신은?”

“격구는 최고죠.”

역시나 말타기를 좋아하는 공주답게, 그녀도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고려 때부터 기병훈련의 일환으로 장려된 격구는 조선사람 모두가 환호하는 스포츠 아닌가.

그걸 볼 기회가 워낙 적어서 그렇지, 만약 마음껏 볼 수만 있다면 신분을 가릴 것 없이 전부 환장할 거다.

과거, 조정에서 “격구를 그만 해라!”라고 외쳐댔던 건... 격구가 문제가 아니라 태종이 하도 노는 걸 좋아하니까, 격구 핑계대고 그만 놀라고 반대했던 것.

고려 때에는 격구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격구장을 화려하게 짓거나 격구기구를 과도하게 치장해서 문제가 됐던 거지, 격구 그 자체가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흐음...”

‘하긴 나도 가끔 봤지.’

연오랑도 착호군과 육군을 이끌 때, 군병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지들끼리 격구 하는 걸 몇 번 봤다.

허벅지가 짓무르고 지쳐 죽을 것 같으면서도, 기어코 놀 힘은 남아 있는 걸 보며 혀를 찼지.

거의 흡사한 운동을 하면서도 훈련과 유희의 마음가짐은 확실히 달랐던 것 같다.

“좋아. 격구도 합격.”

“넵!”

“합격.”

뭘 합격했는지도 모르면서, 다들 박수를 치며 일단 연오랑에게 동조했다. 그만큼 격구는 재밌으니까.

‘그리고... 말하면 당연히 경마 아니겠어?’

“경마도 좋을 거 같은데...”

“...?”

다들 눈에 물음표를 그렸고, 연오랑은 가볍게 풀어놨다.

“음... 재밌을 것 같네요?”

“그럴 거 같습니다. 안 그래도 말 타는 건 신나는데, 경주를 하면 더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다들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있겠나. 사람보다 큰 말이 육중한 몸을 흔들며 땅을 박치고 흙을 튀기며 달리는 것. 그것 자체만 구경해도 박진감 넘치고,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걸 경기로 만들어 경쟁한다? 생각만 해도 엄청나게 재밌을 것 같다.

‘격구와 경마에 딸려오는 부수적인 것도, 만만치 않게 많단 말이지.’

만약 이게 군문이 아니라 민간에 풀린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원래 역사에서처럼 말 품종개량에 힘쓰고, 기타 마구간이나 말의 처우, 수의사 등등의 실력도 함께 성장할 것 아닌가.

말박이의 나라를 꿈꾸는 연오랑과 두 왕이라면, 적극 찬성할 거다.

‘호조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걸?’

시대가 시대니 만큼 도박도 종류가 많지 않지만, 경마가 시작되면 당연히 내기도박이 성행할 것 아닌가.

이걸 미래처럼 나라에서 직접 관리하면, 공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다.

‘게다가... 근대5종경기와 경마를 합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과거의 무과시험과 다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닌가.

말 타면서 활 쏘고, 창 휘두르고, 장애물 넘고, 등등을 채점기준으로 삼아 경기를 만들면, 이 또한 꽤나 볼만한 볼거리가 될 것 같다.

“음... 이것도 섞어보면 어때요?”

공주는 서신 중 하나를 흔들며 연오랑에게 내밀었다.

저 먼 함흥에서 온 서신으로, 매사냥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던 서신.

“매사냥?”

“예. 이것도 잘 꾸려보면, 뭔가 놀거리가 되지 않겠어요?”

“흐음...”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매사냥은 이 시대 최고의 유희잖아?’

연오랑은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매사냥을 미래의 스포츠와 비교하면 견줄만한 게 없고, 굳이 억지로 가져다붙이면 부자들의 요트놀이와 비교될만할까.

그 정도로 더럽게 비싸고, 하는 사람도 몇 없다.

“하지만 충분히 눈요기는 되겠지... 너 매사냥하는 거, 한 번도 못 봤지?”

“예? 예.”

뜬금없이 튄 질문에, 신입관리는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거 구경하면 재밌을 거 같냐?”

“그렇겠죠...?”

매사냥을 본적이 있어야 답을 하겠는데, 본적이 없으니 그저 막연히 상상하고선 긍정의 답을 꺼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