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챕터39. 탄생하다 (8)
“이거면 잘난 집안도 꼼짝 못할 정도로, 체면을 살릴 수 있는 수단이 될걸요?”
공주는 연오랑의 귀를 간지럼피우며 귓속말을 날렸다.
“아...”
그녀는 이걸 스포츠로서 떠올린 게 아니라, 아까 말하던 체면치레용으로 먼저 떠올린 모양이다.
‘틀린 말은 절대 아니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매사냥이 민간에 허락됐다지만, 근본은 고려 왕족과 귀족들이 하던 스포츠다.
다만 여전히 조정의 눈치가 보이고, 달리 들어갈 돈이 많아서 관심을 적게 보인 건데... 이걸 대대적으로 풀어서 놀리면, 죄다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 거다.
백성들도 약아서. 자기 편할 때는 양반이라고 치켜세우고, 불편할 땐 그깟 양반이라고 까 내리지 않나.
“옆 마을 누구집안에선 매사냥을 하면서 눈을 즐겁게 해주던데, 우리 동네에는 매사냥 하는 집안도 없네? 양반 맞아?”라는 성토가 절로 나오지 않을까.
‘보는 스포츠로서 격구나 경마, 매사냥 모두 나쁘지 않아.’
“이걸 전부 대회로 만들어서 상금을 걸면 더 재밌겠지?”
“대회요?”
“상금... 말씀이십니까?”
다들 눈이 빙글빙글 돌아갔다.
공동체의식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그에 맞게 지역연고지 스포츠 팀을 만들어주면 되는 것 아닐까.
“아까 말하던 것의 연장선이야.”
“...?”
“후원제도.”
“아...! 그러겠네요!”
이번엔 연오랑이 귓속말을 날리자, 공주는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고서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미래에도 스포츠 팀의 구단주는 나름 명성도 날리고, 사람들에게 환호와 원성도 받고 그러는 존재 아닌가.
만약 격구, 경마 등의 팀이 만들어지고, 그게 현민들의 관심과 환호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그 팀의 재정을 지원해주는 집안에게도 호감을 표시할 거다.
백성들은 출신에 상관없이 뭉칠 수 있는 매개체와 즐길 거리가 생기는 거고, 현민들이 호감을 표해봤자 스포츠 팀 때문에 목숨을 걸고 충성할 일은 없다.
양반가문은 권세와 재물을 얻진 못하지만 명성은 쌓을 수 있고, 조정은 도박수익을 통해 돈을 벌고, 나라전체로 보면 저절로 말타기 문화의 확산과 말 사육기술 등을 발전시킬 수 있다.
“여러모로 나쁠 건 없는 거지.”
“확실히 그럴 듯 하네요.”
공주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왕 대회를 만들 거면, 단체 대회 말고 다른 대회도 만들어야지. 돈 많이 안 들고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대회.”
연오랑은 그리 말을 하고선, 히죽 웃었다.
왜 웃나 해서 봤더니, 그는 공주가 들고 있던 또 하나의 서신. 예산에서 올라온 서신을 넘겨받아 조목조목 짚어갔다.
“석전 대신 칼싸움은 어때? 단체 칼싸움은?”
“...?”
“... 에엑!”
이건 뭔 엉뚱한 말인지 몰라,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특히나 신입관리는 이게 무슨 역모라도 꾸민다고 생각하는지, 낯빛이 밀가루처럼 하얗게 변했다. 과장해서 해석하면, 태종이 없앤 사병을 나라에서 키우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뭘 그렇게 놀라. 내가 열심히 무사부를 키워서 지방으로 뿌렸는데, 성과가 없어요. 성과가.”
“...”
탓을 하는 건 아니지만, 신입관리는 연오랑이 자신을 타박하는 것처럼 들려서 자라목이 됐다.
이미 부인운동법이라고 해서 요가가, 양생법이라고 해서 도수체조와 맨손체조가 양반,호족을 넘어 민간에도 퍼진 상태다.
백성들 입장에선 장수하고 싶어서 운동하기도 바쁜데, 농사일에 도움도 안 되는 칼질을 뭐 하러 배우려 할까.
그나마 승마는 언제가 됐건 쓸 일이 있지만, 칼질은 전혀 아니올시다.
무관을 꿈꾸는 이들 아니면 당연히 관심이 적었고, 그래서 무사부는 파리만 잡고 있던 거지.
‘하지만 이러면 곤란하단 말이지.’
연오랑은 사태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다.
지금도 총통이라고 해서 핸드캐논 형태의 개인화기가 존재하긴 하지만, 제대로 써먹을 만한 개인화기는 화승총이 등장하고 부터다.
그게 나오려면 앞으로도 백년은 더 남았고, 설령 화승총이 등장하더라도 후장식연발소총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칼질과 기병은 전쟁의 주역이었다.
칼질이 무용지물이 되려면, 앞으로도 수백년은 남았다는 거지.
연오랑 입장에선 무기술을 모든 백성들이 가볍게 받아들이게 만들고, 또 조선이 문과 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함께 성장하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이 무를 키우는 일을 절대 포기할 수 없고, 그 시작이자 주춧돌이 바로 무사부를 통해 향교에서 무기술을 전파하는 것.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그 필요성과 의의를 찾기 힘들다는 거지.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조선제일검술대회를 열면 어떨까 싶은데? 개인전도 있고, 아예 현 단위의 단체전도 있는 거지. 또 모두가 참여해야 하니, 연령으로 나눠서 소년부, 성년부 등으로도 나누고.”
“음...”
“끄응...”
뭐랄까.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말이라서 그럴까? 다들 이해를 쉽게 하지 못해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게 쉽게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먹고 살기 바쁜 백성들은 무술에는 크게 관심이 없지 않겠습니까...?”
“네가 보기에도 그러냐?”
“...”
콕 집어서 되묻자, 신입관리는 답을 못하고 다시금 목이 움츠려들었다.
“조선제일궁술대회는?”
“그건... 괜찮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활쏘기는 조선 선비라면 당연히 함양해야 되는 능력이고, 조선이 건국된지 얼마 안된 이 시대에도 그러했다.
심심하면 마음 수양한답시고 활터가서 활을 쏘는 양반,호족들이 적지 않으니, 이건 나름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까.
남들과 경쟁하려고 활을 쏘는 건, 활쏘기의 본래 목적에 맞지 않다고 입을 놀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야 엄청난 상금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말라고 하면 되는 거고, 하고 싶은 사람들은 하게 해주면 그만 아니야?”
“그야 뭐... 그렇게 따지면 그렇겠죠?”
공주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단 한번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면 이 무술대회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조선제일창술대회, 조선제일월도대회, 조선제일마상무술대회 등등. 아니면 조선제일무술대회로 통합해서 대회를 열어도 되고.”
“음...”
“얼마나 참여할지 모르겠지만... 재미는 확실히 있겠네요?”
연오랑의 통큰 스케일에 다들 혀를 놀리면서도, 한편으론 내심 긍정의 마음이 싹을 피웠다.
그저 말 타는 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무려 칼싸움을 하는 걸 대놓고 구경한다고?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쾌락을 자극하는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괜히 콜로세움에서 검투사가 인기를 끌었겠어.’
연오랑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만만했다.
민간에 무술이 퍼져서 하는 스포츠로 발전하는 건 둘째 치고, 일단 보는 스포츠로서는 엄청난 관심을 이끌어낼 거다.
이게 성리학의 기조에 맞지 않다고 떠들어댈 근본성리학자들도 요샌 보기 힘드니까... 조정에서도 마냥 나쁘게 보진 않을 거다.
“그렇게 입상한 출신에게는 거창한 상금과 표창장을 주고, 만약 선수를 배출한 향교와 현에 금전지원을 함께 하면... 백성들도 관심을 갖지 않을까?”
“음...”
“끄응.”
확실히 다들 이 부분은 확신이 없는지, 끙끙 앓면서 대답을 쉽게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차피 백성들에게 놀거리를 보여줄 의도라면, 다른 대회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공주는 그리 말을 하고선, 한편으론 다르지만 한편으론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장인들이 만든 물건을 뽐내는 대회를 하는 건 어때요?”
“아...!”
‘기능장올림픽?’
연오랑은 번뜩 떠오른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환히 웃으며, 공주의 손을 잡고 흔들어댔다.
“대단한데?”
“히히.”
과연 공주의 머리는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다. 용케도 아까부터 계속 이야기 하고 있던 장인과 지금 말하는 대회를 엮어냈다.
요새 안 그래도 신학문이 대두되면서, 온갖 직업이 다 학문화되고 있지 않나. 이걸 응집해서 대회를 열면, 백성들 모두가 장인을 보는 눈이 확실히 달라지지 않을까.
단순히 장인이 돈을 잘 버는 걸 떠나서, 나라에서 인정받는 직업이 되는 거지.
“지금껏 조정이나 왕실에서 민간 장인에게 직접 상을 내려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잖아요? 이걸 진행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겠어요?”
“분명 그럴 거야.”
신량역천인과 천민이 죄다 사원이 되어 양민이 되었어도, 아직도 뭔가 서로 응어리진 게 있을 거다.
양반과 양민은 “천한 놈들.”이라고, 천민은 “능력도 없으면서 거드름만 부리는 놈들.”이라고 속으로 같잖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잖나.
헌데 무려 왕실이 직접, 양반도 받기 힘든 상금과 표창장을 하사하면 분위기가 어떻겠는가. 스포츠대회 따위는 비교도 알 될 정도의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를 거다.
“그렇겠지?”
“예. 분명 그럴걸요. 게다가 만약 장인을 배출한 기업집안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주 그냥 난리가 날 걸.”
연오랑과 공주는 미래를 상상하며 함박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전국에 명성을 떨쳐 체면이 치솟는 건 당연한 거고, 왕실이 보증하는 물건이니 그야말로 돈을 갈퀴로 쓸어 담지 않겠나.
그로인해 장인의 처우를 최고로 해주는 건 당연할 거고, 덩달아 장인에 대한 인식 또한 한번 더 긍정적으로 바뀌게 될 거다.
“당장 생각나는 것 만해도, 음... 조선제일 비녀대회? 이건 조금 이상한가? 조선제일 장신구대회? 아무튼. 이것 말고도 온갖 것을 다 대회로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지금 있는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가방도 그렇고, 가죽도 그렇고. 심지어 이 저택도 대상이 될 걸요?”
“그렇지! 닥치는 대로 가져다 붙여서 대회를 만들 수 있을걸? 이러다 하도 놀거리가 많아서 뭘 봐야할지 고민하는 거 아냐?”
“헤헤.”
공주와 연오랑은 실없이 웃어댔고, 신입관리는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정확히는 모르겠다만 말 그대로 장인들이 실력을 겨루는 대회가 만들어진다면, 그 또한 한바탕 즐길 수 있는 유흥거리가 될 테니까.
“좋아. 좋아. 조선제일요리대회도 있겠네? 조선제일사냥대회? 이건 조금 힘들까? 또 뭐가 있을까...”
연오랑은 신나서 공책에 빼곡하게 낙서를 시작했고, 공주는 물론이고 유 집사도 평소에 품고 있던 아이디어를 덧붙였다.
이윽고 한바탕 아이디어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 잠시 열기가 가라앉자. 이제 문제점이 눈에 들어왔다.
다 좋은데, 이걸 어디서 어떻게 하냐는 것.
“이 서신의 주된 내용도 그거였죠.”
공주는 예산에서 올라온 서신을 다시금 짚으며 입을 열었다.
‘음... 조금 이르긴 한데, 이걸 지금 시작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두들기며 수지타산을 맞춰보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측해봤다.
의무교육은 근대국가가 형성될 시기에 시작됐으니, 앞으로도 수백년 후에나 진행될 이야기다.
허나 문제 아닌 문제라면, 이미 북방에선 의무교육에 준하는 교육을 이미 하고 있다는 거다.
사실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말과 조선글을 모르면 수십만명의 여진인을 어떻게 조선인으로 만들겠나.
들판에 나가 채집하고 약탈하고 사냥하고 먹고 살던 여진인에게 직업교육 및 사회화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면, 이들이 조선에 정착이나 할 수 있을까.
하여 귀화교육당과 직업교육당은 수년간 온갖 사건사고를 겪으면서 경험을 축적했고, 큰틀에서 보면 미래의 의무교육과 비슷한 커리큘럼을 얼추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문제는 역시나 돈.
‘하지만... 가능성이 있어.’
연오랑은 지금껏 논의했던 스포츠를 떠올리며,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향교는 관아에 부속되어 있지만, 이걸 아예 떼어서 미래의 학교처럼 만들면 어떨까.
못 쓰는 땅은 어디든 있을 테니, 그 땅에 운동장을 만들고 집체교육이 가능한 거대한 향교를 만드는 거지.
“음...”
연오랑은 공책에 향교, 스포츠, 교육을 그려놓고, 삼각형으로 선을 죽죽 그어가며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어나갔다.
착호군 시절부터 만든 연병장이 몇 개던가.
황무지나 다름없는 맨땅을 고른 후에, 큰 돌은 치우고, 작은 돌은 갈퀴로 솎아내고, 무거운 돌바퀴와 쇠추를 굴려서 잡초도 피어나지 못하게 단단히 또 평평하게 다지면 끝.
결국 향교운동장이라곤 하지만 사실은 축국장, 경마장, 격구장, 매사냥장이고, 또 어떨 때는 무술대회장이 되고, 온갖 기술대회장이 되는 거지.
‘어차피 향교는 현에 하나밖에 없는 거고, 현에 하나쯤은 그러한 놀이공간이 있는 게 그렇게 부담되는 건 아니잖아? 종합운동장으로 써먹으면서 대여비도 받고, 만약 경마가 진행되면 그 수익을 향교운영비로 돌릴 수도 있고.’
이리되면 “어찌 나라에서 도박을 허용하고 사행을 방조하냐!”라는 의견에 대해서, 반박할 논리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걸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백성들 입장에선 양전사업으로 인해 죄다 전답이 깔려서 딱히 모일 곳도 없는데, 향교운동장에 모이면 여러모로 쓸모 있지 않을까.
“어때?”
연오랑의 기대 섞인 물음에.
“오...!”
공주는 감탄을 하며 엄지를 치켜들었고,
“흐업...”
신입관리는 그렇게 미친 듯이 불어난 향교를 떠올리며 ‘이걸 관리하라고? 사람이 몇이나 필요할까! 으악!’이라며 신음을 내질렀다.
“그... 다 좋은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백성들을 억지로 향교로 데려올 순 없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겠지만, 보내기 싫어하는 백성들도 몇 없을 걸? 만약에 무술교육을 받으면 점심을 공짜로 주면 어떨까?”
“예에?”
“엥?”
모두는 엉뚱한 말에 자기도 모르게 요상한 신음을 참지 못했고,
“흐흐.”
연오랑 또한 음흉한 음모자마냥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