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81화 (281/538)

281. 챕터39. 탄생하다 (10)

“생각할수록 나쁘지 않아. 어차피 관노비 속량시키는 건 모두가 바라고 있으니, 몇 되지도 않는 관기를 풀어주는 건 어렵지 않겠지. 필요하면 그때그때 조정에서 고용하면 그만이고.”

“음...”

“흐응.”

무려 조정과 왕실의 행사에 참여해야하니, 관습도감에서 얼마나 빡세게 관기를 교육시키겠는가. 당연히 관기가 되는 건 힘들고, 수준도 꽤 높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민간에 풀리고 신분도 완전히 양민으로 격상되면, 이들 또한 어떤 식으로든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칠게 분명.

‘여기에 살짝 관여해서 약을 치면, 종합예술학교가 만들어지는 거지.’

안 그래도 지금. 돈이 돌고, 물류가 모이는 큰 고읍에선 우후죽순 민간기생이 생겨나고 있다.

기생이나 손님이나 둘 다 제대로 놀 줄도 몰라서 흥청망청 저열하게 노는 게 태반인데, 만약 관기가 민간시장에 풀린다면 어떻게 되겠나.

쪼로록 달려와서 수준 높은 기예를 배워가, 고향에서 제대로 돈을 쓸어 담으려고 할 게 분명.

‘또 떠돌이 재인들까지 긁어모아서 민간 음악을 학문화하고 교육시키면, 기생뿐만 아니라 출장공연단이 만들어질 수도 있겠지.’

이렇게 된다면 스포츠 경기뿐만 아니라 공연도 함께 곁들일 수 있으니, 따로 하든 합쳐서 하든... 뭐가 됐든 놀거리 하나만큼은 끝내 줄 거다.

“흐...”

연오랑이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히죽 웃고 있자, 다들 “또 무슨 엉뚱한 상상을 하는 거냐.”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가고,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을 정리한 연오랑은 두툼한 제안서를 작성해 조정에 보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교육, 체육, 놀이를 다 섞어버린 거창한 개혁안이니, 조정에서 난리가 난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러거나 말거나 연오랑은 태평하게 눌러 앉아, 출산일만 기다렸다.

항상 그래왔듯이 연오랑은 기획과 체계만 만들고, 실무는 조정에서 알아서 하지 않나. 이 정도로 떠먹여줬으면, 알아서 잘 다듬어서 실천으로 옮기는 게 조정이 할 일이다.

그렇게 겨울이 찾아왔고, 첫눈이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공주가 진통하기 시작했다.

나름 초비상사태에 돌입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연오랑은 산파와 의원을 아예 집으로 데려와 상주 시켰다.

용연현에서 연오랑의 저택보다 좋은 집은 없고, 이곳은 연오랑의 취향에 맞춰 다른 집에서 보기 힘든 온갖 생경하면서도 편리한 물건이 가득 차 있다.

산파든 의원이든, 이곳에서 숙식하면서 머물다가 환자를 보러 출장 나가는 건 오히려 환영할 일.

빨리 갔다오라고 친절하게 마차까지 붙여준 터라, 나름 팔자 좋기 지내고 있었지.

다만 연오랑의 잔소리가 조금 심해서, 그게 눈치가 보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시각각 공주의 진통과 신경질은 심해졌고, 남산마냥 부른 배는 겉에서 봐도 태아가 발을 빵빵차는 게 보일 정도로 꿈틀거렸다.

그 체력 좋던 공주마저도 요새는 조금 피로를 느끼는 듯 했고, 연오랑은 더욱더 철저하게 집안을 단속했다.

열심히 쓸고 닦아 청결을 유지하고, 항상 끓인 물을 준비해 소독할 준비도 하고, 언제든 아기를 받을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놨다.

“아악!”

며칠 더 지나자 드디어 양수가 터지면서 산통이 시작됐고, 기다렸다는 듯이 산파와 의원이 함께 달려왔다.

이때만을 기다렸는데 머뭇거릴 리가 있나.

주름 가득한 노파와 턱수염마저 싹 밀어버린 청년의원은, 어느덧 서로 친해져서 호흡을 맞춰가며 공주를 이끌었다.

“음...”

“흠.”

연씨 삼형제는 휴가를 끝마치고 원산으로 떠난 지 오래.

연오랑과 유 집사만이 산실 밖에서 대기하며, 제자리에서 빙빙돌며 걸음을 옮겼다.

감히 가까이 오진 못했지만, 저택의 사용인들 또한 멀리 떨어져서 귀를 기울이며 산실을 지켜봤다.

“오래 걸릴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음...”

연오랑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문제없겠지?’

머릿속은 자기도 모르게 복잡해졌다.

어느 신이 농간인지 모르겠다만 그는 이 낯선 세계에 떨어져 태어났고, 전설캐릭터의 능력을 어느 정도 품고 있다.

자신의 자식이 그걸 이어받을지 아닐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몸은 튼튼히 태어나지 않을까?

이런 낙관적인 전망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문제일지 모르니... 반대로 잘못 되는 건 아닌지 걱정과 두려움이 밀려온다.

‘준비는 더 할 수 없을 만큼 잘 했잖아?’

애써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혹시 몰라서 석탄 대신 땔감으로 산실을 꾸준히 덥혀왔고, 살균을 한답시고 비싼 주정까지 만들어서 나름 열심히 소독도 해왔다.

아무리 이 시대의 의술이 개판이라지만, 깨끗이 소독한 손으로 태아를 받으면 큰 문제가 없을 테니... 그저 믿을 수밖에.

“...”

“...”

헌데. 그의 염원이 닿은 건지, 아니면 공주가 원체 튼튼했던 건지 모르겠다만...

“응애!”

“...!?”

공주가 산통을 시작한 지 고작해야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아, 벌써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어...?”

“그러니까.”

연오랑이나 유 집사나, 둘 다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야기를 듣기론 반나절이 걸리기도 하고 초산은 더 오래 걸린다고도 했는데... 전혀 다르지 않나.

헌데 그게 끝이 아니다.

“아악!”

“응애!”

공주의 기운찬 신음소리와 함께, 낯선 울음소리가 함께 섞여 흐르는 게 아닌가.

“어라...?”

‘이 돌팔이 놈들.’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다.

진맥을 하루이틀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쌍둥이인 걸 모를 수가 있나. 어쩌면 이 또한 자신의 혈통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발을 구르고 말았다.

어쩐지 배가 너무 큰 게 아닌가 싶었는데, 진짜로 쌍둥이를 품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

이윽고 산실에선 신음소리가 잦아들고, 후끈 달아올랐던 긴장감이 고요함으로 바뀌어 부산스러운 잡소리만 들려왔다.

“드... 들어가야 되나?”

“글쎄요...?”

유 집사가 비록 상궁이라지만, 그녀라고 언제 애를 받아봤겠는가. 둘 모두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섰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살포시 문이 열리며 환호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감!”

“나리! 아드님이십니다!”

이미 정리까지 끝냈는지, 피를 깔끔하게 닦은 아기가 포대기에 겹쳐 의원과 산파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아닌가.

“어...?”

“들어오셔도 됩니다.”

연오랑은 말을 듣기 무섭게 후다닥 발을 놀려 안으로 향했고, 혹시나 찬바람이 들어 올까봐 냉큼 문을 닫았다.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하지만 코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시선은 팔뚝만큼이나 작은 두 핏덩이를 번갈아가며 오갔다. 의원이 활짝 웃는 걸로 보아 아기들이 문제는 없어보였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녀석들은 옹알이를 하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

아기에게서 시선이 떨어져 공주에게 이어졌는데...

“...”

그녀 또한 이야기로 듣고 각오했던 것과 달리, 너무도 빠르게 순산한 게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고통으로 얼굴이 찌푸려 있으면서도, 놀라고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예...”

공주는 목소리마저도 기운이 실려 있었고, 연오랑은 냉큼 공주 옆에 앉아 땀 흘린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겼다.

“대감.”

“공주자가.”

둘 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 산파는 겁도 없이 냉큼 연오랑에게 아기를 넘겼고, 의원은 공주의 품에 다른 아기를 넘겨줬다.

“두 분 다 아드님이십니다.”

“아...!”

“어...”

공주는 안도의 한숨과 감탄을, 연오랑은 남아든 여아든 상관하지 않았기에 얼떨떨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

‘내 아이란 말이지?’

면포를 뚫고 느껴지는 온기는 생각보다 훨씬 뜨거웠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가벼워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민망했다.

그저 조심스럽게 품에 앉자, 자기도 모르게 힘이 풀려 벽이 기대어 다리를 뻗고 흐트러지고 말았다.

“당신 아기군.”

“당신 아이죠.”

연오랑은 힘없이 하지만 활짝 웃으며 중얼거렸고, 공주 또한 아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하하...”

연오랑이 웃기 시작하자 공주도 따라 웃었고, 이내 의원과 산파도 웃음이 전염되어 산실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

조선 38년. 세종 11년.

새해가 밝고 설이 지난 지 오래건만,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은 새하얀 눈밭과 그 틈을 비집고 피어오른 푸른 싹으로 가득했다.

저 멀리 삐죽삐죽 솟아올라 있는 건 겨울밀과 겨울보리일 테고, 저기 납작하게 푸르스름하게 덮여 있는 건 상추,배추,부추일 거다.

“여기서도 소채를 키우는 모양이군?”

“그런가 봅니다. 저렇게 대규모로 키우는데 팔리긴 팔리는 걸까요?”

“나름 팔릴 겁니다. 강 건너면 바로 한성이니까요.”

“음...”

곡물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굴렀던 게 얼마 전 같은데, 낱알이 열리지 않는 소채를 이렇게 전답 가득 키울 수 있다라... 세상 참 놀랍게 변했다.

눈밭을 가로지르며 느긋하게 달리는 이들.

단단히 챙겨 입었는지 두툼한 가죽장포에, 갓을 대신해 귀를 덮는 모직모자를 쓴 이들이 느긋하게 말을 몰아갔다.

헌데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이 심상치 않다.

완전무장한 연대병 일개소대가 함께 하고 있는데, 검은 두정갑의 소매끝과 어깨에는 황금빛을 뿌리는 견장이 달려 있었다.

군부가 개편되면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궁궐과 한성의 수비를 도맡아 하는 이들. 이제는 금군으로 이름을 바꾼 내금위다.

“아직 멀었나?”

“이제 곧 도착합니다. 저기 보이십니까?”

앞서던 금군 소대장은 저 멀리 산기슭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가리켰다.

청명한 겨울하늘이 무색하게도, 사방에서 피어오른 검고 흰 연기가 사방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기가 저렇게 많이 피어오르는 걸 보면, 가마가 한둘이 아닌가 보군?”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못해도 다섯개는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

“제련 가마가 그렇게 많으면, 길도 제대로 깔았겠네?”

“그렇습니다.”

어째 이 길을 몇 번 와본 건지, 금군 소대장은 망설임 없이 답을 털어놨다.

“자네들이 고생이 많군.”

“...”

뜬금없는 공치사지만 맞는 말이긴 한터라... 금군 기병들은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 말았다.

예전 같았으면 금군이 이런 수송 작업을 하기나 했을까. 시대가 변해도 꽤 많이 변해서, 이젠 익숙해졌다고 해야 할 거다.

한참을 그렇게 나아가자, 드디어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빼곡하게 깔린 전답을 뒤로하고, 살얼음이 낀 대교천을 따라 이동하자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망월산이 눈에 들어왔다.

대교천은 고려 때에 만월산에서 발원한 하천을 개조해서 만든 하천으로 흔히들 굴포천이라 불렀는데, 부평벌을 가로질러 한강으로 이어졌다.

미래에는 이걸 인천 제물포쪽으로 이어 붙이려다가 실패했는데, 지금은 없던 일이지.

“자갈도로군.”

“예. 최근에 만들었습니다. 부평벌에서 한강으로 가는 배가 꽤 많은데, 겨울에는 사용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만월산에서 포구로 이어지는 곳까지 자갈도로를 깔았습니다.”

“음...”

금군 소대장의 설명을 들으며, 계속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아갔다.

이윽고 망월산 근처로 도착하자, 시끌시끌한 소음과 함께 찬기운마저 날려버릴 후끈한 열기가 이따금씩 산바람을 타고 내려왔다.

“정말로 가마가 많은가 보군?”

“그런가 봅니다. 형님.”

“오...”

생각지도 않은 따스한 바람을 맞아서 일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아가던 세 사람 모두 얼굴에 미소가 잡혔다.

드디어 산기슭에 도착하자, 사방에 울퉁불퉁 거대한 왕릉처럼 솟아 오른 가마가 저 멀리 아른 거린다.

낯선 손님이 온 걸 알아차린 걸까? 저편에서 조랑말처럼 작은 대마도마를 타고 누군가 황급히 달려왔다.

“형님들!”

“풍안군. 자네가 직접 나왔나?”

“헤헤. 오랜만에 뵙는데 당연히 제가 나와야죠.”

청년. 풍안군 이효손은 활짝 웃으며, 세 사람을 반겼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먼 부평광산까지 찾아온 이들은 정종의 자식들. 의평군 이원생, 선성군 이무생, 덕천군 이후생 형제였기 때문이다.

“자네들은 쉬고 있게.”

“예.”

금군 기병을 숙소로 떠나보낸 후에, 이효손은 세 사람을 이끌고 화전민촌인지, 가마터인지 헷갈리는 부평광산으로 안내했다.

원래 역사에서 부평광산는 일제 강점기에 제대로 개발이 되지만, 이 시기에도 사람들은 이곳에 광맥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대교천 상류에서 사금을 얼추 채취할 수 있었으니까.

“할 만한가?”

“예.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섞인 꽤나 깊은 질문이건만, 이효손은 히죽 웃으며 답을 했다.

“...”

‘음...’

녀석의 속마음을 읽어낸 이원생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꾸를 대신했다.

과거. 개혁이 시작될 때 공신전은 조정에 빨려 들어갔다. 이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다름 아닌 이효손의 할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의안대군 이화의 집안이었다.

태조의 이복동생인 이화는 태조, 태종을 도와가며 몇 번이고 공신에 올랐으니, 종친인 걸 떠나서도 엄청난 양의 공신전을 하사받지 않았나.

아무리 수익성 높은 염전기업을 허가받았어도, 그 땅을 다 놓친 건 분명한 타격이었고... 하여 다른 돈벌이를 찾아 눈을 돌려 낙점한 사업이 다름 아닌 광산기업.

이화의 자식이자 왕실의 어른 역할을 하던 이징, 이담 형제들이 세상을 떠난 지금. 친손자라 할 수 있는 이효손이 이곳 부평광산을 직접 꾸려가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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