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82화 (282/538)

282. 챕터40. 대비하다 (1)

“형님들은 어떠십니까? 내수사 일은 할 만하십니까?”

“...”

“뭐... 나쁘지 않지.”

“아무렴. 뙤약볕에서 바닷물 마시는 것보단 산천유람을 하는 게 훨씬 낫지.”

이원생은 입을 다물었지만, 이무생, 이후생 형제는 히죽 웃으며 혀를 바쁘게 놀렸다.

‘녀석들...’

원래 역사라면 정종의 아들은 이원생 빼곤 죄다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지만, 지금 역사에선 이들 또한 바뀌었다.

이 시대엔 종친이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종친사환금지법이 없었다.

태조의 형제인 이화도 관직생활을 했고, 태종의 사촌인 이징, 이담도 마찬가지. 태종의 서자이자 세종의 이복동생인 이인도 멀쩡히 관직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하지만 할 수 있다고 해서, 눈치가 안 보이는 건 아니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종친이 명망과 신망을 얻으면 왕위를 위협하기 마련이니, 왕 입장에선 친족이니 힘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거지.

그래서 미래에는 한직이나 명예직만 던져주는 것에 그치고, 종친들은 알아서 눈치 보며 놀고먹고 지냈다. 그래야 신료들이 “저놈 역심을 품은 놈입니다!”이러면서 괜한 오해를 하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이래서 종친 중에서 성질이 개차판인 이들이 계속 나왔던 걸지도 모른다.

열심히 공부한들 쓸데도 없는데 오히려 의심만 받고, 놀고먹으면 의심이 사라지니... 인생 막 사는 거지.

헌데 개혁이 시작되고, 공신전과 궁방전 등의 각종 특혜가 날아가자 놀고먹는 시절이 끝났다.

왕실에선 “이젠 너희가 알아서 먹고 살아야 한다.”라고 분명히 못 박았고, 염전기업을 허가했으니 이거 운영하다가 망해도 왕실이 책임져 주지 않겠다는 거지.

결국 다들 어떻게든 머리를 굴려가며 살길을 찾았고, 몇 안 되는 종친들은 하나같이 기업을 일구기 시작했다.

“헌데, 형님은 염전기업에서 아예 손을 놓고 내수사로 들어가신 겁니까?”

“아니. 나는 그냥 구경와봤네. 이 녀석들이 영 미더워서 말이야.”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형님.”

“맞습니다. 그동안 코피 쏟아가며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이원생의 말에, 두 동생은 볼멘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허나 얼굴엔 미소가 가시질 않는 걸로 보아 진심은 아닌 모양이다.

“...”

‘아버님이 이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이원생은 두 동생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태종이 왕이 되면서 정종의 자식들은 처지가 퍽 묘하게 됐지만, 그걸 떠나서도 이원생의 동생들은 썩 잘났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오죽했으면 원래 역사에서 정종이 “명리를 구하지 말라. 시골 농장으로 물러가서 살라. 공손하고 겸손하게 자기 분수를 지키라.”라는 유언을 남겼겠는가.

그렇게 방종하게 살던 녀석들이, 늦깎이 학생이 되어 이젠 남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으니... 맏형 입장에선 흐뭇하면서도 안타까울 수밖에.

‘어려서부터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그땐 어쩔 수 없지 않았나.’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가지.”

“옙!”

상념에서 깨어난 이원생이 입을 열자, 이효손은 기다렸다는 듯이 셋을 이끌고 나아갔다.

“허허.”

“오...? 용연광산보다 더 큰 거 같은데?”

“꽤 잘 만들었네?”

목책 울타리를 넘어 광산부지로 들어가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눈이 녹아 번들거리는 나무선로는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이어져 있었는데, 저 쪽 갱도에서부터 창고로, 창고에서 제련 가마로, 가마에서 다른 보관창고로 이어졌다.

일하는 인부들의 열기도 뜨겁다.

몇몇은 조랑말이 끄는 짐수레를 선로에 올려 끌고 갔고, 저 멀리 가마터에선 후끈한 연기와 함께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창고에 가려진 저쪽 갱도에선 곡괭이질 하는 소리가 박자를 맞춰 들려오는 듯 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광부가 몇이나 되나?”

“대략 육백명쯤 됩니다.”

이효성은 히죽 웃으며 자랑하듯 가슴을 폈고.

“육백?”

“오...!”

모두가 입을 쩍 벌리며, 다시금 감탄했다.

‘과연... 의안대군께서 모은 재물이 많긴 많았던 모양이구나.’

이원생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광산기업은 초기투자비용이나 유지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기업이고, 대부분은 집안끼리 동업해 조합을 만들어 운영했다.

헌데 이걸 한 집안이 도맡고 있으니, 원래 가산이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하기도 힘들다.

“아예 이곳으로 이주한 건가?”

“예. 저 밑의 부평벌 아랫마을에 자리 잡았습니다. 인부들이 사는 마을도 함께 만들었죠.”

이원생이 무얼 묻는지 재깍 알아차리고선, 이효손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시원하게 답을 해줬다.

“가시죠. 형님들.”

“어.”

이효손은 다시금 앞서나갔다.

제련 가마는 총 6개가 있었는데, 이건 용연광산에서도 본 거라서 특별한 건 없었다. 애초에 조선의 모든 광산이 전부 용연광산을 본떠서 만들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

“은이 나오지?”

“보통은 은에 납이 함께 섞여 있어서, 납도 쏠쏠하게 나옵니다. 그 외에 금,동도 가끔씩 섞여 나오고요.”

“음...”

설명을 들어가며 계속 걸음을 옮겼고, 이윽고 제련 가마를 지나 갱도를 앞에 두고 멈춰 섰다.

“허...?”

“엄청 크잖아? 용연에서 봤던 것보다 더 큰데?”

“흐흐. 최근에는 갱도 뚫는 방법이 바뀌었거든요.”

세 사람은 사람 키 보다도 높게 뚫린 갱도를 보며, 다시금 기함을 내질렀다.

갱도라기 보단 오히려 동굴에 더 가까울 정도로 커서,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무슨 용굴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이렇게 크게 만들 필요가 있나?”

“이것저것 해보는데...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들어도, 차라리 갱도를 크게 파는 게 나중에는 훨씬 낫더라고요.”

“...?”

이효손은 뜻 모를 말을 던졌고, 두 형제는 어느새 공책과 연필을 들고서 받아 적을 준비를 끝마쳤다.

“갱도를 팔 때 가장 힘든 게, 뭔 줄 아십니까?”

“...”

모르니까 배우러 왔는데 무슨 답을 할 수 있을까. 이효손은 딱히 답을 기대한 건 아닌지, 술술 털어놨다.

갱도를 팔 때 분진이나 습기가 가장 위험하고 거슬릴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진짜 어려운 점은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시대엔 전기가 당연히 없으니 파고들면 들수록 달 없는 밤보다 더 어두워서, 눈으로 보고 파는 게 아니라 감으로 곡괭이질을 해야 하는 수준이었지.

“아... 그런 어려움이 있었군.”

“한줄기 빛이라도 더 들어오려면, 입구를 크게 만드는 게 낫죠.”

“음.”

“게다가 파다보면 결국 점점 갱도가 좁아지는데, 나중에는 허리도 못 피고 굴을 파야할 지경이 되죠. 그러면 피로가 너무 쌓여서 효율이 안 나옵니다.”

“...”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을 많이 써야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무조건 넓고 크게 파는 게 이득이다?”

“예.”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모두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저치들은 뭔가?”

이원생은 저기 갱도 옆에 있는 앞이 훤히 뚫린 통나무집을 가리켰다. 부산스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광부들이 죄다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

“쉬는 시간입니다.”

“... 다른 사람들은 일하는 데도?”

“예. 저것도 이것저것해보고 나서 결정했는데, 갱도에서 굴착하는 광부들의 피로가 너무 빨리 쌓이더군요. 계속 밀어 넣어서 파는 것보다 차라리 순번을 정해서 교대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음...”

‘곡괭이질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자기 돈이 걸린 이효손이 그렇게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분명 저렇게 굴리는 게 이득이 되니까, 저런 식으로 운영을 하는 걸 테다.

“안 믿기십니까? 들어가 보실래요? 겨울이라서 나름 따뜻합니다.”

조랑말이 끄는 짐수레가 갱도 밖으로 나오자, 이효손은 넌지시 제안했으나...

“아니. 됐네.”

“대신 엄청 습하겠지.”

다들 고개를 내젓고 사양했다.

첫 번째 갱도를 구경하고 나서 걸음을 옮기자, 저쪽 산 귀퉁이에 특이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웬 목책 비슷한 걸 세워놨는데, 대체 뭐하려고 저걸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저건...?”

“아. 때 맞춰 잘 오셨네요. 재밌는 구경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효손은 히죽 웃으며 셋을 이끌었고, 이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으로 냉큼 다가갔다. 모두의 인사를 대충 흘겨 받으며 나아가더니, 이효손은 특이한 물건을 내밀었다.

사냥창처럼 큼지막한 쇠창인데, 특이하게도 매끈하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선으로 되어 있다. 정의 머리에는 넓적한 판이 붙어 있어서, 누가 봐도 망치로 때리게끔 생긴 모양새다.

“와선정이라 부르는 물건인데, 보통 암반을 뚫을 때 쓰는 물건입니다.”

“오...”

“일반정하고 다른 점이 있나?”

“예. 이 와선을 따라서 빙빙 돌면서 파고드는데, 들이는 힘은 비슷해도 일반정보다 깨끗하게 뚫리는 편이죠.”

“끙... 무겁네?”

“통짜 쇠로 만들어졌는데, 무거운 게 당연하지 않소. 형님.”

두 형제는 만담 아닌 만담을 하며, 생경한 물건을 자세히 살폈다.

“자네. 그것 좀 보여줄 수 있나?”

“예. 여기 있습니다.”

이내 곧 이효손은 광부 복장이 아닌, 관복 비슷해 보이는 복장을 한 이들에게 뭔가를 받아왔다.

셋은 누런 종이로 쌓여진 길쭉한 막대를 유심히 살피며, 이 요상한 녀석의 정체를 짐작해봤다.

“이건...?”

“화약입니다.”

“화약?”

뜬금없는 대답에 눈이 커졌고, 동시에 생경한 복장을 한 이들에게 절로 시선이 돌아간다.

“허...? 그럼 저치들은?”

“광업부에서 파견 나온 화기병입니다. 화약을 저희 마음대로 다룰 순 없지 않습니까. 아마 앞으로 광산을 운영하게 되면, 형님들이 신세를 많이 지게 될 겁니다.”

“어.”

“오!”

두 형제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화약으로 갱도를 뚫는 건 처음 봤는데, 어째 하는 짓을 보아 이런 짓을 한두번 해본 게 아닌 것 같다.

“광산에 써먹을 정도로 화약이 충분한가?”

“그야 저도 모르죠. 다만 여유가 있으니, 광업부에서 화기병을 운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굳이 화기병까지 필요해?”

“당연하죠. 너무 많이 쓰면 다른 갱도가 무너질 수 있고, 너무 적게 넣으면 안 하니 못한 꼴이 되니,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낫죠.”

이렇게 말을 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이원생은 나중에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궁금증을 애써 접었다.

이효손의 호언장담대로, 화기병의 움직임은 꽤나 신속했다.

새로 뚫을 갱도를 미리 정해놓은 모양인지 와선정을 사용해 암반 곳곳에 깊숙한 구멍을 뚫어놨고, 화기병들은 종이로 싼 길쭉한 화약뭉치를 구멍에 쑤셔 넣었다.

심지는 미리 달아놨는지 길게 이어져 밖으로 삐져나왔고, 사방에서 날카로운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발파요!”

“발파요!”

화기병들이 요란하게 소리치며 돌아다니자, 갱도에 있던 광부들은 물론 근처에 있던 이들도 죄다 창고에 숨어들어갔다.

“아...!”

저 요상하게 생긴 목책을 왜 세워놨나 했더니, 파편을 막으려고 세워둔 모양입니다.

“자. 하나씩 챙기시죠.”

“...?”

이효손은 세 사람에게 넓적한 나무방패를 내밀었고, 셋은 “이렇게 까지 해야 되나?”하는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방패를 받았다.

“재수 없게 파편이라도 맞으면,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합니다. 형님들.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화기병을 빌릴 때 애걸복걸해야 한다고요. 손해를 안 보려면 미리미리 조심해야죠.”

“그래?”

“당연하죠. 화약을 민간에서 사용하게 해주는데, 보통 깐깐하게 굴겠습니까.”

군부가 화약에 눈이 돌아간 건, 오래전부터 익히 들었지 않나.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에, 셋은 냉큼 방패를 머리에 이고 몸을 웅크렸다.

“발파!”

“발파!”

다시금 화기병의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치이익! 이윽고 심지에 붙은 불꽃은 목책을 넘어 화약뭉치에 닿았다.

콰콰쾅! 천지가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푸다닥. 암반에서 쏟아진 바위조각이 목책에 요란하게 부딪쳤다.

방패를 들라고 했던 게 장난이 아닌지, 진짜로 손가락만한 파편이 저 멀리 하늘로 치솟아서 여기저기 떨어지는 게 아닌가.

“오...”

“아윽.”

“엄청 시끄럽군?”

화포를 쏘는 건 구경도 안 해본 셋 인지라, 얼얼한 귀를 매만지며 날아갔던 넋을 다시 붙들었다.

새로 파는 갱도도 구경한 세사람은 선로를 따라 다시 빙빙 돌며, 광산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눈으로 익히고 손으로 받아 적었다.

두 형제가 다른 광부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캐묻는 동안, 이효손은 조심스럽게 이원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입을 열었다.

“헌데... 정말로 내수사에서 운산광산을 개발하는 겁니까?”

“그럴 걸로 알고 있네.”

“지금 내수사에서 개발하고 있는 광산만 4개가 넘는데, 또 말입니까?”

“그렇다고 하더군.”

“음...”

이효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과거. 태조는 고려시절 동북면의 대호족이었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그 땅과 재산은 조정에 귀속되지 않고 국왕의 재산으로 남았다.

태종은 자신의 형제들과 태조의 형제들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가문의 재산도 정리하여 내수별좌를 만들었지.

원래 역사에선 내수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는데, 면세지인 내수사 토지를 경작하는 게 백성들에게도 이득인터라, 지주의 횡포나 세금회피를 위해서 전답을 내수사에 헌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거꾸로 가고 있었다.

세종은 몇해전부터 내수별좌를 내수사로 전환하여, 조정에서 완전히 떼어내어 독립적인 부서를 창설했다. 이는 굳이 따지자면 왕실기업과 마찬가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지.

내수사 소속의 땅은 조정에 넘기고, 천일염전을 비롯한 각종 기업체를 직접 꾸리기 시작한 거다.

세종과 태종은 연오랑이 한 말을 잊지 않았다.

양반,호족이 지주가 아닌 자본가, 기업가로 변모하게 되면, 그때 이들을 찍어 누르기 위해선 왕실과 조정이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세수는 미친 듯이 늘어가니 조정은 알아서 쑥쑥 커지고 있고, 그에 맞춰 왕실 또한 땅이 아닌 독립적인 자본력을 보유해야만 했다.

이걸 감안했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왕실기업을 만들어 키우는 거지. 그리고 다른 어떤 집안보다 자금력이 월등한 왕실은 다른 가문이 쉽게 하기 힘든 기업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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