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챕터40. 대비하다 (2)
광산기업이 그 대표적으로, 옛 명나라 시절에 조공을 바치던 산금지産金地인 단천, 영흥, 정선, 안변에 정식으로 광산기업을 만들어 채굴을 시작했다.
원래 역사에서 금,은을 조공으로 바치지 않은 건 세종대에 이뤄진 일.
지금 역사에선 명이 망한 후로 일찌감치 폐쇄했다가, 요 근래에 재개한 거지.
“왜? 운산광산이 문제가 있을 것 같나?”
“그럴 리가요. 거긴 광맥이 풍부한 곳으로 소문난 곳 아닙니까.”
“...”
원래 역사에서 구한말에 고종이 팔아먹은 걸로 유명한 운산금광이지만, 이 시대에도 사금이 나오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나.
게다가 운산금광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운산 바로 옆 창성, 삭주에도 대유동, 교동금광 등. 크고 작은 광맥이 빽빽하게 박혀 있다.
여긴 개발만하면, 분명 금을 무진장 캐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금,은을 캐낼 필요가 있을까요?”
이효손의 의문은 이거였다.
조선은 여전히 현물시장경제를 유지하고 있고, 광산을 개발한다지만 채굴한 금,은은 전부 조정으로 빨려들어가서 감감무소식이다.
광산기업이 직접 민간에 팔수도 없어서, 조정에서 전량 사들이는 중이지.
‘광산기업이 운영된 지 벌써 몇해가 훌쩍 지났는데, 여전히 사들이고 있지 않나. 민간에 풀지도 않을 걸, 그렇게 많이 쟁여놓을 필요가 있을까.’
그는 차마 이런 의문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되삼켰다.
“나야 조정에서 일하지 않으니 모르겠군. 다 생각이 있지 않겠나?”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저렇게 말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조정이 하는 일에 관심 갖기 싫다는 표현이나 다름없어서, 이효손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헌데...”
“...?”
이원생이 ‘또 뭐가 궁금하냐?’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효손은 조심스럽게 두 형제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로 내수사 생활이 괜찮은 겁니까?”
질문의 분위기가 다른 걸 느껴서일까? 이원생은 부드러운 눈길로 의아하다는 듯 바라봤다.
“... 왜 그런가? 자네는 이곳을 꾸리기에도 바쁘지 않나?”
“그... 제가 아니라 제 사촌들 중에서, 내수사에 관심이 있는 이가 있어서 말입니다.”
청탁하는 것도 아니건만, 이효손은 괜히 낯이 뜨거워서 말을 흐리고 말았다.
내수별좌가 내수사로 개편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욱 놀라운 건 내수사 경영을 내시나 왕, 조정관리가 아니라 종친들을 데려와 부려먹었다는 점이다.
왕실이 껴 있다는 점을 뺀다면, 내수사나 민간기업이나 다를 게 없으니 조정관원이 여기에 끼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 거지.
“음... 글쎄? 좋아서 있는 이들도 있고, 마지못해서 있는 이들도 있긴 한데... 그래도 다들 만족하는 편이네.”
“...”
나름 회한과 아픔이 담겨 있는 말 인터라, 이효손은 조심스럽게 위로 아닌 위로의 손짓을 날려댔다.
“마음 쓸 것 없네. 뭐... 전하께서 등극하신 후부터, 음서도 없어지고 과거시험이 바뀌었지 않나. 종친들에게 출사의 길이 열리긴 했지만... 스스로 자신 있지 않는 이상 조정관직에 오르는 게 쉬운 건 아니지. 특히나 내 또래는.”
“예에...”
오히려 이효손을 다독이듯 이원생이 히죽 웃자, 그도 얼떨결에 멋쩍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조선이 건국된 지 이제 고작 3대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종친이 많을 리가 없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팍 줄어들었다.
헌데 말하지 않았나. 왕이 아닌 종친이 능력을 너무 뽐내면 문제가 된다고.
특히나 형제들 쓰러뜨린 태종이 집권한 이상. 종친들은 바짝 엎드려 살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했지.
원래 역사에선 세종이 종친 교육기관인 종학宗學을 만들지만, 지금 역사에선 당연히 없었고.
“그리고... 우리만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종친이라고 해서 뭐 다를 게 있나.”
“...!”
차마 입에 담기도 무서운 말에, 이효손은 누가 볼까 싶어 고개를 휙휙 둘러가며 주위를 살폈다.
“어찌...”
“뭘 그리 놀라는가. 종친부에 오래 있다 보면 다 알게 되는 거지. 모두가 자네처럼 기운찬 건 아니지.”
“...”
이원생은 이효손의 아버지인 이담과 함께 종친부의 중역으로 활동하지 않았나. 분명 이효손이 모르는 종친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종친도 사람이고, 모두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건 아니다.
기업의 사장이 되어 자신의 결정 하나하나에 사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무거운 부담과 압박을 즐길 수 없고,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즐기는 것보단 예전처럼 편하게 흘러 가는대로 살기를 바라는 이도 적지 않다.
이래서 많은 양반,호족집안이 그나마 익숙한 농산,목장,농장기업을 일구는 거고.
더불어 염전기업을 허가받았지만, 모든 종친이 전부 부유한 건 아니지 않나.
결국 어중간하게 기업을 일굴 바에는, 혹은 형제자매가 많아 상속받을 재산도 적다면, 차라리 내수사의 사원이 되는 게 훨씬 낫다고 보는 종친도 적지 않았던 거지.
“그렇군요...”
“그렇네. 내 항렬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지만, 자네 항렬은 다르지 않나. 앞으로는 다들 열심히 살게 되겠지.”
“...”
왠지 모르게 무거운 말에, 이효손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효손은 세종과 같은 항렬이고, 이들은 지금 조선의 허리가 된 운석핵꿀밤 세대의 대표주자들 아닌가.
종친 사이에서도 세대차이가 나는 터라... 젊고 어린 종친들은 내수사에 들어가기 위해서, 혹은 가업을 키우기 위해서 눈치 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추세였다.
다만 선대의 아픔을 발판삼아 자식들이 크는 꼴이라서, 이효손은 괜히 눈치가 보였다.
“...”
“...”
“그런데 말입니다.”
“음?”
오랜만에 비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일까? 이효손의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무리 내수사라고 해도, 이렇게 기업을 막 늘려도 되겠습니까? 기업제한법을 만든 게 전하이신데... 조정신료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을 텐데요.”
“맞아. 소란이 없지 않았지.”
이걸 단순히 소란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태종과 세종의 권위가 워낙 강력해서 부드럽게 반대했던 거지, 옛날 같았으면 지부상소를 하겠다고 도끼를 꺼내들었을 거다.
“그래서 8개의 기업만 하기로 결정됐다. 아무리 기업제한법이 있지만 그래도 왕실이 민간과 같을 순 없지 않나. 기업 운영에 있어서는 특혜 없이 동등한 법을 따르기로 했으니, 그 정도는 인정해 줘야지.”
“으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원생도 종친이라서 세종의 뜻에 찬동하는 모양이다.
“그럼...?”
“생각하는 게 맞을 거다. 내수사 소유의 염전기업 중에서 수익성이 떨어지는 기업은 민간에 팔거나 조정에 팔겠지. 지금 당장은 일단 광산기업에 집중하려는 모양이야. 나중에는 뭐... 광산기업을 팔지도 모르고.”
“예...”
이해가 됐다는 듯, 이효손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찌됐건 내수사가 기업 활동을 하면 분명히 이득이 있으니, 조정으로서도 마냥 반대할 순 없으니까.”
“그건 그렇죠.”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개혁이 진행되면서 조선은 제2의 격변기를 맞이했다.
자본이라는 개념이 모두에게 침투해서, 사농공상 전부를 엮어 성장시키는 기조가 만들어졌다.
내수사의 기업전환은 이 기조가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증명과 다르지 않으니... 아직도 눈치 보며 미적거리는 지주집안에게 “옛날로 돌아갈 거라는 착각은 꿈도 꾸지 마라.”라는 선언과 마찬가지였지.
게다가 내수사는 민심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니, 무작정 극한의 이익을 추구할 수가 없다.
백성들이 봐도 “저 정도는 이해할만 하다.”라는 상한선이 존재했고, 왕실기업이 앞장서서 백성들의 이권을 보장하면 다른 기업이 무시할 수 있을까.
그랬다간 “감히 왕님도 심하게 돈을 탐하지 않는데, 니들이 뭔데 우릴 이렇게 험하게 부리냐?”라는 말이 단박에 튀어나오기 마련.
굳이 법으로 규정하지 않아도, 내수사의 존재자체가 민간기업 활동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가 되는 거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계속 걷고 있자, 저 뒤에서 시끌벅적하게 굴던 두 형제가 냉큼 달려왔다.
“풍안군!”
“예. 형님.”
“이거... 산출입장부를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작성해야 되나?”
“그야 당연하죠. 의평군 형님께 물어보시죠.”
두 형제가 힐끔 이원생을 바라보자, 그는 두말할 것 없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흠... 보통 일이 아닌데?”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까지 자세할 줄은 몰랐다고.”
둘은 흡사 서책처럼 생긴 장부를 흔들며 침을 튀겼다.
이 시대엔 회계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진 않았지만, 모르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호조의 속아문에 회계사會計司가 있지 않나.
회계의 개념과 원리는 당연히 알고 있지.
복잡하게 따지면 고려 때 개성상인들이 사용하던 사개치부법四介治簿法이 있었고, 간단하게는 가계부 수준의 장부도 지주집안에서 심심치 않게 사용했다.
다만 회계장부가 널리 퍼지지 않아 주먹구구식이거나, 자신만 알아볼 수 있게 만든 장부를 사용했었는데... 이젠 기업가들 중에서 회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기업법과 기업내규를 보면 자세히 나와 있을 텐데요? 그거 모르면 장사하기 힘드실 걸요.”
“끄응...”
“음.”
광산 운영하는 법을 보러왔는데, 전혀 다른 숙제를 얻은 것 같아 두 형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둘도 신학문을 공부했으니 산학에 대해 알지만,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당연한 게, 연오랑이 미래의 복식부기로 만든 장부를 기본으로 제시했으니까.
“이거 보면 인건비, 자재비, 하다못해 조랑말이 먹은 사료비와 오물을 모아 비료기업에 판 금액까지 적혀 있는데... 이런 시시콜콜한 것 까지 다 적어야 한다고?”
“예.”
“끄응...”
“흡.”
둘은 안 그래도 구겨졌던 얼굴이 한번 더 구겨졌다.
회계장부는 그만큼 철저했는데, 오죽했으면 아예 장부책의 크기와 형태까지 일괄되게 규정해 놨을까. 심지어 그 안에 들어갈 품목은 물론, 도표의 크기와 형태까지 규정해 놨을 정도지.
이걸 보면 볼수록 두 형제가 느낀 감정은...
“아무래도 이거 우리 편하라고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기 편하라고 만드는 거 같은데?”
“맞아. 물론 정확한 회계장부가 있으니 좋긴 하겠지만, 이렇게 까지 속내를 전부 들춰낼 필요는 없지 않나?”
“뭐... 그건 그렇죠.”
이건 이효손도 동의하는 거라서, 자기도 모르게 누가 들을까 싶어서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럼 장부를 가지고 장난치는 작자도 있겠네?”
“할 수 있으면 하겠죠? 하지만 쉽게 될 리가 있나요.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구른 조세부 관원을 상대로, 숫자장난이 통할 리가 없을 텐데요.”
“그런가?”
“그럴 겁니다.”
둘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겪어본 이효손은 질렸던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세금을 담당하던 호조의 판적사는 미래의 국세청과 유사한 조세부로 떨어져 나왔다.
부서별로 개별적으로 운용하던 재정이 통합되자 덩치가 너무 커졌고, 떨어져 나오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
그리고 이 조세부 관원은 의주와 제주에서 무역상인을 상대하며 숫자놀이를 하던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치들을 속여 먹으려면, 진짜 기똥찬 재주가 있어야 할 거다.
“세금도 안 걷으면서, 조세부 관원이 회계장부를 조사하러 나온단 말이지?”
“예. 지금도 국방세는 자발적으로 내고 있지 않습니까. 뭐... 기업들은 다들 앞으로 조세체계가 바뀔 거라고 대충 예상하고 있죠. 장부는 그 근거가 될 거고요.”
“음...”
이게 이제 보니, 단순히 귀찮고 복잡한 걸로 끝날 문제가 아닌 모양이다.
기업은 자발적으로 국방세라고 해서 동네에 이런저런 투자를 하지 않나. 이들도 새로 만든 장부를 바탕으로 대략 순수익의 30%정도를 투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장부를 조세부 관원이 보고서, 투자가 제대로 이뤄졌는지 확인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
언제가 됐건 자율적인 투자가 아니라 조정이 그 금액만큼 직접 세금을 걷겠다는 신호나 다름없었고... 다들 내색은 안 해도 내심 준비는 하고 있었다.
“그렇고만.”
“예. 그러니 내수사일수록 더욱더 조심해야죠. 왕실의 이름을 걸고 하는데, 문제가 생기면 그거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조세부 관원들은 걸핏하면 어사부 관원과 함께 온단 말입니다.”
“헉!”
“끄응.”
둘은 이효손의 무서운 말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명칭조차 무시무시한 어사부 아닌가.
감찰부를 만드니 마니하며 조정에서 싸우던 게 엊그제 같은데, 결국엔 감찰부가 아니라 어사부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왕의 임명을 받는 어사에서 이젠 그냥 관리 중 하나로 격하된 어사지만, 그 무서움은 사헌부 시절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이치들은 조정관원의 비위감찰을 하는 건 물론이고, 이따금씩 민간기업 사찰도 함께 하는 터라... 잘못 걸리면 진짜 피똥 싼다.
“그 정도야?”
“예. 비리가 들통 나서 처벌을 받게 되면, 어사부에서 율법부로 넘기고 어쩌고 하면서 복잡하게 되겠지만... 결론적으론 예전보다 훨씬 강한 처벌을 받게 됐죠. 재산을 뜯어내니까요.”
“음...”
“흠.”
이효손은 자신도 잘 모른다고 대충 설명해주긴 했는데, 가볍게 들은 것만으로도 사지가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다.
이윽고 광산 구경을 전부 끝마친 후에,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토벽이 아닌 석벽으로 만들어진 창고에, 문마저도 강철로 만들고, 쇳덩이나 다름없는 자물쇠로 잠겨 있는 곳.
끼기긱. 문을 열고 들어가자, 광산에서 제련한 은괴가 궤짝에 담겨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