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챕터40. 대비하다 (3)
“허...!”
“이렇게 많이?”
“에이. 운산금광을 운영하면 이보다 훨씬 많은 금,은을 보게 되실 겁니다.”
이효손은 화들짝 놀란 세사람을 보며 헤실헤실 웃어댔다. 사실 그도 처음에 광산에서 은을 캤을 때 이런 반응을 보였으니까.
“옮기게.”
“옙!”
이효손이 손짓을 하기 무섭게, 함께 따라왔던 금군기병들이 드디어 몸을 움직였다.
힘겹게 끌고 온 강철수레에 은 궤짝을 실어 날랐고, 몇 개 들어가기 무섭게 강철수레의 바퀴가 땅에 움푹 들어갔다.
이제 보니 금군은 진짜 운송병이 되어, 은을 지키기 위해 따라왔던 모양이다.
요샌 도적이나 화적이 보이지도 않지만, 혹시 또 아나. 은에 눈이 먼 정신 나간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지.
“금군이 여기 상주하진 않지?”
“그건 아니죠. 아무리 은광이라고 해도 엄연히 제 집안소유인데, 금군이 여길 왜 지켜주겠습니까. 그래도 도둑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광산창고를 노릴 수도 없고, 이 무거운 은궤짝을 어떻게 들고 갑니까.”
“그런가?”
“예. 그리고 은 빼돌려서 어디에 팔려고요? 사주는 사람도 없고, 세공기업도 조정에서 은을 사서 쓰지 민간에서 사서 쓰진 않거든요. 은을 팔려고 하면 당장 걸려들 겁니다.”
“그래도... 몰래 몇 개씩 빼돌릴 수도 있지 않나?”
“그랬다간 다 죽는 거죠.”
혹시 몰라 되묻자, 이효손은 지금까지의 모습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 마냥. 냉랭한 표정으로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표정에서 무슨 짓을 할지 읽어진다.
“뭐. 대비를 안 해둔 건 아니고요. 저희도 자체적으로 번을 세우고, 파수꾼도 두고 있습니다.”
“그... 혹시 사병을 키운다고 오해를 받거나 그러진 않지?”
“그럴 리가 있나요.”
괜한 걱정에 다시금 되묻자, 이효손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걸 사병이라고 부른다면 온갖 기업이 죄다 사병으로 걸려 들어갈 거다. 특히나 목장은 아예 기병을 키운다고 오해를 사지 않을까.
조선의 군력과 왕의 군력이 약하면 지레 겁먹기 마련이지만, 지금 조선에 굴러다니는 군병이 몇인데 그런 걱정을 할까.
사병에 노이로제가 걸린 태종마저도, 지금은 그런 말을 아예 하지도 않는다. 오래전 연오랑의 호언장담대로, 사병보다 그 사병을 제어할 무력이 월등히 강해졌으니까.
이윽고 금군이 몇 번 움직이기 무섭게, 창고는 썰렁해지고 강철수레는 꽉 찼다.
“다 실었나?”
“예.”
“그럼 가지. 형님들도 같이 가시죠.”
“어...?”
와서 쉬지도 못했는데 움직이자는 말에, 셋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쉴 틈이 어디 있습니까. 남한산에 가서 은을 넘겨주고 와야 돈을 벌죠. 가면서 계속 알려드리겠습니다.”
“자네가 직접 가나?”
“당연하죠. 이걸 어떻게 남에게 맡깁니까.”
이효손은 “당연한 말을 왜 하냐?”는 듯 눈을 살포시 흘겼고, 두 형제는 뜨끔해서 목이 움츠려들었다.
“아...”
“후...”
동시에 험난한 앞날이 눈앞에 그려졌다.
앞으로 운산금광에서 금,은을 캐내면, 이들 또한 남한산을 왔다갔다 해야 하는데... 산 넘고 물 건너는 먼 여정을 떠올리니 고생길이 훤해 보였다.
부평광산에서 출발한 일행은 쉬지도 않고 곧장 남한산으로 질주했다.
비록 자갈도로를 깔진 않았지만, 이들이 지나갈 금천, 과천, 광주부는 오래전에 양전사업이 끝나지 않았나.
한강과 붙어 있는 쪽은 아직도 개발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내륙쪽은 어느 정도 정리가 돼서, 대로라 부를 만한 흙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예전에는 대로, 중로, 소로로 나눠서 길을 만들었지만, 어차피 다 갈아엎는 판국에 굳이 따질 필요가 있나.
특히나 소로의 경우에는 환산하면 폭이 3.5미터 정도 밖에 안 되니, 이건 도로가 아니라 논두렁이라고 봐도 무방했지.
도로는 자고로 크면 클수록 좋은 법.
기존의 중로마저도 대로로, 그것도 폭을 늘려 거의 25미터에 달하는 거대대로로 만들어 놨다.
어차피 조선의 기후특성상 도로가 망가지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닌가. 일부가 망가져도 통행에 문제가 없게, 크게 만들 수밖에 없었지.
다만 속을 파서 바위-자갈-모래-흙 순으로 다시 파묻어, 땅을 다지는 작업을 모든 구간에서 할 수는 없다.
그저 명의 사신이 내려오는 의주대로로 유명한 10대로. 조선판 고속도로라 할 수 있는 10대로를 한성과 가까운 곳부터, 야금야금 자갈도로로 바꾸기 위한 다지기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나머지는 그냥 도로구역만 나눠놓은 맨땅이나 다름없었지.
이것조차도 만들 때에 “뭐 하러 이렇게 크게 만드냐.” “아까운 땅 없어진다.” “이거 관리 어떻게 하냐.” 등등 말이 많았는데... 말과 마차의 운행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반대 의견은 쏙 들어갔고.
요샌 큰 고읍 주변에선 “흙길은 관리하기 힘들다. 자갈도로로 대체 언제 바꾸는 거냐!”라는 의견이 심심치 않게 나올 정도였지.
“...”
“...”
그런 우여곡절 끝에 새롭게 만든 대로를 따라 가로수로 심어 놓은 버드나무, 참나무, 은행나무 등이 팔을 흔들어댔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운치 있지 않나.
금군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유람하듯 계속 나아간다.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네모반듯하게 일궈놓은 전답과 그것보다 많은 크고 작은 저수지들.
이 시대엔 댐이나 거대한 보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니 어쩌겠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질이 떨어지면 양으로라도 밀어붙여야지.
수심이 그리 깊지 않고, 지름이 50미터도 안 되는 작은 저수지부터 2,3키로미터를 넘어가는 저수지까지.
토지의 상태와 지형에 맞춰 온갖 형태의 저수지를 마구 만들어서, 거미줄처럼 강과 이어지는 수로를 연결해 놨다.
길을 따라 지나갈 때마다 하얀 눈밭과 눈밭을 비집고 피어나온 푸른빛이 어울려지고, 그에 못지않게 많은 곳에서 살얼음이 낀 저수지가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이들은 계속해서 대로와 논두렁, 작게 만든 석교를 건넜고, 해가 어스름하게 질 무렵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멀리 그 유명한 남한산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
“여긴 처음 와보십니까?”
“당연하지. 내가 여기 올 일이 있었겠나.”
“흐흐.”
이효손은 괜히 자랑을 하고 싶어 입술이 씰룩거렸다.
요새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많이 돌아다닌다곤 하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한번 이주한 곳에 터 잡고 살았다.
팔자 좋은 이들은 지금 시대야 말로 유람하기 딱 좋은 시대라고 외쳐대지만, 늦깎이 학생이 된 이들이 놀러 다닐 시간이 있겠나. 집에 박혀서 초롱불만 피워댔지.
그런 만큼 북방에서나 볼법한 신형요새는 꽤나 신기하고 위압적으로 비춰졌다.
기존의 높게 솟은 성벽도 압도적이지만, 잔디와 가시나무가 깔려 가파른 언덕처럼 보이는 성형요새는 꼭 산이 눌러 앉은 것 같은 묵직함을 선사했다.
“저게 남한산성인가?”
“아뇨. 산성은 저 산꼭대기에 있는 거고, 저건 뭐랄까. 그냥 성이죠.”
“...”
성의 없는 대답에 셋은 눈을 흘겼지만, 이효손이라고 뭐 알겠나.
남한산성은 조선대에 유명해졌지만, 실상 한강유역을 두고 다투던 삼국시대부터 요충지였다.
남한산에는 신라 때부터 성을 쌓았고, 그게 조선까지 이어오면서 계속 개보수가 이어져왔지.
그리고 지금은 산성을 확장보수하고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산성으로 올라가는 출입로에 생경한 신형요새를 건설해 놨다.
“오... 그래?”
“예. 저도 주워들은 거라서 정확히는 모르고요.”
또 아는 거라고는 저 새로 지은 요새에 조정이 특별 관리하는 부서가 있다는 것과 바로 옆에 사단사령부가 위치해 연대병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군병이 지킨다고?”
“예. 가까이가면 성벽 위를 순찰하고 있는 병사들이 보일 겁니다. 전국의 광산에서 캐온 금,은이 전부 저기로 들어가는데, 당연히 지켜야죠.”
“하긴.”
“음.”
당연한 말 인터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만 금,은 보관창고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거대해서 기가 질린다.
남한산성을 향해 쭉 터져 있는 대로를 따라 계속 나아가자, 드디어 성형요새가 완전히 눈을 가렸다.
말했던 대로 성벽 위에서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순찰을 도는 게 보였고, 삐죽삐죽 튀어나온 성벽 곳곳의 모서리엔 모자를 쓴 것 마냥 둥근포진지가 사방에 박혀 있었다.
화포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만, 저 낯설고 생경한 모습자체가 살 떨리게 하는 기세를 풍겼다.
아마 저런 성벽을 처음 본 평범한 조선백성들도, 다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성문으로 쉽게 공격할 수 없게, 성문을 팔로 감싼 형태로 만들어놓은 옹성의 옆구리로 향하자 수비병이 이들을 막아 세웠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딱 봐도 금군기병이고, 금군이 금,은을 수송하는 걸 알고 있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
수비병의 물음에 이효손은 냉큼 달려가 옥패와 함께 서류를 건넸고, 이내 수비병들은 강철수레를 살펴 은괴를 확인했다.
“...?”
태종이 실시했던 호패법은 실패했지만, 관원과 종친들은 자기들이 편하기 위해서라도 여전히 관패나 신분패를 사용하지 않나.
수비병은 ‘갑자기 종친이 여긴 왜 이렇게 많이 왔지?’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네 사람을 살폈다.
이내 신분확인이 끝나자 일행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오...?”
“와.”
들어오기 무섭게, 셋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요새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군주둔지라기 보단 그냥 거대한 관청 그 자체로 보일 정도였다.
이젠 대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기와로 치장된 3층 관청이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았고, 양 옆에는 어째 왕릉처럼 보이는 가마가 빼곡하게 박혀 있었다. 피어오르는 연기만 봐도 못해도, 20개는 될 것 같다.
나머지 건물이야 보나마나 석탄과 목탄, 식량 등을 보관하는 창고일 게 분명할 거고, 저쪽 구석에선 연기와 함께 캉캉! 날카로운 금속파열음이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가시죠.”
“어... 그래.”
“어엉.”
다들 얼빠진 모습을 보이다가 애써 표정을 관리했고, 이효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관청에서의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효손을 하루이틀 본 게 아니지 않나. 관리는 은 궤짝의 수량과 은의 품위를 확인하고, 이내 곧 화려하면서도 경건하게 만들어진 관표를 넘겨줬다.
중앙관청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궁금증에 불타는 셋의 눈동자가 이효손의 입에 틀어박혔다.
“...?”
“이게 은관표입니다. 녹표祿標랑 비슷한 거죠.”
“아...”
처음 보는 물건이건만, 셋은 무슨 뜻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관리의 급여명세서를 녹표라 불렀는데, 관리는 이걸 가지고 광흥창에 가서 녹봉으로 쌀과 면포를 받았다.
이곳에서 은값을 직접 정산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당연히 은관표만 받은 후에, 한성에 가서 녹표를 쓰듯 필요한 물건으로 교환하는 거지.
“요새 광흥창이 만물상이 됐다고 들었는데... 거기서 바꾸는 건가?”
“예. 광흥창에 별의별 게 다 있죠. 이게 의외로 생각보다 편합니다.”
“음...”
“흐음.”
셋도 예전에는 광흥창에서 녹봉을 받아본 적이 있는 터라, 어떻게 사용하는지 대충 짐작이 됐다.
조선은 여전히 공물을 받고 있는데, 기업들 중에선 국방세를 대신해 공물을 추가로 올려 보내는 기업이 꽤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기업은 차기업.
조선이 들어서면서 차문화는 쇠퇴했지만, 착호군이 끓는 물을 장려하자 되살아났다.
덤으로 착호군과 함께하는 태종 또한 차를 즐기자, 차문화에 대한 규제가 완전히 풀린 걸 확인. 민간에서도 더 이상 숨어서 먹지 않고, 옛 전성기를 곧장 찾아갔지.
값싸고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귀족문화에서 일상문화로 내려온 이상, 이걸 가지고 사치라고 폄하하는 유학자들도 없어졌으니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세종이 “이거 먹고 잠 자지말고 열심히 일해라.”라면서 관리들에게 차를 마구 뿌렸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아무튼. 이는 차문화를 장려해 기업을 육성하려는 의도와 함께, 오래전 연오랑의 포부대로 조선의 차를 온 사방에 팔아넘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은 계획대로 잘 진행돼서, 차의 본고장인 중국에도 조선의 차가 진출했을 정도였지.
“그래? 광흥창에 차가 산처럼 쌓여 있단 말이지?”
“물론이죠. 그리고 차만 있겠습니까. 자기는 당연한 거고, 공작기업에서 만든 농기구나 제련기업에서 만든 주괴나 탄광기업에서 만든 석탄, 심지어 수산기업에선 절인생선, 과수원에서는 과일, 양주기업에선 술까지 보냈죠.”
“오...?”
“듣기로는 몇몇 지방에선 아예 관아에서 직접 장시를 열 정도라고 하니, 모든 공물이 모이는 광흥창은 진짜 만물상이 다 됐죠.”
“음.”
“충분히 그럴 만 해.”
셋은 기업들의 심정이 이해가 돼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네를 살기 좋게 바꾸는 것도 좋지만, 이것도 사람 모집하고 물물교환하고 귀찮지 않나.
그럴 바엔 어차피 만들고 수확한 상품과 물품을, 그냥 현물세금이라 생각하고 조정에 보내는 게 속편하지. 조정에선 나중에야 어찌돼든, 지금 당장은 공짜니 그냥 받은 거고.
문제 아닌 문제라면 기업은 딱히 조정의 소관부서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올리다보니까, 어쩌다보니 광흥창이 권한을 뛰어넘는 만물창고가 되어버렸다는 것.
“일이 이렇게 되니, 요샌 광흥창과 풍저창豐儲倉, 공정고供正庫등의 호조 속아문을 통합,분리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네?”
“그럼. 부서가 또 생기는 건가...?”
“골치 아프겠네.”
셋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풍저창은 국용을 위한 전곡의 수입과 지출을 담당했고, 공정고는 궁궐에서 소요되는 미곡과 장醬 등의 식료품 공급을 담당했는데... 이젠 광흥창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를 게 없어진 것.
호조에서 조세부가 떨어져 나갈 때 한바탕 시끄러웠는데, 또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