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챕터40. 대비하다 (4)
설명을 듣고 은관표에서 시선을 뗀 이들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저쪽은...?”
“거긴 못 들어갈 걸요.”
딱 봐도 뭔가 있어 보이는 안쪽을 바라보지만, 이효손은 단박에 잘라냈다.
심심치 않게 군병들이 순찰을 하며 돌아다니는데, 아무 곳에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나. 출입이 제한된 곳이 분명해 보였다.
이미 예전에 한번 물어봤다가, 거부당한 적이 있기도 했고.
헌데... 이들을 도와줄 인물이 뜬금없이 등장했다.
“...? 자네가 여기 어쩐 일인가?”
“... 대감!”
일행 중에서 이원생이 상대를 먼저 알아보고선,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깡마른 체구에 관복 위에 솜으로 만든 장옷을 겹쳐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깃털을 부풀린 새처럼 보였다.
그와 반대로 눈빛은 호랑이를 잡아먹은 것 마냥 날카롭게 빛나고 있으니, 이렇게 눈에 확 띠는 외모를 가진 대신이 몇이나 될까.
저 먼 의주와 호주에 머물던 허조가 이곳에 있었다.
이원생이 반기며 인사를 하자, 엉거주춤해 있던 다른 이들도 화들짝 놀라 넙죽 고개를 숙였다.
조정에 온갖 부서가 생기면서 의정부는 아예 없어졌고, 덩달아 삼정승제도도 함께 사라지지 않았나. 허나 허조가 정승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그의 위명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정승에서 내려온 후에 이름값 높은 양반들이 어디 갔나 했는데... 그가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감.”
셋은 나란히 자기소개를 하며, 자신들이 여기 왜 왔는지 열심히 입을 놀렸다.
“앞으로 내수사에게 들어가게 됐단 말이구려.”
“그렇습니다. 대감.”
“음...”
지금 역사의 허조는 원래 역사의 허조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지 않았나.
운석핵꿀밤 이후에도 사상이 바뀌었지만, 의주에서 몇 년간 무역을 담당하면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됐다.
거기서 쏟아지는 막대한 양의 세수, 판이하게 달라진 국제무역과 외교관계 등을 다루다보니, 조선 하나만 생각하던 유학자로서의 뿌리 깊은 신념은 송두리째 뽑혀나갔지.
이젠 왕이 직접 장사를 하겠다고 내수사를 만들고 종친을 빨아들였어도, 반발은커녕 냉큼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개혁적인 인물이 됐다.
‘내수사라...’
잠시 대화가 멈추자, 허조는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이들을 굽어봤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 안을 구경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눈빛으로 묻고 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이곳에 들린 많은 신료들이 다 똑같은 눈빛을 뿌려댔으니까.
다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으니, 발만 동동 구르는 거지.
‘하지만... 이들은 당사자들 아닌가. 알아둬서 나쁠 건 없고... 이제 슬슬 소문을 퍼트릴 때도 됐지.’
그는 속으로 혼잣말을 하고선 입을 열었다.
“안이 보고 싶은 건가?”
“예?...”
“어찌 그런...”
“...”
말은 그렇게 하는데도, 표정은 반대로 웃고 있다.
“따라오게.”
허조는 피식 웃으며 앞서나갔고, 아니나 다를까 네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 따라붙었다.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는 군병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별천지 아닌 별천지가 펼쳐졌다.
단순히 가마만 있는 게 아니라, 주물공장이 함께 있는 것 아닌가.
사방에서 관원들과 장인들이 목청을 높여가며 뜨거운 쇳물을 옮기고 있었는데, 이 가마에 들어가는 재료가 얼마나 많은지 무려 나무선로까지 깔아 놨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짐수레를 힐끔 살피자, 자기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이효손이 가져온 것과 비슷하게 생긴 은 궤짝이 수레에 실려 가마로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
“음...”
“허...?”
넷은 머릿속으로 “이게 대체 뭔 일이야? 금,은을 이곳에서 다시 녹이고 있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와 함께 파생되는 상념이 뭉게구름처럼 마구 피어오른다.
이내 허조의 발길이 멈춘 곳은, 후끈한 열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집무실 중 한 곳.
“가장 최근에 만든 견본품을 가져 오게.”
“예!”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관원에게 말을 하기 무섭게, 관원은 가마터 한곳으로 달려가더니 나무상자를 가져와 냉큼 대령했다.
“여기서 뭐하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한번 보겠나?”
허조는 놀리는 것 마냥 히죽 웃으며 상자뚜껑을 열었고.
“...!”
“헉!?”
“어...?”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터지며,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지고 말았다. 금,은이 있을 거라고는 짐작했는데, 이게 이런 모양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대감? 설마 이게...?”
“맞네. 주화일세. 만져 봐도 되네.”
“오...!”
모두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상자에 담긴 주화를 하나둘씩 챙겨들었다. 동전은 총 세종류로, 하나는 말 그대로 동화, 나머지 둘은 중국에서도 쓰이지 않는 은화와 금화였다.
“예전 것과 많이 다르군요.”
“그렇지.”
태종대에 저화의 보조화폐로 동전을 찍어냈는데 제대로 말아먹고 곧 사라졌지만, 이원생은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집안을 뒤져보면 굴러다니는 동전을 찾을 지도 모르고.
그랬기에 그때의 동전과 지금 손에 들린 동전을 확실히 비교할 수 있었다. 이건 중앙에 네모난 구멍이 뚫린 게 아니라 통으로 되어 있었으니까.
“음...”
“...?”
모두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허조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하나같이 비슷한 반응을 보이니, 볼 때마다 웃길 수밖에.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해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게 유학에서 말하는 전통적인 기본 우주론이었다.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주화를 제조할 때, 둥근 형태에 안에 네모난 구멍을 뚫은 건 그 때문이었고, 원래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이 화폐를 만들 때도 같은 맥락이었다.
허나 운석핵꿀밤으로 천원지방 사상도 흔들렸고, 조선해군이 서해를 넘어 남중국해로 나아가면 갈수록 더욱더 심해졌다.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별자리도 바뀌고, 바다는 끝이 없고,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저 먼 서역상인과 접촉하면서 고정관념은 점점 깨져갔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고, 자주화를 추구하는 조선이 중국에도 없는 멋들어진 동전을 만들었는데... 굳이 옛 전철을 따라 구멍을 뚫을 이유와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거지.
“조선통보라...”
이원생은 자기도 모르게 동전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한어도 아닌 훈민정음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이젠 왕실문양으로 널리 사용되는 이화문양이 박혀 있었다.
은화나 금화도 형상은 똑같았고, 다만 은화와 금화는 같은 크기지만 동화는 그보다 살짝 작았다.
“마제은보다 훨씬 나아보이지 않나?”
“그야 이를 말씀이십니까.”
이원생도 소금을 팔러 다니면서 중국상인과 접촉했고, 그 때 마제은을 본적이 있었다. 이것과 비교하면 그건 그냥 은덩이와 다를 게 없다.
금화도 그렇다. 이런저런 경로로 고려 때 흘러들어온 천축, 서역 금화가 이따금씩 떠돌곤 하는데, 그런 조잡한 금덩이와는 비교하면 민망할 수준.
“이건 주화가 아니라 세공품이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이효손은 요철무늬를 이뤄 까끌까끌한 동전의 테두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조선통보라 박힌 글자도 그렇고, 뒤에 새긴 이화문양도 그렇고,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정교하게 찍어낼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
“음...?”
“순금과 순은은 아닌 모양인데?”
이무생, 이후생 형제는 다른 의견을 내놨다.
금,은은 물러서 동전형태로 주조하는 게 어렵고, 이렇게 얇은 형태면 힘을 줘서 구부릴 수도 있지 않나.
허나 이건 튼튼해서,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다.
“여러 광석을 섞은 모양이군요.”
“그렇네.”
“대단합니다.”
이원생은 집무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줄기에 주화를 비춰보며 중얼거렸다.
동화는 유기그릇보다 어둡지만 철보다는 밝았고, 은화는 순은보다 반짝였으며, 금화는 순금보다 어두웠다.
색만 봐도 순도가 떨어지는 합금으로 만든 걸 알 수 있지만, 그야 일부러 그렇게 만든 거고... 대체 여기에 뭐가 들어갔는지, 어떤 비율로 첨가했는지는 꿈에도 모를 것 같다.
‘위조는 절대 불가능하겠군.’
속으로 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합금의 재료와 비율을 찾아내는 건 둘째치고, 예술품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통일되게 만들어졌는데... 이걸 어떻게 따라 만들겠나.
이 정도 실력을 가졌다면, 장신구 세공사로 나서는 게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다.
“대체... 이런 기술을 가진 장인을 어떻게 수배하셨습니까?”
이원생은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묻고 말았고, 허조는 힘없는 미소를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몰랐네. 용연군이 여기까지 준비해 놨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허조는 왠지 모르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차마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화폐를 유통하는 건 허조가 관직에 있을 때부터, 조정이 사활을 걸고 진행했던 정책이지 않나.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헌데 화폐를 다시 만들려고 준비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신기술과 신합금을 만든 장인이 우수수 튀어나왔다.
연오랑이 이때를 위해서, 하동에 있을 때부터 키워 온 기술자들은 용연광산에서 일하며 기술을 계속 갈고닦고 있었으니까.
‘용연군이 여기까지 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허조는 다시금 침을 조용히 삼키며 되새겼다.
개혁이 진행되면서 나라전체가 정신이 없었는데, 용연군은 이걸 오래전부터 준비하지 않았나.
못해도 십수년전부터 화폐를 주조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그 심계가 놀라운 걸 넘어 무서울 지경이다.
“...”
감탄과 놀람이 가득한 침묵이 장내를 지배했고, 이내 하나둘씩 아쉬운 표정으로 주화를 내려놨다.
“새로 만든 틀을 가져오게.”
“예!”
네 사람이 놀란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관리는, 허조의 외침에 다시금 바삐 발을 놀렸다.
이윽고 가져온 건, 얇은 나무로 만들어진 주조틀.
“...?”
넷이 ‘이건 뭐냐?’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지만, 관리는 일단 네사람의 손에 주조틀을 넘겨줬다.
“앞으로 광산에서 괴를 만들 때, 그 틀에 맞춰 만들게.”
“...?”
“보다시피 이곳에선 전국에서 온 주괴를 다시 녹여서 주화로 만들고 있네. 어차피 다시 녹이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 품위와 양을 매번 확인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서 말일세. 통일되게 만들어서 가져오면 우리 일이 더 쉬워지겠지.”
“예...”
“알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하고서, 모두는 조심스럽게 나무틀을 챙겼다.
이제 볼 걸 다 보여줬다고 생각했는지, 허조는 다시 앞장서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따라오게.”
“예.” “넵.”
넷은 냉큼 입을 다물고 뒤를 쫓았다. 보아하니 놀랄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닌 것 같다. 계속 구경하려면 조용히 있어야 하는 법.
넷은 벙어리가 되어 걸음을 계속 옮겼는데, 허조는 아예 성문을 넘어 밖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건가?’라는 속마음을 꼭꼭 숨기고 따라가자, 이윽고 네사람에게도 익숙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연오랑이 처음으로 선보인 이후로, 성저십리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우후죽순 생겨난 건물.
조선판 원룸이라 할 수 있는 단체숙소가 길게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그 길쭉한 건물 앞에는 관아인지 편전인지 모르게 생긴 거대한 건물이 위치했고, 허조는 그곳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
“...”
눈만 굴리며 열심히 발을 놀렸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도떼기 시장이 펼쳐졌다.
꽤 큼지막한 탁자와 의자가 빼곡하게 깔려 있고, 탁자 위에는 하나같이 혼합지로 만든 서류가 가득가득 쌓여 있었다.
관복도 아닌 제각각 취향에 맞는 평복을 입은 이들이 부산스럽게 돌아다닌다.
한쪽에선 시끄럽게 주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다른 한쪽에선 서류철을 놓고 자로 이것저것 그려가며 토의를 하는 이들이 보였다.
나이대도, 옷차림도 천차만별, 심지어 쓰고 있는 모자조차 관모도 있고 갓도 있고, 심지어 모자가 아닌 솜으로 만든 마상건을 쓰고 있는 자들도 있다.
“정신없지?”
“예...”
“이해하게. 시간이 없거든.”
“...”
뭔 시간이 없는지 모르겠다만, 넷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 알겠나?”
“...?”
당연히 모르는데 이게 꼭 시험처럼 느껴져서, 넷은 맹렬히 머리를 굴려댔다.
슬쩍 눈을 굴려 탁자 위에 올려있는 서류를 살피자, 누가 쓴 건지 몰라도 개발새발 갈긴 훈민정음 보고서가 눈에 들어왔다.
“... 헉?”
“으음!?”
허조의 묵시적인 허락 속에서 넷은 서류를 살피다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서류는 전국 공창의 미곡 입출입과 보관양, 면포를 비롯한 각종 면,모직물의 현황, 그 외에 전국에서 쏟아지는 공물 및 물산의 추세를 적어놨으니까.
‘이게 주화를 만드는 것과 무슨 상관이...’
이효손은 머리를 굴리다가, 저기. 회의실인지 집무실인지 모를 저쪽 벽 한편에 작게 박혀 있는 현판 아닌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다시금 헛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헉!”
‘왜 그러냐?’라고 눈빛으로 묻기도 전에, 이효손은 손으로 현판을 가리켰다.
“조선은행...!?”
“설마...?”
“저걸 진짜 한단 말입니까?”
모두는 화들짝 놀라서 다들 같은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조선은 청도에 진출하면서 중국의 전장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해 왔다. 이건 관료들뿐만 아니라 무역항을 드나드는 민간기업가들도 알고 있었지.
언제가 됐건 “조선에도 진짜로 전장이 생기는 건가?”라는 의문을 품었는데, 어째 연구는 계속한다는 말은 들리는 데... 결과가 나오질 않아서 이내 관심은 시들해졌다.
헌데 여기서 이렇게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이야? 정녕 상상도 못했다.
‘주화와 전장의 다른 말인 은행이 이렇게 벌써 준비되고 있다면... 진짜로 화폐개혁이 이제 곧 시작이구나!’
“헉?”
“아... 그렇군!”
이효손은 자기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눈을 번뜩였고,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서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