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86화 (286/538)

286. 챕터40. 대비하다 (5)

“대체 언제부터...?”

“오래전부터.”

허조조차도 확언할 수 없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세종의 명을 받고 의주에서 내려온 후에, 이곳 남한산에 처박혀서 몇 년을 보내게 될 줄이야.

과거에는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해 육조가 힘을 합쳐 움직였는데, 지금은 아예 육조에 버금가는 독립부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조폐부라는 부서를 신설할 줄 짐작이나 했을까.

더불어 조선에 없던 전장인 은행 또한 함께 만들 줄은 몰랐다.

이 대업의 책임자로 허조가 임명됐으니, 그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거다.

특히나 이미 한번 실패한 전력이 있지 않나.

해놓고 시장의 반응을 보면서 맞춰가는 게 아니라, 시작하기 전에 완벽하고 대대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몇 년간 이곳에 처박혀 준비를 하고 있었지.

“가지.”

“예...”

“...”

허조는 은행 관리들의 인사를 익숙하게 손으로 받아넘기며 나아갔고, 넷은 얼빠진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저 발자국만 좇았다.

“그... 저화는 그럼 사용하지 않는 겁니까?”

“이미 무용지물이 된 물건이고, 은화, 금화를 만들었는데 필요가 없지 않나. 백성들에게 신뢰를 잃어버렸는데, 또 써먹기는 쉽지 않지. 괜히 우려와 거부감만 줄 걸세.”

“예...”

가장 나이가 많은 이원생은 태종대 저화의 실상을 알고 있었기에, 허조가 뭘 말하는지 곧장 알아차렸다.

‘하긴... 따지고 보면 저화의 가치나, 은,금화의 가치나 크게 차이가 없겠지.’

속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고, 서로 귓속말을 나누자 다들 동의했다.

태종대에 저화의 유통이 엉망이 된 건, 신용의 문제도 있지만 화폐의 가치가 너무 컸기 때문.

아마도 조폐부가 노리는 건... 중국에서처럼 가치가 낮은 동화는 일상에서 사용하고, 큰 거래를 할 때 마제은을 쓰는 것처럼 은화와 금화를 활용하려는 계획 같았다.

‘그렇게 되면 확실히 고액화폐에 대한 불안은 없어지겠지.’

비록 합금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은,금화는 어쨌든 은과 금이다. 설령 화폐가 제 역할을 못하더라도 어찌됐건 유통이 되긴 될 거다.

허조는 신형요새. 조폐부가 있는 곳이니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조폐성이라 부를 만한 요새의 옆으로 향했다.

어째 이곳에도 또 요새가 있었는데, 저 하늘 위에서 여길 내려다본다면 외성 속에 파묻힌 내성처럼 보였을 거다.

“음...”

안 그래도 조폐성은 삼엄했는데, 여긴 더 하다. 일하는 관리의 숫자보다 지키는 군병의 수가 더 많은 것 같다.

“여긴...?”

“조선은행 중앙금고네.”

‘금고?’

‘중앙금고?’

모두는 눈동자에 물음표를 피웠지만, 일단 허조를 따라갔다.

내성 안에는 성벽마냥 완전히 석재를 쌓아올리고, 그 겉에 삼물회까지 두툼하게 바른 거대한 창고가 있었다.

우중충한 회색빛을 띄고 있었는데, 이건 건물이 아니라 거암괴석을 보는 것 같다.

허조는 창고를 지키던 관리와 군병을 불러 창고문을 열게 했는데, 여는 방식도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자물쇠를 이중으로 달아놓은 건 물론이고, 통짜 쇠로 만들어진 문은 열기도 힘들어서 몸으로 낑낑대며 밀어야 열렸다.

화락. 호롱불을 피우고 들어가서, 안쪽에 있는 문을 한번 더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헉!”

“히힉!” “커허헉...”

다들 하나같이 기함을 금치 못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창고 위쪽에 작게 나 있는 창으로 빛줄기가 어스름하게 비추는데... 그 빛이 닿는 모든 곳이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다.

저게 전부다 주화.

수십. 아니 수백개의 궤짝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은화와 금화의 산을 보고 있자니 넋이 나간다.

그간 몇 년간 채굴한 은,금이 어디로 갔나 했는데, 죄다 동전으로 바뀌어서 여기에 보관되어 있었나 보다.

“이... 이게 대체 얼맙니까?”

“나도 모르지. 나라고 언제 이렇게 많은 은,금을 봤겠나?”

허조가 피식 웃으며 답하자, 다들 한번 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아까 보니 이런 창고가 하나가 아니었는데... 설마?’

“옆의 창고도...?”

“맞네. 전부 다 은,금이 쌓여 있지.”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다시금 기겁하고 말았다.

보물섬이라는 게 있다면 바로 여기를 말하는 게 아닐까? 이 정도 양이면, 모르긴 몰라도 저 멀리 있는 남방소국 하나쯤은 그냥 돈으로 사버릴 수 있을 것 같다.

“확인했나?”

“예? 예...”

“예. 대감.”

뭘 확인하라는 건지 모르겠다만, 넷은 얼떨결에 답을 하고선 허조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기운을 잔뜩 받고 와서 그런지, 밖으로 나오자 오히려 늦겨울 바람이 후끈하게 느껴진다.

“자네들에게 왜 이걸 보여주는지 알겠나?”

“...?”

뜬금없는 물음에 모두는 입을 다물었고, 허조는 담담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수사는 그저 돈이나 벌자고 광산을 개발하는 건 아니네.”

“...”

“이건 나라의 명운을 걸고 하는 대사업일세.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는데 이번에도 화폐유통에 실패한다면... 다시는 할 수 없겠지. 앞으로는 자네들뿐만 아니라 다른 광산기업가들도 여길 보고 갈 걸세.”

“...”

행간에 숨겨진 속뜻을 읽고, 넷은 자기도 모르게 오금이 움츠러들었다.

웃기게도 조정대신인 허조가 왕실기업인 내수사를 걱정하고 있지 않나. 지금 격려를 하는 건지, 협박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둘 다겠지.’

허조의 말은 헛짓거리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이곳에 은,금을 계속 보내라는 뜻이리라.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았나?”

“예.”

“예. 대감.”

허조가 어느새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매서운 눈길을 하고 한명씩 굽어보자, 모두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수백년을 이어갈 나라의 대업이네. 이게 실패하면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을 걸세.”

“...”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 생경한 조폐부니, 조선은행을 만들겠다고 비밀리에 수년간 천금을 쏟아 부은 것 같은데, 실패하면 피바람이 불어 닥칠 거다.

허조는 이제 보여줄 건 다 보여줬다는 듯이 일행을 이끌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고, 드디어 정신을 차린 이효손은 조심스럽게 입을 땠다.

“헌데 대감...”

“...?”

“그럼 언제쯤 주화가 유통되는 겁니까?”

“백성들이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느껴 주화의 필요성을 외칠 때. 모두가 한마음으로 바랄 때 시행될 걸세. 그리고... 그리 멀지 않았지.”

“...”

허조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이효손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 또한 은관표로 광흥창에서 물건을 되받는 게 편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불편하지 않았나.

큰 거래를 하는 이들일수록 쌀과 면포를 들고 다니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고, 요샌 이것저것 사서 쓰기 시작한 일반 백성들 또한 정도는 달라도 비슷한 심정일 거다.

“허면 조선은행은 언제쯤...?”

“아국에 돌고 있는 미곡과 면포를 전부 사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재화가 쌓이면, 그 때 문을 열걸세.”

“...!”

“헉.”

포부가 커도 너무 큰 대답에 다들 헛기침을 내뱉었으나, 한편으론 마냥 허황된 소리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금고창고가 몇 개 더 생기면, 진짜로 조선의 모든 미곡과 면포를 다 사버릴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리 된다면, 화폐의 유통은 식은 죽 먹기가 될 거다.’

‘그렇군!’

화폐유통이든 전장운영이든 신용이 바탕이 돼야 가능한 일. 만약 의심하는 작자들에게 조선은행 금고를 보여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산처럼 쌓여 있는 금,은을 보고서, 하나같이 재산을 싸들고 와서 맡기려 할 거다.

이윽고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왔고, 허조는 “보여줄 건 다 보여줬으니, 이제 가라.”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본 걸 널리 알리고, 자네들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게. 자네들이 비록 사서에 이름이 남진 않겠지만 대업의 한 축이 되었으니까. 알겠나?”

“예. 대감.”

“넵.”

모두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고, 훌쩍 몸을 돌려 되돌아가는 허조의 뒷모습에 계속 경의를 표했다.

짐을 마저 챙긴 이들은 놀란 가슴을 애써 다독이며, 놀라움이 가득했던 조폐성을 빠져나갔다.

푹 쉬면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직원들은 “대체 뭘 보고 왔는데, 낯빛이 저렇게 하얗게 변했을까?”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행은 발걸음을 돌려 송파포구로 향했다.

은관표를 받았으니, 한강을 넘어 광흥창에 들려야 하지 않겠나.

아직 해가 떨어지려면 멀었지만, 슬슬 어두운 기운이 하늘저편에 몰아치니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도 많이 바뀌었군.”

“그렇지요?”

이 시대의 한강은 미래의 한강과 완전히 다르고, 한강의 치수사업을 하는 건 전국에 도로를 건설하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사업이다.

당연히 지금은 꿈도 못 꾸는 터라, 한강변은 죄다 모래터, 습지, 갈대밭으로 뒤덮여 있었고 여름에는 걸핏하면 범람하는 지역이었지.

하지만 그래도 여차저차 치수공사를 하긴 했는지, 낯선 둑방길이 일행을 맞이했다.

어차피 홍수와 범람을 막을 수 없다면, 그 넘치는 물을 어떻게든 내륙으로 끌고 와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한강을 따라서 크고 작은 수로를 이어 붙여서, 강남 지방에 만들어 놓은 저수지로 물을 끌어오고 있었다.

“음...”

“잘 만들었네.”

“이젠 강둑에 풀도 자랐군요.”

일행은 수로를 따라서 2미터 정도 솟아 있는 둑방길에 올라타서, 경치 구경을 하며 송파나루로 향했다.

송파나루는 광주부와 한성을 잇는 주요한 나루터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선 나루터가 아니라 포구이자 하나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이곳 또한 범람에 대비해서 모래톱 한참 안쪽에 포구가 만들어졌는데, 어째 돈을 꽤 쓴 걸까? 모래톱 위로 이어지는 부두들은 나무가 아니라 석재와 벽돌로 만들어져서, 손가락을 뻗듯 한강으로 파고 들어가 있었다.

“오...”

“해가 지는데도 사람이 많군.”

일행은 시장터를 방불케 하는 포구를 보며 감상평을 늘어놨다.

대로와 이어진 곳인 만큼 이곳 또한 도로를 만들어놨는데, 사람이 워낙 많이 드나드는 곳답게 자갈도로를 깔아 놨다.

다 해봐야 길이가 2,3키로미터밖에 안되니 가능했겠지만, 그래도 깔아 놓은 게 어딘가.

자갈도로 옆엔 배수로를 파놨는데, 이건 하수도의 용도도 있었지만 도로를 파먹지 못하게 막는 역할이 더 커보였다.

“이젠 쪽배를 끄는 뱃사공도 없어졌겠군?”

“예.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몇 번 와본 이효손이 냉큼 답을 했다.

나루터가 포구로 확장되고 물류가 늘어나자, 뱃사공들은 힘을 합쳐 아예 조합을 만들었다. 민간에 풀리고 있는 중맹선이나 대맹선을 사들여서, 유람선 및 수송선으로 써먹은 거지.

“아직 겨울인데 배가 돌아다니나 보네?”

“한강이 얼어붙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 선원들이 새벽마다 나가서 얼음을 깨고 있을 겁니다.”

“음...”

자기 밥벌이가 달려 있으니, 당연히 그럴 거다.

그리고 배가 돌아다닐 수 있게 얼음을 깨는 동시에, 그 깬 얼음을 가져와 지하실에 박아놨겠지.

이런 사설빙고는 한강변에 꽤 많이 만들어졌는데, 조정의 서빙고,동빙고보단 못하지만 전체 양으로 보면 둘을 한참 웃돌았다.

이렇게 겨울에 캐낸 얼음을 여름에 팔아서, 뱃사공들은 부수입을 얻고 있었다.

포구를 넘어 시장이 생겼으니, 당연히 숙박시설인 객주도 생기기 마련.

예전처럼 양반집에 빌붙거나 민가에 유숙하는 건, 이미 민폐 문화가 된지 오래다. 특히나 이렇게 번화한 포구나 도시에선 더욱 그렇고.

일행은 사람구경을 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마구간이 있는 객주로 향했다.

“어서 오십쇼!”

“말은 저희에게 주시죠.”

“짐은 각자 챙기셔야 합니다.”

워낙 뜨내기 상인들을 많이 상대해 봐서 일까? 객주에서 일하는 소년점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다른 객주로 가지 못하게 말을 쏟아냈다.

“얘들도 참 먹고 살기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히죽 웃어줬고, 모두가 말에 내리자 점원들은 냉큼 고삐를 잡고 끌고 갔다.

“일곱 명일세. 방은 두 개로. 안쪽 독채로 주게.”

“예이.”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옷을 입은 걸 알아보고선, 주인은 허리를 연신 굽혀댔다.

부하직원은 능숙하게 면포를 잘라 삯을 치렀고, 이효손은 그걸 보며 다시금 조폐성이 떠올랐다.

몰랐을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알고 나니 확실히 거슬린다.

만약 화폐가 유통된다면 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저렇게 번거롭게 면포를 자를 것 없이 그냥 동전만 던져주면 끝 아니겠나.

그는 차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주인장.”

“예? 예예! 나리.”

이효손이 슬쩍 가죽장옷을 젖혀 옥패를 보이자, 주인장은 더욱더 공손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요새 양반이 양반취급을 못 받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옥패는 귀한 신분을 상징하지 않나.

허리가 절로 굽혀진다.

“보통 쌀과 면포로 삯을 치르나?”

“예. 쌀 뿐만 아니라 다른 곡식도 받고, 아니면 상인이 가져온 현물도 받습니다.”

주인은 “당연한 걸 왜 묻냐?”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곱게 답을 털어놨다.

“이렇게 번화한 객주라면 그 양이 적지 않을 텐데...?”

“예? 예...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독채 하나를 창고로 쓰고 있지요.”

주인은 “내가 얼마나 버는지는 왜 물어봐?”라는 표정을 애써 숨기고서, 조심스럽게 담벼락 한쪽에 붙어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불편하지 않나?”

“그야 당연히 그렇습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자꾸 캐묻는 것처럼 느껴져서, 주인장은 슬슬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네. 식사는 당연히 될 테고, 술은 뭐 있나?”

“말씀 잘하셨습니다. 저희 객주에선...”

이효손이 히죽 웃으며 손을 내젓자 주인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자기 집에서 파는 술을 줄줄이 읊어댔다.

허나 그게 마냥 허풍이 아니다.

송파나루는 한성으로 가는 길목이라서 그런지, 이효손은 물론 세 사람 모두 들어보지도 못한 별의별 술이 다 언급됐다.

“그럼 그걸로 시키지.”

“예이! 자리로 가시지요.”

주인은 냉큼 객주 마당에 깔린 평상으로 안내했고, 이내 곧 술상이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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