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챕터40. 대비하다 (8)
특히나 지금 만드는 도로가 그냥 도로인가. 대로보다 더 큰 거대대로이니 온갖 말이 다 튀어나왔지.
그래서 차일피일 공사를 하니 마니하며 시간만 끌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새로 건설한 항구에는 석회부두와 석회도로가 깔리고 있었지.
하지만 조정에서도, 마냥 손 놓고 놀고만 있진 않았다.
원래 역사에서는 재작년에 한성대화재가 발생하지만, 지금 역사에선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면 뭐 하지만, 예전부터 자잘한 화재는 몇 번 발생했지.
그리고 이렇게 초가집이 밀집된 한성에서 불이 나면, 궁궐마저 홀라당 타버릴 거라는 건 조정대신들 모두가 공감한 일.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제대로 해보려는 심정인지, 몇 년간 물밑에서 설계도면을 두고 화재방지, 청계천치수, 하수도정비, 도로건설 등을 종합한 한성재개발계획을 짜고 있었다.
결국. 작년부터 첫 삽을 떠서 석회도로를 깔기 시작했는데... 고작 일년만에,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광화문에서 시작한 도로가 동대문까지 이어진 거지.
“음...”
‘저거... 성벽과 성문이 애물단지가 되겠는데?’
사내는 공사 중인 도로를 한번, 반대로 동대문 밖 자갈도로를 한번. 머릿속 상상으로 두 도로를 이어봤다.
성문보다 몇 배는 큰 도로가 서로 이어져 있으니, 완성되고 나면 혼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
“크큭.”
‘골치 좀 썩겠네.’
그는 고생할 관리들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군의관 출신답게, 그는 지난 강남전쟁 때 성벽이 어떻게 무용지물이 되는지 충분히 봤다.
조선군 화포는 거용관을 무너뜨리고, 천진을 불태웠으며, 남통을 부셨다.
산성을 제외하면 중국성벽에 비해 조선성벽은 한참 미흡하지 않나. 성벽은 분명 쓸모가 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난공불락의 위엄을 뽐내는 건 결코 아니게 됐지.
‘게다가 한성성벽은 너무 넓고...’
사내는 오래전 중대장들이 떠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시대의 한성은 전세계적으로 봐도 꽤 큰 편에 속하는 도시고, 당연히 도시를 둘러싼 성벽도 수십키로미터에 달했다.
이 성벽에 빼곡히 수비군을 올리려면 수만명이 필요한데, 이게 가당키나 할까.
화포를 상대하려면 문제는 더 커진다.
안 그래도 긴 성벽에 화포를 전부 올릴 수도 없는데, 적군은 조선군이 했던 것처럼 화포를 집중해 한곳에 집중포격을 할 수 있다.
크고 넓은 성벽이 오히려 수성에 방해가 되는 꼴이 된 거지.
‘그렇다고 성벽을 없애는 건 무리잖아?’
수비야 둘째 치고... 성벽이 주는 안도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고, 이런 거대한 성벽에 둘러싸여 산다는 도성민으로서의 우월감도 적지 않을 거다.
그러니 있는 성벽을 다 허물어버리진 않더라도, 사대문을 비롯한 성문은 어떤 식으로든 개보수가 이뤄지지 않을까? 안 그러면 답답해서 못 살 거다.
공사장을 지나쳐 사람들을 밀치며 계속 나아갔다.
관아가 있는 육조거리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으니, 열심히 발을 놀리는데 그래도 공사장은 끝을 보이지 않는다.
자갈도로를 까는 것과 마찬가지로 땅을 1미터 이상 파서 기반다지기 작업을 하고 있던 터라, 반쯤 허물다가만 도로 옆 저택공터에는 바윗돌과 자갈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
그리고 그런 공사터를 지나갈 때마다, 낯선 말이 귀를 찔렀다.
‘왜어?’
자기도 모르게 힐끔 옆을 살펴보니, 왠지 모르게 키가 작아 보이는 이가 왜어로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작업정리가 제대로 안 돼서, 욕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허... 세상 참 많이 변했군.’
도성에서 왜어를 듣는 날이 올 줄이야.
저걸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사내 그 자신도 아무렇지 않아하는 걸 깨닫고서, 자기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긴 특별한 건 아니지.’
뭔가 괜히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사내는 스스로에게 변명을 토해냈다.
대마도에서 끌고 온 왜인포로는 영택별감이라는 임시부서에 소속되어, 개혁 초창기부터 공사현장에 투입됐다.
그 세월이 벌써 9년이 지났으니, 토목건설의 달인이 된 왜인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전국에 만들어진 건설기업은 또 얼마나 많던가.
건설기업은 자본금이 꽤 필요하기 때문에 왜인이 직접 기업을 세우진 못했지만, 작업반장으로 취업한 왜인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지금와선 이들을 왜인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조선인이 다 됐지.
“...”
스스로만 느끼는 괜한 멋쩍음에 사내는 발걸음을 재촉했고, 이내 공사가 마무리 된 석회도로에 발을 디뎠다.
다만 자갈도로와 달리 뭔가 낯설다.
석회도로 옆에 빼곡하게 박힌 가로수와 그 가로수 옆에 파인 배수로를 보며 절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음...?”
배수로야 당연히 이해가 된다지만...
‘왜 여긴 이렇게 빽빽하게 박아놨을까...?’
도시 밖 가로수는 도로를 파먹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가 컸고, 그래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심어져 있다.
헌데 이곳은 너무 빽빽하게 심어놔서,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가 도로를 다 가릴 정도다.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답은 간단했다. 한여름에는 석회도로를 깐 곳이 너무 뜨거워서, 그나마 그늘을 만들어 식히려고 가로수를 많이 깐 거였지.
“음...”
한참을 나아가자, 수많은 사람들이 도로를 오가고 있었다.
아직 다 완성되진 않았지만,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얼마나 멀던가. 완성된 부분은 벌써부터 써먹는 모양이다.
‘흐음...?’
한데 이곳에서도 뭔가 묘한 게 느껴졌다.
오는 사람이나 가는 사람이나 전부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말이나 마차는 도로 중앙부를 이용하고, 도보로 움직이는 이들은 가장자리를 이용하는 게 아닌가.
이런 모습은 또 처음 보는 터라, 뭔가 이상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줬다.
촌놈 티를 낼 수 없는 법.
사내 또한 익숙하다는 듯이 연기하며, 행인들 사이에 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눈은 사방으로 굴려댔다.
“음.”
‘대체 뭘 기준으로 이러는 걸까?’하고 보니, 도로 한가운데에 얇고 긴 표지석이 이따금씩 박혀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저걸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눠서 움직이는 것 같다.
‘이런 건 다른 곳에서도 못 본 것 같은데... 우측통행이라? 신기하네.’
고작 일년밖에 안 지났는데, 별세상에 온 것 마냥 신기한 것 투성이다.
먼 미래와 같이 우측통행이 시작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도로가 넓으니 제멋대로 다니기 쉽고, 그러면 서로 부딪치고 난리가 날 것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임시개통을 하자, 당연히 개판이 됐다.
해답은 한쪽은 오는 길, 반대편은 가는 길로 나누는 것.
우측통행이 시작된 것도, 금군 및 연대기병이 돌아다니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오른손잡이가 대다수이니, 당연히 무장 또한 오른쪽으로 꺼내들게 교범이 만들어졌지 않나. 좌측통행을 하면 마주보는 상대와 무구가 부딪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또한 무장한 기병들은 오른쪽 공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에, 심리적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고.
이렇게 기병이 우측통행을 시작하자 일반 백성들도 우측통행을 하게 됐고, 말과 마차, 수레가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자 또 자연스럽게 마도馬道와 인도가 구분된 거지.
한성에서 이게 정착됐으니, 다른 지방 도시로도 쭉쭉 전파될 게 분명하다.
그렇게 낯선 풍경을 감상하며 나아가자, 거대한 광장과 함께 행인들이 천천히 빙빙 도는 장소가 등장했다.
중앙의 빈 공터에도 또 뭔가를 만드는 걸까? 석재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그 빈 공간을 끼고 행인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먼 미래에는 이걸 로터리, 회전교차로라 부를 거다.
“오...!”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비단 회전교차로 때문에 놀란 게 아니다.
도로는 4개가 맞물리고 있었는데 북대문인 숙정문, 남대문인 숭례문, 서대문인 돈의문으로 이어지는 석회도로가 만들어져 있는 게 아닌가.
‘허... 이걸 한 번에 다 한다고? 여력이 되나?’
몇 년간 고심하더니, 아주 화끈하게 움직이는 모양이다.
다만 한강 이남과의 연결이 시급하니, 아마도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먼저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교차로를 지나, 해가 완전히 저물 때쯤 되자 드디어 육조거리에 다다랐다.
재작년에 왔을 때도, 작년에 왔을 때도 그랬는데, 올해 역시도 또 바뀌었다.
육조건물은 그저 건물 한 채가 달랑 서 있는 게 아니다.
장원이나 부잣집 저택마냥, 담벼락 안에 십여채의 가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였지. 허나 관원이 적을 때도 이 정도였는데, 몇배는 많아진 지금은 어떻게 됐겠는가.
당연히 기존의 건물로는 감당을 못해서, 신식전각군은 흡사 산세를 이루듯 광화문에서부터 이어져서 육조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관아의 표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큼지막한 검은기와로 장식하고 엿가락처럼 옆으로 길게 늘인 3층전각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바로 코앞에 보이는 네모반듯한 사각담벼락 안에는, 3층전각이 디귿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무려 6동이나 몰려 있었다.
‘정말 어마어마하군. 사실은 관청건물 짓느라 도로건설을 못한 거 아냐?’
홀린 듯 손가락을 들어, 눈에 보이는 전각만 가볍게 세어 봐도 50동을 훌쩍 넘어간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저거 짓느라, 다른 공사를 못한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쪽이던가...’
이내 구경을 멈추고, 사내는 길게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관청담벼락과 담벼락 사이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원래 역사에선 대로를 이용하는 높은 사람들, 말을 탄 관리들을 피하기 위해서 피마避馬길이라는 게 만들어지고, 이곳에 장터가 들어서면서 훗날 피맛골이 만들어진다.
허나 지금은 관청 뒤에 또 관청이 들어섰고, 건물을 올리면서 사이사이의 좁은 골목길도 확장해놨는데 피마길이 만들어질 리가 있나.
중로라 불러도 무방할 골목길로 들어서서, 관청의 담벼락을 훑으며 나아가자 머리위에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 뭔가 했네.’
힐끔 위를 살피니, 회색빛의 구름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관청이 워낙 커지다보니, 서로 오가는 것도 한세월. 백성들과 부대끼며 돌아다니는 것도 일이다.
해서 관청의 담벼락과 담벼락 위로 골목길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만들었지.
이걸 이용하면 번거롭게 육조거리를 오가지 않더라도, 관청과 관청을 가로지르면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어디서도 보기 힘든 풍경인터라, 한성을 처음 와보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고 구경하는 명물이 됐고.
그렇게 조세부 관청 뒤로 향하자, 목적지인 의약부 관청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조선의 의과직은 전의감, 제생원, 혜민국, 동서활인원 등, 각각 다른 육조부서에 속해 나눠져 있었다.
만들어진 시기도, 하는 일도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고, 상대하는 사람도, 치료해주는 의원도 제각각이었지. 더 큰 문제는 재원 또한 통일되지 않아서 제각각이라는 점이었고.
허나 배봉마을에 장서각이 설립되고, 약제사와 의원을 교육시키자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오죽했으면 향약집성방을 만들 때, 연구원과 조정관원이 힘을 합쳐서 만들었을까.
그 때부터 기존의 의과직이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개혁이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풍랑에 휩쓸렸다.
까닭은 착호군과 종두법 때문.
착호군은 군의관을 필요로 하니, 배봉연구소를 필두로 민간의원을 모집해 흡수했고... 전국에서 종두를 접종시키려면 엄청난 수의 의원이 필요한데, 기존의 의원으로 가당키나 할까.
해서 별시를 통해 의원을 모집하고, 돌팔이나 다름없는 이들을 연수원에서 한번 더 교육시켜 진짜 의원으로 만들었지.
이후 조선내지에서 종두 접종을 끝마치는데 무려 3년이 걸렸고, 북방의 여진까지 끝마치는 데는 2년이 추가로 걸렸다.
그리고... 이렇게 각 현으로 파견된 의원은 그대로 눌러앉았다. 신생아가 태어나 나이가 차면, 종두 접종을 계속 해줘야 했으니까.
이러다보니 중앙조정과 완전히 한 몸이 되어 움직이는 조직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바로 의약부였던 거지.
‘가자.’
잠시 옛 생각을 했던 사내는 서둘러 관청으로 들어갔다.
해가 이미 저물어서인지 다들 퇴청한 것으로 보였고, 관청의 몇몇 방에서만 노란 등잔 빛이 반짝이고 있다.
‘다행이군.’
사내는 정중앙에 위치한 전각 꼭대기에서 빛이 반짝이는 걸 보며,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높은 사람이 높은 곳을 좋아하는 건 만고의 불변인지, 부서장의 집무실은 전부 3층에 자리 잡지 않았나.
천만다행으로 아직 퇴청을 안 한 모양이다.
“이 시간에 누구...?”
“...”
당직을 서는 관리는 늦은 시간에 관청을 찾아온 불청객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사내가 관패와 명령서를 보여주자 재깍 허리가 굽혀졌다.
별것도 없어 보이는 이가 상해조차지 책임 의원일 줄이야? 화들짝 놀란 관리는 군말 없이 곧장 3층으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들겨 손님이 왔음을 알리고, 안에서 쉰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내는 냉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무실은 호롱불을 여러개 피워서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고, 흰수염을 늘어뜨린 노인. 맹사성은 노란 불빛에 파묻혀, 사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누군지 기억을 못하는 모양이다.
“상해조차지 책임 의원. 전순의라 하옵니다. 대감.”
“아...! 그렇고만. 전에 한번 보지 않았나.”
“예.”
작년에 한번 들렸는데, 맹사성이 기억이나 할까.
전순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겉으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삼정승제도가 없어지면서 맹사성도 실업자가 됐지만, 맹사성은 오래전부터 종두 접종을 담당하지 않았나.
종두접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방의료체계를 건드릴 수밖에 없었고, 그 경력을 이어와 의약부장으로 임명됐지.
원래 역사에서 전순의는 세종부터 세조 때까지 어의로 활동한 인물로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에 기여했는데, 지금 역사에서도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이미 퇴청시간도 훌쩍 지났는데, 질질 끌 필요 있나.
“경과보고서입니다.”
전순의는 군용배낭에서 두툼한 서책을 왕창 꺼내, 맹사성에게 들이밀었다.
“개똥쑥에 관한 문건인가?”
“예. 여기보시면...”
상해조차지 의원이 책임질 건 개똥쑥 밖에 없는 터라, 묻는 맹사성이나 답하는 전순의나 시원시원하게 대화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