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296화 (296/538)

296. 챕터41. 확인하다 (6)

“대감. 대감!?”

연오랑이 생각에 잠겨 무의식적으로 걷고 있자, 세자는 격구체로 그의 옆구리를 살살 찌르며 불렀다.

“아... 죄송합니다. 저하.”

“아하하. 됐습니다. 그리고...”

왜 갑자기 옆구리를 콕콕 찌르나 했더니, 세자는 저 앞에서 발그레한 얼굴로 수건을 들고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아...!”

“헤헤.”

좋긴 좋은지 세자는 체통도 잊고 헤실헤실 웃어댔고, 연오랑 또한 피식 웃고 말았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용연군 대감. 허민현이라 하옵니다.”

“처음 뵙는군요.”

한걸음에 다가가자 인사하자, 소녀는 연오랑의 큰 덩치에 기가 죽었는지 잔뜩 긴장해서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했다.

‘나쁘지 않은데? 덩치도 나름 있고.’

연오랑은 앞에 선 소녀를 빠르게 훑어봤다.

세자는 공주와 친해서 그런지 몰라도 심미안이 조금 다른 걸까? 소녀는 또래보다 살짝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외모야 세자가 선택했으니 당연히 나쁘지 않고, 혈색도 좋고, 몸매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집안 또한 알아서 어련히 조사했을 테니 그것도 문제없을 거다.

‘오지랖이긴 한데... 그간 내가 고생한 게 얼만데.’

그 누구도 모르는 이야기를, 연오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가 품평한다고 해서 세자의 혼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살펴보는 게 나쁠 건 없지 않나.

원래 역사처럼 혼인관계가 파탄 나는 걸 방지해야 되니, 이 정도 관심은 인지상정이지.

‘그것도 그런데...’

헌데 그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귀마개가 달린 토끼털 모자 사이로 가볍게 흔들리는 귀걸이와 꽁꽁 싸맨 옷 주름 사이로 흘러나온 거북이 장식이 달린 목걸이다.

‘궁에서 저걸, 저렇게 버젓이 하고 다닐 수 있게 됐단 말이지?’

연오랑은 정밀세공기술과 합금기술의 발전을 위해 장신구를 이용하기로 계획하지 않았나.

공주는 용연의 공작기업과 세공사가 생산한 귀금속 장신구를, 그녀의 자매들과 왕실 어른들에게 꾸준히 보냈다.

가채를 밀어냈던 것처럼, 이번에는 귀걸이와 목걸이가 유행하게 만든 거지.

왕실에서 유행이 시작되면 당연히 민간으로 퍼질 수밖에 없고, 돈 있는 이들은 보다 수준 높은 장신구를 찾는 게 인지상정.

그렇게 민간으로도 퍼져나가면 거꾸로 다시 왕실에도 영향을 줘서, 복식규정마저 비틀어 버리게 된 것.

그래서 아직 외부인이라 할 수 있는 소녀가, 궁궐 내에서 저러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 안하는 모양이다.

“...”

“...?”

‘뭐 그건 그거고... 아무튼 세자와 동갑이라고 했지? 꽤 잘 선택한 거 같은데?’

연오랑은 그런 생각을 하며 히죽 웃었고, 그의 미소를 기다렸는지 세자는 얼굴이 활짝 피더니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리곤 소녀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고, 소녀는 더욱더 볼이 빨갛게 붉어지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좋을 때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편전으로 가는 겁니까?”

“예.”

“내가 안내하죠!”

세자는 연오랑의 모습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활짝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법정나이를 꺼낸 게, 여기까지 번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연오랑은 옆에서 조잘거리는 세자와 미래의 세자비를 보며, 생각을 이어갔다.

지금까진 관례라는 걸 통해 암묵적 혹은 알아서 성인으로 취급했고, 여자의 경우에는 초경을 시작하면 거의 성인취급을 했다.

헌데 이걸 다 무시해버리고 이른바 법정나이를 만들어서, 양반,천민 가릴 것 없이 성인을 공식화하니 어떤 문제가 터졌겠나.

성인이 된다는 건 단순히 혼인의 문제가 아니라 관직출사, 군 입대, 세금, 요역, 요즘에는 민간기업 입사기준까지 걸린 문제가 되어버린 거지.

해서 “군역과 세금징수의 기준인 16세로 해야 된다.” “관직 출사조건인 20세로 해야 된다.” “남,녀 모두 성인으로 인정하니 여성의 신체를 기준으로 15세로 해야 된다.”

“어찌 여성을 기준으로 할 수 있냐. 남자 기준으로 따라야 한다.” “그러면 혼인 연령이 너무 높아진다.” 등등으로 끊임없이 싸워댔다.

결국 나온 결론은 그 중간쯤인 17세로 정해졌으니... 뭐랄까 근본도 없는 성인 나이가 결정되었고, 세자의 혼인도 결국엔 미뤄지게 됐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만... 어째 약혼문화가 생겨난 것 같단 말이지.’

연오랑은 앞에서 딱 붙어서 걷고 있는 둘을 보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도 뭐 태중혼약 같은 게 있긴 하지만 거의 드문 일이고, 그냥 때가 되면 혼인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허나 세자는 가례도감을 거치지 않고 이미 세자비를 찍었으니, 세자비가 다른 남자와 혼인하면 난리가 나지 않겠나.

해서 합방은 하지 않고 혼인에 준하는 약혼 비슷한 걸 할 수밖에 없었고, 세자비 집안은 한성으로 올라와서 따로 집을 구해서 살고 있었다.

겸사겸사 궁으로 와서 이런저런 예법도 배웠고.

어쩌면 미래의 연인처럼, 세자와 세자비는 궁궐데이트를 즐기는 중이다.

‘뭐... 나쁠 건 없잖아? 혼인 당사자들은 반기고 있을 지도 모르겠네.’

그런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웃음이 세어 나왔다.

혼인은 가문의 결합이니, 어른들의 말에 따라 신랑과 신부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결혼을 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허나 이제는 그게 힘들어지지 않았나.

여자에게 있어 17세라는 나이는 기존의 관습으로 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기에, 여식을 둔 부모들은 정식 혼인하기 전에 어떻게든 짝을 찾길 원했다.

본의 아니게 약혼문화가 번질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서 신부와 신랑이 혼인 전에 미리 만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된 거지.

‘꼭 집어서 약혼문화라고 부를 건 없지만, 전에도 은연중에 비슷한 건 있었잖아? 그리고 약혼을 깨버리는 것도 별 문제 없게 만들었으니까...’

태종, 세종은 양반을 갈라놓기 위해서, 구멍이 송송 뚫린 이혼법을 더욱더 널널하게 만들어놓지 않았나.

원래 역사에서 이혼은 나라에서 강제했고, 남자만이 주장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이는 신분질서 유지 등의 명분이 있지만, 깊숙한 속내로 들어가면 재산분배를 막기 위한 조치 중 하나였다.

당연히 이건 양반에게만 적용됐고, 일반 양민은 자유롭게 이혼할 수 있었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정반대다.

유학기조에 입각한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의 확산은 돈좌됐고, 신분질서의 안정은 왕실이 나서서 깨부수고 있다.

“망한 명나라 놈들 법은 왜 따르냐?”라고 하고 있으니, 대명률의 이혼조항은 무시되기 일 수. 여기에 고려 때의 강력했던 부인의 위세까지도 살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은 상속법을 들먹이며 “부인도 이혼주장을 할 수 있다.”라고 부채질하고 있으니... 하루라도 양반집안들이 조용할 날이 없는 거지.

법으로 규정된 이혼조차도 이 난장판이니, 법으로 규정되지도 않아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약혼이 무슨 효력이 있겠나.

깨고 싶으면 깨는 거니, 혼인나이를 뒤로 미뤄서 양반집안의 결합을 어렵게 만들려는 계획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이렇게 집안은 골치 아프게 됐지만... 혼인 당사자들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며, 서로를 미리 알아볼 수 있게 된 거고.

“안 그렇습니까? 대감.”

“예예.”

연오랑은 세자의 물음에 대충 답하면서, 상념을 마무리 지었다.

‘어찌됐건 원래 역사의 그 폐비들은 없게 되겠군.’

사실 누군지도 모르는 집안들이고, 역사가 한참 비틀린 지금은 그 집안들이 잘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다만... 어찌됐건 전부 다 없는 일이 되지 않았나.

세자비가 바뀌었으니 미래의 단종은 없어지겠지만, 단종을 대신할 아들이 더 빨리 나오지 않을까 싶다.

‘저렇게 서로 좋아하니까, 문제는 없겠지.’

연오랑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함께 걷는 둘을 보며, 다시금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 그리고... 동궁의 온돌을 바꿔준 그 기업 말입니다.”

“... 설마.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혹시 소개를 받을 수 있나 해서요.”

연오랑의 물음에 세자는 손사래를 치더니, 괜히 꼼지락거리면서 소녀를 힐끔 거렸다.

‘아... 난 또. 큰일 난 줄 알았네.’

연오랑은 화들짝 놀란 마음을 가리 앉히고서,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는 처가에도 신형온돌을 깔아주고 싶은 모양이다.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전과 비교하면 조금 덜 따뜻하긴 한데... 그래도 나쁘지 않던데요? 탄 냄새도 안 나고.”

“예.”

세자는 새로 만든 온돌을 열심히 찬양했고, 연오랑은 사용자의 체험기를 귀담아 들었다.

온돌문화는 북방을 넘어 남방에도 확산되고, 연료로서 석탄도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문제는 일산화탄소 중독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 특히나 아궁이와 구들장이 오래된 집은 더욱더 그러했지.

그러니 궁에서 석탄을 난방용으로 사용할 수가 있나.

까닥 잘못했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감당도 못하고, 왕실식구 중 누가 비명횡사라도 하면 석탄 사용을 금지당할 수도 있지 않나.

결국은 보일러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고, 연오랑은 진작부터 연구를 하고 있었다.

미래의 그가 비닐하우스 농사를 하기 위해서 가장 싸게 써먹었던 게 석탄보일러이니 꽤 잘 알았고, 자연순환식 석탄보일러는 구조적으로도 크게 어려운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역시나 돈인데... 궁에서 쓰는 물건에 돈을 아낄 필요는 없는 법.

해서 연오랑은 자신의 집에 먼저 보일러를 설치한 후에, 실험을 완료하고 궁에도 설치했다.

“새로 만든 온돌이 꽤 비싼 건 아시지요?”

“공사하는 걸 봤습니다. 동관을 바닥에 엄청 깔던데... 당연히 그렇겠죠?”

“예. 같은 바닥크기의 기와집 5,6채 가격은 나올 겁니다.”

“그래도...”

세자는 자기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계산해보려는지, 눈을 바쁘게 깜박거렸다.

이 시대엔 당연히 플라스틱 배관을 설치할 수 없으니, 그걸 전부 동관으로 대체해야 했다.

용연과 북방의 동광산에서 직접 동을 캐고, 중국과 일본에서 꾸준히 동을 수입한다지만... 여전히 동이 싼 금속은 아니었지.

반대로 그렇게 비싼 동을 유기나 다른 제품으로 만들지 않고, 관으로 만들어 바닥에 깔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조선이 나름 부자라는 걸 증명하는 사례일 거다.

그 다음으로 문제되는 건, 동관 자체를 만드는 기술력.

열이 잘 전달되기 위해선 동관을 크고 얇게 만들고, 용접도 못하니 나사구조로 체결해야 하는데... 이게 쉽게 될 리가 있나.

몇 년간 이것만 붙잡고 있다가 이제야 완성된 거다.

궁과 연오랑의 집에 설치한 후에,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긴 했는데... 이게 워낙 비싼 물건이라서 폭발적인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었고.

“돈은 제가 내어드리겠습니다. 제가 부자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

연오랑이 히죽 웃으며 자랑하자, 세자와 세자비는 좋긴 좋은데 이걸 받아도 되나 싶어서 멋쩍은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하긴... 미분을 팔고 있으니까.”

“...”

세자는 손사래를 치려다가 애써 관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자가 자기 돈 쓰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있나. 농담이 아니라 연오랑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맞다.

유사msg인 미분을 만들 수 있는 건 연오랑의 기업밖에 없고, 미분은 왕실은 물론이고 조선, 중국, 일본, 몽골에까지 절찬리로 판매되는 조미료다.

유통기한이 있는데도 이렇게 팔리는 걸 보면, 여전히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중이지.

“다만 전문 인부가 있어야 하는 터라, 당장은 힘들 겁니다. 지금 공사를 하고 있는 집이 있어서 말이죠.”

“예.”

“그 집 공사가 끝나면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대감.”

세자비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세자가 슬쩍 옆구리를 찌르자, 냉큼 연오랑에게 감사를 표했다.

공짜로 보일러를 얻어서 그런지 세자의 목소리를 더욱 쾌활해졌고, 이윽고 정전 근처에 도착하자 낯설면서도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사무를 처리하는 외전外殿은 자객과 같은 외부의 위협과 각종행사, 궁을 방문하는 이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 보통 나무를 심지 않고 뻥 뚫어놓는 편이다.

앞으로 정전이 될 이곳 역시 마찬가지이긴 한데... 이건 너무 과했다.

‘너무 허허벌판이잖아? 이거 분명 또 궁궐오대문을 만드느니 뭐니 할 거 같은데.’

연오랑은 흙밭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장소를 보며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여기도 바닥에 다 돌을 깔아야 할 텐데... 뭐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계속 걷다보니 정전 한 귀퉁이에 박힌, 묘하게 생긴 전각이 눈을 사로잡았다. 창고도 아닌 것이, 꽤 얄팍하고 높게 치솟아 있는 전각이다.

“어...?”

“헤헤. 아바마마께서 만드신 작품입니다.”

“아!”

연오랑은 자랑스럽게 웃는 세자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내지르고 말았다.

장영실과 세종이 몇 년간 붙들고 있던 물건. 바로 기계식 추시계다.

‘기어코 만들었네.’

“작동은 잘 하나보군요?”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때맞춰 종은 울리니까요.”

“오...”

시계에 종, 징, 북을 달아서 소리를 내는 장치는 크게 어려울 것도 없고, 이미 지금도 기리고차와 같은 물건에 써먹지 않았나.

문제는 초침과 분침, 시침을 일정하게 움직이는 게 중요한 거지.

‘음...?’

다만 연오랑은 감탄을 하면서도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 애매하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지만, 이게 딱 어울리는 감상평이었다.

시계가 잘 돌아가는지는 둘째 치고, 이건 집안에 들이기엔 너무 크고, 그렇다고 시계탑처럼 밖에다 놓기에는 또 너무 작다.

형태와 구조는 괘종시계를 닮았는데, 크기는 탑시계를 분질러 놓은 것 같은 괴이한 물건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이렇게 시계를 꽁꽁 싸매는 전각을 새로 만들어서, 이 안에 박아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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